딱히 많은 말은 필요 없었다.
박경은 작년 쯤 한 번 만난 게 다였고, 번호만 있었을 뿐 바꼈을지도 몰라서 불안한 마음으로 전화를 걸어야 했다. 컬러링이 나오는 내내 난 제발 맞아라,하고 빌었고 컬러링이 끊기는가 싶더니 가벼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보세요.]
"아, 혹시. 박 경 핸드폰이에요?"
[맞는데 누구세요.]
"아, 나 우지호 친구 정진영인데. 기억나?"
한동안 대답이 없었다. 난 기억 못하는 건가, 하고 한숨을 쉬며 우지호 일로 만나자고 얘기를 꺼내려 했다. 그런데 수화기 너머로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금 바로 시내에 있는 'Bee'로 와]
우지호를 부탁해
05
학교는 상관이 없었다. 어차피 다음 시간부터는 체육이라 빠져도 모를 테니까. 물론 친구 놈들이 입을 잘 막아준다는 한에서 말이다.
이 시간에 교복을 입고 돌아다니는 남학생을 주변 사람들은 의아하다는 듯 바라보았지만 다들 얼마 안 가 신경을 끄고 자기 할 일을 하는 일이 반복되었다. 번화가로 들어가 전에 길 가다가 딱 한 번 본 적 있는 'Bee'라는 카페를 찾으려 고개를 돌렸다. 가을인가, 선선한 공기에 하복만 입은 팔이 조금 시려워왔다. 그러다가 문득 눈에 작은 카페가 눈에 띄었고 나는 카페 문을 열었다. 문이 열리며 종업원이 어서오세요,하고 형식적인 인사를 하는 것을 듣고 가게 안을 둘러보았다.
"정진영!"
손을 흔들며 웃는 박경. 그 때나 지금이나 별로 변한 게 없어서 금방 알아보고 앞에 앉았다. 종업원이 핸드폰을 바라보다가 우리 둘이 한 테이블에 앉는 것을 보고 묘한 표정을 지었지만 아무렴 어때, 우린 그런 사이도 아닌데.
"우지호 얘기지?"
"어? 어떻게 알았어?"
"그 새끼면 볼 것도 없지, 뭐. 아버지 돌아가시고 존나 변했다 뭐 이런 거 아니야?
얜 뭐 이런 걸 다 알지. 최근에 우지호 만났냐고 물으니 아버지 장례식 이후로 안 만났댄다. 근데 어떻게 이렇게 잘 아나. 역시 10년지기 친구는 다르다 이건가.
"우지호 그 새끼가 뻔하지 뭐. 뭐 마실래? 내가 살게."
"아이스 코코아."
박경이 사람좋게 웃으며 일어나 주문을 하러 가고 나는 작게 한숨을 내쉬며 핸드폰을 들어 올렸다. 이태일의 살벌한 욕 문자 다섯 통을 확인한 후 그냥 홀드 키를 눌러 버렸다. 창 밖을 보니 날씨도 드럽게 좋은 게, 이 시간에 학교가 아닌 바깥에 있다는 기쁨을 배로 느끼게 해주었다. 전에 우지호가 한 소리("학교에 있어야 할 시간에 밖에 있으면 기분이 얼마나 좋은지 니가 알아?")가 마냥 헛소리만은 아닌가보다.
박경이 다시 내 앞에 앉은 뒤 히죽 웃었다. 우리 학교와는 거리가 꽤 있는 학교의 교복을 입은 박경이 가벼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대충 예상은 했지만 자세한 일은 모르니까, 우지호가 정확하게 뭘 어쨌는데?"
"음, 그냥."
무미건조해졌어.
그 말을 차마 입 밖에 꺼내지 못하고 멍하니 이태일 부모님 댁에서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기차에서 있었던 일도. 갑자기 얼굴이 화끈거리던 느낌이 우지호의 '무섭다'라는 한 마디에 다시 가라앉았다. 내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떨구자 박경이 얼굴을 아래로 내려 내 얼굴을 살피며 물었다.
"왜, 뭔데."
"음, 그니까. 우지호가 아버지 돌아가신 이후로 웃지도 않고 말도 잘 안하고..."
박경이 몸을 뒤로 쭉빼며 한심하단 표정을 지었다.
