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렇게 우리는 어울리지도않는 진지한말로 서로에게 상처만 남긴채로 끝났다. 그리고 오늘 오후 준회의 무표정을보고, 내가 이렇게 머리를 쥐어메기까지의 시간은 하루밖에 되지않았다. 쉽게말하면 우리는 어제 헤어졌다는거다. 처음 우리가 싸운건 그저께. 그러니까 내방꼴이 이렇게 된건 그저께고, 아직도 치워지지 못했던이유는 어제 우리가 헤어졌기때문이다. 내가 헤어진 여파로 이 방을 치우지 못하고있는게 그냥 시덥잖은 핑계가 아니라면, 대체 언제까지 이렇게 더러운채로 살게될까. 언제쯤 저 쓰레기들을 내다버릴수있을까. 난 그냥 헤어지면 끝일줄로만 알았는데, 그래도 꽤 오래 더럽기 살아야할것만 같았다. 이제 구준회없으면 벌레가 꼬여도 처치하지못하는 곤란한상황일뿐더러, 대신 잡아줄 남자를 구하고싶지도 않았기때문에 나는 침대에서 일어나 주섬주섬 널부러진 쓰레기들을 한쪽으로 모았다. *** 방이 깨끗해지면, 복잡한 머릿속도 나아질거라고 생각했다. 뭐 그렇다고 방이 더러워서 머리가 아픈거라는 착각을하고있던건 아니었다. 몰론 구준회때문이란건 알지만 , 뭐대충 내가 구준회와 헤어지는 과정의 흔적들을 치우면 그 기억은 내눈앞에서 사라질거라고 생각한것같은데 뭐 어떤 이유에서 였던 나는 틀렸다. 하나도 안괜찮아. 너무 똑같다. 다시 침대에 드러누웠다. 바뀐건 없었다. 나는 여기 누워있고, 우리는 헤어졌고, 머리는 여전히 복잡하고. 딱하나 바뀐건 깨끗해진 방뿐이었다. 그냥 다 가져다 버린다고 버려진다면 얼마나 좋을까. 내가 대체 뭐때문에 이렇게 골머리를 앓고있는건지 모르지만, 이게 눈물닦은 휴지인지, 콧물닦은 휴지인지도 모르고 가져다버려서 이제 이곳에 없는것처럼. 내 눈앞에서 사라져서 나를 더이상 괴롭게하지 않는것처럼. 대체 뭔지는 모르겠지만 그냥 가져다 버릴수는 없는걸까. 나는 후회하지 않는다. 울고싶지도않고, 그렇다고 웃고싶지도않다. 괜찮은척은 하고싶지만 친구들을 만나러 나가서 괜찮다며 크게 웃다가 술에취해서 사실 괜찮은게 아니라고 울고싶지도않다. 나는 후회하지않고, 울고싶지도않고, 울고있지도않은데, 괜찮지도 않다. 이유가 뭘까. 기쁘지도 슬프지도않지만 굳이 따지자면 슬픈쪽이다. 대체 왜일까 후회하지않으면 잘한일이고, 울고싶지 않으면 울지 않을 수 있고, 울고있지 않으니 괜찮아야하는데 그런데도 왜 괜찮지 않을까. 혼자 생각할 시간을 갖고싶어서 지저분한 방도 정리하고, 이렇게 혼자있을수있는 공간에. 편하게 누워있는데도 정리가 되질않는다. 뭐부터 정리해야할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너저분한걸까. 내 머릿속을 좀 들여다보고싶었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복잡을 넘어서 머리가 지끈지끈거렸다. 가만히 누워있는데도 뭔가 핑핑도는것도같고.. 기분탓일까 생각하고 넘기려고했지만 그러기엔 눈이 감기고 미간이 찌푸려지는게 심상치가않았다. 