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te: 대량 움짤 / 새로 고침 필수 :)
별이 떨어진다면 당신이 있는 공간으로
- 성동혁, 1226456
미스 캐나다, 프로답지 못하게 왜 그래?
엄연히 공식적인 자리에서 서로 모른 척하는 건 당연한 거 아니야?
한때 직장 안팎을 가리지 않고 연애에 목숨 걸었던 라이프지 김 팀장이 말했다. 자고로 ‘연애’란 남에게 숨길수록 좋으며, 특히 회사 내에서는 결혼식 전날 밝혀야 지구촌 인류 모두가 행복한 법이라고.
고온 다습하지 않아 헤어졌다는 것만으로도 둘의 관계 노출은 충분하니 입에는 자크를 달고 말할 때도 엉덩이로 말하란다. 프로의 길은 입이 무거운 것부터 시작되는 거라고 지문 인식기에 퇴근을 찍으며 그녀가 말했다. 최는 본격적으로 꼰대의 길로 들어서려는 팀장의 가방을 잡고 문밖으로 밀었다. 어젯밤 비상구 계단에서 아래층 아트 디렉터와 뽀뽀하다 걸린 이야기를 시도 때도 없이 남발한 그녀가 몹시도 창피한 최였다.
퇴근 후 거실 바닥에 누워 관련된 페이지를 긁어모았다. 블로그, 티스토리, 나무위키 할 것 없이 기말 하루 남은 사망년처럼 비밀 연애와 관련된 리소스를 핏줄 선 눈으로 벼락치기 중이었다.
마음만 먹으면 남남은 식은 죽 먹기라 떵떵거렸으나 왼쪽 눈물점 박힌 눈으로 웃는 지훈을 본다면 난 아이폰보다 빠르게 잠금 해제될 인간상이었다. 그러니 단단히 준비해야 했다. 방심한 순간이 누군가의 목격담으로, 또다른 누군가에게로, 그리고 K건설 안으로, 지훈의 뒷배경을 미루어 본다면 내일 당장 스포츠 신문 1면 헤드라인에 걸릴 수도 있을 것이다.
막말로 신서체 38pt로 쓰인 제목은 ‘K건설 외아들, 피앙세와 공과 사 구분 없는 애정행각?’ 정도 되겠고 양손으로 지훈의 뺨을 잡고 뽀- 를 감행하는 내 육중한 뒷모습이 증거 사진으로 떠돌리라.
팀장의 뼈저린 조언과 광고성 게시물을 헤쳐 작업한 지 두 시간 째, 마침내 완성한 비밀 문서는 아래와 같았다.
[비밀 계약서]
KISAN Engineering & Construction., Ltd. 건축 설계 팀 이지훈 (이하 “지훈”)과 Green-age Korea 라이프 스타일 소속 김여주 (이하 “여주”)는 다음과 같이 비밀 계약을 체결한다.
1. 계약 목적
- 본 계약은 공식 업무를 수행하면서 사적인 감정으로 인한 직무 태만, 직무 유기, 사회적 품위 손상 등이 발생하지 않도록 예방함을 그 목적으로 한다.
2. 계약 기간
- 11월 11일부터 11월 11일까지 (지훈의 인터뷰 홍보 촬영 당일)
3. 계약 내용
- 상호 협의를 바탕으로 계약일 다음 날부터 해당 촬영 스케줄 종료 시까지 쌍방의 형식적인 비즈니스 관계를 유지한다.
4. 상세 조건
- 낮춤말 (반말) 금지
- 공공에 위배되는 불건전한 시선 금지 (e.g. 멜로 눈깔 등)
- 타인의 의심을 부르는 은밀한 스킨십 금지
- 동방예의지국 에티켓 간격 (120cm – 360cm) 반드시 유지 『두근거림 방지 무슨 무슨 법 제3조 1항에 의거』
5. 기타
- 중지로 미간을 긁으면 개인적인 대화 일시적으로 가능 (단, 제한 시간 3분)
- ‘상세 조건’에 반한 경고 2회 누적 시 본 계약은 즉시 파기되며 추후 금전적 손해 배상을 청구하거나 받을 수 있음
- 금전적 손해 배상 협의 가능
□ 이하 모든 규칙에 동의합니다
□ 개인 정보 수집에 동의합니다
□ 당일 야식 구름 찜 닭에 동의합니다
11월 10일
이지훈 (인)
김여주 (인)
― “대한민국에 두근거림 방지법이 있다고?”
원리원칙 증거주의 이지훈 씨는 어영부영 넘어가는 법이 없었다. 밤 11시 가까이 퇴근해 피곤해하기는커녕 문제의 법 원문과 레퍼런스를 추궁하는 눈초리가 쨍했다.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며 보편적 계약서에 적절치 않은 ‘멜로 눈깔’ 워딩과 하필이면 가운뎃손가락으로 미간을 긁어야만 하는지 거침없는 난색도 표했다. 고로 번갯불에 콩 구워 먹듯 얼레벌레 받아내려던 사인 작전은 모두 퐁퐁 거품이 됐다는 소리다.
― “한국은 아니고 스코틀랜드 고양이 법에서 발췌했어.”
― “정보 위조 딱 걸렸고.”
― “국어사전에 멜로 눈깔 등재됐는데 못 봤어?”
― “설득이 전혀 안 돼.”
― “검지로 긁어도 재미없잖아.”
― “욕과 호출은 한 번에 하고 싶다는 얘기로 들린다.”
― “손해 배상 금액은 타당하고 합리적으로 하자.”
― “그럼 3억 적어.”
분할 말고 일시불. 이행에 최선을 다하라는 의미지. 지훈은 가죽 소파에 기대 다리를 꼬았다. 애간장 녹이는 눈웃음과 그렇지 못한 워렌버핏 식 경제적 넘버링이었다.
― “날 파산시키는 게 목적이야?”
― “계약대로 일만 하면 최소 본전인데 뭘 걱정해.”
― “이지훈 벗겨 먹을 거야.”
― “그래서 대출 날짜 언제라고?”
돈도 걸었겠다, 질 마음 없어 보이는 그가 KB, 신한, 우리 은행 대출 절차 링크를 보냈다. 장기 외국 체류 신분은 준비 서류가 내국인보다 까다로울 거란다. 이럴 때만 극단적인 친절이었다
― “뭐가 많네.”
지훈은 피카츄가 달랑거리는 펜을 굴리며 계약서를 처음부터 꼼꼼히 훑었다. 내일 야식 동의까지 무리 없이 착수되는 듯했으나 정작 중요한 사인을 남기고 그가 돌연 움직임을 멈췄다.
― “볼펜이 나랑 좀 안 맞는 것 같다.”
여분 종이에 펜을 긁다시피 확인하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 “사인하고 싶은데 그립감이 안 좋아.”
― “……뭐가 안 좋다고?”
― “이건 내 잘못이 아니라 얘 잘못이야.”
