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저마다의 학창 시절을 품고 산다. 내 기억 속 가장 깊숙이 자리한 그 애는 남들이 시시하다 할 농담에도 고개를 젖혀 두 눈꼬리를 접으며 꺄르르 행복하게 웃던 사람이었다. 아마 그 애는 죽어도 모르겠지. 그 웃는 입꼬리가 그 시절 나를 얼마나 설레게 했는지. 세월이 지나 우리가 다시금 마주하는 순간이 온다면, 그땐 이렇게 말해야지. 넌 몰랐겠지만, 내가 정말 후회 없이 좋아한 아이는 너였어. 너만 괜찮다면 서로 후련한 마음으로 한 번 안아 보고 헤어질 수 있을까. 더 이상 어떠한 감정도 담기지 않는 눈으로 그 애를 바라보며 환하게 떠나보내자고. 가족과 동아리 후배들이 건네준 분홍 꽃다발과 케이크를 품에 가득 안은 채 마이크를 쥔 교장 앞에 서 고개를 꾸벅이는 그 애의 뒷모습을 보며 나는 남몰래 그리 다짐했다.
오랜 인연을 거쳐 비로소 운명이 된,
저희 두 사람의 의미 있는 날에 당신을 초대합니다.
박지민
&
윤슬
퍼플유 웨딩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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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3.21
2:00 p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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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나 많이 울었는지 모른다. 눈물이 그리 많은 편이 아니면서도 눈물샘이 고장나기로 한 듯이 끊임없이 눈물이 흘렀다. 잊으러 하였으나, 너를 잊지 못하였다. 어느 사극 드라마의 한 대사처럼 여전히 나는 박지민을 잊지 못한 채로 세월을 보내고 있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쫓기듯 번호를 바꾸었음에도 어떻게 알아냈는지, 여주 넌 꼭 왔으면 좋겠다고. 자기만큼이나 예쁜 청첩장을 문자로 보내 온 박지민에 나는 어떤 답장을 보내야 할지 몰라 그저 이틀간 핸드폰을 꺼 놓는 수밖에 없었다.
그냥 가만히 앉아 있다 네 얼굴만 보고 조용히 나올까. 그러다 오히려 눈이라도 마주치면 그대로 무너져서 인사는커녕 눈물만 흘리다 나오는 거 아닐까. 그냥 가지 말아야겠다. 우리는 태어나고 죽을 때까지 선택 하나로 살아간다는데, 반오십이라 불리는 나이가 됐음에도 나는 죽음의 기로에 선 것처럼 어차피 후회할 선택지들을 두고 밤낮을 망설이며 고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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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민을 하는 데 있어서 우위를 둔 것이 있다면, 그건 후회였다. 아마 난 어느 쪽을 선택하든지 어떠한 이유로든 후회하게 될 것이다. 마지막이 될 수도 있는 박지민의 만남을 그냥 그렇게 흘려보내거나, 마지막이 될 수도 있는 그 애를 만나 마음에도 없는 말들을 나열하다 더는 돌이킬 수 없음을 깨닫고 또다른 상처를 안고 나온다거나. 물론 선택함으로서 얻는 좋은 일도 있을 거다. 나는 그냥, 이보다 조금 더 세월이 흐른 시점에서 이 시절을 꺼내 볼 그때의 내게 덜 아픔을 주고 싶어서. 그 어떤 때보다 신중히 생각하는 거였다.
“어머. 쟤 김여주 아니야?”
“그러게, 맞는 거 같다. 내가 가서 불러올 테니까 여주 자리 좀 하나 맡아 줘.”
핸드백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렇게 고민을 하고 식장에 왔는데도 먼 걸음하느라 고생했다는 그 애의 부모님의 손을 마주잡고 나니 그냥 이대로 다시 집으로 돌아가도 될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바쁘신 부모님을 두고 홀로 수능장을 향했을 때도 이렇게까지 발걸음이 무겁진 않았다. 마음이 가볍지 않아 그런가.
“혼자 왔어, 김여주?”
“아, 응.”
“저기 우리반 애들 기다리고 있어. 보이지. 쟤들 봐봐, 하나도 안 변한 거.”
“그러니까. 그대로다.”
“너는 손댄 거 없어 보이는데, 진짜 예뻐졌다.”
“젖살이 빠져서 그런가 봐. 그리고 너도 갸름해지고 예뻐졌는데.”
“얘가, 옛날이나 지금이나 아부는 존나 잘 떨어.”
언제 들어도 외모 칭찬은 부끄럽다는 주연은 새로 한 듯한 물결펌의 머리카락에 손가락을 넣어 배배 꼬고는 내 팔꿈치를 쿡 찔렀다. 쟤들 빨리 오라고 손 흔든다. 가자.
결혼식은 대게 이루어지는 방향대로 무난하고 평범하게 흘러갔다. 하나뿐인 장녀의 손을 팔에 끼고서 묵묵히 걸어가는 신부의 아버지는 보고 있는 내 마음을 먹먹하게 만들었으며, 울컥하는지 그 옆에 따라 걸으며 애써 입꼬리를 올려 보이는 백색의 신부는 이곳에 머무는 그 누구보다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
“.......”
그리고 그 신부를 다정한 미소로 기다리는 남편 박지민은, 그 시절 내가 보았던 입꼬리 중 가장 예쁘다 할 것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찬란했다. 그래서 그랬던가. 차마 마주친 눈을 계속 두기엔 네가 너무 눈부셔서, 나도 모르게 피하고 말았던 건.
“애들아, 나 급한 일이 생겨서 먼저 가 봐야 할 거 같아.”
“왜 다 끝나가는데, 너무 바쁘면 사진만 찍다 가.”
“미안해. 지민이한테 결혼 축하한다고 전해 주라. 연락할게.”
“많이 바쁜 일인가 보네. 알았어. 조심히 가고, 연락해. 만나서 술이나 한 잔 먹자.”
잘하지도 않는 연기를 쥐어짜내듯이 하느라 온몸에 피로가 쌓이는 기분이었다. 애초에 오기 전에 이럴 거라 생각은 했지만, 느낌이 너무 강렬해서 당분간 일상 생활에 지장이 있을 듯 싶었다.
“저, 축의금 어디로 내면 될까요.”
“아, 저한테 주시면 됩니다.”
“여기요.”
“네. ...아 저,”
“이름은 고등학교 동문이라고 적어 주세요.”
“네. 성함은 따로 안 적고요.”
“네.”
“알겠습니다. 혹시 신랑, 신부에게 따로 하고픈 말씀 있으시면 여기 방명록에 적으시면 되거든요.”
쓸까 말까, 이것도 많이 고민한 거 같다.
“좋은 걸음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안녕히 가세요.”
「 결혼 축하해, 지민아.
그리고 하나뿐인 내 학창 시절을 예쁘게 밝혀 줘서 정말 고마워.
그 누구보다 행복하게 지내길 바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