"부모님 중에 한 분 돌아가셨는데 웃고 떠들 놈이 어딨겠어? 그거 말고 더 있잖아. 뭔데."
나는 우물쭈물거리며 입을 열었다 닫았다를 반복했다. 나랑 우지호 사이를 말하면 커밍아웃인데? 지금까지 아무한테도 말 안했는데 이걸 어떻게 말해야 하나 하고 고민하고 있는데 박경이 손을 휘휘 저었다.
"너 우지호랑 사귀지?"
"뭐?"
순간 톤이 높아지며 삑사리가 나버렸다. 쪽팔림은 순간이었고, 박경이 한 말에 내가 입을 벌리고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자 박경이 웃음을 터뜨렸다.
"나랑 우지호랑 10년 친구야."
"아, 우지호가 말했어?"
우지호 이 개자식, 아무한테도 안 말했다며.
"아니, 우지호가 말한 건 아니지. 내가 알아챈거니까."
뭐가 그렇게 좋은지 낄낄대며 웃는 박경. 웃음소리가 점점 커지자 옆 테이블에 있던 여자가 짜증섞인 목소리로 들으라는 듯 '뭐야?'하고 앙칼지게 말했고 나는 박경의 머리를 한 대 치며 '어떻게 알았어?'하고 물었다.
"우지호 핸드폰 뒤지는데 둘이 문자한 거 있더라고. 우지호 그 새끼 문자 하도 귀찮아해서 나랑도 문자 안하는데 너랑은 문자하는 게 신기해서 며칠 내내 쫓아다녔더니 둘이 사귀던데?"
갑자기 얼굴이 달아오르는 기분이 들어 얼빠진 표정만 짓고 있었다. 박경이 "난 그런 거 신경안써"하고 말할 때까지 얼빠진 표정만 짓고 있다가 이내 정신을 차리고 말했다.
"그 뭐지, 전에 이태일...아, 이태일 알아?"
"알아, 난쟁이 똥자루 새끼. 같은 중학교 나왔어."
"아무튼 지난 주에 이태일 부모님 댁 갔다 왔어. 사실 그 전까지는 우지호가 하도 말도 안하고 내 말도 다 무시하고 그래서 섭섭하고 그런 감정이 다였는데, 그 뭐지..."
열대야에 잠이 깼을 때 보았던 우지호가 떠올라 한숨을 내쉬며 이마를 짚었다.
"새벽에 우지호가 내 위에 올라 타 있었"
"푸흡!"
마시고 있던 레모네이드를 그대로 뿜어버린 박경. 내가 식겁해서 '빨리 닦아!'하고 외치자 허둥지둥 안 어울리게 당황한 얼굴로 테이블 구석에 놓여 있던 휴지를 뽑아 닦기 시작한다.
"아씨, 잠깐만. 그래, 우지호가 널 덮치려고 했다고?"
"목소리 안 낮춰?"
주변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하며 내가 낮게 말하자 박경이 '아, 그래'하고 얼빠진 표정을 지으며 마지막으로 테이블을 한 번 더 닦았다. 그리고 휴지를 구석에 대충 놓고서 묻는다.
"진짜야?"
"그래."
"새끼, 고자인 줄 알았더니."
뜬금없이 뿌듯한 표정을 짓는 놈의 머리를 한 대 쥐어박자 그제야 다시 진지한 얼굴로 돌아온다. 더 말해보란 녀석의 말에 천천히 그 일부터 기차에서 있었던 일까지 하나하나 말해주고 오늘 이태일이 폭발한 일까지 말해주니 박경의 표정이 잔뜩 일그러진다.
"왜 그래?"
짜증난다는 듯 연신 욕을 중얼거리며 이마를 쓸어 올리는 박경에게 묻자 놈은 입김을 불어 앞머리를 한 번 불어올린 후 답했다.
"우지호 그 새끼 존나 애네, 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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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퇴했어요ㅠㅠㅠㅠㅠ 근데 약 멋고 나았어요 아이 좋아라 우리 경이 욕 많이 쓰네여 욕 쓰면 안되여 우리 경이 전 레몬에이드가 참 좋아여 그래서 필명도 ADE인 건 안 비밀 커플하려고 일부러 박경 레몬에이드 먹게 쓴 것도 안 비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