백 퍼센트 피카츄 과실이란다. 예민한 사수에게 붙잡힌 신입의 마음으로 다가가 그립감에 환장할 몽블랑 만년필을 건넸다. 한국 올 때 면세점에서 한정판 겟 했어. 트럼프도 이걸로 사인하다가 중국 선빵 날리자는 결재 최종 승인할 뻔했대. 그만큼 부드러움에 미친다는 거지.
지훈은 제 손에 들어온 만년필 캡을 열었다. 그러나 사인은 하지 않았다. 탐탁지 않은 표정으로 촉대를 유심히 살펴보는 듯하더니 이내 뚜껑을 닫았다. 지훈의 넓은 어깨와 턱이 같은 방향으로 돌아간 것도 그때였다.
한 손으로 내 뒤통수를 잡고 순식간에 입술을 훔친 그가 계약서에 그대로 얼굴을 포갰다. 감히 상상도 못 한 입술 도장이었다.
― “잘 찍혔네.”
지구에서 가장 섹시한 계약서를 가장 담백하게 돌려주는 이 시대의 청춘 ‘갑’ 이지훈 씨. 와칸다만 가고 싶은 공상 추종자인 줄 알았으나 원한다면 현실 판타지 로맨스도 쌉가능한 다재다능 무한 인간 스펙트럼이었다.
어제 산 맥 신상이 의외의 곳에서 발색될 줄이야. 이럴 줄 알았으면 매대 싹 쓸어올걸. 립스틱 챌린지는 아쉽게 놓치고 말았으니 오늘은 어쩔 수 없이 하나로 끝장 봐야겠다. 지훈아, 내 입술 보지 말고 너도 발라.
― “둘 다 하면 재미없지.”
― “둘 다 해야 더 재밌지. 거의 극락 좌표야.”
― “이상한 데 꽂히지 말고 그냥 자.”
― “이게 MLBB라는 거거든?”
― “어, 열지 마.”
지훈은 눈앞에 떨어진 립스틱에 치를 떨었다. 내가 왜 해. 아냐. 됐어. 너 많이 써. 아우, 힘은 또 왜 이렇게 세. 큼지막한 두 손에 공격적인 손목을 붙든 그가 눈을 찡그렸다. 작은 얼굴에 오목조목 들어찬 이목구비와 대조되는 뚜렷한 힘줄은 사람 미치게 만든 재주가 있었는데, 슬그머니 그곳에 입술을 대자 이번엔 손바닥이 내 이마를 밀었다.
이거 봐, 뭐만 하면 집중 안 하고 꼭 딴 길로 새지. 술 먹었어요, 안 먹었어요. 지훈은 잡은 손목을 당겨 목 언저리에서 알콜 냄새를 확인했다. 숨을 내쉴 때마다 닿는 감촉에 힘이 빠져 손가락만 뭉그적거리자 눈치 빠른 그가 픽 웃었다.
― “놓고 이리 와. 안아 보게.”
― “길 건너 GS편의점 노총각 배 씨 아저씨한테 갈 거야.”
― “갑자기?”
― “입술 도장 대리인 부탁할 거거든.”
― “무슨 말 같지도 않은 말을 하고 있어.”
― “맥주 사러 가면 공짜로 두 개씩 더 주면서 번호 물어보는데 이거 나 좋아하는 거 맞지?”
― “그래서 내가 가지 말라고 했잖아.”
― “그럼 안 가는 대신 계속 치대면 넘어올 거야?”
― “……일단 해 봐.”
지훈은 결국 체념의 눈을 감았다. 약하게 발려 본래의 색과 차이가 없었음에도 바닥만 내려다보는 수심이 깊었다. 얄쌍한 턱을 쥐고 아랫입술을 감쳐물자 지훈은 눈을 감았다. 사인 명목으로 시작된 ‘본격 이지훈 잡아먹기’ 게임은 제2의 자아라 해도 무방한 그의 귓불이 뜨겁게 반응할 때까지 멈추지 않았다.
내 손끝을 잡고 시작한 농도 짙은 게임은 곧 팔과 어깨, 등과 허리로 내려갔다. 지훈은 제 무릎 위에 앉혀 희미하게 번진 입술로 날 올려다보았다. 티셔츠 안으로 지난밤 흔적이 역력한 얄궂은 자취가 비추기 시작했을 때, 지훈은 달은 얼굴로 내 눈을 가렸다.
― “그만 봐.”
― “누가 그랬어?”
― “너.”
어깨와 쇄골 아래 남은 형상을 부끄러워하는 것마저 퍽 야했다. 정사를 모르는 듯한 뽀얀 뺨 밑으로 난장 당한 것이 혀 아래 뭉근한 침샘을 자극했다. 손을 거둬 허리에 두르자 지훈의 허벅지가 들썩였다. 이내 내 품에 머리를 부비며 등을 끌어안았다.
손끝으로 턱을 들어 올리면 습관이 밴 그는 눈을 감고 입술을 줬다.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깊어가는 탓에 그가 눈을 뜨며 물었다.
― “사인만 한다며.”
― “너한테 하고 있잖아.”
― “사람 들었다 놨다 선수야 아주.”
못 이기는 척 나른한 숨을 뱉는 모습은 평생 나만 보게 해주세요. 일부러 만지지 않고 떨어지면 금세 끙끙대는 짓도 평생 나한테만 하게 해주세요. 둘만 있을 때는 붙어 있다 못해 뽀- 만 해도 빨개지는 이지훈 갭도 영원히 오래오래 제발 나만 알게 해주세요. 누구든 내 애인에게 작업 걸면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다. 나무아미타불 아멘.
― “밖에서는 예민하고 까칠하게 굴면서 지금은 말 잘 듣네?”
― “일할 때만. 네 말은 원래 잘 듣고.”
― “내일 참 걱정이다. 네가 날 너무 좋아하는데 조절이 되겠어?”
― “굳이 밖에서 그러진 않지. 나도 사회적 체면이라는 게 있으니까.”
― “3억 미리 잘 받을게.”
― “이러고 내일 또 차갑게 대했다고 서운해할 거 다 안다.”
― “내가 은근히 의지가 강하다고 말했었나?”
― “강하지. 강하기만 하지.”
― “강아지라고? 나 어디가 어떻게 귀여운데?”
― “봐, 술 먹었네.”
― “아무튼 초면처럼 일만 할 거야.”
― “그러고 싶어서 계약서 쓴 거잖아. 맞춰드려요.”
― “진짜 반지 빼고 가야지.”
― “솔직히 빼지는 말자. 디자인 똑같진 않아서 어차피 사람들 봐도 몰라.”
― “내일부터 싱글인데 약지에 반지 있으면 자유로운 연애에 방해되지 않을까?”
― “싱글? 자유로운 연애? 그건 계약에 없는 내용 아냐?”
― “이구우, 덥다. 빨리 샤워하고 자야지.”
