華 : 빛날 화 不 : 아닐 불 再: 두 재 揚 :날릴 양
꽃은 다시 매달 수 없다는 뜻으로, 한 번 떨어진 꽃을 다시 붙일 수 없듯이 흘러간 세월은 다시 돌아오지 않음을 이르는 말.
00. 관계성립
넓은 소파에 혼자 앉아 티비를 보는 척 문틈 사이로 그의 행동을 주시했다. 방 안에서 겉옷을 걸치고 거울로 자신의 모습을 정리하는 것을 보니 이 늦은 시간에 집을 나서려는 듯한 그의 행동이 못마땅한듯 미간을 찌푸리는 여주였다.
“ 나 오늘 늦을 거 같아 기다리지 마 “
“ 누가 기다린대? “
“ 아니다, 그냥 기다려 “
쾅. 적막 사이에 몇 마디가 오고간 후 쾅 하고 문이 닫혔다. 바람인지 아님 일부러 세게 닫은 건지 여주의 심기를 건들였다.
한 집에서 같이 사는 그와 여주를 본다면, 모두 연인으로 생각하겠지만 둘은 그렇지 않았다. 서로 주고받는 대화나 눈빛에서 연인 사이의 다정함 따윈 찾아볼 수 없었고 연인일 리가 없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었다. 그의 기다리라는 말을 끝으로 문이 닫힌 후 여주는 쾅 하고 닫힌 문을 보며 멍을 때린 것도 잠시, ‘내가 지를 왜 기다려’ 바로 일어나 옷도 갈아입지 않은 채 집을 나서는 여주였다.
“ 문 좀 열어줘요 “
“ ..... “
도어락 소리가 들리며 현관문이 열렸고, 문을 열어보니 얇은 옷차림의 여주를 보곤 당황하는 남자였다.
여주를 두고 나가버린 그와는 사뭇 다른 따뜻한 분위기를 풍기는 남자는 갑작스레 찾아온 여주에 당황했지만 얇은 손목을 잡아당겨 여주를 집으로 들였다.
“ 많이 놀랐나봐요. 그런 표정은 처음 봐 “
“ 어... 무슨일이예요? “
“ 그냥 “
“ .... “
“ 그냥 좀 허전해서요 “
단지 허전해서 이 늦은 밤 혼자 사는 남자집에 다짜고짜 찾아 온 여자를 보고 당황스러움은 숨겨지지 않았다. 몇 마디를 나누곤 제 집 마냥 거실 소파에 앉아버리는 여자에 기가찼다. 현관에 대충 벗어놓고 간 여주의 슬리퍼를 가지런히 정리하곤, 여주의 옆에 거리를 두고 앉는 남자였다.
“ 시간 늦었는데, 오빠가 걱정 안 해요? “
“ ..오빠? 무슨? “
“ 같이 사는 남자.. 친오빠 아니었나.. “
“ ..... “
“ 아니면 미안해요. 제가 오해했나봐요 “
“ 내가 걔보다 어리게 생겼어요? “
“ 키 차이가 많이나서 오빠인 줄 알았어요. 얼굴을 자세히 못 봐서 “
“ 아, 친오빠 맞아요 “
“ 다행이네요 제가 오해한 줄 알았어요 “
허, 걔가 오빠라니 잔잔한 목소리로 오빠가 아니냐는 남자의 말에 속으로 허, 하곤 헛웃음이 나오는 여주였다. 사실 한 집에 같이 사는 그는 여주의 친오빠가 아니었다. 친오빠가 아니지만 아니라고 수습하기도 좀 그렇고, 굳이 그래야하나 싶어 이내 친오빠가 맞다며 남자에게 웃음을 보였다.
“ 근데 이름이 뭐예요? 소파도 공유했는데 이웃끼리 이름정돈 알아야죠 “
공유라... 공유라 하기엔 제 집마냥 멋대로 소파에 앉은 여주지만, 공유라 치지 뭐 하고 넘기는 남자는 여주의 눈을 빤히 쳐다보곤 곧 입술을 움직였다.
“ 김석진이예요 “
“ 석진.... 좋네요 이름 “
“ 좋은 이름이예요? “
“ 네 뭐 .. 그냥 한 말인데 “
“ 그쪽은... 여주? “
“ 엥? 제 이름 알아요? “
“ 저번에 오빠분이 부르는 거 들었어요, 김..여주랬나..? “
“ 귀도 참 밝으시네요 맞아요 김여주. “
뒤 늦은 통성명을 마친 후 서로의 시선은 티비에 집중되며 다시 정적이 흘렀다. 그 정적을 깨고 석진은 여주에게 “ 뭐 좀 먹을래요? “ 물었지만, 여주의 대답은 석진을 또 한 번 당황하게 만들었다.
