"오늘부터 니가 지내야 할 집이야"
"여기서?"
"응. 그리고 같이 지내야 할 형이니까 인사하고"
"형 아닌 것 같은데.."
"누나. 어디가서 누나 아들 아닌 것 같다는 말은 안듣겠네요. 누나랑 꼭 닮았어요, 성격까지"
재범과 영재의 첫만남은 이랬다.
영재는 별 특별한 것 없이 잘 살고 있었고, 어느날 부모님이 해외로 발령이 났다는 거의 통보식의 말을 들었다.
그런 일은 소설이나 드라마에서만 봤지 실제로 저한테 일어날거라는건 상상도 못했던 터라 당황스러웠지만
엄마가 앞으로 제가 같이 살, 본인의 오랜 고향 동생이라고 소개한 재범이 있어 금방 바뀐 일상에 적응했다.
32살인 재범은 18살 밖에 되지 않은 영재를 누구보다 잘 이해해줬다.
가끔 유치하게 굴어도 그 모습까지 이해해줬고, 낯가림이 심한 성격까지 이해해줬다.
영재가 자신을 편하게 느낄 때까지 큰 강요를 하지 않았다.
재범은 다정했다. 그리고 영재는 재범의 그런 다정함을 동경했다.
또 모든 일에 능숙했고, 진지했고, 어른스러웠다.
어느것도 빠짐없이 영재는 재범의 모든 것을 동경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동경은 사랑이 되었다.
자신의 동경이 사랑임을 깨달아버린 날 영재는 평생 마음에 묻어야 겠다고 생각했지만,
-
"여보세요? 어 엄마. 왜, 아.. 소개팅.. 나 그거 안한다고 했잖아. 엄마 마음도 알겠지만 나 지금 너무 행복해요. 일도 잘되고 있고.. 사랑하는 사람 만나면 그 때 결혼할게, 응. 알아 아는데 좀만 기다려줘. 응 알겠어..... 끊어, 내가 또 연락할게"
소개팅이라는 말이 원래 이렇게 가슴을 찌르는 단어였나, 그 말에 저도 모르게 재범의 방에 들어갔던 것 같다.
"영재야 왜, 할 말있어?"
"아저씨 소개팅 해?"
"응?"
"아저씨 소개팅 하냐고. 이제 여자 만나야해? 집에서 뭐라 그래?"
"아니야, 나 소개팅 안해. 왜이렇게 다급해~ 너 다른데서 살아야할까봐? 아직 그럴 생각 없으니까 너 여기서 편하게 살아도돼"
아차.. 곧 자신이 어린 행동을 했다는 것을 자각했지만 곧바로 어린아이를 어르듯 머리를 쓰다듬는 손길에 울컥한 마음이 들어버렸다.
"그런거 아니야"
"그런게 아니면 뭐야~"
"아저씨 좋아해. 좋아했어 좀 오래"
그렇게 재범의 품에 안겨버렸다.
당황한 채로 저를 밀쳐버릴거라고 생각했지만 재범은 잠시 굳어있다가 따뜻하게 영재를 마주안았다.
오히려 예상한 반응과 다르자 당황한 영재가 얼굴이 빨개진 채로 재범을 쳐다봤고,
재범은 다정하게 영재를 쳐다보다 이내 영재의 볼을 잡고 입을 맞춘다.
관계의 발전은 꽤 갑작스러웠지만, 예상하지 못한 만큼 달콤했다.
그리고 그렇게 '연인'이라는 이름으로 함께한지도 어느새 1년이 지나버렸다.
-
"아저씨 어디야?"
[나 오늘 야근이라고 했잖아]
"어제도 야근이었잖아? 엊그제도 야근이고 그 전 날도 야근이었고 그 전전 날은 회식이었고...."
[연말이라 정리할게 많아서 좀 바쁘네. 회식 자리도 많이 잡히고, 미안해]
"그래도 오늘..."
[어?]
"아니야. 야근 잘하고와"
영재보다 많이 성숙한 사람인 만큼 늘 영재를 배려해주고 생각해주지만,
재범은 마음만 먹으면 야자는 언제든 때려칠 수 있는 고딩에 비해 상사의 눈치에 야근이나 회식은
거의 빼지 못하는 직장인이기 때문에 가끔 서운한 마음이 든다.
"우리 오늘 사귄지 1년 됐는데.."
한 달 동안 어딜 그렇게 쏘아 다니냐는 재범의 꾸중에도 열심히 알바를 해서 모은 돈으로 산
목걸이 두 개와 케이크를 보며 잠깐 눈물을 그렁거리다, 눈물을 꾸역꾸역 닦아낸다.