― “야 강아지, 어딜 도망가.”
― “지금부터 플라토닉.”
― “웃기고 있네.”
지훈은 내 뒤통수를 잡고 계약서를 얼굴에 붙였다. 하얀 종이 밑 부분 어디쯤 찍힌 립 자국을 확인한 그가 계약서를 바닥으로 흘려보내며 일어남과 동시에 내 허벅지 뒤를 감싸 어깨에 들춰 맸다.
증거 없앤다고 내가 사라지는 것도 아닌데 어디서 수작이야. 침대에 눕혀 한 손으로 내 손목을 움켜쥔 그가 끝내지 못한 MLBB 스킨십을 쏟아냈다. 어쩔 수 없이 립스틱 하나로 끝장내는 건 못 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하지 않았던 것뿐인 스킨십 장인 이지훈이었다.
― “자유로운 연애, 좋지.”
……
― “걸리기만 해.”
보통 날과 색이 다른 집착에 위험 경보가 떴다. 뺨과 목덜미, 말아 올라간 상의 속의 움직임이 짙어질수록 골반과 허벅지 사이가 뻐근했다. 지극히 개인적인 쾌감까지 꿰고 있는 지훈의 손을 급하게 잡아보지만 그것은 타격력 제로에 수렴하는 성가신 저항일 뿐이었다.
위에서 아래로 내려가는 입술은 한없이 다정했으나 손목을 붙든 힘은 단단히 화가 났다. 팔을 빼면 손을 잡혔고 손을 빼면 깍지를 꼈다. 지훈의 습관적 취미는 애 닳은 그 모습을 관전하는 것. 실컷 괴롭히다 모른 척 물어보는 것.
― “누가 또 괴롭혔어.”
……
― “바람 피다 걸리면 더 죽겠다, 그치.”
지훈은 클레오파트라도 울고 갈 평소의 정갈한 수면 자세를 버리고 뒤에서 허리를 껴안았다. 뭐가 그리 불안한지 매끈한 종아리를 내 다리 사이에 넣고 애착 인형처럼 품에 가뒀다.
내 냄새 배면 다른 사람 못 만나. 내일도 이러고 잘 거야. 숨을 내쉴 때마다 엉덩이에 닿는 촉감에 애먼 손톱만 튕겼다. 이불 안은 습했고 뒤에서는 낮은 숨이 흘렀다. 어린 애도 아닌데 잠들지 못하는 건 지훈도 마찬가지였다.
결국 뒤를 돌아 목을 끌어 당겼다. 그가 등허리를 쓸어내리며 말했다.
― “지금 어떻게 안아주면 좋은지 말해 봐.”
……
― “직접 나 보면서.”
다 알면서 묻는 짓궂은 질문이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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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4시.
캐주얼 수트 차림의 두 사람이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각각 반대편에서 휴대폰과 아이패드로 스케줄을 체크했다. 오피스텔 로비에 다다른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지훈이 먼저 밖으로 나갔다.
나가기 직전 말없이 내 손을 힘껏 쥐다 보내면서.
Oh My Rainbow
; The Finale
10. 비밀 연애 Part. 1
[오고 계시죠?]
[사표 내신 거 아니죠?]
생존 신고를 요구하는 박의 문자였다. 답장의 여유 따윈 없었다. 구식 미니 냉장고와 맞먹는 짐을 안고 악명 높은 논현동 스튜디오 언덕을 등반하고 있었으니 중간에 숨이 멎어 까무러치지만 않으면 다행이었다.
한 시간 전, 스튜디오 촬영 스탭들을 위해 커피 매장에서 케이터링 박스를 직접 픽업한 것까지는 좋았다. 사거리에서 느닷없이 바퀴가 퍼진 탓에 회사 차는 30분 전 레카에 실려 갔다. 히치하이킹은 정신 빠진 소리였고 새벽을 달린 주정뱅이들의 손에 넘어간 건지 그 흔한 택시조차 보이지 않았다.
그리하여 그것들은 현재 인간의 수족을 빌어 움직이는 중이었다. 갓길에 박스를 내려놓고 디스크 위험에 노출된 허리를 두드렸다. 하늘에 가느다란 입김이 연거푸 터졌다. 사물에 수족을 희생당한 인간은 재수 없게도 나였다.
진즉 이승을 떠난 어깻죽지는 견갑골의 손상도를 따져 산재 처리할 예정이었다. 끝이 보이지 않는 오르막길에 머리가 핑핑 돌았다. 나를 살릴까, 스탭들의 수혈을 살릴까. 어차피 인간은 이기적인 동물이니 다 버리고 바닐라 라떼나 빨러 갈까. 자켓에서 휴대폰이 울렸다. 포기를 모르는 박의 문자였다.
[커피콩을 직접 갈고 계신 거예요?]
[오늘 지훈 씨 컨디션 좋아 보이죠?]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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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시간 이지훈도 받아먹지 못하는 수전증이었다. 박은 연달아 하트를 보내며 도착을 재촉했다. 트리플 크런치 하트라던지, 쌍쌍 커플 하트라던지, 별 희한한 제목을 갖다 붙였다. 세브란스 명의 정한도 혀를 내두를 정도의 관종 말기 양상이었다.
요즘 멀티 프로필로 사람도 가리는 마당에 특정인 하트 차단 기능도 있었으면 좋겠다. 이과는 왜 일을 하지 않는 걸까. 블루투스 샤워기는 도대체 언제 만드는 걸까. 지금 불티나게 전화 때리는 스마트 이과 놈팽이는 알지 않을까. 승관아, 넌 무슨 말인지 알지.
― [야, 넌 뇌를 블루투스로 차단했냐? 술 개꼴아가지고 정한이 형 보는 앞에서 이쥰 입술을 부비고 싶디? 왜, 아예 키스도 갈기지 그랬냐?]
이 새끼가 아침부터 또.
― [아하, 기억이 안 나신다고요? 통째로 날리셨다고요? 네가 렉 처먹은 엑셀입니까? 투포환 선수세요? 도쿄 유령 올림픽 혼자 출전해서 금메달 딴 게 너세요?]
승관은 반강제 집들이한 그 날을 되짚었다. 고농도 알콜에 기절한 석민의 다리를 질질 끌어 베란다 옆에 재운 것도 모자라, 지훈의 뺨에서 떨어질 줄 모르던 붕어 주둥이를 회상한 녀석은 내 덕분에 미래의 시아주버님이 될지도 모르는 정한에게 보일 낯짝이 없다고 했다.
글자 크기 30pt 욕망의 구호 ‘뿌’를 외치며 정한에게 개기던 누군가도 정상적인 그루브는 아니었지만 축축한 볼때기를 닦으며 허공을 쳐다보던 지훈의 눈빛이 어제처럼 생생하다는 진실의 조동아리 앞에서 반박할 용기는 없었다.
