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유설원도
夢遊雪原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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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GM / Merry Christmas Mr. Lawrence
::02
창문이 바람에 요란스레 덜컥이는 소리와 함께 눈을 떴다. 투명한 창으로 보이는 바깥은 온통 눈바람뿐이라서 얼마 동안 잠에 빠져있었던 건지 차마 가늠하기가 힘들었다.
온통 낯선 것들이 즐비한 주변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역시나 나는 또다시 어디론가 옮겨져있었다. 이제는 더 이상 놀랄 기운조차 남아있지 않아서 그저 얕은 한숨만 푹 내쉬었다. 방 안에는 훈훈한 온기가 돌았지만 내가 뱉은 날숨들은 왠지 모르게 뿌연 입김으로 변모해 있을 것만 같았다. 침대 끄트머리에 걸터앉아 무미건조한 발 장난만 치다가 문득 몸에 반동을 주어 일어섰다.
협소한 장소를 느긋하게 구경하며 발걸음을 떼었다. 내가 있는 방은 지극히 동양적인 구조를 띠고 있었다. 갈색 나무 바닥과 좋은 향이 날 것만 같은 목제 가구들, 널찍한 침대 위에 펼쳐진 예쁜 수가 새겨진 두꺼운 겨울철 이불들. 적당히 밋밋하면서도 보는 이로서 아늑함을 느끼게 해주는 장소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도무지 불안하게 요동치는 마음을 잠재울 수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나는 이곳에서만큼은 완벽한 이방인이었다. 온전히 내 마음을 기댈 이도 없을뿐더러 주변에는 온통 알 수 없는 것들뿐이었으니까. 구태여 여유 부리는 척을 하고 있다 한들, 속마음은 경계심으로 그득하게 차 가시를 세우고 있을 것이 분명할 터였다. 내 마음처럼 이리저리 얽히고 엉킨 머리카락을 손빗질로 대강 빗어내리던 와중에 잠에 빠지기 직전에 내가 마주했던 한 장면이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그러면 조금 있다가 보자.”
“··········”
“한여주.”
어떻게 이 일을 이렇게까지 새카맣게 잊고 있을 수가 있지? 어째 점점 퇴화하는 듯한 내 기억력에 걷잡을 수 없이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풍선에서 바람 빠지듯이 새어 나오는 웃음이 서서히 거두어질 무렵, 다시금 상념에 빠져들었다.
분명히 그 남자는 내 이름을 알고 있다. 하지만 나는 결코 그에게 나에 대한 어떤 것도 이야기해 준 적이 없었다. 이것은 분명 이상한 일이었다. 남자를 찾아야 했다. 짧은 고민 끝에 드디어 결론을 짓고 문쪽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그가 이곳에서 없을지도 모르는 일이었지만, 은연중에서도 나는 확실히 알 수 있었다.
그가 분명히 이곳 어딘가에 있을 거라는 사실을.
나는 확신에 찬 상태로 창호지처럼 얇은 종이가 덧발라진 문을 옆으로 밀어 열었다. 그러자 머리 위로 한껏 드리워진 누군가의 그림자에 주저 없이 고개를 들어 그이와 마주했다. 지나치게 태연자약한 얼굴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는 사람은 역시 그 남자였다.
"눈치가 꽤 빠르네. 아무것도 못하고 발만 동동 구르고 있을 줄 알았는데."
"······· 그쪽은 누구예요?"
"인간들은 만나면 안부 인사라는 것부터 한다며. 그런데 너는 어째 본론부터 꺼내는구나."
"····· 하지만 그건 당신이 인간일 때 이야기고요. 그런데 아무리 봐도 인간 같지는 않잖아요. 알려주지도 않은 내 이름을 알고 있는 것부터 하며, 눈만 감았다가 뜨면 그쪽이랑 같이 이상한 곳으로 옮겨져있는데. 도대체 어떤 누가 당신을 인간이라고 이야기하겠어요?"
남자는 잠시 골몰하는 척을 하더니, 저의 잘 빠진 턱을 매만지며 고개를 끄덕였다. 암묵적으로 던진 내 질문에 대한 답변이었다. 역시나 내 예상대로 그는 일반적인 사람은 아닌 듯싶었다. 남자가 한참 동안 침묵으로 일관하더니 일순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궁금하지 않아?"
"······ 네?"
"궁금할 거 아니야. 여기가 어디인지. 내가 누구인지. 어떻게 네 이름을 알고 있는지, 아냐?"
남자가 문득 던진 뜬금없는 질문에 당황하기도 잠시,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는 남자에게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궁금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나로서는 이곳이 도대체 어디인지, 나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파악할 수가 없었으니까. 나의 대답을 확인한 남자가 보다 풀린 낯으로 내게 제 손을 내밀었다. 그럼 잡아. 네가 궁금해하는 모든 걸 알려줄게.
잠시 머뭇거리다가 결국 그의 커다란 손바닥 위로 내 손을 겹쳐올렸다. 어디서 파생되었는지 모를, 손바닥 아래에서 퍼지는 냉기에 순간 온몸에 소름이 돋는듯한 느낌이 들었다. 손이 서로 단단히 얽히자마자, 남자의 검고 단단한 눈동자와 시선이 맞물렸다.
