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고... 힘들다. 고작 오전 시간 지났을 뿐인데 모두 지쳐서 나가 떨어진 13 남매였다. 꼬리가 축 쳐져서 바닥에 널부러진 비글들부터, 내가 크리스티나 목욕시키는 동안 메이든이랑 격한 레이스 펼치느라 넋이 나간 듯한 황자도랑 오세훈. 민석이 오빠랑 준면이 오빠는 안 그래도 많은 13남매 + 4남매 까지 챙기느라 다크서클이 턱밑까지 내려 왔다. 삭신이 쑤시네, 쑤셔... 역시 대한민국의 위대한 어머니들. 엄마, 사랑해요. 조금 전까지도 지치지 않고 기어다니던 메이든조차 이제는 지쳤는지 쇼파 위로 올라와 내 품에 파고들었다.
"배고파아..."
"응? 메이든. 배고파?"
"우우웅...배고파.."
"애기들은 뭐 먹어야 돼지?"
"떡뽀끼!!!!!"
"...떡볶이?"
그리하여 결정된 점심 메뉴는 바로 ★떡볶이★!!! 13남매 대표 요리사 도경수 쉐프의 주도 하에 장보기 팀과 요리 팀이 나뉘어져 일사분란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나도 요리할래! 요리! 요리하겠다고 난리를 쳤음에도 불구하고 도경수는 단호했다.
"됐어. 너는 장 보러 가"
"예, 쉐프..."
존나 니가 신하균이세요? 아주 단호박으로 스프 만들 기세네. 니가 신하균이면 내가 공효진이다!!
결국 시무룩해져서 메이든을 안고, 예흥이 오빠랑 변백현이랑 현관을 나서는데. 음? 이 조합 뭔가 불안한데... 내가 느낀 찜찜함을 그대로 느낀 건지 준면이 오빠가 뒤늦게서야 우리를 따라나섰다. 역시 결제가 필요할 때는, 준멘! 마트에 도착하자마자 우리의 눈을 사로잡는 것은...카트였다. 변백현과 나의 눈이 동시에 반짝였다. 단언컨대, 카트는 최고의 놀이기구입니다.
"우와아앙!!!"
"음료수 가판대까지 늦게 가는 사람이 딱밤!!"
메이든을 태운 덕에 한 발 늦게 도착한 내가 딱밤을 면하려고 날뛰는 동안, 우리 쪽으로 달려온 준면 오빠에 의해 상황 종료.
죄송합니다, 죄송해요. 하하. 얘들이 원래 이런 애들이 아닌데... 하하.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주변의 아주머니들에게 사과를 하던 준면 오빠가 우리 둘의 뒷덜미를 잡았다. 으억! 오빠! 미안해! 하..하하. ㅇㅇㅇ. 변백현. 등증 재료 스르 그르..(당장 재료 사러 가라)
결국 예흥이 오빠, 준면이 오빠, 그리고 메이든을 안고 있어야 해서 손이 없는 나와 변백현. 이렇게 따로 떡볶이 재료들을 사기 위해 흩어졌다. 고추장... 고추장... 어, 여기 있다! 고추장을 골라 카트에 담는데 갑자기 변백현이 카트에 담긴 고추장을 끄집어냈다.
"아 왜!"
"이거 말고 이거 해, 이거."
"뭐가 다른데!"
"어! 태양초로 해야지 태양초! 당연한 거 아님?"
"태양초가 뭐가 다른데!"
"이름이 예쁘잖아"
아 저 진짜 병신 저거 아오... 동글동글한 뒷통수를 한 대 때려줄까 말까 가열차게 고민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뒤에서 마트 아주머니의 경쾌한 목소리가 울렸다.
"꽃등심이 100그램에 9900원~ 10000원도 아니고 9900원~ 오늘만 9900원~"
순간 번뜩이는 육식 본능. 변백현과 눈이 마주쳤다. 니 생각, 내 생각. 똑같아. 메이든을 고쳐 안고 변백현과 다정하게 카트를 몰며 꽃등심 아주머니 쪽으로 천천히 다가갔다. 불판 위에서 지글지글 끓는 저 아름다운 자태를 보시라.
"아휴. 신혼부부에요? 애기가 너~무 귀엽네. 이거 한 번 드셔보고 가!"
으..으즈므니...신혼부부라니요. 제가 이런 비글이랑 결혼해서 살림 차릴 바에야는 평생 솔로 만세! 커플 지옥!을 외치며 독신으로 살테야.