― [됐고요. 조슈아 사인 픽업이나 하세요. 너 때문에 어렵게 받은 건데 당연히 네가 와야지 내가 가리? 얼씨구, 퀵 같은 소리 하네. 저도 바쁘거든요?]
오늘 날씨 참 좋다.
왠지 민트 초코를 끼얹은 치킨이란 괴식을 하고 싶은걸.
― [여보세요? 여보시요? 할로? 야, 끊었냐? 설마 씹냐? 단물만 빠니까 맛있냐? 이 쥬시 후레시 페퍼론치노 같은 게 이지훈이랑 아이컨택부터 오지게 망해버려라!]
메아리를 보건대 녀석은 죽고 못 사는 아아를 빨고 라디오국 8층 화장실에서 모닝 똥 중이리라. 친구야, 애플 희대의 명작 노이즈 캔슬링을 이딴 식으로 쓰고 싶진 않았거든?
― [내가 살다 살다 네 똥 소리까지 ASMR로 들어야겠어?]
― [야, 그러지 말고 프론지 뭐시긴지 이쥰이랑 사귀는 티 안 내기 성공하면 오빠가 숭어 한 사발 멋지게 쏜다.]
― [또 길바닥에 전 부치지 말고 누나가 사주는 국밥이나 처먹으면 안 될까?]
― [누나 저는요, 살면서 위로 싸질러 본 적이 없거든요? 제 돈-고-는 아래에만 있다는 걸 명심해줬으면 좋겠는데요?]
― [지금 당신 입으로 친히 싸지르고 계시잖아요?]
― [제주도 자연산 두 마리로 화해하자요.]
― [두 마리 받고 제주도 전복까지 잭팟으로 가자.]
― [도박하냐?]
― [티가 나?]
― [이건 또 뭔 전개냐?]
― [근데 콩팥 하나로도 나름 살 만하겠지?]
― [미친아! 너 도박하냐고!]
일방적인 통화 종료였다. 그것은 도박장 좌표를 캐묻는 승관의 집착을 낳았다. 외국에서 못된 것만 배워왔다고, 어느 덜 떨어진 카지노 시큐가 IQ, EQ, JQ 테스트도 없이 입장을 허락하냐는 육두문자가 박의 하트 위로 겹겹이 쌓였다.
그래, 금강산도 부승관 했으니 초심으로 돌아가자. 방지 턱을 넘어 오르기를 한참, 내 연락에 두 손을 번쩍 들며 달려온 박이 하얗게 질린 인간 수레바퀴에게 물었다.
세상에, 이걸 혼자 들고 오셨어요? 여기까지 걸어오신 건 아니죠? 저희 차는요? 예? 큰맘 먹고 헐값에 파셨다구요? 기회만 되면 몰디브 드시고 모히또로 도주하신다더니 홧김에 자금을 만들어 버리신 거예요?
박은 레카 번호를 저장한 후 케이터링 박스를 들었다. 차는 제가 알아서 할게요. 천천히 오세요. 오늘 하루 길어요. 반 코마 상태의 팔을 안고 박의 뒤를 따랐다. 36-6번지 파란색 우체통이 붙은 철제문은 정수리로 밀었다. 인류의 진화가 퇴보한 이 순간은 우리끼리만 아는 걸로 하자. 이건 특별히 4억.
사면 전체를 둘러싼 유리창에 은은한 자연광이 내렸다. 세팅을 마친 박은 부스에서 대기 중인 스탭들에게 다가갔다. 그 옆으로 자칭 감각적 분위기 연출 전문 포토그래퍼 장이 보였다. 그는 스탭들의 서포트를 받으며 심취해 있었는데, 촬영에 몰두한 건 단지 카메라만이 아니었다.
현란하게 움직이는 장의 둔부는 ‘맛있는 피사체’를 발견했을 때에만 발현되는 극적 신호탄이었다. 일 년에 몇 없는 희귀 현상임을 최에게 미리 언질은 받았으나 실제 그 모습은 생소하다 못해 눈을 둘 곳이 없었다. 그런 특별한 날의 주인공이 보일 듯 말 듯 그들 사이를 지나쳤다.
장비가 하나둘 비껴가고 장마저 허리를 구부렸을 때, 오롯이 떠오른 얼굴에 불현듯 숨을 참았다.
라이프지 팀장의 강력한 어필로 특별 호 커버 모델까지 떠맡게 된 지훈은 난항을 예상했던 모두의 걱정을 뒤엎고 순조로이 촬영에 임했다. 자연스러운 시선 처리와 몸짓은 여느 기성 모델과 다르지 않았고 카메라 렌즈의 미세한 변화에도 예민하게 반응할 줄 알았다.
상냥하되 매혹적이며, 부드럽지만 아찔해야 하고, 또 그것들이 표면 직접적으로 드러나지 않아야 한다는 광기 오더에도 지훈은 무리가 없었다.
촬영은 처음이라면서 너무 우리 쪽인데? 몰래 투잡 뛰는 거 아니에요? 장의 말에 스탭들도 동조했다. 지훈은 웃음을 참으며 습관처럼 눈을 찌푸렸다. 그 순간에도 장의 셔터는 멈추지 않았다. 프리뷰 모니터 속 지훈의 매력적인 움직임은 훗날 247/365 보고 싶은 스페셜 컷으로 종종 회자되지 않을까. 촬영 끝나면 몰래 샤악- 해서 샤아악- 해야지.
……눈 마주쳤다. 굼뜬 다리가 조형 나무 뒤로 숨었다. 눈은 가렸으니 거의 다 된 거나 다름없다. 그렇다고 가로로 임팩트 있는 몸뚱이가 가려지는 건 아니었다. 원거리 아이컨택부터 망할 조짐이었다. 쥬시 후레시 어쩌고 아이컨택이나 오지게 망해버리라는 부승관의 저주가 불쑥 떠올랐다.
예상했던 것보다 보는 눈이 많습니다. 거짓말 반 젓가락 보태서 금요일 저녁 7시 신촌 유플렉스 급이거든요. 카페인이 필요한 스탭 한 무더기를 이끌고 돌아온 박이었다. 사무실에서부터 프로의 길에 적극 동참하겠다던 서포터 박이 내 눈을 동그랗게 가리켰다.
― “죄송한데 동공이 하트세요.”
― “빛의 반사 때문에 그래요.”
― “계신 곳은 그늘이거든요.”
― “착시 현상?”
― “문과세요?”
뼛속 문과 철학과 출신 박이 스탭들의 커피를 따랐다. 그들은 오늘 날씨가 어떤지, 보면 볼수록 지훈 씨 예쁘지 않은지, 대한민국 국민 중 열에 여덟은 듣는다는 ‘부승관의 카스테라’에서 강원도 겨울 벚꽃 입장권을 준다는데 어떤 사연을 보내야 뽑힐지 등 오래 만난 친구처럼 격한 수다를 떨었다. 그들이 멀어지고 나서도 박은 꾸준히 말이 많았다.