"정호석."
"·········"
"네 이름에 대한 내 보답이야."
"········"
"너도 내 이름을 기억해 줬으면 좋겠어."
정호석이 살짝 웃었다. 이유 없이 마음이 놓이는 듯한 착각이 드는 미소였다. 눈과 얼음으로 꽁꽁 얼어붙은 타지에서 만난 난데없는 다정이었다. 처음으로 그가 생각보다 좋은 이일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夢遊雪原圖
매서운 칼바람을 정면으로 맞아서 안면이 얼얼했다. 나도 모르게 내 이목구비가 제자리에 잘 붙어있는지 확인하려 얼굴을 더듬거려야 했을 정도였으니, 바람의 위력이 결코 소소하지 않았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당최 정신이 차려지질 않았다.
정호석의 마지막 말이 끝나는 동시에 그는 내 손을 더욱 꽉 붙들고 순식간에 어딘가로 이동했다. 옛 동양 판타지 소설에 심심찮게 등장했던 축지법을 몸소 경험한 내 몸은 그 짧지만 강렬한 감각에 한참을 정신을 못 차리고 해롱거렸다. 밀려오는 토기와 멀미에 정신을 못 차리는 나에 반해, 장소에 도착한 정호석은 바람으로 흩어지고 갈라진 제 머리칼을 단정히 정리하느라 여념이 없는 모양이었다.
사람이 이렇게 힘들어하면 걱정하는 기색이라도 보이기 마련인데 꿋꿋하게 제 옷차림새만 정돈하는 정호석의 뒤에서 몰래 손가락 욕이라도 날려줄까 하다가 마음을 접었다. 아무리 몰래 한다고 한들, 다 들킬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다시금 울렁이는 속을 진정시키려 가슴팍을 퍽퍽 때렸다. 아무래도 몸이 말을 들을 여념이 없는 듯싶어서 포기하고 비틀대며 정호석 쪽으로 몸을 돌렸다.
"이제 정신이 좀 차려지나 보네."
······ 아 예. 어련하시겠어요. 애초에 염려나 걱정 같은 건 바라지도 않았건만, 열이 북받쳐 오르는 것은 어찌할 바 없었다. 멍하니 서서 비실거리기만 하는 나를 기다리던 정호석이 주섬주섬 제 겉옷을 벗어 내게 둘러주었다. 갑자기 살갗에 닿는 옷의 질감에 드디어 정신을 차리고 그를 마주했다. 묵묵히 내게 둘러준 겉옷을 추슬러주는 정호석의 얼굴이 너무 가까워서 나도 모르게 머리를 뒤로 빼었다. 사람도 아닌 것이 얼굴만 잘나서 순간 깜짝 놀란 마음을 가까스로 진정시켰다.
"정호석 씨는 안 추워요?"
내 질문이 결코 의미 없는 물음은 아니었던 게, 정호석의 옷차림은 지금 날씨에 비해 지나치게 가벼웠다. 영하 10도쯤을 웃도는 듯한 온도에도 낯빛 한 번 바뀌지 않는 것만 보아도 지금 이 날씨가 그에게 영향을 주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아차릴 수 있기는 했지만.
"나는 추위 같은 거 안 타."
짧게 일축하여 말하고는 정호석이 내게서 몸을 돌렸다. 고개를 대충 끄덕이며 나도 그가 바라보고 있는 곳을 향해 시선을 고정시켰다. 정호석이 마주하고 있는 거대한 조형물이 한순간에 내 시선을 앗았다.
"얼음으로 만든····· 모래시계네요."
거대한 모래시계 속에서는 모래 대신, 하얀 눈송이들이 천천히 떨어지고 있었다. 하릴없이 바닥으로 추락하는 눈꽃들을 바라보고 있자니 괜스레 마음이 복잡해졌다. 이것이 무엇을 위해 만들어진 시계인지는 모르겠지만, 이것이 정호석을 옭아매고 있는 물체라는 것은 어림짐작으로 예측할 수는 있었다.
나도 이곳에 떨어지기 전에 시간에 뒤쫓기던 사람이었다 보니, 괜히 정호석에게 연민 섞인 감정이 들었다. 시선을 옮겨 아무 말 없이 투명한 얼음벽 속에서 눈송이들이 떨어지고 있는 장면만 보고 있는 정호석을 바라보았다. 그는 차마 감정을 읽을 수 없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 있으려니 불안감이 물밀듯이 쏟아졌다. 명확한 사정도 모르는 이를 동정해버릴까 두려워져서 서둘러 말을 꺼내었다.
"그래서 여기는 왜 온 거예요? 내가 궁금해하는 거 알려준다면서요.”
"짜증 나게도 그걸 설명하려면 이게 있어야 하거든."
드디어 적막이 깨졌다. 정호석은 무표정으로 얼음 시계를 가리키며 대답을 내놓았다. 일단 너는 이곳이 어디인지 궁금한 거지? 정호석의 질문에 말없이 눈만 한 번 깜빡였다. 긍정의 표시였다.
