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루감화서
w.규닝
05.
촤르륵, 탁. 자꾸만 접선을 접었다 폈다 하는 소리가 좁은 방 안을 채웠다. 열흘도 전, 얼떨결에 주워들었던 우현의 접선을 어쩐 이유에선지 쉬이 돌려주지 못하고 있어 성규의 마음이 외려 갑갑해져왔다. 갖고 싶은 것도 아니었고, 골탕을 먹이려는 마음에 돌려주기 싫은 것도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우현에게 선뜻 건네줄 수가 없었다. 아무렇게나 엎어져 접선을 만지작거리다가 다시 등을 돌려 누워 등잔 밑에 그것을 빗대어보기도 한참. 요즈음 성규의 밤은 그렇게 멍하니 접선을 쳐다보는 것으로 마무리되어가고 있었다.
하루걸러 하루 궁에 입궐하려 들리는 반촌 옆 성균관은 언제나 성규에게 아득했다. 하루가 멀다하고 들르는 곳이긴 하였지만 그랬다. 심적으로는 저만치나 멀리 있어 가까이 할 수 없는 곳이었지만 요사이 자꾸만 마음이 발보다 먼저 성균관 안에 가 닿아 있는 것에 알 수 없이 마음이 뜀박질했다. 그것은 아마, 약방에 약제를 가져다 놓아야 함에 있어서 온 신경이 그 쪽으로 쏠리는 탓에 어쩔 수 없이 나타나는 현상일거라고 스스로를 다독였다. 성규가 멍하니 바라보던 성균관의 기와 끝에서 눈을 거두고 궐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요사이 우현의 기분은 때때로 천차만별이었다. 지독하리만치 가라앉아있던 기분이 잠시 후면 하늘 끝까지 솟구치기도 했으며 조금 후에는 바싹 화가 올라 또 언제 그랬냐는 듯 무겁게 표정을 굳히고 앉아있는 일이 다반사였다. 특히나 며칠이 지나도 약방의 텅 빈 약제 칸에 약제가 들이 차지 않을 때에는 심각하게 기분이 언짢아지기도 했다. 도서고에 매일같이 드나들며 공부하는 일에 있어서는 하루도 빼먹지 않고 열심히면서 정작 본연의 일에는 무감각한 성규에 괜히 뿔이 나는 것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매일같이 옥그릇에 엽전은 차 있었지만 성규의 모습은 그야말로 함흥차사였다.
“야.”
아침 식사를 마치고, 진사 식당에서 팔자 좋게 걸어나오던 우현이 뒷짐을 지고 멈춰 섰다.
“잘도 돌아다니는구나. 약방에 가는 것이냐?”
우현이 가늘게 뜬 눈을 내리깔아 제 눈 앞에 보이는 쥐를 흘겼다. 수로 아래를 후닥닥 달려가던 쥐가 중간에 멈춰 서 있었던 것을 우현이 발견한 것이었다. 우현이 기척 없이 쥐에게 가까이 붙어 섰다. 그 조막만한 몸통이 우현을 올려다보았다.
“밤에만 나다니는 줄 알았더니 제법 낮에도 낯짝을 뵈는구나. 네가…,”
잠자코 생쥐를 내려다보던 우현이 말끝을 흐렸다.
잠깐 동안 우현을 올려다보았던 쥐가 잡힐세라 수로 아래로 달음박질하였다. 무엇보다 빠르게 수로 아래로 숨어버린 쥐의 꼬리가 완전히 모습을 감춰버린 꼴을 가만히 내려다보다 컴컴한 수로 아래로 넋을 놓았다.
“나타나라. 내 앞에도.”
영문 모를 혼잣말이 우현의 입에서 튀어나왔다. 그렇게 잠시 우현의 앞에는 침묵이 흘렀다. 후에는 어둡게 꺼진 구멍 앞을 향하던 시선이 올곧게 올라가 비천당을 향했다. 아마 방금 전 뱉은 말의 속내를 자신조차 알아차리지 못한 탓이었다. 은연중에 튀어 나왔던 영문 모를 말이 전각 앞 공기 속으로 섞여 들어갔다.
*
그러는 사이 바람은 한 층 차졌다.
가지마다 아슬아슬하게 달려 있던 잎들도 모두 떨어진 것도 오래였다. 겨울로 접어들수록 차지는 바람이 밤마다 청재의 창호 문을 흔들어댔다. 장안을 노니는 유생들의 발걸음도 어느덧 전보다는 뜸하게 되었으며, 살을 에는 칼바람에 성균관 밖으로는 나서기가 싫다며 기방을 향하던 걸음들도 죄다 반궁 안에 묶였다. 청재 앞마당에 저희들끼리 모여 앉아 희희낙락 떠들어대던 재직들의 볼이 빨갛게 얼어 하얗게 텄다. 요즈음 들어서는 한 걸음 걸러 한 걸음을 내딛으면 누군가가 코를 훌쩍이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차게 얼은 동재 앞마루가 늦가을 바람에 삐걱거렸다.
취침! 취침! 쉰 목으로 아낌없이 소리를 내지르던 재직이 서리청으로 저만치 사라지고 나서야 동재의 끝 방문이 열렸다. 저번처럼 살금살금 마루 위로 발을 내딛은 우현이 삐거덕거리며 우는 마루를 간신히 건너가 태사혜를 구겨 신었다. 잠시 동안 주위를 둘러보던 우현이 곧 태연하게 뒷짐을 지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여차해서 누군가를 만나게 된다면 곧바로 ‘수복청에 가는 길이었다!’하며 둘러대기 위해 목소리까지 가다듬은 우현이 부러 더 큰 동작으로 걸음을 떼어 마당으로 내려왔다.
곧 존경각 앞문에 걸쇠가 걸릴 시간인데…. 우현이 수복청으로 향하던 발걸음을 은근슬쩍 돌려 게걸음을 시작하였다. 곧이어 서재에 다다른 우현이 벽면에 붙어 서 발소리를 죽이며 도서고의 근처에까지 아닌 척 다다랐다. 큼, 흠흠. 주위에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하자 어깨를 쫙 펴고 자연스럽게 도서고 앞으로 향하려고 했을 때였다.
“진짭니다요. 쇤네가 무슨 덕을 보자고 상유께 거짓을 아룁니까? 틀림없이 이 속에서 난리법석인 소리를 들었습니다요!”