― “지금 뭐 하세요?”
― “커피 괜찮죠?”
― “지훈 씨가 이쪽 보니까 제 뒤로 숨은 거잖아요?”
― “저도 겨울 벚꽃 여행 가고 싶은데 하루에 네 번 차였다고 사연 보내면 얻을 수 있을까요?”
― “말 돌리시네요?”
― “조랑말이요?”
― “조랑(저랑), 말장난하고 싶으신 거예요?”
― “왼쪽 어깨 올려주세요.”
본분에 충실한 프로는 게 눈 감추듯 사라지고 어느 남정네 등에 붙어 멜로 눈깔만 겨우 숨기는 멍청이만 남았다. 프로 같은 소리는 시고르자브종한테 줄 걸 그랬어. 아무리 생각해도 흰둥이 - 숭늉 - 모닝빵 - 하얀 오목눈이의 인격체를 비즈니스로만 대하는 건 너무 가혹한 일이야. 조만간 ‘안고싶병’에 걸려 시름시름 앓다가 시골 가마솥 시래깃국에 찰파닥 말려질지도 몰라.
(호기심 많은 흰둥이.gif)
(순간 포착 세상에 모닝 숭늉.jpg)
(지훈 식용 안 된다면 왜 빵 모양.jpg)
(새소리 가요 대제전 대기실에서 목 푸는 하얀 오목눈이.kijul)
이것 봐.
미칠 것 같다고.
― [야, 그러지 말고 프론지 뭐시긴지 이쥰이랑 사귀는 티 안 내기 성공하면 오빠가 숭어 한 사발 멋지게 쏜다.]
이대로 숭어 꼬리에 뺨 맞고 잡탕 매운탕에 대선 병나발 기울 각인 거 맞지. 어렵게 한국까지 왔는데 자연산 숭어 정도는 품어봐야 하지 않을까. 부승관 잠 팔아서 번 돈 한큐에 탕진 시켜 봐야 지루한 인생 회 떠 먹고 재밌게 살았다고 비석에 유언이라도 새기지. 그래, 까놓고 말해서 뻔뻔히 고개 쳐드는 게 어려운 것도 아니고 말이야.
……어, 뭐야.
이지훈 오지 마.
직진하지 마.
아니야! 여기 아니야!
― “안녕하세요.”
가히 겨울에 핀 벚꽃이었다. 지훈은 여럿 죽이는 눈웃음으로 스탭들을 지나쳐 내 앞에 다다랐다. 자켓 한쪽을 내려 입는 버릇에 미치는 줄도 모르고 그가 손을 내밀었다.
― “오랜만이네요.”
그렇다. 오늘의 목표는 프로 of 프로. 들숨에 ‘공과 사’를, 날숨에 ‘이지훈 씨’를 뿌려보자. 냉철함과 뻔뻔함으로 다져진 사회생활 짬빠를 걸어 보기로 했다. 널리 이롭게 알리는 홍익 인간의 이념을 받들어 8282 코리안 자주적 정신으로 단번에 이겨주마.
박은 담배를 핑계로 없어진 뒤였다. 오른손에 얼음 주걱을 쥐고 그를 사납게 노려봤다. 아, 너무 노려보면 용맹한 고구려인의 직손 같으니 조금만 느슨하게.
― “저도 주세요.”
― “(뭘요? 제 마음을요?) 커피요?”
― “코코아.”
……말리지 말자.
― “(제주도 자연산 숭어 두 마리를 생각해) 지훈 씨도 잘 지내셨죠?”
― “덕분에요.”
― “(그런 식으로 예쁘게 웃지 말아줘) 촬영은 괜찮으세요?”
― “재밌어요.”
― “(나도 네 얼굴이 제일 재밌어) 시간 많이 뺏지 않도록 최대한 조절해 볼게요.”
― “오후 촬영도 오세요?”
― “(끝나고 너희 집에서 야식도 함께 먹기를 대단히 희망합니다) 네.”
― “오늘은 말이 별로 없다.”
― “(들키면 3억! 들키면 3억! 들키면 3억!) 좋은 분위기 망치지 않게 조심해야죠.”
― “그쪽 있으면 항상 좋긴 해요.”
그때도 덕분에 인터뷰 편하게 했잖아요. 일할 때 좋았어요. 심장이 목구멍에서 골반까지 번지 점프를 했다. 주변에서 커피를 마시던 스탭들의 호기심이 한곳에 꽂혔다.
― “제 인터뷰 스타일 좋으셨나 보다.”
― “그러게요.”
― “좋은 인상을 남길 수 있어서 저도 영광이네요.”
― “말투 뭔가 처음 들어본다.”
― “업.무.중.이.라.서.”
― “나쁘진 않네요.”
멀리서 들리는 장의 부름에 스탭들이 멀어졌다. 지훈은 고개를 돌려 작게 웃었다. 등잔 밑이 어둡다더니 적은 아주 가까이에 있었던 거라. 유리창을 넘은 볕이 뺨에 어릴 때, 지훈은 문득 턱 끝으로 손가락을 가리켰다. 내내 그의 표정에 자리한 여유로움이 묘하게 흐트러진 것도 바로 그때였다.
― “반지, 있지 않았어요?”
실내로 돌아온 박이 잽싸게 몸을 돌려 큰 보폭으로 나갔다. 눈치가 더럽게 빨랐다. ‘싱글’과 ‘자유로운 연애’에 예민한 그가 눈짓으로 대답을 채근했다. 내 손가락은 애매한 인중을 긁었다.
비밀 연애는 증거 인멸이 중요한 법. 디자인은 달라도 커플링의 아우라는 타인의 눈에 뻔하다. 노후 연금 타려면 멀었고 3억을 토해낼 자신이 없는 월급쟁이는 비밀 계약에 누구보다 진심이었다.
― “저한테 반지가 있었나요? 금속 알레르기 있어서 안 껴요.”
― “어제까지 있었던 거 같은데.”
― “없어요.”
― “있는데 없어요?”
― “아니요. 없어요.”
― “있었는데 없어요?”
― “그냥 원래 없어요.”
지훈은 국제 날치기에 여권을 잃어버린 사람 같았다. 공항 구석에서 웃다가, 게이트 주변을 방황하다가, 라운지에 앉아 혀로 볼 안쪽을 둥글게 쓸다가, 결국 허탈하게 미소 지으며 자신의 분신과도 같은 여권을 회상하는 잘생긴 여행객 말이다.
― “되게 윤정한 같다.”
― “칭찬 감사합니다.”
― “열 번 말하면 아홉 번 안 듣고 하지 말라는 한 번은 꼭 하잖아.”
― “안부 차 전달해 드릴게요.”
― “닮지 않아도 될 것만 정확하게 닮았어.”
