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빤 무슨 그런 말을 연극 보러 와서 하냐...?"
이유도 없이 이별을 고한 준만은 덩그러니 여주를 남겨둔 채, 극장을 나갔다. 야 이 준만이 새끼야, 헤어질 거면 연극 다 보고 말하던가! 주변 사람들의 눈치 따위는 보이지 않는 것인지. 떠나가는 준만의 뒷모습에 욕을 날린 여주는 그 자리에서 펑펑 울었다. 연극이 시작되기 직전까지도...
"연극 시작 전, 관객 여러분들께 안내 말씀 드리겠습니다. 휴대 전화는 무음으로 전환해 주시고..."
그리고 나갈 타이밍을 놓쳐버린 여주는 결국
"에이 씨... 연극이나 보고 가야지..."
차오르는 눈물을 진정시키고 연극을 보기로 했다. 그런데 하필 또 내용은 왜 사랑하는 청춘 남녀가 이별하는 내용인 건지...
"이제 놓아줘야 하는데, 그게 잘 안 되네."
"..."
"그래도 노력은 해볼게."
"... 흐윽..."
"... 네가 힘들면 나도 힘드니까."
"따쉬..."
연극을 보다가 결국 눈물을 흘려버린 여주다. 존만이 새끼, 아니 준만이 새끼는 연극 연출 전공 답게 청승맞은 이별까지 연극으로 연출하고 가는구나... 여주는 이를 빠득빠득 갈았다. 같은 시각,
무대 위에서 열심히 대사를 치고 있던 석진도 당황했다. 이유는 1열에서 입을 틀어막고 오열하고 있는 한 관객 때문이었다. 저렇게 울 정도로 슬픈 내용은 아닐 텐데... 막힘없이 대사를 풀어가던 석진의 동공이 살짝 흔들리긴 했지만, 금세 시선을 거두고 연기에 집중했다. 명색이 연기전공 17학번 과탑인데, 관객 한 명 때문에 첫 공연을 망칠 수 없었다.
얼레벌레 극단생활 00 : 얼레벌레 극단 입성기
공연을 끝까지 본, 아니 공연 내내 눈물을 훔쳤던 여주는 팅팅 부은 눈으로 소극장을 나섰다. 연극 때문에 꺼두었던 휴대폰에는 준만이의 연락 따위 찍혀있지 않았다. 호흡을 크게 들이쉰 여주는 소극장 옆 골목길에 들어가 크게 울부짖었다.
"이... 이 존만이 새끼... 나도 너랑 헤어지고 싶었다고!"
"내가 누구 때문에 1년 내내 아싸로 지냈는데!!!"
"이제 자유다!!!!!!!"
"..."
갑자기 등장한 여주에 놀라서 피우고 있던 담배를 떨어트린 태형이 있는 줄도 모르고, 여주는 한참을 파워풀하게 소리 질렀다. 대체로 내용은 준만이의 욕. 질투와 집착 때문에 친구를 못 만들었다느니, 쓰고 있는 작품에 관여 좀 작작하라느니, 내로남불이 조진다느니... 육두문자가 섞인 말에 인상을 찌푸릴 법도 한데, 태형은 뭐가 그리도 재밌는 것인지 실실 웃으며 여주를 바라보았다. 무대 위에서 독백하는 것 같네. 연기 전공다운 생각도 하면서.
"아, 깜짝이야!"
"..."
"언제부터 거기 계셨어요?"
"존만이 새끼랑 헤어지고 싶다고 할 때부터?"
"처... 처음부터 다 보셨구나..."
"네."
"그럼 전 이만... 시끄럽게 만들어서 죄송합니다."
통통한 마카롱마냥 부어버린 눈을 가린 여주는 짧은 사과와 함께 몸을 돌렸다. 그와 동시에 여주에게 덮여지는 태형의 가디건.
"날 쌀쌀한데 이거라도 걸치고 가요."
"네...? 괜찮은데..."
"반납은 바로 옆 소극장 티켓부스에 '김태형' 이름으로 하시면 돼요."
"아... 네... 그럼 사양 않고... 감사합니다. 전 진짜 이만..."
태형은 축 쳐진 여주의 뒷모습이 작아지는 것을 보며 저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 와 같은 원초적인 질문을 떠올렸다. 사람을 보면 분석하는 것이 습관이 된 태형다운 궁금증이었다. 어서 저 사람이 가디건을 돌려주러 왔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하면서.