왠지 속상한 마음이 계속 들어 잠이라도 일찍 자볼까, 하는 마음에 평소보다 일찍 침대에 누웠지만
특별한 날을 그냥 보내기 싫은 마음이 자꾸 들어서인지 잠은 안온다.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다 그것마저 흥미가 없어 그냥 뜬 눈으로 멍하니 천장을 보고 있는데 도어락을 푸는 소리가 들려,
방금까지 속상했다는 것도 잊은 채 신난 얼굴로 현관으로 달려간다.
"아저씨이"
재범이 신발을 채 벗기도 전에 영재가 재범의 품에 폭- 안긴다.
"넌 점점 몸은 말라지는데 왜이렇게 무거워지냐. 근육 키워?"
"무슨 얼굴보자마자 그런 말을.."
"서운해?"
"뭐가"
"오늘 나한테 서운하냐고"
"당연히 오자마자 그런 말 하면 내가 서운하지, 그럼 안서운...."
채 끝내지 못한 말이 재범의 입 속으로 먹혀 들어간다.
오늘 회사에서 힘든 일 있었나.. 가끔 하루가 고단할 때 영재에게 투정 부리듯
지금처럼 다짜고짜 키스를 하긴 했지만 아까 잠깐 본 얼굴은 피곤해보이긴 했지만,
그리 고단한 하루를 산 얼굴 같진 않았다.
또 힘든 하루를 보상받기 위한 키스라면 조금 거칠었을텐데,
오늘은 평소보다 훨씬 부드러웠다. 마치 서운한 기분이 가득했던 제 하루를 보상해주듯.
천천히 입 안을 헤집는 혀를 받다가
쪽 소리를 마지막으로 떨어지는 재범의 입술을 아쉬운 듯이 봤다.
"미안해. 내가 오늘 너한테 거짓말 좀 했어"
"거짓말?"
"응. 사올게 좀 있어서"
설마.. 하는 생각이 머릿속에 든다.
그리고 그 설마가 맞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바로 이어진다.
"내가 모를줄 알았어? 1주년?"
재범이 장난스레 웃으며 노트북 가방에서 꺼내 든 것은 제가 산 싸구려 목걸이 보다
몇 배는 비싸보이는 고급진 반지 두 개였다. 그리고 뒤를 돌아 또 무언갈 뒤적거리며 꺼내더니 주춤한다.
"저, 내가 난생 처음으로 편지를 썼는데 워낙에 글주변이 없어서...."
뒷 말은 듣지도 않았는데 눈물이 난다.
참기도 전에 흘러버린 눈물이라 못난 얼굴을 하며 엉엉, 울고 있는데
약간 당황한 듯한 재범이 따뜻하게 얼굴에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아준다.
"왜.. 왜 울어"
"나는 유치해서 이런거 사왔는데 아저씨는 멋있는거 사오고... 아저씨가 다 알고있는 것도 모르고 괜히 서운해서 아저씨 잠깐 미워서... 미웠어...... 그래서 일찍 자려고 심술나서 눕고.... 나는......."
우느라 두서없는 말을 하는 와중에 영재가 가져온 상자를 열어보자,
비싸진 않지만 -학생이 사기엔 꽤 비싸보이는- 반지가 들어있었고, 옆엔 조그마한 케익도 있다.
"미안해.... 아저씬 좋은 사람인데 내가 어려서 맨날 이래..... 진짜 미안해 아저씨"
"영재야"
"...응"
"앞으로 힘들게 이런거 안사줘도 되지만, 지금 기분 좋다"
".."
"하나도 안어려. 그러니까 울지마, 뚝. 나보다 니가 더 성숙해. 난 너 서운하게 했지만 넌 나 서운하게 하지도 않고 이렇게 다 준비했잖아"
"아저씨가 나 어딜 그렇게 가냐고 걱정했잖아"
"그래 걱정은 좀 했다"
피식 웃으며 재범이 영재에게 살짝 꿀밤을 먹인다.
"아야, 아파"
"하나도 안아프면서"
"어떻게 알았지"
"난 다 알지. 최영재에 대해선 다 알아"
"오글거리게"
"원래 이런 날에는 오글거리고 느끼한 멘트 좀 해주는거야"
"뭐야 그게.. 진짜 아저씨같아"
"나 아저씨 맞아"
"어휴, 알겠어요 아저씨"
"우리 반지랑 목걸이랑 다 해보자. 그리고 케익도 먹자 얼른"
남자 둘이서 어울리지도 않는 금 반지에 은 목걸이를 한 모습은 저들이 보기에도 퍽 웃겨,
재범과 영재는 서로 쳐다보고 한참 낄낄 웃다가 눈이 꽤 길게 마주쳤을 때
영재에 먼저 눈을 감고 다가가 재범의 입술에 안착한다.
닿은 입술처럼, 포근하고 달콤한 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