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 앞에서 모이기로 한 시각이 아직 십분 정도 남아 있었다. 습관처럼 담배를 피우러 잠시 나왔는데 택이가 날 기다리고 있을 줄이야. 쌍문동의 낡은 골목엔 택이와 나, 단 둘 뿐이었다.
정적이 흘렀다. 나는 피우려던 담배를 손에 쥐고 라이터를 찾았다. 택이가 놀란 눈으로 그런 나의 모습을 지켜봤다. 계속해서 라이터를 찾지 못하자 택이가 자신의 주머니에서 라이터를 꺼내 대신 불을 붙여주었다.
"...고맙다."
"너 담배 싫어했잖아."
연기를 내뿜는 소리만이 골목을 채웠다. 이런 사소한 대화마저 숨막히는 상황. 이런 것들이 나는 너무 싫었다. 택이가 나에게 미안해하는 것도, 이런 상황을 초래한 것이 결국 나라는 것도. 나는 어제 쌍문동에 오면 안 되는 거였다. 그냥 나만의 공간에서 혼자 외로워하면 모든 것이 제대로 흘러갔을 것이다.
"...정환아."
"야. 너 설마 아직까지도 내가 덕선이 좋아한다고 생각하냐?"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이게 아니었다. 나는 덕선이를 잊지 못해서 그동안 쌍문동에 오지 않았어. 다시 쌍문동에 온 것도 내가 덕선이를 잊어서 그런게 아니라, 아직 덕선이가 너무 좋아서 그런거야. 내 머리 속을 가득 채운 말인데 내 입 밖에선 전혀 다른 말이 흘러 나왔다. 손에 쥐고 있는 담배처럼 마음이 타들어 갔다.
"정환아. 나 바보 아니야."
"..."
택이는 금세라도 울 것 같았다. 택이를 이토록 힘들게 하는 것이 무엇일까. 우정과 사랑 사이의 갈등? 그런 건 이미 끝난지 오래다. 택이도 나도 이미 많이 느꼈기 때문이다. 우정을 위해 사랑을 양보하는 것이 얼마나 바보같은 짓인지를.
"정환아. 사실..."
울먹거리던 택이가 다시 입을 떼자마자 끼익-하는 소리와 함께 선우가 집에서 나왔다. 정팔아~ 희동아~ 신난 선우의 목소리와 함께 쌍문동 골목의 공기는 다시 상쾌해졌다. 택이는 눈물을 훔치고 선우를 향해 웃어보였다. 나도 그런 택이를 보며 애써 입꼬리를 올렸다. 택이마저 성장해 있었다. 지난 5년 간 훌쩍 커 버린 듯한 택이의 모습에 나는 나혼자 도태된 것 같은 느낌에 빠졌다.
"어이- 개정팔. 어디 안 도망갔네?"
저 멀리서 덕선이가 뛰어오며 발랄하게 외쳤다. 오랜만에 승무원 머리가 아닌 긴 생머리였다. 그리고 평소답지 않게 분홍색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선우와 택이도 낯설었는지 덕선에게 다시 갈아입고 오라고 면박을 줬다.
"왜 예쁘구만."
나는 나도 모르게 입 밖에 나온 내면의 목소리에 얼굴이 붉어졌다. 선우도, 택이도, 그리고 덕선이마저 그런 나를 보며 웃었다.
어이 거기. 동작 그만. 어느 새 등장한 동룡이가 나빼고 또 무슨 짓을 했냐며 징징거렸다. 나는 붉어진 얼굴이 창피해서 고개를 들지 못했다. 이 새낀 또 왜 이래. 동룡이가 나를 보고 말했다.
"야. 니네 또 누구 사귀면 나한테 당장 말해. 선우처럼 나한테만 안 가르쳐주면 그날로!"
절교야! 동룡이가 팔을 뻗으며 영화의 한 장면처럼 외쳤다. 아무래도 아직까지 선우한테 뒷끝이 남아있는 것 같았다. 그런데 저 말을 하면서 날 쳐다보는 건 내 착각일까.
우리는 오랜만에 함께 영화를 봤다. 영화 제목은 <식스센스>였다.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는 이야기에 우리는 영화가 끝나고도 유치원생들처럼 재잘거렸다. 특히 말콤이 귀신인 것이 밝혀지던 영화 후반부에는 동룡이가 소름이 돋는다며 영화관 안에서 소리를 질렀다. 우리는 너무 창피해서 영화 포스터로 얼굴을 가린 채 영화관을 빠져 나왔다.
"거기서 소리를 왜 질러 븅신아."
동룡이는 아직도 심장이 벌렁벌렁 댄다며 택이와 함께 화장실로 향했다.
"그래도 대박이긴 하다. 난 끝까지 뭔 내용인지 모르겠어."
덕선이가 해맑게 말했다. 으휴. 그래, 니가 왜 특공대겠냐. 나는 그런 덕선이가 너무 귀여워서 또 장난을 쳤다. 그러자 덕선이가 날 째려보며 말했다.
"지는. 여자 마음 하나도 제대로 모르면서."
"뭐?"
덕선이는 자신이 한 말에 자신도 놀란 듯 했다. 굳은 채로 땅만 보고 서 있었다. 나는 참지 못하고 덕선이의 어깨를 붙잡았다.
"그게 무슨 소리야?"
이번에는 덕선이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날 올려다보았다. 방금 덕선이의 말은 마치 자신의 마음을 알아주지 못한 나에게 하는 투정같았다. 내 예상이 맞는거라면, 덕선이는. 옆에서 선우의 시선이 느껴졌다.
"둘이 뭐하냐?"
화장실을 갔다 온 동룡이가 택이와 함께 다가왔다. 덕선이는 날 올려다보던 시선을 거두고 어깨를 잡은 내 손에서 빠져나갔다. 왜인지 모르게 불편해보였다. 이리저리 눈치를 살피던 동룡이가 하하하. 어색하게 웃더니 선우를 데리고 덕선이와 나 단 둘이만 둔 채 다시 화장실로 사라져 버렸다. 나는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히고 다시 덕선이의 팔을 잡았다.
"성덕선."
덕선이가 나를 다시 올려다보았다. 덕선아. 나는 한동안 말 없이 가만히 서 있었다. 덕선이의 표정은 장난 고백 때와 별 다를 게 없었다.
나는 다시 실망했다. 그래. 덕선이는 택이를 좋아한다. 그건 반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나는 저 둘에게 불청객이고, 사랑의 방해물 쯤 될 것이다. 5년 간 버리려 했던 나의 미련은 우정과 사랑 앞에서 다시 나를 괴롭혔다. 이번엔 놓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내 머리 속에서 저 둘의 사이를 멋대로 판단하고 합리화시킨 것 일까.
"됐다."
덕선이의 팔을 놓았다. 이미 5년이나 흘렀다. 덕선이와 택이의 사이가 예전만큼 좋지 않다고 해서 나에게 기회가 있는 것이 아니었다. 나는 덕선이에게 소꿉친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닐테니. 여러 번 기회를 놓쳤다. 돌이킬 수 없는 것이다. 내 앞에 덕선이가 있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