느닷없는 말소리에 화들짝 놀란 우현이 다시 서재 쪽 벽면 뒤로 몸을 숨겼다.
“헌데 어찌 지금은 아무런 소리도 나지 않는 것인지를 설명해 보아라!”
“그것은 모르겠지만 아마 조금만 기다려보시면….”
수복의 쩔쩔매는 소리가 서장의의 목소리와 얽혀들었다. 우현이 벽 뒤쪽으로 깊숙이 숨겼던 몸을 바깥으로 조금 뺐다. 보다 어려 보이는 수복 하나가 서장의의 앞에 넙죽 엎드려 제 억울함을 호소하고 있는 듯 했다. 우현이 차마 삼키지 못해 한 데 모았던 침을 소리나게 꿀꺽 삼켰다.
어둠이 짙어 존경각 앞에 누군가가 있는지는 가늠하지 못했던 탓에 맞닥뜨린 해괴한 상황이었다. 또 다시 무어라고 얘기를 나누는 통에 소란스러워진 도서고 앞으로 바짝 귀를 붙인 우현의 표정이 심상찮게 가라앉았다.
“쥐새끼 한 마리 잡아내자고 도서고를 통째로 불태우자는 말이더냐?”
“그것은 아니옵지만, 상유께서 몇 주 전부터 도적 잡기에 얼마나 혈안이셨는지를 쇤네가 아는 바…, 뭐라도 도움이 되고 싶어 곧바로 아뢴 것이옵지요.”
“허나 거짓은 내게 눈꼽 만큼의 도움도 되질 않는다.”
서장의의 목소리가 번뜩이는 칼날을 걷는 것과 같이 날카로웠다. 수복이 잠깐 들었던 머리를 다시 냅다 바닥으로 갖다 댔다.
“송구합니다!”
“호롱불을 내어 오너라.”
서장의가 대번에 단호한 목소리로 호령했다.
“네 말마따나 확인은 해 보아야 할 것 아니냐. 허나 서책 도둑은 커녕 쥐새끼 하나 보이지 않으면 이 야단을 나게 만든 네 놈을 당장에 잘라 수복들에 본보기를 보여주어야겠으니 그것만큼은 명심해라.”
서장의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수복이 서재 너머로 달음박질 했다. 벽 위로 납작하게 붙어 서 쿵쾅거리는 가슴을 붙들고 그 꼴을 보고 있던 우현이 꽁지가 빠져라 모퉁이를 돌아 사라지는 수복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시선을 거두어 서장의에게로 돌렸다. 저도 모르게 갈증이 나고 있는 것만 같았다. 우현은 방금 제가 보고 들은 말과 상황이 저도 믿기지 않아 가슴이 덜컹하였다. 오랜만에 호령다운 호령을 해 본 탓에 조금은 으쓱해진 서장의의 올라간 어깨를 내리 훑던 우현이 제 가슴에 손을 얹어 심호흡을 했다.
이 시간에 존경각이라. 실제 서책 도둑이 안에 들어가 있지 않고서야 있을 사람은 오직 서생원 한 마리 뿐이었다. 우현이 머릿속으로 덜컥 치미는 성규의 얼굴에 외려 제가 간이 떨려 서재 바깥으로 다짜고짜 발을 딛었다.
“상유께서는 이 시간에 어쩐 일이시오?”
앞뒤 가릴 것 없이 인기척을 내며 돌아서 있던 서장의의 등에 대고 아는 체를 해버렸다. 낯선 목소리에 휙 뒤를 돌아다본 서장의가 어둠이 내려앉아 제 앞에 선 이의 얼굴이 분간이 되지 않아 실눈을 떴다.
“누구시오?”
“동재에 기거하는 도헌이외다.”
“아, 도헌.”
서장의가 가늘게 떴던 눈을 거두고 뒷짐을 바로 졌다. 도헌이라, 같은 당파가 아닌 데에다가 청재가 달라 자주 보지는 못했던 얼굴이지만 귀동냥으로 듣는 소문으로는 꽤나 골치 아픈 녀석이라는 것을 주워들었던 바였다. 서장의가 제 앞까지 다가와 우뚝 멈춰 선 우현을 위아래로 훑었다.
“나는 잠시 확인할 게 있어 나왔소만…그대께서는?”
“나는 찾을 게 있어 들렀소.”
우현이 태연자약하게 둘러댔다.
“내 기방에 들르게 되면 기녀에게 내어주려 산 노리개를 안에다 놓고 온 것 같아 다시 찾은 거요. 비록 걸쇠는 걸려 있지만 내 들어가 봐도 되겠소?”
같은 청재의 동장의가 아닌 서장의이지만 그래도 예는 갖추어야 했기에 한 층 성질을 죽인 목소리가 어줍잖게 동의를 구했다. 서장의가 짐짓 뒷짐을 지고 섰다.
“비록 해시에 접어들었지만 그리하도록 하오. 어차피 나도 일 다경 즈음 후에는 들어가보아야 하는 것도 피차일반이니. 헌데…,”
들어가봐도 되겠냐고 물어놓고서는 대답이 채 떨어지기도 전에 이미 절반정도는 도서고 안으로 몸을 들여놓고 있던 우현이 홱 뒤를 돌았다.
“안은 어두운데 무엇이 무엇인지 식별할 수 있겠소?”
“됐소.”
이내 우현이 관심 없다는 듯 등을 돌렸다. 애써 물었던 서장의가 우현의 말뽄새에 혀를 끌끌 차며 고개를 돌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이미 도서고 안으로 발을 들인 우현은 한달음에 고서 창고 앞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호롱불을 가지러 간 수복이 돌아오기 전에 얼른 일러두어야 할 것 같아 한 치의 망설임 없이 다다른 고서 창고의 미닫이를 홱 제꼈다. 드르륵,하는 소리와 함께 눈앞에 훤히 드러난 것은 볼 것도 없이 예상했던 인물이었다.
“서생원.”
우현이 한껏 목소리를 죽였다.
“얼굴이 더 못나졌다.”
안쪽에 숨은 성규만큼이나 사실은 제 심장도 쿵쾅쿵쾅 난리였음에도 불구하고 침착하게 낮춘 목소리로 그렇게 일렀다. 다짜고짜 문을 열자 보이는 것은 제 인기척에 어지간히 놀랐는지 보기 좋게 나자빠져 얼이 빠져 있는 성규의 모습이었다. 그런 그를 본 우현이 저도 모르게 입술을 물었다.