겨우 일어나 침대헤드를 붙잡고 앉았다. 누워있다가 갑자기 일어나 움직였더니 어지러운게 눈앞도 잠깐잠깐 뿌옇게 흐려 아무것도 보이지가 않았다. 이러다 진짜 어떻게되는게 아닐까 싶어서 얼른 약을 찾으려 일어났지만 뒷통수쪽이 아찔해져서 자꾸 중심을 잃고 다리에 힘이 풀렸다. 얼굴만 잔뜩 찌푸린채로 약을 모아둔 서랍을 열어 두통약을 찾았다. 대충 빨간색 상자였던것같은데.. 서랍에 손을 넣어 대충 휘적거리자 빨간색상자가 보였다. 차곡차곡쌓아 정리해뒀던 서랍속은 내가 휘적휘적거린탓에 엉망이된지 오래였고, 나는 정리할생각도 못한채 그냥 서랍을 닫아버렸다. 좀 나아진틈에 부엌에서 물을 떠다가 침대맡으로 가져왔다. 약을 먹기위해 상자를 열려는데 이 약이 구준회가 사다줬던 약이었음을 기억해냈다. 상자릉 열려던 내손이 멈추고 찌푸려졌던 얼굴이 펴졌다. 갑자기 괜찮은것같은게 약을 먹지않아도 될것같았다. 너무 미련하고 바보같고 유치하지만. 그냥 정말 구준회가 사다준 약이라는 이유로 선뜻 꺼내먹기가 눈치보였다. 약통을 조용히 침대옆에 내려두고 다시 누워 이불을덮었다. 머리끝까지. *** 눈을 떠보니 9시. 벌써 5시간이 흘렀다. 깜빡 잠들었던것같다. 머리가 아팠던것도 한잠 자고나니 정말 괜찮아진것같았다. 몸도 좀 가벼워진것같고. 머리는 여전히 복잡하지만 그래도 아프진않으니 다행이라치고. 오늘 밤은 꼼짝없이 눈뜨고 보내게 생겼구나싶어 한숨이 나왔다. 침대옆엔 거슬리는 두통약상자와 물컵이 놓여있었다. 나는 물컵만집어들고 두통약은 못본척 침대밑으로 밀어넣었다. 싱크대에 물컵을 내려두고 돌아섰을때, 침대그림자를 넘어 살짝비쳐보이는 빨간상자가 거슬렸다 눈을 꼭감고 그냥 지나쳐 침대위에 누웠다. 잠들려고 노력했지만 아까 충분히 잤던탓에 잠은 올리가 없었다. 뒤척이다 일어나서 옷을챙겨입었다. 몸도 괜찮아진것같고, 다시 아파지기전에 혹시모르니 약이나 사러갈까하는 핑계로 바람을 쐐러나가기 위해서였다. 학교에서 돌아온후로 쭉 집에서 창문도열어놓지않은채로 누워있었더니 많이 답답했다. 어쩌면 그것때문에 머리가 아팠던걸지도 모르고, 찬바람을 쐐면 생각이 조금 정리될지도 모르니까. 집앞이긴하지만 그래도 너무 추하게하고 나갈순없는 노릇이라 거울을 보니 무슨 정신이었는지 학교갈때 화장했던게 아직 그대로였다. 맙소사. 내가 무슨정신으로 화장도안지우고 뒹굴었던거지? 나갔다 와서 지워야겠다 마음먹고, 마음먹은김에 틴트를 덧발랐다. *** 날씨가 꽤 춥다. 아까 낮에도 춥긴했지만.. 밤이라서 그런가 훨씬추워졌다. 하긴. 겨울의 추운날씨가 이상한일은 아니니까. 계단을 내려오는데 나도모르게 걸음이 들떴다. 누가보면 일년만에 외출하는 앤줄 알겠네. 신나게 뛰어나와 자동문이 열리길 기다렸다가 잽싸게 나왔다. 순간 나도모르게 옆으로 고갤 틀자 익숙한 사람이있었다. 익숙한 사람일것도없이. 지금 이상황에서 우리집현관문옆, 시멘트벽에 기대서 마른세수를하며 뭔가를 망설이고있을사람이 또 누가있을까. 나의 신났던 걸음이 멈추고, 고개는 틀어지고 표정은 굳었다. 