-
준만과 교제하는 2년 동안 정이 많이 들었던 여주는 주말 내내 눈물을 흘리며 시간을 보냈다. 밥 먹다가도 울컥, 세수 하다가도 울컥, 잠 자기 전에도 울컥. 술을 마시고 싶은 심정은 굴뚝 같았으나, 같이 마셔줄 친구 조차 없어서 술은 마시지 못했다. 술까지 마셨다면 정말 지지리 청승맞은 전 여자친구처럼 연락을 보냈을 게 뻔했기에 오히려 잘 된 일이라고 스스로 위로했다.
월요일이 되어서야 언제까지나 이렇게 우울하게 지낼 수는 없다고 판단한 여주는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래! 결심했어. 오늘부터 나도 갓생을 살아보는 거야!"
"친구도 만들고, 멋진 새애인도 만들고, 커리어도 쌓으면서!"
"그렇게 이 시대의 빛나는 대학생이 되어보는 거지!"
양 주먹을 꽉 쥐고 고개까지 끄덕인 여주는 개운한 마음가짐으로 샤워를 마쳤다. 그리고는...
"음... 근데 뭘 해야 하지?"
벌써부터 첫 난관에 봉착했다. 뒷목을 긁적이던 여주는 불현듯 이별을 겪은 날, 의문의 남자에게 빌린 가디건이 떠올랐다. 그래, 그 가디건 먼저 돌려주고 오자. 주인이 애타게 기다리고 있을 지도 모르잖아. 갓생을 살기로 결심한 여주가 정한 첫 번째 계획은 '남자의 가디건 돌려주기'였다. 마음만 같아서는 이별을 겪은 그 장소로 가고 싶지 않았으나, 가디건을 빨리 돌려주는 게 예의이므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티켓 예매하러 오셨어요?"
"아... 그..."
"오늘은 7시 연극 있는데, 그걸로 몇 장 드리면 될까요?"
"그게 아니라... '김태평' 씨 가디건 돌려 드리러 왔는데요."
"태평 씨...?"
"...?"
"혹시 태형이...?"
"아, 네! 태평 씨가 아니라 태형 씨... 태형 씨 가디건 가져다 드리러 왔는데..."
아~ 태형이 가디건 빌려가신 분이구나. 저 주시면 돼요. 여주는 고개를 끄덕이며 태형의 가디건을 호석에게 건넸다. 태형이 '조금 특이하신 분이 가디건 들고 오면 받아줘.'라고 말하긴 했으나, 호석은 여주가 특이하기 보다는 살짝 귀여운 쪽이라고 생각했다. 그런 호석의 생각을 알 리 없는 여주는 뚫어지게 자신을 쳐다보는 상대방의 시선에 멋쩍게 웃어보였다. 내 얼굴에 뭐가 묻었나... 생각하면서.
"여주?"
여주와 호석이 티켓부스에서 알 수 없는 눈싸움을 하고 있던 찰나, 극장 문을 열고 나온 남준은 의외의 인영에 저도 모르게 여주의 이름을 외쳤다. 그 부름에 호석과 여주의 시선은 남준에게로 돌아가고, 그렇지 않아도 큰 여주의 눈은 두 배로 커졌다.
극작과 2학년이었던 남준은 제비뽑기에 걸려 억지로 스파이를 담당하게 됐고, 이 사실을 미처 몰랐던 새내기 여주는 하필이면 남준과 OT, 각종 술자리에서 붙어다녔다. 남준이 스파이임이 밝혀지자 마자, 여주는 자연스럽게 남준과 멀어졌고 남준은 2학기가 되자마자 영화과로 홀라당 전과를 해버렸다. 뒤늦게 정신차린 여주가 친구를 만들기 위해 주변을 둘러 보았을 땐, 동기들은 이미 무리가 형성된 후였다.
그래, 여주가 아싸였던 이유는 준만이의 탓도 있었지만, 어찌보면 남준의 탓도 있었다.
"아니, 이게 누구야. 나 버리고 홀라당 전과하신 김남준 선배님 아니세요?"
"넌 오랜만인데도 그 소리니..."
"오랜만이라 반갑긴 한데, 선배님 덕분에 아싸가 된 저를 생각하면..."