"글쎄····· 뭐라고 설명해야 가장 정확할까. 굳이 정의하려니까 어렵네. 그냥 이렇게 생각해.”
여기는 네가 굳이 꿈속이라고 정의하면 꿈 속인 거고, 꿈이 아니라고 하면 현실인 세상이야.
알아들을 수 없는 말만 주절주절 늘어놓는 정호석을 바라보며 나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다. 이게 도대체 무슨 소리야.
"나한테는 이곳이 내 세계고 나의 현실이야. 그니까 네가 사는 현실이, 나에게는 이곳이라는 거야. 너는 그런 내 세계에 들어온 거고.”
당최 결론이 명확하게 나오지를 않았다. 꼬리에 꼬리를 물고 생기는 물음표가 머릿속을 가득히 메웠다. 답답한 마음에 마저 말을 이어가려는 남자의 말을 끊고 혀뿌리 밑에 고여있던 질문을 던졌다.
"무슨 말인지 알아 들을 수는 없지만, 뭐 대충 그렇다고 쳐요. 그렇다면 내가 어떻게 여기로 온 건데요? 그쪽은 또 누구고요."
"네가 그랬잖아."
"········· 네?"
"죽어도 좋으니까 현실에서 벗어나고 싶다며."
"···········"
그래서 데리고 온 건데. 내가. 무미건조한 말투로 정호석이 말을 덧붙였다. 겨우내 진정되었던 속이 울렁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저 새삼 정말 알 수 없는 사람이구나, 싶었다.
"그리고 마저 말하자면 네가 예상했다시피 나는 인간이 아니야."
"··········"
"나를 보통 인간들은 요괴라고 통칭하더라고. 정확히 말하면 눈 요괴. 별 대단한 능력이 있는 건 아니고, 그냥 눈이랑 관련된 건 이것저것 할 수 있어."
마침 그의 정체에 대해 물어보려던 참에 정호석이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제 이야기를 이어나가기 시작했다. 궁금했던 이야기이기는 했지만, 차마 어찌 대꾸를 해야 할지 모르겠어서 고개만 까딱이며 경청하는 시늉을 내는 것이 전부였다.
내가 이래 봬도 꽤 오래 살았거든. 나 같은 일반 요괴들은 300살이 되면 소멸되는 일이 다반사지. 저 시계는 일종의 타이머야. 그니까 저 얼음 시계에 들어있는 눈꽃들이 다 바닥에 떨어지면, 나도 같이 소멸된다는 말이거든.
이게 바로 네가 이곳으로 오게 된 이유야. 인간 여자에게서만 나오는 구슬이 있어. 그걸 정기옥이라고 부르는데I, 그걸 시계에 있는 저 구멍에 넣으면 시계를 멈출 수 있거든.
죽음을 앞두고 있다니. 그 정도로 중요한 일이라고는 상상도 못한 바람에 넋을 놓고 있는 나를 보며 정호석이 콧잔등을 찡긋거리고는 말을 끝맺었다. 어때, 이 정도면 궁금한 건 더 이상 없지 않아? 자리를 파하려고 하는 그의 기색이 만연해서 급히 그의 손목을 낚아챘다. 하마터면 결정적인 질문을 까먹을 뻔 했다.
“아직 뭐가 더 남았어?”
"제일 중요한 걸 이야기 안 해줬잖아요."
"뭔데?"
"만약 제가 저 시계를 멈추면요,"
그러면 저는 어떻게 되는 건데요?
내 말에 정호석이 차마 대답을 하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 글쎄. 사실 나도 거기까지는 잘 몰라. 누가 봐도 수상쩍은 말투였다. 걷잡을 수 없이 의심이 무럭무럭 피어올랐다.
"그러면 지금 해보면 되겠네요."
"뭐?"
"정기옥 말이에요. 그거 지금 가져가보면 되잖아요. 죽나 안 죽나 어디 한 번 보게."
"········"
"어떻게 하면 줄 수 있어요? 뭘 게워내야 하는 건가?"
애써 헛구역질이라도 해보려고 하는 나를 바라보는 정호석의 눈빛이 순간 싸하게 변했다. 당황에 물들어 있던 낯도 어느샌가 모호하게 변질되어 있는 모습을 보고 나는 입을 닫고 그저 침묵을 지켰다.
"오늘은 말고."
"··········"
"다음에. 다음에 가져갈게."
정호석이 의미 모를 한숨을 내쉬며 흘러내린 제 머리를 쓸어올렸다. 투정 부리는 아이를 달래는 듯한, 퍽이나 다정한 말투였다. 허공에서 진득한 시선이 얽혔다. 정호석의 새카만 눈동자가 나를 단단히 옭아매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비록 내 앞의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나를 바라보는 시선이 그리 말했다.
그냥 왠지 모르게 아직은 준비가 안 된 것 같아. 그러니까, 조금만 나중으로 미루자. 아직 너에 대해서 궁금한 게 많거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