백두산 호랑이 굴도 아닌데 어깨가 조금씩 움츠러드는 이유는 고의로 신발 앞코를 부딪치며 나를 구석으로 모는 잘생긴 여행객 때문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케이터링 테이블 뒤편은 스테이지에서 보이지 않는 완벽한 사각지대. 허탈하게 웃는 순간부터 주변을 살피더라니 공간 보고 있던 거였구나. 직업을 이렇게도 쓰는구나. 이지훈 너 고소할 거야.
― “그래서 연애할 사람은 골랐어?”
……
― “누군데?”
오른쪽으로 몸을 틀면 다리에 막혔고 왼쪽으로 고개를 돌리면 널따란 어깨에 막혔다. 공공을 위반하는 반말과 두근두근 방지법을 어기는 초근접 거리는 경고 감이었는데, 이러한 침묵에 더 미쳐 날뛰는 건 여권처럼 제 애인을 잃어버린 지훈이었다.
― “뒤지면 다 나와.”
― “집착하시는 거예요?”
― “당연하지.”
― “몇 명인지 세어 보진 않았지만 취향은 대략 다섯 명 정도?”
― “계약 안 해. 3억 너 가져.”
― “정말요?”
― “오늘 촬영 취소야. 스케줄 엎고 너랑 구청 갈 거니까.”
혼인 신고하자는 말을 구청 가자고 돌려 말하는 귀염둥이를 어떡하면 좋을까. 지훈아, 나야 뭐 항상 준비되어 있다구. 도장도 새로 팠어. 언제 어디서 너와 새로운 결실을 맺게 될지 모르잖아. 그런데 이 좋은 순간에 왜 하필 박이 달려오는 거지? 눈치 있게 사라져. 삼 초 센다.
하나!
두울!
지훈 씨, 갑자기 왜 그러세요? 스트레스 받으세요? 간지러우세요? 얼굴이 너무 빨간데요? 알러지 아니에요? 뭐 드셨어요? 코코아? 몸에 안 받는데 억지로 드셨어요? 메이크업 팀 비상이요!
픽서와 파우더를 들고 나타난 무리가 단숨에 지훈을 둘러쌌다. 뺨이 붉다는 이유만으로 수정 메이크업만 옴팡지게 받은 그는 2차 촬영을 위해 의상 부스에 갇혔다. 자유로운 연애에 할 말 많던 이지훈 씨는 결국 무방비한 산업 현장으로 또다시 내던져지고야 말았다.
둘이 너무 가깝던데요? 사각지대 아니었으면 큰일 날 뻔했어요. 박은 서포터의 히어로라 자칭하며 자신이 아니었다면 알래스카 동쪽 시베리안 허스키 둘째도 둘의 재회를 알았을 거라 너스레를 떨었다. 죽마고우 승관 이후 처음으로 엉덩이를 걷어차 주고 싶은 인물이었다.
단체 컷을 위해 도착한 K건설 설계팀 일부 직원들을 환영하며 박이 스튜디오를 안내했다. 지훈의 특별 호 인터뷰 페이지 분기점을 나누는 두 장의 삽입이었음에도 포토그래퍼 장의 열정은 식을 줄 몰랐다.
더 가까이!
더!
그래, 식지 않은 게 문제였다. 새해 설날 맞이 대가족 사진도 아닌데 자꾸만 가까이 모이란다. 거래처 미팅으로 바쁜 설계팀 팀장 대신 자리를 차지한 단발머리 직원은 미친 포토그래퍼의 끔찍한 요구대로 지훈의 팔을 감아 당겼다.
둘 너무 좋다!
우리가 웨딩 촬영도 한다고 말했었나?
모든 건 망할 포토그래퍼 때문이었다. 눈짐작을 때려도 지훈과 그녀의 사이는 분명 45cm 이내였다. 무릇 연인 사이에만 허용되는 특별한 간격이란 말이다. 프리뷰 모니터 옆에서 그들을 바라보며 인중을 박박 긁었다. 박도 덩달아 내 속을 긁었다.
― “다들 인물이 훤해서 잘 나올 것 같아요. 팀장님도 좋아하시겠죠?”
― “(시베리아 열차 타다가 창문 뜯겨진 기분이니까 말 걸지 마세요) 네.”
― “인중은 왜 그러세요? 진짜 알러지 아니에요?”
― “(이판사판 인중판 열리기 전에 고약한 질문을 멈춰주세요) 우리 밥 언제 먹어요?”
K건설 기둥들의 환한 웃음을 끝으로 스튜디오 촬영이 갈무리되었다. 부스에서 옷을 갈아입고 나온 지훈은 설계팀 직원들과 둘러 이야기를 했다. 이따금 우스갯소리가 나올 때마다 단발머리는 지훈의 등이나 팔뚝을 터치하며 웃었다. 박은 케이터링 박스를 정리하며 애매한 표정으로 서 있는 내게 말했다.
― “점심은 한식당에서 하기로 했어요.”
― “네.”
― “지훈 씨 아무한테나 넘어갈 성격은 아니죠.”
눈치 빠른 서포터가 스크래치 난 눈썹을 까딱거리며 밖으로 나갔다. 박의 말마따나 지훈의 기질은 마치 ‘순 우유에 퐁당 빠진 고추냉이 케이크’. 유순한 외형에 감춘 짜릿한 화끈함이 매력적인 남자는 그 불순한 터치를 곧이곧대로 받아줄 위인이 아니었다.
전직 주니어 야구 포수는 적절한 타이밍에 각도를 틀어 거부의 시그널을 날렸다. 허공에서 민망해진 단발머리 손은 그 뒤에도 몇 차례 헛방을 당한 후 조용히 물러났다. 아예 반대로 자리를 옮긴 지훈은 자신의 휴대폰을 만졌다. 문자 진동이 울렸다.
[내 차 타고 가]
……
[뒷문에서 만나]
후발대로 합류한 그린 에이지 촬영 팀이 스튜디오 정문 앞에서 박을 태웠다. 장비가 있어서 저까지만 탈게요. 지훈 씨한테는 제가 미리 얘기했어요. 같이 타고 오시면 돼요. 이따 식당에서 봬요. 까만 스타렉스가 언덕길을 내려갔다. 장과 스탭들, K건설 팀원들이 각자 차량에 올랐다. 가방을 정리하며 뒷문에서 그를 기다리는데 단발머리가 앞을 막았다.
― “예전에 지훈 씨 만난 적 있다면서요?”
― “…….”
― “지금은 아니죠?”
언젠가 고온 다습하지 않아 헤어졌다는 말이 돌고 돌아 변방까지 들린 모양이었다. 지훈의 반지를 언급하며 어떤 사람을 만나는지, 어떤 스타일을 좋아하는지, 혹 빈약한 외형을 좋아하는지 세 번 덧댄 최의 아이라인보다 진한 눈꼬리가 내 가슴을 훑었다. 왠지 시애틀 기념품 샵에서 산 FUCK YOU 티셔츠를 입고 싶더라니.