얼마나 울었는지 성규의 두 뺨은 온통 눈물로 어룽져있었다. 두 손으로 바닥을 짚고 엎어져있던 성규가 우현의 얼굴을 확인하자마자 팔을 들어 제 옷소매로 얼굴을 감추었다. 십년치를 몰아 한꺼번에 놀랐다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정신이 헤져, 눈물 때문에 흐려진 시야로 드문드문 우현의 얼굴이 비쳤다. 성규가 잇새로 흘러나오려는 울음을 삼켰다. 미닫이 문을 붙들고 앉은 우현의 손에 힘이 실렸다.
“안쪽으로 더 들어가.”
“…….”
“도와주려는 것이니 내 말 들어라.”
결국엔 눈물을 떨궈낸 탓에 조금 선명해진 우현의 얼굴이 가까이 다가왔다.
*
우현이 들어와 앉은 창고가 평소보다 더욱 비좁은 느낌이었다.
빛이 새어나가지 않도록 꼭꼭 여닫아 입구 쪽을 등지고 들어와 너절하게 엎어져 있던 성규의 앞에 떡하니 자리 잡았다. 정신없이 헤맨 탓에 흐트러진 제 옷을 정리할 새도 없이 눈물을 삼킨 성규가 가까이도 다가온 우현의 얼굴에 제 입을 꾹 다물었다. 우현은 제가 찾아왔음에도 불구하고 하염없이 눈물을 떨어트리는 얼굴에 눈을 고정했다. 서생원. 낮게 부르는 목소리에 성규가 고개를 끄덕였다. 우현이 고개를 낮춰 성규의 얼굴을 확인했다.
“울 시간 없다. 내 도와준다 했지 않았느냐.”
“헌데 어찌….”
눈물에 젖은 목소리가 흐려졌다. 성규가 끝까지 말을 잇지 못하고 제 도포자락으로 입을 막고 우현을 향해 눈을 들었다.
어떻게 이곳을 찾아왔느냐를 묻는 것인지, 어떻게 도와줄 것이냐고 묻는 말인지조차 확실하지 않은 물음이 뱉어졌다. 우현이 볼품없이 작아진 눈에 제 눈을 맞추다가 고개를 들었다.
“내가 적당히 시간을 벌 것이야.”
“…….”
“호롱불을 꺼라.”
우현이 제 앞에 환하게 드리워진 호롱불을 턱짓으로 가리켰다. 정신없이 눈물을 훔쳐내는 와중에도 우현의 명에 따르려 호롱불을 집는 손길이 여력에 부쳐 덜덜 떨었다. 연유를 물을 것도 없이 우현의 말을 따라 호롱불을 불어 꺼트린 성규에, 창고 안에는 거짓말처럼 어둠이 들어찼다. 간간히 울음을 죽이는 성규의 음성 외에는 온통 고요한 창고 안에서 두 사람의 옷깃이 부스러지는 소리가 선연했다. 우현이 손을 들어 성규의 갓머리를 잡았다가 아래로 손을 가져갔다. 곧이어 차게 얼은 두 뺨을 손에 쥐었다.
“이제 이곳도 바깥과 다름없이 어두우니 너를 쉬이 식별하지는 못할 것이다.”
“…….”
“내 이 곳에서 먼저 나갈 때 문을 열어두고 나갈 것이다. 허면 후에 네가 나올 때에는 아무런 인기척도 나지 않을 것이니…”
“…….”
“내가 주의를 끄는 동안 조용히 나가라.”
최대한 도서고 안쪽으로 유인할테니까. 우현이 성규의 두 뺨을 붙은 손에서 힘을 풀었다. 아무것도 뵈질 않아 성규의 표정이 어떠한지는 알 수 없었지만 적어도, 끊임없이 새어나오던 흐느낌이 사그라든 것을 보아 조금은 진정한 듯 보여 우현도 알게 모르게 숨을 골랐다. 제 말소리를 듣고 있기는 한 것인지, 조그마한 기척도 없이 숨을 죽이고 앉은 성규가 골라내는 옅은 숨이 우현의 입술 아래 와 닿았다. 우현의 손이 조금 더 내려갔다. 가늘게 쳐진 마른 어깨 위로 우현의 손이 내려앉았다. 그것을 나지막히 붙든 우현이 외려 소리나게 침을 삼켰다.
“너는 숨 하나는 고요히 잘 죽이는 서생원이 아니더냐.”
그것은 우현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격려였다. 그리고 잠시 후에는, 조금 전까지만 해도 두려움에 벌벌 떨었던 미려한 손 끝이 제 어깨를 감싼 우현의 손목을 지긋이 붙들었다. 그것은 아마, 알겠다는 말 내지 고맙다는 말을 비쳐 낸 것이었으리라.
곧이어 바깥에서 들려오는 소란스러운 인기척에 우현이 먼저 떠들썩하게 미닫이를 열고 나갔다. 괴상한 비명소리와 함께 소스라치게 놀란 수복이 저것 좀 보라며 서책 도둑이 있었다면서 우현을 손가락질 했고, 그게 무슨 망발이냐며 도리어 수복을 혼내키는 소리가 호들갑스럽게 높아졌다. 수복을 뒤이어 도서고 안으로 발을 딛은 서장의가 수복더러 그만 두라는 손짓을 했다. 도헌이시다. 조금 전 문 밖에서 만나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내 확인하였으니 그만두거라. 수복은 그제서야 침착하게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죄송합니다요. 어둠 속에서 갑자기 나타나셔서 쇤네가 착각했습니다. 우현은 괜히 목청을 가다듬었다.
그나저나 어둠이 눈에 익지 않아 노리개를 찾기에 힘에 부치니 호롱불을 좀 빌려달라는 말로 서장의 일행에게 끼어든 우현이 다짜고짜 호롱불을 낚아채고 도서고 뒤편으로 돌아 들어갔다. 후닥닥 우현의 뒤에 붙어 선 수복이 무슨 일이시냐며 우현을 캐물었고, 어차피 도서고를 한 바퀴 돌아나가야 하는 것이기 때문에 마땅히 거절할 이유가 없었던 서장의가 그들의 뒤를 따라 존경각의 뒤편으로 걸음을 옮겼다. 문 앞에서 어른거리던 호롱불이 점점 더 뒷켠으로, 그 뒷켠으로 옮겨갔다. 우현은 벌써 저만치나 멀어진 존경각 문 앞을 힐끔거리면서 열심히 노리개를 찾는 척 허리를 숙여 책장을 뒤적거렸다.