그리고 그 망설이던 사람은 잔뜩 헝끌어진 머리로 얼마나 고민하고있었는지를 나에게 그대로 보여주며 기대었던 몸을 세워서 내쪽으로 방향을 돌렸다. 우리는 약속이라도 한듯 아무말이 없었다. 침착하자. 나를 만나러 온게 아닐지도 모르잖아? 하지만 이 빌라에 구준회가 알만한사람이 대체 누구지? 아냐 이사왔을수도있으니까.. 나는 곧, 내가 왜왔냐며 가라고할수있는 상황은 아니라고 생각했고 그냥 구준회가 서있는 반대쪽으로 몸을 틀었다. 뭐 ..몇발짝 가지못하고, 구준회에게 붙잡혔지만. 내가 몸을틀자마자 뒤에서 구준회의 발걸음이 다급해지더니 손이 내 팔목을 붙잡아왔다. "잠깐만.." 목소리나 말하는투가 꼭 술에 취한것같았다. 아니 그러고보니 술냄새가 나는것도같고. "술마셨어?" "...조금" 내가 뜸을들이다 한숨을 깊게쉬고 묻자 구준회는 멋쩍은듯이 말하곤 내팔을잡고 남은손으로 뒷통수를 긁적였다. "뭐하자는건데 이건" 이어서 내가 내팔목을 붙잡은 구준회의 손을 눈으로 가리키자 구준회가 큼큼거리며 내 팔목을 놓았다. "....어디..가?" "..그냥.. 여기앞에.." "화장까지 다하고?" "....니가 상관할건 아닌것같은데" "........." 다 받아들이겠다더니. 이렇게 집앞까지 찾아온 구준회도 웃기지만, 울고불고 난리치고 아까까진 머리도 죽도록아팠던 내가 이제와서 깨끗히 잊은척 구준회를 쳐내고있는건 더 웃겼다. 구준회에게도 충격이었겠지만 나도 모르게 모진말을 뱉고 뒤돌아서는 내마음도 편하진않았다. "그래도 남자친구였는데..!" "........" "하루정도는 아무것도 못할만큼 슬퍼해줘야되는거아니냐?" 내가 가던걸음을 멈추고 뒤돌아서자 구준회가 못한말을 이었다. "....나랑 너무 다르잖아.." "뭐가 다른데" "나는 아무것도 못하고있었는데, 나는 참다참다 자존심 다버리고 여기까지와서. 너한테 사과할까말까 고민하고있었는데, 넌 아무렇지도않잖아.. 하루정도는 너도 나같아야하는거아냐?" "...진짜 이기적이다" 뜸들이던 내가 조금 울먹이며 말했다. 눈썹만 조금 꿈틀거렸을뿐 구준회의 눈빛은 변함이없었다. "니가 모르는거겠지 나도 너랑 사귀면서. 매일 기다리고 울고 아무것도 못했어. 자존심 다버리고 밤늦게까지 답장없는 너한테 한번더 연락하고, 니가 받아줄지 말지도 모르는 전화. 받아줘도 언제끊길지 모르는 전화 한번 걸어볼까 수십번 고민했어." "........" "근데 내가.. 또 힘들어야해? 이걸론 모자라? 나는 그렇게 힘들었던 날이 얼만데, 너야말로 하루정도는 참을수있어야되는거 아냐? 나는 그렇게 참은날이 얼만데 넌 고작 하루만에 이렇게 찾아와서 사람마음 불편하게해? 꼭 너 힘든거 내가 알아야해? 넌 나 몰라줬으면서? 내가 너 이해해줘야해?" 감정이 복받쳐서 언성이 높아졌다. 눈물도 좀 차오른게 흘렀는지 안흘렀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도모르는사이에 눈앞이 조금 뿌옇게변했다. 구준회의 표정은 변함이없었다. 눈물이 좀 고인것같기도했다. 