언덕에서 내려온 벤츠가 갓길에 멈췄다. 어울리지 않는 투 샷에 고개를 갸웃거리며 운전석 창문을 내렸다. 단발머리가 수줍게 웃더니 벤츠 조수석을 꿰차며 말했다.
저희 차 만석이라 여기 타고 가도 돼죠? 멀미 심해서 앞에 탈게요. 지훈은 한숨을 쉬며 브레이크를 걸었다. 그 모습을 보고 있다 확신의 인중을 살살 긁으며 운전석 문을 열었다. 그가 당황한 듯 동그랗게 눈을 떴다. 대놓고 어울리지 않는 투 샷에 조바심을 내 거나 며칠 동안 속을 앓기엔 이미 난 산전수전 다 겪은 신파극 인생 2회차라서.
― “지훈 씨, 나오세요.”
……
― “벤츠 운전은 처음이라 떨려.”
대기업 회장님 석에 앉은 지훈은 5초마다 웃음을 참았다. 시속 80을 넘지 않는 세이프 드라이버는 곧 10년 경력 무사고 정한을 뒤이을 인재였다. 창문에 머리를 박은 단발머리는 식당에 도착할 때까지 움직이지 않았다. 그녀 대신 신이 난 건 오랜만에 게임에 몰두한 이 회장님이었다.
― “이거 눈만 깜빡이면 올라와.”
지훈의 무신경과 나의 뻔뻔함이 이룬 콜라보에 단발머리는 식당에 도착하자마자 실내로 사라졌다. 지훈은 부서를 통틀어 미혼 남자들에게 추파를 던지는 문어발이라며 그녀를 소개했다. 다시 말해 신경 쓸 존재가 아니라는 뜻이었다.
차 키를 뽑아 지훈에게 건넸다. 운전 값이라는 핑계로 볼에 입술을 찍고 내린 차주는 주머니에 두 손을 꽂고 천천히 걸었다. 원체 걸음걸이가 빠른 그가 속도를 늦추는 이유는 단 하나.
― “발 안 아파?”
……
― “운동화 트렁크에 있는데.”
볼 뽀뽀는 재량으로 넘어가기로.
* * *
미식가 장이 엄선한 한식집에 모인 스탭들은 좌식 테이블 네 개를 붙여도 밀집도가 높았다. 지훈과 K건설 직원들을 포함한 주요 스탭들이 중앙 테이블에 앉아 형식적인 덕담을 나눴다. 앞에서 냉수만 홀짝이던 단발머리가 지훈의 눈치를 봤다. 이번엔 틈새 공격으로 전략을 바꾼 모양이었다.
다음 달 개봉할 영화에 신민아가 출연한다더라, 만인의 첫사랑 역으로 나온다던데, 내 입으로 말하기 쑥스럽지만 신민아 닮았다는 소리 종종 듣는다 따위의 코끼리 지푸라기 똥 싸는 소리였다.
시큰둥할 줄 알았던 지훈은 의외로 단발머리를 끝까지 경청했다. 신민아 닮은 꼴이라는 자화자찬에 심지어 턱을 괴고 고개를 끄덕거리기까지 했다. 종잡을 수 없는 오묘한 표정으로 눈을 떼지 않자, 이상한 우주로부터 힘을 얻은 그녀가 과감히 데이트 신청을 했다. 지훈은 심드렁한 얼굴로 벽에 등을 기댔다.
― “그날 약속 있어요.”
― “아직 날짜도 모르잖아요?”
― “모르는데 약속은 있을 것 같아요.”
― “약속 없는 날에 만나면 되죠?”
― “앞으로도 쭉, 계속 있을 것 같아요.”
전설의 이과 언어 1등급에게 박수를, 차마 대놓고 웃지는 못하고 고개만 숙이는 K건설 식구들에게 확장 스피커를 달아보자. 자리에서 일어난 지훈은 식당 밖으로 나가 전화를 받았다. 아무개에게 차인 전적만 수두룩할 단발머리가 대낮부터 소주를 깜으로써 오후 촬영에는 그녀의 부재 확률이 높았다.
― “꽃게탕은 이 테이블에만 있다길래.”
……
― “엄청 좋아하잖아요, 저.”
통화를 마친 지훈은 내 옆을 비집고 들어오다시피 방석에 엉덩이를 붙였다. 옆으로 가주세요. 부대끼는 짓은 죽어도 싫어하면서 굳이 좁은 구석을 차지한 채 앞접시를 챙기는 이유를 이해할 수 없었다. 조금만 비틀어도 무릎과 무릎이 닿는 치열한 틈의 예민한 이지훈이라니. 차라리 시원한 음식 먹고 싶어서 시장에 오이냉국 사러 간 부승관을 믿지, 안 그래?
― “첫 끼라 안 들어갈 줄 알았는데 다 들어가네.”
이지훈이 꽃게를 ‘엄청’ 좋아한 다라. 지나간 식사를 되짚어봐도 갑각류에 환장하는 캐릭터는 아니었다. 껍데기 자체를 귀찮아하는 대쪽 같은 성격은 해물 탕 제철 꽃게는 고사하고 새우도 그냥저냥 뚜껑에 옮기기 바빴다. 그렇게 엄청 좋아한다더니 지금도 국물이나 건더기를 떠먹는 정도였다. 알다가도 모를 그였다.
식사 말미에는 단발머리가 실려 나갔다. 보기와 달리 소량의 알콜에도 취약했다. 마지막까지 비틀거리며 지훈에게 안기고 싶었던 수작은 보다 못한 박이 저지했다.
지훈은 콜택시를 불렀다. 후불제였고 모범이었다. 머리 좋은 그가 많은 힘을 들이지 않고도 멀리 보내 버리는 효율적인 방법이었다. 식사를 끝낸 지훈은 알게 모르게 반찬을 내 앞으로 밀었다. 누가 후불제로 실려 가든 말든 깨작거리며 저작 운동 중인 자신의 담당자에게 꽂혀 있었다.
― “뭘 그렇게 보세요?”
― “멍 때리는 거죠.”
― “왜 절 보면서 하세요?”
― “집중 잘 돼요.”
― “제가 매직아이인가요?”
― “그럼 계속 봐도 돼요?”
여러분, 얘가 나 꼬셔요. 마지막 말은 진심으로 속삭였거든요. 눈짓으로 막 엉겨 붙는데 이거 흔히 말하는 멜로 눈깔 맞죠. 완전 불건전한 시선 맞는 거죠. 빛의 반사도 없고, 굴절도 없고, 하물며 착시 현상도 없으니 저 하트 동공은 진짜라고 결론 내려도 되겠죠. 그럼 이제 나긋하게 흘려볼까요.
― “지훈 씨.”
― “응, 네.”
― “경고 1회요.”
― “왜죠?”
― “멜로 눈빛 금지요.”
― “방금 사막이지 않았어요?”
