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차원 대 3차원
차선우X정진영
수강 정정기간이 끝난 지금 첫 수업에 지각한다는 건 그 과목 출석 점수를 포기한다는 것과 같은 뜻이기에, 급한 마음에 여유를 즐기며 느릿하게 걷고 있는 사람들을 헤치고 강의실을 향해 뛰어가던 도중 몇몇 사람들이랑 좀 부딪혔더니 뒤에서 뜨거운 시선과 진심이 담긴 비속어들이 들려온다. 씨발 소리 할 사람은 나라고요.. 어차피 계속 볼 사람도 아니고 같은 반도 아닐테니 건성으로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만 연발하며 강의실 앞에 도착하자마자 문을 확 열고 들어가니 반 안에 있던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내 쪽으로 집중되는데, 이 상황을 겪어본 사람은 알겠지만 쪽팔리다 못 해 맘 같아선 땅 밑으로 숨어버리고 싶다.
그래도 여기까지 온 이상 출석은 하고 가야지. 얼굴에 철판을 깔고 어색하게 웃으며 자리에 앉을려고 보니 교수님과 멀리 떨어진 곳에 앉고 싶은 마음은 다들 똑같은 지, 맨 앞 줄만 비어있다. 울며 겨자 먹기로 어쩔 수 없이 앞 줄, 맨 구석 쪽 자리에 앉아 시간을 보기 위해 핸드폰을 꺼내는 순간 교수님이 예고도 없이 문을 열고 들어오셨고, 놀라서 핸드폰을 떨어뜨리니 살짝 째려보시곤 앞으로 가시는데 씨발.. 이미지 좆 됐구나.
회화 수업이라 원어민 교수님일 줄 알았던 내 예상과 달리 담당 교수님은 작은 키에 단발 머리, 독수리마냥 무섭게 올라간 눈초리가 딱 봐도 엄청 고지식할 것처럼 생긴 분이셨고, 이런 말은 하면 안되지만 말씀 하시는 속도가 꼭 카세트 테이프가 늘어진 것 마냥 느릿느릿해서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답답하게 만드는 데 재주가 있으신 것 같았다. 이번 학기도 힘들겠다는 들자마자 한숨이 나왔고, 교수님이 출석부도 안 부르시는데 괜히 왔다는 생각이 들던 찰나 이번엔 조 짜기를 하신단다. 안 왔으면 큰 일 날 뻔 했네.
잘 온 거라고 자신을 위로하며 고개를 돌려 반 애들을 좀 훑어보는데 어째 반 이상이 남자애들이고 여자애들은 극소수다. 이왕이면 예쁜 여자 선배랑 조 해서 발표 준비 같이 하는 동안 눈 맞고 맘 맞고..
차선우
예?
정진영이랑 같은 조
네? 아 네..
남자들이라면 한 번쯤 해봤을 그런 상상을 하며 행복에 잠겨있는데 교수님은 그 행복을 무참히 깨버리시고, 여자 선배랑 하고 싶다던 작은 소원까지 붕괴시켜 버리셨다. 아.. 진짜 이번엔 무슨 재미로 학교 다니지? 괜히 머리카락을 쥐어 뜯고 있는데 뒷자리 여자애들의 영양가 없는 담소 속에서 언뜻 같은 조라던 사람의 이름이 들려 모든 신경을 그 쪽으로 집중해보니 오타쿠, 불쌍, 장학금.. 전혀 관련 없는 단어들을 얘기하는데 도대체 뭐가 뭔 지를 모르겠다. 반 인원이 적어서 그런가 조 짜기는 생각보다 일찍 끝났고, 서로 연락처를 교환하라는 말만 남긴 채 교수님은 그 길로 강의실을 나가버리셨다. 아니 정진영이 누군지도 모르는데 나보고 어떡하란 거야, 씨발, 씨발, 씨발!
다시 한 번 뒤돌아보니 나 빼고 모든 애들이 자기 조원을 찾아가 얘기를 나누고 있는데 나만 혼자 덩그러니 남아있으니깐 꼭 로맨스 영화에서 한 번 쓰고 버려지는 엑스트라가 된 느낌이다. 오늘 따라 헤어진 구여친이 보고 싶네.. 이십 분 사이에 한숨만 스무 번 쉰 거 같고. 어느새 연락처 교환을 끝낸 사람들이 사이좋게 얘기하며 나가고, 벌써 친해진 몇 명은 밥 같이 먹자며 난리다. 사람들이 확 줄어들어 조용해진 교실 안에 아직 어색한 지 얘기도 제대로 못 나누고 있는 두 조와, 나처럼 혼자 있는 애 하나가 보인다. 보자마자 아, 쟤가 정진영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움직이지도 않고 가만히 앉아만 있는 그 새끼 주위에 꼭 검은 먹구름이 떠다니는 거 같아 괜히 겁 먹고 다가서질 못 하고 있다가 조심스럽게 다가가 검지로 톡톡 두드렸는데 반응이 없다.
저기요..
무엄하다, 어디 감히 인간 주제에..
이 미친 놈이 지금 뭐래..? 생긴 건 멀쩡한 걸 넘어서서 존나 잘생긴 놈이 인상을 잔뜩 쓴 채 날 올려다보며 무슨 중세풍 말투를 써대는데 하늘이 공평하다는 말이 이럴 때 쓰라고 있나보다. 아무래도 너무 잘 생긴 나머지 미친 게 틀림 없어.. 아님 더위를 먹었나? 아님 내 귀가 이상.. 해진 건 아닐거고. 사실 말투는 별로 중요한 게 아닌데 처음 보는 사이에 무엄하다라니, 겁나 쌀쌀맞네. 그리고 인간 주제에? 자긴 뭐 인간 아닌가? 나 원 참, 어이가 없어서. 맘 같아선 멱살을 잡고 싸우고 싶지만 이번 학기 내 성적을 반 정도 부담하게 될 조원이기에 애써 웃어보이며 다시 용기를 냈다.
아니 우리 같은 조거든요? 번호 좀 교환 하자고요.
아직도 날 못 믿겠는지 안 그래도 얇은 눈을 더 가늘게 뜨며 한참을 노려보다 내 손에 쥐어있던 핸드폰을 낚아채가선 번호를 입력하곤 폰을 건네 받을려고 손을 뻗었더니 내 손과 폰을 번갈아 보다가 공주를 보필하는 자로서 신원 확인이 되지 않은 불결한 존재와 접촉할 수는 없다, 하곤 그대로 책상에 던지듯이 폰을 내려놓고 가방을 챙겨 나가버린다. 씨발 뭔데 저 새끼.. 존나 사람 짜증나게 하는 타입이네.. 중얼거리며 핸드폰을 보니 읽기도 힘든 프랑스어로 저장되어있다. 아 혹시 혼혈에 외국에서 살다 온 애라 말을 그렇게 이상하게 하는건가? 아무래도 과제보다 더 안 풀릴 궁금증 하나가 생겨버린 거 같다.
더보기 |
이 글을 이 망상을 쓴 글쓴이에게 바칩니다...ㅁ7ㅁ8 사실 상이라고 써두긴 했는데 아마 10화까지 쓸 거 같아요 심각한 오덕을 어떻게 표현할까 고민하다가 말투를 저렇게 설정했는데.. 진영아 미안...ㅁ7ㅁ8 잠 안 와서 쭉 써내려 간 거라 퀄리티는 기대 안 하시고 보시는 게 좋아요.. 이 뒤에 쓰는 것도 코믹이라 웃길 거고.. 아무튼 바진 행쇼. 2차원 캐릭터에 지지 말고 차선우 힘 내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