"주... 준만이랑 헤어졌다며?"
그렇잖아도 여주에게 항상 미안했던 남준은 다급하게 여주의 입을 제 말로 틀어막았다. 하필이면 여주의 아픈 구석으로... 남준은 제가 말을 뱉어놓고도 놀라서 양 손으로 제 입을 막았다. 티켓 부스에서 상황을 파악하던 호석도 입을 떠억하고 벌렸다. 정작 사건의 당사자만 아무렇지 않은 모습이었다.
"그... 미안."
"아뇨, 괜찮아요. 사실인데요. 뭐! 그럼 전 볼일 끝났으니 이만."
안녕히 계세요! 고개를 꾸벅 숙여 인사를 한 여주는 지하 소극장 건물에서 나왔다.
사실 여주는 아무렇지 않은 게 아니라, 꾹 참고 있었던 거였다. 주말 내내 청승맞게 울었으면서 또 울고 싶지 않아서. 오늘부터 준만이 따위 잊고 갓생 살기로 다짐 했으니까, 꾸욱 참은 거였다. 이를 모를 리 없는 눈치 빠른 호석이는 남준에게 어서 빨리 여주를 쫓아가라고 눈빛을 보냈고, 남준은 허겁지겁 따라 나섰다.
"씨이... 오랜만에 만났는데 정곡을 찔러?!"
남준은 제 앞에서 축 쳐진 자세로 걸어가는 여주를 보고 제 머리를 헝클였다. 이 놈의 입이 방정이지. 남준은 조심스럽게 여주의 이름을 부르며 다가갔다. 그 소리에 여주는 화들짝! 놀라버렸다. 방금 중얼거린 남준의 욕이 들렸을까 걱정되었기 때문이다.
"어, 선배... 하하. 왜 부르셨어요?"
"여주야, 나랑 같이 극단 하지 않을래?"
"네?"
"준만이가 너 외부 활동 못하게 했었잖아. 이제 헤어졌으니까 나랑 극단 활동 해보자고."
"아..."
그래서 나랑 준만 오빠 헤어졌냐고 물어본 거구나.
여주는 방금까지 남준의 욕을 하던 자신 스스로를 나무랐다. 그래, 남준 선배가 비록 날 버리고 전과하긴 했어도 착한 사람인데 느닷없이 공격할 이유가 없지. 어떻게든 상황을 무마하기 위해 말을 꺼낸 남준의 의도는 알아채지 못한 여주가 남준에게 감동의 눈빛을 보냈다. 그 눈빛을 받은 남준은 흠칫.
"언젠가 선배가 절 챙겨줄 거라고 생각은 했었는데..."
"어... 그래..."
"정말 이렇게 챙겨주실 줄이야... 감사해요!"
"선배로서 당연한 거지..."
"남준 선배 짱!"
여주가 단순해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남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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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여주 / 22세 / 한국대 극작과 3학년 (19학번)
한국대의 자랑, 극단 'BTS'의 작가 담당으로 얼레벌레 들어감.
소심한 관종.
본인 글 칭찬 받는 거 좋아함. (교수님께 나름 칭찬도 자주 받아서 자부심 있음)
김석진 / 24세 / 한국대 창작학부 연기 전공 3학년 (17학번)
극단 'BTS'의 대표 얼굴.
입학할 때부터 지금까지 과탑을 단 한 번도 놓쳐본 적 없음.
연생연사 (연기에 살고 연기에 죽음)
김태형 / 23세 / 한국대 창작학부 연기 전공 2학년 (18학번)
복학하자마자 극단 'BTS'에서 제 역할을 톡톡히 해내고 있음.
흥미로워 보이는 인물 보면 관찰하는 게 습관.
정호석 / 24세 / 한국대 무대미술과 3학년 (17학번)
극단 'BTS'에서 무대 미술 담당. 사전 작업이 끝나면 주로 티켓부스에서 예매 도와줌.
이유 없는 다정함은 유죄, 많은 이들에게 죄를 짓고 있음.
눈치 무지하게 빠름.
김남준 / 24세 / 한국대 창작학부 연극연출 전공 3학년 (17학번)
한국대의 자랑인 극단 'BTS'를 끌고 있는 극단 대표.
1년 반 동안 극작과 다니다가 홀연히 연극연출 전공으로 전과함.
실력파 연극 연출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