“ 먹고 싶은 거 있어요? 만들어줄게요 “
“ 안주 만들어줘요 술 먹어요 우리. “
정식으로 첫 만남에, 그것도 석진의 집에서 술을 먹자는 여주의 당돌한 목소리를 듣자마자 석진은 능숙한 솜씨로 몇가지 안주를 만들었고, 냉장고에 술 두병을 꺼내어 금세 식탁 위를 채웠다.
그걸 본 여주는 소파에서 일어나 부엌으로 향했고 반짝이는 눈을 보이며 우와, 요리 배웠어요? 하곤 의자에 앉아 우와 - 하는 감탄사를 보였다.
“ 배운 건 아니고 그냥 요리를 좋아해요 “
“ 우와 집에서 이런 안주는 처음인데 잘 먹을게요. 완전. “
안주에 손을 대기 전 초록 색을 띈 병을 들어 석진의 잔에 따라주고, 제 잔에 따라주며 짠 해요 짠. 잔을 한 번 살짝 부딪히곤 원샷을 보인 여주였다.
그에 석진도 잔을 비웠고 서로 가벼운 대화를 나누며 술잔을 비워나갔다.
그게 얼마나 지났을까, 몇시간이 훌쩍 지난 후 조금 해롱해롱 해진 정신을 붙잡은 건 다름 아닌 여주의 핸드폰 벨소리였다,
여주는 의자에서 일어나 비틀비틀 걸어가 소파 위의 핸드폰을 집으려 했다. 걷는 게 영 불안해 보이는 여주를 보곤 석진은 따라 일어나 핸드폰을 들기 위해 상체를 숙인 여주가 휘청하고 넘어지려는 찰나, 이럴 줄 알았다. 하고 넘어질 뻔한 여주의 허리를 잡은 석진이었다.
석진이 허리를 잡아준 탓에 서로 가까이 얼굴을 마주하게 되었고, 괜찮아요? 하고 물어보려는 석진의 입을 다급하게 막은 여주였다.
여주는 이미 전화를 받은 상태였고, 핸드폰에선 여보세요? 하는 목소리를 듣자마자 석진의 입을 막은 것이다.
“ 괜, “
“ 어, 왜? “
“.....”
“ 내가 널 왜 기다려. 밖이야
그리고 알 필요 없잖아 알아서 들어갈게 “
뚝-,
뚝 하고 끊긴 전화 화면을 보고 여주는 석진의 입술 위에 올렸던 손을 급히 치우곤 아, 미안해요 하며 제대로 자세를 고쳐잡은 여주였다.
갑자기 어두워진 여주의 표정을 보자 집에 가봐야 하지 않냐는 석진의 말에 여주는 아... 가야죠 하곤 잘 먹었다며 현관으로 나섰고 석진이 가지런히 정리해 놓은 슬리퍼를 신었다.
“ 안주 맛있었어요 아, 물론 같이 먹은 술도. “
“ 조심히 가요 “
“ 바로 옆집인데 뭘 조심히.. 다음엔 제가 대접할게요 “
간단히 인사를 하고 석진의 공간에서 나가버린 여주에 석진은 아까 전, 여주와 몹시 가까웠던 거리를 곱씹으며 나쁘지 않은 웃음을 지었고, 여주와 먹다 남은 잔을 혼자서 비우는 석진이었다.
-
“ 시간이 몇신데 이제 들어와? “
여주가 현관 문을 열자, 벽에 몸을 기대어 여주를 곱지 않은 눈빛으로 말을 건내는 그를 그냥 지나쳐 가는 여주였다.
그런 여주의 태도가 성질을 긁은 건지, 여주의 손목을 잡아 자신에게 돌아세우는 그의 눈빛은 차가웠다.
“ 옷은 또 왜그래, 그러고 이 추운 날 어딜 돌아다녀? “
“ 머리 아프니까 말 걸지마. “
그에 맞서 날이 선 여주의 말투에 그는 여주의 목에 얼굴을 가까이 가져가, 술 냄새를 맡은 표정은 더욱 더 일그러졌다.
“ 술 마셨어? 누구랑? “
“ 남자랑 “
안그래도 어지러운 머리를 부여잡고 끈질긴 그의 물음을 애써 무시하며 대충 대답을 하곤 방으로 곧장 들어간 여주였다. 쾅 하고 닫히는 문 소리 이후로 이 정적은 끝내 깨지지 않았다.
“ .......... ”
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