이윽고 허탕을 쳤다는 말과 함께 문 앞으로 되돌아온 세 사람이 노리개건 서책 도적이건 귀신이 곡할 노릇이라며 입을 쉬지 않는 수복의 말소리를 끝으로 도서고를 벗어났다. 우현이 문을 나서기 전 흘끗 들여다 본 창고가 텅 비어있는 것을 보고 크게 한숨을 돌렸다. 속에서 몰아치던 갖은 풍파가 싹 잠재워진 느낌이었다.
아닌 밤중에 소란이었다며 수복에게 호통하는 서장의의 목소리를 등지고 떠난 우현의 발걸음에 속도가 붙었다. 분명 멀리 가지는 아니했을 것인데. 급한 걸음이 서재를 지나고 향관청 모퉁이를 돌아 나갔다. 혹시나 꼬리가 잘릴까 신나게 달음박질했을 게 두려워 성규를 잡아챌 요량으로 재게 놀리던 걸음이 신삼문 앞에 다다라서는 뚝 끊기게 되었다.
“소인, 오늘….”
층계 앞에 기대어 앉아 몸을 수그리고 있던 성규가 우현과 눈이 마주치자 대번에 바닥으로 이마를 붙여 엎드렸다. 우현이 당황할 새도 없이 꾸역꾸역 눈물을 눌러 담은 목소리가 숙여진 고개 아래로 새어나왔다.
“덕을 입었습니다. 도헌께.”
“…바닥이 차다. 당장,”
“도헌께서는 이제,”
느닷없이 번쩍 들어올려진 고개가 우현을 향했다. 여전히 눈물범벅인 채로 입을 악무는 게 이제는 애처로워 보일 정도라 우현의 입이 떡하니 벌어졌다. 성규가 오른손으로 제 눈가를 닦았다.
“소인에게까지 다정하십니다….”
퍽 어린아이처럼 어려진 목소리가 결국에는 흐려졌다. 그리고 잠시 후에는 우현도 덩달아 맥이 풀려 헛웃음을 터뜨렸다. 좀 더 차졌던 바람이 두 사람의 달뜬 탈출 공작에 조금은 데펴졌던 것도 같았던 밤이었다.
*
타닥타닥, 화로의 장작이 타들어가는 소리가 청재의 방 안을 울리고 있었다. 평소에는 세 사람 몫의 신이 섬돌 위에 올려져 있어야 마땅했지만 오늘은 겨우 두 짝이 전부였다. 우현이 깔아둔 이불 위에서 팔짱을 끼고 앉아 눈앞에 보이고 있는 꼴을 보며 끌끌 혀를 찼다.
이미 인경(人定)을 훨씬 넘어선 데에다가, 순라군의 감찰이 여느때보다 심해진 시간에 접어들은 탓에 성규를 방으로 오라 부른 우현이 군말없이 가만히 서 있는 성규의 손을 팩 잡아끌었었다. 마침 나흘 정도 방을 비울 예정이라던 방우들에게 이토록 고마움을 느꼈던 적이 없었다. 비었으니 자고가라, 하는 말로 성규를 무작정 방 안으로 집어넣은 우현이 다른 눈에게 들킬세라 방문을 빈틈없이 여닫았다. 꼼짝없이 방 안에 나앉은 성규가 여적지 눈을 둘 곳을 몰라 이리저리 방 안을 살피고만 있었다. 그렇게 시간은 잘도 흘러갔다. 꼭 첫날밤에 얼굴을 처음 마주한 신랑 신부처럼 어색한 공기가 방 안을 부유하고 있었다. 아마 신나게 펑펑 울어제꼈던 탓에 아직까지 민망함이 가시지 않아 고 작은 입이 열리고 있지 않는 것이리라. 우현이 찬 벽에 등을 기대어 앉아 저만치 떨어져 웅크리고 있는 성규를 살피고 있었다.
“…야.”
잠시 후에는, 믿어지지 않는 광경에 우현이 허탈한 목소리로 성규를 불렀다.
“뭐하는 거냐?”
한껏 웅크리고 있던 성규가 조금씩 움직이면서 품 안에 안아들었던 무엇인가를 바닥에 주섬주섬 펴 놓았기 때문이었다. 우현의 삐딱한 음성에 흠칫 놀란 성규가 조금 고개를 숙였다.
“…아무것도…아니온데.”
“아무것도 아니긴 뭐가 아니야. 그거 방금 도서고에서 빼돌린 책인 거냐?”
우현이 벽면에 붙이고 있던 등을 홱 떼어 성규를 노려보았다. 아,아,아닙니다! 그에 지레 놀란 성규가 아직까지 발갛게 충혈된 눈을 빠르게 깜빡이며 손을 내저었다. 그게 아니라!
“빼돌렸다고 하는 건 너무하십니다!”
“그럼 빼돌린 게 아니고 그게 무엇이란 말이냐? 훔쳐왔다고 해야 하는 게 마땅하냐?”
“그것도 아닙니다!”
성규가 잔뜩 억울한 목소리로 항변했다.
“소인은 절대 맹세코 도적질을 한 적이 없습니다. 도헌께오서도 그걸 알고 계시어 저를 도와주셨던 것 아닙니까?”
“그럼 지금 그것을 설명해봐라. 네 품에서 나온 그것은 아무리 보아도 존경고의 서책들이 맞건만 어찌 내게 거짓을 고하려는 것인거냐?”
“아닙니다!”
성규의 목소리가 급기야 팩 엇나갔다. 그에 만만찮은 목소리로 따지던 우현이 한 층 물러났다. 아까처럼 물기어린 목소리가 꾸역꾸역 아니라는 말만 뱉어내고 있었다.
“소인, 그렇게 발각되어버릴 위기에 놓여 오늘 읽기로 마음먹었던 서책을 미처 읽지 못하고 나오게 생겼기에…,”
성규가 제 눈가를 옷자락으로 벅벅 눌러 닦았다.
“오늘 하루만 바깥으로 가져갔다 모두 읽고 내일 해시에 가져다 두려 한 것이었습니다.”
우현이 기가 찬 마음에 헛웃음을 뱉었다. 뭐라?
“그럼 그 도망길에 오르는 와중에도 읽어야 할 서책을 꼼꼼하게도 챙겨 달아났다 이 말인 것이냐?”