진지하게 뱉는 사막 공격이라니. 지훈은 믿을 수 없다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좀 난감하다. 어떻게 그렇게 보지. 시력 검사 안 해요? 한 지 오래된 것 같은데. 당황하면 말이 빨라지는 습관을 여과 없이 보이며 공과 사를 아슬하게 넘는 그가 ‘매우 당황’의 신호인 귀끝을 손가락으로 만지작거렸다.
정점을 찍은 건 내 립 자국이 난 물컵을 그대로 마시며 흥분을 가라앉히는 것. 그런 그를 목격한 박이 충격적인 눈알로 납작 엎드려 물었다.
지훈 씨 결벽증 아니었냐고.
타인의 몸에 닿기만 해도 질색하고, 장난이랍시고 오는 터치에도 민감하고, 인터뷰 중간 식사 자리에서도 본인 식기 이외는 거들떠보지도 않은 사람인데 대체 어떻게 된 일이냐고.
글쎄.
박이 아는 지훈과 내가 아는 고온 다습은 많이 다르지.
― ‘몇 시야 지금. 회식이라도 주는 대로 다 마시지 말라고 몇 번을 말해.’
……
― ‘도어락은 아홉 번 만에 열어서 다행이긴 한데.’
술 취해 방바닥에 누워 있으면 때 탄 양말도 벗겨 주고 (옷도 막 벗겨 주고), 내키진 않지만 치카포카 양치도 시켜주고, 잠결에 목 마르면 물도 떠주고, 일어나면 눈곱도 떼 주고, 다음날 해장 전에 산발 머리도 서툴게 묶어 주는 고온 다습 다정이인데 사람들은 대체 어느 부분에서 그를 오해하는 건지.
― ‘이런 걸 너 아니면 어디서 하겠어.’
……
― ‘아, 머리 자꾸 삐져나와. 감긴 한 거야?’
.
.
.
― “무슨 생각 하세요?”
― “네?”
― “지훈 씨 일 있다고 아까 전에 나가셨어요.”
박은 영수증을 뒷주머니에 넣고 박하사탕 두 개를 한입에 굴렸다. 이럴 땐 당황하지 않고 쿨해야 한다. 전혀 상관하지 않는 듯한 밤거리 도시인만의 그 비릿한 쟈가움 알지.
― “얼마나 서운하시면 지훈 씨가 먹은 밥그릇만 보고 계시는지.”
― “오해입니다.”
― “그렇다고 할게요.”
게슴츠레한 눈으로 겨울 같지 않은 쨍한 한낮을 바라보고 있을 때, 식당으로 돌아온 촬영 팀 막내가 다가왔다.
밖에서 지훈 씨가 전해 달라고 하셨어요. 급한 회의 있어서 먼저 가신대요. 투명 플라스틱 포장 백을 건넨 막내가 총총 사라졌다. 그 안에는 내가 좋아하는 샌드위치가. 최근 인별 감성 샷 핫플레이스로 떠올라 줄을 서지 않으면 살 수 없게 되어 버린 그곳에서.
― ‘앞으로도 쭉, 계속 있을 것 같아요.’
애초부터 원천 봉쇄 차단으로 막아버리고.
― ‘옆으로 가주세요.’
모서리에서 밥 먹는 걸 끔찍하게 싫어하는 날 알고.
[샌드위치 무럭무럭 먹고 많이 자라자]
이젠 오묘한 도치법이 취미인 나를 따라하기도 하고.
이지훈만의 공과 사 스타일에 빠져 죽고 싶었다. 스타렉스 뒷자리에 낑겨 장비 더미에 묻혀도 좋았다. 그런 지훈에게 반한 건 나뿐만이 아니었다. 그에게 뿌리지도 않은 시원한 아쿠아 향이 나는 것만 같다는 박의 미친 소리에 오늘만큼은 고개를 끄덕이기로 했다.
― “선을 넘는 듯하면서도 넘지 않는 그 짬빠를 저도 배우고 싶네요.”
― “본사로 오실래요? 일대일 전담 마크 가능해요.”
― “과외 해주시는 거예요? 멋져요.”
― “갑자기 칭찬 모드?”
― “지훈 씨가 인성 파탄 동료와 마찰 없이 일하는 법을 알려주셨거든요. 눈치가 생명이라고 하셨어요.”
― “혹시 ‘생각 의자’라고 들어보셨어요?”
― “지훈 씨가 그것도 조심해야 한다고…….”
.
.
― ‘탄수화물이 부족하면 부작용으로 그 친구 인성이 도망가는데 그때 ‘생각 의자’ 권유는 반드시 피해야 합니다. 제가 지금은 웃으면서 말씀드려도 그곳은 갈 곳이 절대 못 되거든요. 전 좋아한다는 말만 정확히 오백 스물두 번 하고 풀려났으니까 대충 무슨 집착인지 아실 겁니다.’
.
.
.
― “그리고 또….”
― “또?”
.
.
.
― ‘아까 보니까 밥 잘 안 먹던데 평소에도 그래요?’
― ‘스트레스 받으시면 아예 안 드실 때도 있어요.’
― ‘최근에 밖에서 뭐 좋아하는 거 있어요?’
― ‘저번에 샌드위치 드시는 거 봤는데 거긴 라인업 길어서…….’
― ‘기다리는 게 뭐 별거라고.’
……
― ‘주소 문자로 주세요.’
.
.
.
[훈]
[뭐해]
[지금 오는 중?]
[너한테 가는 중]
[샌드위치 모야 ㅠㅠ 잘 먹을게]
[오후 촬영도 금방 끝내 줄게 ㅠㅠㅠㅠ]
[보고 싶어]
(굳이 말로 안 해도 본인도 대충 같다는 뜻.gif)
Epilogue.
촬영은 처음이라면서 너무 우리 쪽인데? 몰래 투잡 뛰는 거 아니에요? 장을 돕던 스탭들이 동조했다. 지훈은 웃음을 참으며 습관처럼 눈을 찌푸렸다. 그 순간에도 장의 셔터는 멈추지 않았다. 프리뷰 모니터 속 지훈의 매력적인 움직임은 훗날 247/365 보고 싶은 스페셜 컷으로 종종 회자되지 않을까. 촬영 끝나면 몰래 샤악- 해서 샤아악- 해야지.
Q. 이때 모니터로 너 보고 있었는데 몰랐지?
A. 왜 몰라. 난 너 보고 웃은 건데.
+
Q. 지훈 씨, 아까 계약서 사인할 때 도대체 어떤 펜을 원하셨던 거에요? 골라 주세요.
A. 애초에 펜을 원한 게 아니라서 이런 거 다 줘도 안 써요 ㅎㅎ
COMING UP NEXT
― “여주 씨, 남자 친구 있어요?”
― “제 별명 참 솔로.”
― “주변에 좋은 놈 하나 있는데 소개해 드려요?”
― “번호 지금 드릴까요?”
이지훈 / 지나가던 참 솔로 남자 친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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