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느 날과 같은 날이었다.
월요일이다, 싶었는데 주말이 벌써 온 건지 늦은 밤거리엔 찬란한 빛이 완연했다.
그녀는 지친 발걸음을 잠시 멈추고, 그녀가 항상 지나는 난잡한 거리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어느 때나 활기넘치는 이 거리는 밤이 되면 더욱이 요란해져 눈과 귀를 어지럽게 했다.
이 도시의 밤은 뻔뻔스러울 정도로 사치스럽고 아름다웠다.
걸음 걸음마다 붙잡는 소위 삐끼들의 노련한 목소리와, 눈부시고 화려한 전광판들.
그 사이를 비집고 걸어가다, 무심코 눈에 띈 빨간 글씨에 호기심섞인 이끌림으로 바에 들어섰다.
"어서오세요."
이른바, 호스트 바, 여성전용 술집이었다.
막상 들어서고나니 어찌할 바를 몰라 멀뚱히 서 있는 그녀를 직원인 듯한 남자가 예의 그 얄쌍한 미소로 안내했다.
자리에 앉자, 자연스레 그녀의 옆자리에 한 남자가 다가왔다.
"아마 처음 오셨나보네요. 전 바비라고 합니다."
그녀는 남자의 갑작스런 소개에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몰랐다.
"아 네. 안녕하세요."
딱 맞는 검은색 수트를 입은 바비, 물론 이곳에서의 이름이겠지만, 그의 이름이 그의 살짝 매서운 눈매와 잘 어울린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그는 거의 모든 여성들이 좋아할 만한 애프터 쉐이브의 향을 풍겼다.
"낯선 장소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살짝 우스꽝스러운 농담을 하며 그가 손을 내밀었다.
"확실히 낯설긴 하네요." 그녀는 그가 당연히 악수를 하리라 생각하며 손을 내밀었다.
그런데 그는 그녀의 손을 가볍게 잡는 대신에 그녀가 미처 빼낼 사이도 없이 그녀의 손목 안쪽에 입술을 댔다.
그것은 정중하면서도 예의있었지만 이 요염하고 시끄러운 장소와는 굉장히 어울리지 않는 행동이었다.
실제로 그의 입술은 그녀의 손목에 닿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녀의 살갗은 그의 입술이 닿았던 것처럼 움찔했다.
"음료는 뭐가 좋을까요?"
바비의 갑작스런 행동에 살짝 멍해진 그녀를 보며 푸스스 웃던 바텐더가 물었다.
"아, 러스티 네일 한 잔이요." 그제야 정신이 돌아온 듯, 그녀는 칵테일을 주문했다.
"처음 오시는 분 치곤 과감하시네요. 꽤 독한 칵테일인데."
"그만큼 달기도 하고요. 낮에 피곤한 일이 좀 있었거든요." 그녀의 말에 위트있게 웃으며 바비는 바텐더가 건네는 잔을 받아 그녀의 앞에 놓아주었다.
그녀는 처음보는 사람에게, 특히 남자에겐 더더욱, 자신의 얘기를 하는 일이 없었지만 왜인지 그와 친근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아마 이런 화술도 이런 곳에서 일하기 위해 갖춰야 할 기본적 소양일테지, 하고 그녀는 생각했다.
동시에 그런 자본주의적인 생각을 했다는 것에, 이 사회에 찌들어버린 자신을 자책했다.
이제야 둘러보는 가게 안은 이미 과감한 농담과 농염한 유희를 즐기는 사람들로 즐비했다.
생각보다 화끈한 장면에 그녀는 난감한 기색이 완연했다.
"아주 우아한 곳이군요." 불평인 듯, 불만인 듯. 그녀가 퉁명하게 내뱉는 말에 바비는 그녀가 당황할 만큼 크게 웃었다.
"아주 우아한 곳이죠." 아직도 큭큭대며 웃는 그가 늦게야 대답했다.
그녀는 시선을 돌렸다. 자신과 어울리지 않는 이 공간에 들어선 것 자체가 잘못된 선택이었다고 생각했다.
"후회하시는군요." 약간의 걱정과 비아냥이 섞인 말투로 그가 말했다.
"저랑은 어울리지 않아요."
"하지만 누구나 옷을 걸쳐볼 수는 있죠. 비록 자신과 어울리지 않는 색일지라도."
"다시 한 번 깨닫기 위해 그런 수고를 하진 않으려고요." 그녀는 쉽사리 이야기의 주도권을 뺏기지 않았다.
"'우아한' 생각이네요."
그녀가 그를 돌아보았다. "그러니까 지금 저를 놀리고 계시는 거군요."