우현의 말에 성규의 고개가 천천히 끄덕여졌다. 우현이 황망하게 그 꼴을 지켜보고 있었다. 미쳤다. 미치지 않고서야 네가….
“하긴, 어지간한 공부벌레가 아니고서야 애초에 존경각에 숨어 들 생각은 꿈조차 못 꿨겠지….”
“…….”
“허나 오늘로써 너는 서책 도적과 공범이 된 셈이다. 혹여라도 나중에 발뺌할 것도 없으니 그것만큼은 명심해라.”
결국엔 우현이 혀를 내둘렀다. 성규가 마땅히 대꾸하지 못하고 마른 손으로 책장을 넘겼다. 우현의 본래 방과는 어울리지 않는 ‘서책 넘기는 소리’가 방 안에 차고 있었다. 벌써 이불을 깔고 드러누우려는 우현과 멀찍이 떨어져 문가에서 책장을 넘기려던 성규가 두 무릎을 모으고 앉아 다시금 제 얼굴을 무릎 위로 묻었다.
그 어떤 상황이 닥쳐도 서책을 꿋꿋이 읽고 잘 것처럼 굳세어 보이던 게 고개를 숙이고 앉아있자 우현의 고개가 심심하게 들렸다.
“왜 그러고 앉아 있느냐?”
“헌데 책이 읽혀지질 않습니다.”
무릎에 박은 얼굴 아래에서 실같은 목소리가 새어나왔다. 반듯이 누우려던 우현이 모로 누워 손으로 제 머리를 받쳤다. 발끝을 붙이고 앉아 얼굴이 보이지 않게끔 숙이고 있는 성규를 찬찬히 바라보던 우현이 한숨을 내쉬었다.
“하긴, 그런 일을 당하고도 멀쩡히 책이 읽혀진다면 너는 이미 주상전하의 목에 칼을 겨누고도 남았을 배짱이었겠지. 서생원.”
“예.”
“이리 와라.”
우현의 말에 잠자코 대답을 뱉던 성규의 고개가 천천히 들렸다. 저 쪽 화로 너머에서 누워 제 쪽을 빤히 향하고 있는 얼굴을 마주했다.
우현이 제 말에도 불구하고 멍청하게 저만을 쳐다보고 있는 성규를 마주보다 제 옆자리를 툭툭 두들겼다. 그럼에도 달싹하지 않는 성규에 재차 제 옆자리를 두드린 우현이 절반쯤 누웠던 상체를 일으켰다.
“안 잘 거냐?”
“예?”
멍청히 두 눈을 깜빡이고 있던 성규가 소스라치게 놀라며 몸을 뒤로 뺐다. 그 탓에 발치에 놓아두었던 서책이 발길에 떠밀려 저만치 밀려났다. 우현이 다시금 시큰둥하게 몸을 뉘였다.
“안 잘 거냐고 물었다. 서책도 읽혀지질 않는다며, 허면 그리 앉아 뭘 할 것이냐? 들어와서 자지는 않고.”
“아, 소인은…소인은.”
“성균관에서는 재직이 취침이라 이르면 그대로 취침해야 하는 것이 마땅하다. 이미 오래 전에 재직이 취침을 알렸으니 침수에 들어야 한단 소리다.”
우현이 짐짓 삐딱하게 이르고 제 자리에 누웠다. 성규가 더듬거리던 말을 멈추고 고개를 숙였다. 일부러 화로께에서 눈을 거둔 우현이 관심 없다는 듯 자리에 돌아누웠다.
그렇게 잠시 후에는 하릴없이 서책을 넘기는 소리가 뚝 끊겼다. 읽히지도 않으면서 심심하게 책장을 넘기던 성규가 곧이어 그것을 눌러 덮고는 화로 쪽으로 당겨 앉았다. 그 덕에 벽 쪽으로 돌아누웠던 우현이 그 곳으로 예민하게 귀를 기울였다.
정말이지 한참 후에야 성규의 옷감이 사각거리는 소리를 내며 풀어지기 시작했다. 타닥타닥 장작을 태우는 소리와 까슬한 옷감이 부딪혀 풀러지는 소리가 이상한 조화를 이루며 방 안의 공기를 달뜨게 만들었다. 야! 가만히 그것을 들어내고 있던 우현이 벌떡이며 몸을 일으켰다. 우현의 인기척에 성규가 흠칫 놀라 문 쪽으로 붙어 앉았다.
“옷을 천년만년 벗고 있냐???”
“예?”
그렇잖아도 어색함에 예민해져있던 성규가 우현의 커진 목소리에 겁을 집어먹고 이상한 목소리로 반문했다. 우현이 제 앞섶을 가리고 앉아있는 성규를 흘겨다보았다.
“다 했으면 들어와라.”
“…….”
“걱정은 마라. 둘이 자도 넉넉할 만큼의 크기는 되니.”
우현이 제가 덮고 있던 이불을 널리 들춰 자리를 보여주었다. 딱딱하게 굳어 앉아있던 성규가 얼른 목을 빼서 제가 누울 자리를 확인했다.
한 자리인고 해서 민망함에 달아있었던 얼굴색이 차츰 돌아왔다. 다행이도 두 사람이 떨어져 누워도 충분할 만큼의 자리가 남아 있었다. 결국에는 속적삼만을 갖춰 입은 성규가 낡은 겉옷을 우현의 도포 옆에 나란히 걸어두고 화로 옆을 지났다. 실은 다른 이가 조심스레 곁에 눕는 느낌이 생소하기는 우현도 마찬가지였다. 애써 내색하지 않으려 등을 돌리고 모로 누운 우현이 바스락거리며 이불 아래로 들어오는 성규에 사실 온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바로 잠에 드십니까?”
언제 울었냐는 듯 말짱해진 목소리가 물었다. 들어오라 명해놓고 외려 바짝 숨을 삼키고 있던 우현이 두 눈을 빠르게 깜빡였다.
“그렇다.”
“허면 불을 끄겠습니다.”
이윽고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연이어 들려왔다. 좀 더 뒤적이던 기척이 후, 하며 바람을 일으켰고 구석구석 환했던 빛이 단숨에 잠식되었다.
*
“저…. 소인은 내일 어찌 밖으로 나갑니까?”
눈이 좀처럼 감기질 않았다.
불은 끈 직후에 약속이라도 한 듯 돌아누운 둘의 눈이 사실은 맞춘 것처럼 멀뚱멀뚱 허공을 향하고 있었다. 그렇게 한참을 후에, 어쩐지 우현의 숨소리가 잠든 이의 그것 같지 않아 조심스레 말을 붙인 성규가 이불자락을 붙들었다.