내가 구준회를 똑바로 쳐다보자 구준회는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그러더니 고개를 푹숙였다. 주먹을 꽉쥔 두손은 부들부들 떨렸다. "이제 가. 너 바쁘잖아" 눈물이 차서 힘풀린 눈으로 비꼬며 말하는 내가 얼마나 미울까. 사실 그렇게 흥분하고 복받쳐서 소리지르면서 뱉은말들도, 내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알아주길바랐던 생색섞인 말이 아니었을까. 뒤돌아서자마자 눈물이 툭 떨어졌다. 우는 소리가 날까봐, 혹시 우는 소리가 들릴까봐 입술을 꽉다물고 참느라 얼굴이 있는대로 구겨졌다. 다시 뒤돌아서서 가려는데, 내가 한걸음 떼기가 무섭게 다시 구준회의 발걸음이 다급해졌다. 이번엔 붙잡다못해 두팔을 내 어깨와 목에 둘러서 나를 안았다. 키차이가 꽤 나서 내 머리위로 구준회의 턱이 닿았다. 머리에서도, 구준회가 팔을 두른 어깨와 목에서도 떨리는 구준회를 느낄수가있었다. 굳이 빠져나가려고하지 않았다. 저항해봤자 구준회에게 눌렸을게 뻔하지만 꼭 그런이유만은 아니었다. 나도모르게 바라고있던 품이었다. "...왜이래..." 내가 떨리는 숨을 가다듬고 말했다. 아무렇지 않은척한다고 한건데, 코먹는소리가났다. 알아챘겠지 이미. "누가 이해해 달래?" 구준회의 목소리가 고르지못한 숨을 타고 얇게 실려나왔다. 손만큼, 목소리도 많이 떨리고있었다. "말했잖아 사과하러왔다고" "........" "미안해..진짜. 정말 미안한데 우리 돌아가자. 너 겁날거 알아. 그래서 더 미안한데.." 가만히 듣고만있었다. 구준회는 정리가 안된것같았다. 하지만 충분히 느껴졌다. 그냥 구준회가 나한테 표현을 하는것만으로도, 아니 그렇게 자존심 센 준회가 여기까지 찾아와 머리를 헝끌어뜨리고 있었다는것만으로도 어떤 마음인지 다 보였다. 구준회의 손을 풀고 뒤를돌아 구준회를 마주봤다. 아까와는 다르게.. 뭐라고해야하지? 뭔가 무장해제된 모습이었다. 미간은 찌푸러져있고, 눈꼬리는 축쳐져있고, 눈물은 그렁그렁한데다 아랫입술 조금을 꽉 깨문채로 부들부들 떨리는 입꼬리도 아래쪽으로 향하고있었다. 처음보는 준회의 우는 모습이었다. 나는 여러번 보여준 우는 모습이었고, 구준회는 항상그랬듯 큰손으로 내얼굴을 감싸서 엄지손가락으로 내 눈물을 닦아내주었다. 준회의 손이 차가웠다. ***
나는 구준회가 내 얼굴을 닦지못하게 손을 떼어냄과 동시에 고개를 푹 숙였다. "우리 이러지말자.." 내말에 당황하던준회의 손이 멈췄다. 구준회의 표정은 보지못했지만 대충 예상이갔다. 바람은 쐘만큼 쐤다. 더이상 필요가없었다. 나도 내가 어떤마음인지 모른채, 구준회를 뒤로하고 다시 들어왔다. 방향을 틀어 계단을 한칸 올라가자마자 주저앉아버렸다. 복도에선 소리가 조금만 세어도 몇번이고 메아리쳐 크게울렸기때문에 나는 더 세게 입을 틀어막았다. ♡암호닉♡ 구주네 / 아이닌 / 아이콘은 축구중 / 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