"죄송합니다. 아가씨." 바비는 장난기 어린 미소로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그쪽의 말이 굉장히 인상적이어서요."
"그냥 제 생각일 뿐이에요."
"불쾌하게 할 생각은 전혀 없었습니다."
그녀는 갑자기 당황스러워져 고개를 저었다.
"어렸을 적에 난 별난 오리로 불렸어요."
"정말이에요?" 그가 되물었다. "오리?"
"가끔 엉뚱한 데가 있거든요."
"단정한 정장 차림의 숙녀에게 어울리는 별명은 아니군요."
"신경쓰지 마세요. 익숙한 일이에요."
하지만 바비는 집요하게 말꼬리를 붙잡았다. "어떤 점에서 엉뚱하다는 거죠?"
"모르겠어요." 그녀는 어느새 비어버린 잔을 말없이 바텐더에게 내밀었다.
"저는 쓸데없는 일에 유별나고 막상 신경써야 할 중요한 것들엔 무심하거든요."
"그 중요한 일이란 게 뭐죠?"
그녀는 누구와도 이런 이야기를 나눠본 적이 없었다.
"그러니까, 파티에 초대되었을 때 내가 입을 옷이라던지, 손님을 대접하기 위한 음식들 같은 거 말이에요. 난 그런 것들을 고민하는 게 아주 지겨워요."
그녀는 마치 오랜 친구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는 느낌을 받았다. "하지만, 제 시간에 기차를 탈 가능성을 계산하는 데엔 유별나죠."
그는 조용히, 진심어린 관심을 보이며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럼 아가씨의 계산은 정확한 편인가요?"
"대개는요."
"그런 일들이 왜 아가씨에겐 중요하죠?"
"모르겠어요." 그녀가 인정했다. "계산하기를 좋아해요. 초대받은 자리에서 내 자리가 몇 번째인가, 하는 따분한 계산같은 게 아니라, 하늘에서 떨어진 폭탄이 왜 하필 그 장소에 떨어졌을까? 어떤 것도 무작위나 우연히 되는 게 아닐테니까요."
"제가 생각하기에, 그쪽은 오리가 아니라 현명한 올빼미 같은데요?"
"그건 모르죠." 그녀가 살짝 부끄러운 듯 웃었다.
생각지 못한 장소에서, 둘은 꽤나 심도있는 대화를 하고 있었다.
"일주일 뒤면 이 곳을 떠나는데, 왠지 막다른 골목에 와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럴지도 모르죠. 하지만 아직 당신이 흥미로운 계산을 할 수 있는 일들은 많이 남아있을 테니까요."
"네. 그렇지만 지금은 뭘 해야 하죠?"
바비는 오늘 처음보는 그녀에게 흥미를 느꼈다. 그는 자신이 그녀의 이야기를, 지금 마음이 어떤지를 그녀가 다시 말해 주기를 바라고 있었다.
"기다려야죠."
"뭘요?"
"모르죠." 그는 의자에 깊이 기대 앉으며 술을 들이켰다. 그리곤 지하의 녹슨 냄새와 사람들의 향수냄새, 짙은 보드카 향을 한껏 들이마시며 말했다. "뭘 해야 할 지 모르겠다면,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최선이죠."
"경험자로서의 조언인가요?"
그는 위장으로 퍼지는 싸한 술을 느끼며 눈을 감았다. "그렇습니다."
그녀는 다시 한 번 주위를 둘러보았다.
온통 발그레해진 얼굴도 모르는 채 친구들과 즐거운 얘기를 나누는 여자들의 무리, 그 앞에서 형형색색의 칵테일을 만들어내고 있는 바텐더, 이리저리 바쁜 걸음을 옮기는 호스트들.
판단할 수 없지만, 그녀가 보기에 그들은 활기에 넘쳤고 그들 자신의 행동에 몰두하고 있었다.
그녀는 자신도 저랬던 때가 있었는지 생각해 내려다 그런 적이 없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자유로워지는 법을 잊어버리고 만 것이다.
대신에 늘 그녀는 자신을 과소평가하고, 세심히 살피고, 판단하고, 결핍감에 빠져있었던 것 같았다.
"아가씨."
그녀는 바비를 흘깃 쳐다보았다. 얇은 눈썹, 도톰한 입술, 검고 짙은 속눈썹이 두드러진 그의 얼굴. "네?"
그는 눈을 뜨지 않은 채 말했다.
"당신은 중요한 게 무엇인지를 아는 분입니다."
"제가요?"
"제시간에 기차역에 도착하는 문제는 중요하죠. 물론 비행기와 폭탄사이의 공간을 운에 맡길 수도 없는 일이고요."
그녀는 혼자 빙긋 웃었다. "맞아요. 그렇게 생각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