우현이 벽면을 향하고 있던 눈을 느리게 깜빡였다.
“내가 그런 것까지 신경 써야 하는 거냐? 적당히 눈치 봐서 네가 나가야지.”
바닥에 볼이 눌린 성규가 우현처럼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알겠습니다.”
“이만 자라.”
그렇게 또 한참을 침묵이 흘렀다.
분명 서로 잠을 권하고 있었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또렷해오는 정신이 새벽녘의 좁은 방 안의 공기를 더욱 민망하게 만들어오고 있었다. 오히려 서로가 잠에 들지 않고 있다는 것을 직시하고 나자 내뱉고 있는 숨소리 하나하나가 예민하게 귓가에 박혀왔다. 그러면 그럴수록 성규가 저의 이불 끝을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서생원.”
그러다가 문득 우현의 입에서 성규의 호(號)가 불리어졌다. 성규가 어정쩡하게 뜨고 있던 눈에 바짝 힘을 주었다. 예?
“안 주무십니까?”
“어인 이유로 울고 있었느냐?”
성규의 등 뒤로 마주 댄 등 너머에서 잠결처럼 낮은 목소리가 물었다. 성규가 예상치 못했던 질문에 곧바로 답을 내지 못하고 멀뚱히 누워 있자 우현이 말을 이었다.
“내가 본래, 처음 보는 장면이 있으면 마음에 걸리어 쉽게 잠에 들지 않는다.”
“…….”
“그게 네놈이라서가 아니라…내 원래 그러는 것이니.”
“…….”
“말해라. 어찌 그리 울고 있었는지.”
우현의 물음에 성규가 애먼 입술을 잘근잘근 뜯었다.
등잔이 가신 방 안이 가진 빛이라고는 조그막한 화로의 장작에 덜 꺼진 불씨의 발간 불빛 뿐이었다. 성규가 제 눈 앞에서 타닥거리는 소리를 내며 간간히 불씨를 튀기는 화로에 멍한 눈을 고정하다가 숨을 모아 쉬었다.
우현은 잠자코 성규의 말소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잠시 후에는 성규가 모로 누웠던 몸을 바르게 해서 천장을 향하게끔 했다. 덕분에 우현의 등허리에 스칠 듯 말듯하게 어깨가 뉘어졌다. 그리하여 우현이 조금 더 바짝 정신을 차리려 했을 때에는 성규의 말소리가 불쑥 튀어나왔다. 단지….
“소인을 위해서가 아니었습니다.”
너무 울었던 탓에, 감았다 뜨기도 뻑뻑한 두 눈을 애써 깜빡이며 천장을 보는 성규의 입에서 마른 목소리가 뱉어졌다.
“단지 소인의 잘못된 행동을 들켜, 그것이 두려워서 그리했던 게 아니옵고….”
“…….”
“낯선 소리가 존경각에 들었을 때에는, 제일 먼저 대감마님이 떠올랐습니다.”
“…….”
“소인의 잘잘못은 오로지 소인에게만 그치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성규의 목소리가 어느새 느려졌다.
“소인은 덕을 봐도 대감마님 덕이고, 덕을 보지 못했어도 대감마님 덕인 처지에 살고 있습니다. 하여 소인이 저지른 잘잘못은 곧 대감마님의 이름에 누가 되는 것이옵고…, 가진 것 없는 소인에게 하늘이시고 땅이셨던 대감마님의 얼굴이, 머릿속이 혼잡한 와중에도 소인의 마음을 어지럽히기에 그랬습니다.”
한껏 타고 이제야 막 꺼지려는 장작불처럼 조곤조곤한 목소리가 우현의 등 언저리를 간질이고 있었다. 성규가 잠깐의 정적 후에 조금 웃었다.
“혹 제게 해가 일렀다면…, 소인에게만 그치지 않을 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만한 배짱 하나 없는 놈이 그동안 잘도 존경각을 들락거렸구나.”
제 성미와 맞지 않게 한껏 쳐진 목소리가 듣기 싫어 우현이 부러 삐딱하게 말을 받았다. 성규가 우현의 말에는 입을 꾹 다물었다. 성규에게서 등을 돌려 모로 누운 우현이 자세를 고치려 이불이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크게 났다.
틀린 말은 아니지 싶었다. 위험한 일인 것은 알고 있었지만 감수해 낼만한 용기는 없었기에, 어찌 보면 무책임하게 용감한 짓이라고도 생각하고 있었기에ㅡ 우현이 한 것은 독설이 아니라 정곡일 뿐이었다. 성규가 딱 다물은 입을 쉬이 떼지 못하고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그러니 너는 내게 잘 보여야 할 것이야.”
우현이 문득 정자세로 고쳐 누웠다. 그에 나란히 어깨가 닿아버려 흠칫 놀란 성규가 우현 모르게 경직되었다. 우현이 아무렇지도 않은 목소리를 내었다. 너도 알고 있지 않느냐.
“이리 위험한 순간에 너를 빼줄 수 있는 것은 생각해보니 나밖에 없다는 것을.”
“…….”
“너는 덕을 봐도 대감의 덕이고, 덕을 보지 못했어도 대감의 덕이라 일렀더냐?”
“그렇습니다.”
“틀린 말이다.”
괜히 심술이 돋은 탓에 건들거리는 목소리가 같잖다는 듯 삐뚤어져 있었다.
“네가 서장의를 피해 존경각 밖으로 달아날 수 있었던 것이 어찌 네 스승의 덕이란 말이냐? 대감이 너를 찾아 도망가라 일러 준 것이었더냐? 대감이 친히 서장의를 따돌려 네가 성균관을 빠져나가도록 시간을 벌어 준 것이었더냐?”
“…….”
“아니질 않느냐. 내 덕이다.”
하고 싶은 말은 그것이었다.
빙빙 돌려 말했지만 사실은 성규의 말에서부터 이미 심기가 어긋나있었던 우현이 못마땅히 중얼거렸다. 그러면서도 한 치의 표정 변화도 없는 얼굴을 힐끔인 성규가 조금씩 틀어 훔쳐다보던 우현의 옆얼굴에서 시선을 거두었다. 곧이어 멀뚱히 천장을 바라보았다. 결국은 나란히 천장을 보고 누운 꼴이 된 두 사람의 눈 위로는 아까처럼 어색한 공기가 둥둥 떠다니고 있었다. 성규가 침을 꼴깍 삼켰다.