"어머. 자기야~ 고기 정말 맛있겠다~ 그치?"
"그러게. 우리 돼지, 아까 그렇게 먹었는데 또 배고픈가보네~?"
띠밤... 은근슬쩍 디스하지 말아줄래? 내 혀를 잘라버리고 싶은 것을 꾹 참고 코맹맹이 소리를 내며 변백현에게 자기야, 라고 부르자 카트를 밀고 있지 않은 다른 손으로 고기를 집어 내게 내미는 변백현이었다. 아. 입 안에서 퍼지는 달콤한 육즙. 이 맛이야 이맛ㅠㅠㅠㅠㅠㅠㅠㅠ. 그렇게 나 한 점~ 너 한 점~ 메이든 한 점~ 해서 불판 위에서 잘 익고 있던 고기들을 모두 해치우고서야 시식 코너에서 발길을 돌린 우리 셋이었다.
***
무사히 장을 보고, 준면 오빠의 성스러운 카드, 일명 '준카'로 계산까지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다. 어느새 보글보글 소리가 나고, 맛있는 냄새가 나는 게... 도쉐프의 솜씨를 제대로 확인해볼 수 있는건가! 사실 도경수가 처음부터 요리를 잘했던 건 아니다. 생긴거랑은 다르게 요리하는 걸 좋아해서 자주 우리한테 무언가를 만들어주기는 했지만, 사실 진짜 먹을 만해서 먹은 게 절반, 도경수의 시크시크열매 쳐먹은 표정에 못 이겨 억지로 먹은 게 절반이었다. 그러니까 도경수가 딱히...요리를...잘하는 건 아니었는데. 도경수의 요리에 대한 열정을 불타오르게 한 사건이 있었지. 바로 그 레전더리한 '족발 사건'..! 별 생각 없이 세훈이랑 경수 요리실력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던, 평화로운 어느 밤이었다. 야, 근데 세훈아. 너는 경수 요리 중에 뭐가 제일 맛있어?
"경수 형이 사온 족발."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그리고 둘이 한참을 쳐웃었더랬지. 마침 나갔다 들어오던 도경수는 현관에서 그 얘기를 전부 들었더랬지. 그대로 집 나가서 다음 날 저녁까지 들어오지 않았더랬지. 들리는 소문으로는 자신의 요리 실력에 대해 고뇌를 하다가 요리 학원에서 한 달 권을 끊었더랬지...그 후로 매일 저녁마다 비밀스레 어딘가를 들락날락하던 도경수는 꼬박 한 달이 지난 후 저녁에 우리에게 눈물의 족발을 대접했다고 한다. 그 얘기는 아직도 남매 사이의 암묵적인 침묵 지대에 남겨져 있다.
"우리 왔다!"
식탁 위에 떡볶이 재료가 잔뜩 담긴 봉투를 내려놓자 봉투에서 하나하나 재료를 꺼내보는 도 쉐프. 근데 뭔가 표정이 야리꾸리한 게...응? 떡볶이 만드는데 웬 카레?
"야. 카레 누가 사왔어?"
"카레? 내가 사완눈데?"
"오빠? 카레 누가 사오랬어?"
"응! 경수가 카레랑...떡이랑...사오랬는데?"
...형...그건...도 쉐프의 표정이 순식간에 구겨졌다.
"가래떡이야..."
"웅! 카레떡!"
"아니 형...가래떡...가래...떡..."
"구로니까! 카뤠떡! 사왔눈데!?"
"후...그래..."
그리하여 완성된 도 쉐프표 카레떡볶이. 와! 존나 맛있겠다! 하...하하... 똥 마려운 강아지마냥 안절부절하고 있는 도 쉐프와, 우물쭈물하는 열일곱 명. 그 대표로 민석 오빠가 제일 먼저 용감하게 젓가락을 뻗었다. 우물우물하는 오빠의 표정이 잠깐 요상해졌다가...
"어. 맛있는데?"
그리고 다음 타자인 메이든도...
"마이쩡!!!"
그제서야 도 쉐프의 표정이 한결 편안해졌다. 오오, 맛있어!!! 메이슨, 메이빈, 메이든, 그리고 시크한 크리스티나도 모두 맛있게 떡볶이를 먹기 시작했고, 애기들 보느라 평소보다 에너지를 아홉 배로 더 쓴 형제들도 굶주린 하이에나마냥 떡볶이를 흡입하기 시작했다. 역시 우리의 도 쉐프! 나중에 취직 못하면 경수랑 떡볶이집이나 하나 차려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