그렇게 직접적으로 이르지 않아도, 오늘 있었던 그 일에 있어서는 모든 것이 우현의 덕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니 사실 우현의 말마따나 그에게 잘 보여야 하는 것도 맞았다. 단지 도헌의 덕입니다, 고맙습니다 하는 그 쉬운 말조차 어쩐지 재깍 떨어지지 않아 민망하려던 차에 우현의 심기가 엇나갔을 뿐이었다. 성규가 이불 속에 감춰둔 제 두 손을 괜스레 만지작거렸다. 그리고 잠시 후에는 제가 먼저 입을 열었다. 소인이…
“어찌 잘해드려야 도헌의 기분이 좋으시겠습니까?”
그렇게 말하면서도 민망해져오는 마음에 성규의 손가락이 속이불을 한 움큼 잡아 쥐었다. 그에 우현이 옆을 홱 치켜다보았다. 뭐야?
“뭘 어찌 잘해 줄 거란 말이냐. 그러기 전에 일단 고마울 때 하는 인사부터 해야 할 것 아냐!”
반듯이 누웠던 몸을 절반 정도 일으킨 우현이 제 팔로 바닥을 짚고 앉았다. 순간적으로 확 일으켜진 우현의 몸에, 천장을 향해 누워 평온히도 다잡고 있던 성규의 마음이 크게 일렁였다. 우현이 제 머리를 짚고 성규를 향해 모로 누웠다. 서생원. 잔뜩 심통이 난 목소리가 성규를 부르고 있었다. 성규가 저의 귀 바로 옆에서 저를 부르는 목소리에 긴장의 끈을 놓지 않으려 정신을 차렸다.
“예?”
“고마울 때 하는 인사 같은 거 없냐?”
우현이 냉큼 제가 원하는 바를 꺼냈다.
그러다 잠시 후에는 정적이 흘렀다.
고마울 때 하는 인사…? 성규의 머릿속에서 복잡 미묘한 잡생각들이 둥둥 떠다니기 시작했다. 정확히는 우현이 무엇을 바라고 한 말인지를 가늠할 수가 없어 쉽사리 반응을 내비치기가 어렵기도 하여 뜸을 들이고 있는 것이었다. 성규가 ‘인사’에 관한 고찰을 열심히 시작하려고 했을 때에는 우현의 머릿속에서도 역시나 미묘한 무엇인가가 둥둥 부유하기를 시작했다.
제가 뱉어놓고도 모르겠는 말이었다. 정확히 제가 무엇을 바라고 꺼낸 말인지도 모르겠어서 저조차도 영문을 모르겠을 때 문득 우현의 눈에 들어온 것은 저의 말뜻을 헤아리려 곰곰이 생각에 빠진 성규의 옆모습. 정확히 말하면 굳게 다물은 입술이었다.
우현이 저도 모르게 얼이 빠져 그의 곧은 코끝과 입술 선을 따라 시선을 내리고 있을 때에는 올곧게 정면을 향하고 있던 성규의 얼굴이 우현 쪽으로 덜컥 돌아왔다.
“혹시…”
“…….”
“…이런 것 말하십니까?”
저처럼 반쯤 상체를 일으킨 성규가 우현을 향해서 꼬박, 머리를 숙였다.
그러자 다시 정적이 찾아왔다. 가깝게도 마주한 얼굴 사이에서는 서로가 모르겠는 표정이 오고 가고 있었다. 느닷없이 까딱여진 고개가 이런 걸 원했던 게 아니냐는 듯 동그란 눈을 하고서 우현의 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우현이 제 눈앞에서 깜빡이며 숙여진 정수리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입술을 달싹였다.
“소간에 다녀온다!”
그러다가 벌떡 몸을 일으킨 우현이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나 이불을 걷었다. 덕분에 같이 덮고 있었던 이불이 허리께까지 걷혀지는 것을 느끼며 잘게 놀란 성규가 영문 모를 두 눈을 열심히 깜빡였다. 에이, 씨! 우현이 끝까지 언짢은 소리를 내며 성큼성큼 방을 가로질러갔다. 까무룩한 새벽녘임에도 불구하고 주위 방들을 신경 쓰지 아니한 발소리가 쿵쾅쿵쾅 툇마루를 울렸다. 우현이 청재의 마루 끝에 주저앉듯이 걸터앉았다.
한편, 방 안에 덩그러니 남겨진 성규가 큰소리와 함께 닫힌 문에 눈을 고정했다.
도저히 모르겠는 사람이었다. 도헌은. 놀란 마음에 일으켰던 몸을 다시 아주 천천히 이불 위에 뉘인 성규가 에라 모르겠다는 듯 눈을 감았다.
*
청재에 남겨진 우현이 맞은 새벽은 너무나 길고도 긴 시련이었다.
다짜고짜 소간에 다녀오겠다며 방을 나선지 한 식경(30분) 정도가 지난 시각이었다. 해가 가고 달마저도 가신 탓에 살을 에는 칼바람이 한 층 더 날카로워졌음에도 불구하고 우현의 발이 청재의 툇마루를 떠나질 못했다. 줄곧 마루 아래로 내려놓고 있던 발을 급기야 올려 두 무릎을 끌어안고서야 속적삼을 파고드는 바람이 덜 들어차는 것 같아 그나마 한숨을 돌린 우현이 애꿎은 방 안을 노려보다가 눈을 거두었다.
제가 이토록이나 잠을 못 이루는 이유가 오롯이 성규 때문만은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모든 책임은 순전히 저에게 있다는 것을 모르는 게 아니었으므로 자꾸만 미묘하게 떠다니는 마음을 쉬이 가라앉히지 못하고 마루에 걸터앉은 우현이 영문 모를 한숨을 푹푹 내쉬고 있었다. 그러니까… 서생원이.
말로 정의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머릿속의 생각으로도 답답한 속내의 말끝은 맺어지질 않고 있었다. 분명 무엇인가는 바라고 한 말이었다. 그러나 정확히는 제가 무엇을 바라고 있는지를 모르겠는 갑갑한 마음이 우현을 괴롭혀오고 있었다. 우현이 급기야는 제 머리를 싸매고 앓는 소리를 내었다. 그렇게 한참을, 차양 위로 들이차는 바람과 맞서 고민하기를 또다시 일 다경(15분)이 지난 시각이었다. 일어서서 나왔을 때처럼 벌떡 자리에서 일어난 우현이 소리나지 않게 방 문을 열어 젖혔다.
거의 다 꺼진 불씨가 자아내는 열기 덕분에 훈훈해진 방 안의 공기가 훅 하니 끼쳐왔다. 조용히 방 안에 걸음한 우현이 바깥으로 나왔을 적과는 다르게 조심스럽게 문을 닫았다. 한 식경 전만 해도 또렷한 눈으로 제 가는 곳을 보고 있던 성규의 눈이 고요히 감겨 있었던 탓이었다. 우현이 곧이어 제 자리로 들어와 이불을 들춰내고 안으로 들어갔다.
자리에 눕자 성규의 얼굴이 바로 가까이에 와 있다는 것을 느꼈다. 이제 어둠에 눈이 익어 어느 정도는 그의 윤곽이 눈앞에 잡히는 것 같았다. 우현이 제 팔을 괴고 옆으로 누워, 저의 얼굴 아래로 가만히 감겨 있는 눈꺼풀을 소리죽여 내려다보았다. 새근새근 숨을 고르느라 오르내리는 판판한 가슴이 까무룩한 잠에 빠져있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우현이 성규의 가지런히 모아진 손을 내려보다가 다시금 얼굴로 눈을 가져왔다.
이상하게 눈에 들어왔던 입술선이 어둠 속에서도 너무나 정확히 보여 딱 죽을 맛이었다. 정신을 차려보자고 찬바람을 맞으려 괜스레 바깥으로 나돌았던 시간이 무색하도록 아까와도 같은 상황이었다. 다른 게 있다면 성규의 눈이 지긋이도 감겨졌다는 것 뿐. 우현이 그의 팩 째진 눈꼬리를 내려다보다가 고개를 가까이 가져왔다.
곱게 감긴 눈꺼풀 위로 우현의 입술이 가 닿았다.
두 시진(4시간) 전, 두려움에 달아 발갛게 상기되어 눈물을 펑펑 쏟아내던 눈에 남은 열기가 그대로 우현의 입술 위로 옮아갔다. 물론 그로부터 줄곧 툭하면 눈물을 흘려냈던 탓에 조금은 부은 눈가가 부드럽게 우현의 입술에 닿았다. 그렇게 한 번, 눈 바로 아래를 따라 한기가 어룽진 뺨 위로 다시 한 번 입술을 맞추고 나니, 홀리듯 감겼던 우현의 눈도 잠에서 깨어나듯 천천히 떠졌다.
저조차도 모르겠는 기분으로, 이끌리듯 따라가 원하는 것에 맞추었던 입술이 떼어지는 소리가 고요한 방 안의 유일한 소음이었다. 여전히 얌전하게 감겨있는 두 눈을 확인하고서야 우현의 입술이 원래대로 멀어졌다.
“고마울 때 하는 인사….”
듣는 이 없는 말이 중얼거리듯 뱉어졌다.
“이런 걸 말하는 것이었다.”
고요히 들리는 성규의 숨소리에 맞춰 우현의 숨도 일정해졌다. 우현이 그의 입술선을 다시 내려다보았다.
“어릴 적에 이런 걸 배우지 아니하고 무얼 익혔단 말이더냐. 너보다 성균관의 어린 재직들이 이런 것은 훨씬…잘 알겠다.”
왜 자꾸 입술이 보이는지는 모르겠다. 우현이 성규의 옆모습을 바라보던 눈을 거두어 그처럼 바르게 누웠다. 부드럽게 닿았던 입술의 감촉이 생소해 그의 쉼 없이 뛰는 심박수가 입술 위로 옮겨간 것만 같아 하릴없이 기분이 허해지는 기분이었을 뿐이었다.
그저 평소에 나를 쉬이 흘겨대던 눈이 어떻게 생겨먹은 것은 것이기에 나를 홀렸는지, 또 그게 궁금해 한 번만 가까이 해보고 싶었음이 분명했다. 결국에는 안이하게 내린 변명은 그것이었다. 그래 그저 궁금했으니까.
자꾸만 깊어지는 새벽녘은 그 자리에 멈춰 우현만 내버려두고 해를 재촉하고 있었다. 또다시 쉽사리 잠이 오지 않아 우현이 한참동안 자리에서 뒤척이며 이불을 감싸매기만을 반복했다. 모든 것이 혼란스럽고 또 미묘하게 들뜨는 밤이었다.
*
파루(罷漏)에 가까워지도록 늦은 시각이었다.
곁에서 느껴지는 뒤척임이 멈추자 가늘게 떠진 것은 성규의 눈이었다. 때는 이미 어스름한 새벽빛이 창호문 너머로 새어 들어와 이부자리를 고즈넉이 스미고 있을 시간이었다. 성규가 또렷이 떠진 눈을 천장 위로 바로 뜬 채 입술을 물고 있었다.
아직까지도 느낌이 생경한 제 눈 위로 자꾸만 저의 손을 겹쳐 놓았다가 떼기만을 반복했다. 여기? 제 손으로 눈 위를 짚었다가 떼어보고. 또 여기? 자꾸만 쿵쿵거리며 우는 심장을 잠재워보려고도 해보았다. 성규가 불규칙하게 뜀박질하는 제 가슴팍에 마지막으로 갈 곳 없는 제 손을 조용히 얹었다.
“고마울 때 하는 인사가 아니라…그것은….”
성규가 거의 들릴 듯 말듯 한 목소리로 이불 아래로 몸을 돌린 채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그것은…,
“무엇인가를 좋아할 때 하는 인사로 알고 있사온데, 소인은.”
성규가 애먼 저의 입술을 꾹 물었다.
도헌께오서는… 어찌 어릴 적에 헛것을 배우셔서 소인의 새벽을 앗아가는 것입니까? 야속할만큼 규칙적으로 들려오는 우현의 숨소리에 한껏 제 숨을 죽인 성규가 자꾸만 제 눈꺼풀 위로 손을 얹어보았다.
헤아려보면 헤아려볼수록, 같은 자리에서 닿았던 입술이 다시금 닿아오는 것만 같았다.
*
파루[罷漏 ]
통금 해제를 알리는 북
장의[掌議]
조선시대 성균관 재생(齋生)들의 자치기구인 재회(齋會)의 임원. 동,서재에 각각 하나씩 임원을 둠.
아 |
더웡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