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렘의 법칙_08] 공식만 알면 관련 문제들은 알아서 풀리는 수학문제처럼 현실도 그런 식이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나 이론은 빠삭해도 실전에선 무너지기 십상인 게 바로 현실이다. 대표적으로 사랑이 그렇다. 나 역시도 김효진 앞에서 그동안의 수많은 연애 지식들이 쓸모없었다는 걸 깨닫는다. 〈좋아하는 상대가 생기면, 먼저 자연스럽게 약속을 만든다.> 분명 인터넷에서 본 연애성공 팁 2번에는 그렇게 써 있었는데 그게 말처럼 쉬운 게 아니었다. 결국 김효진이 먼저 던져준 기회를 잡는게 최선이었다. “맛있어 여주야?” “네? 아, 네 맛있어요...” 정신을 차려보니 고깃집이었다. 나랑 밥 먹으러 가자, 그 말에 이게 꿈인가 생신가 고개를 마구 끄덕였는데 어쩌다보니 앞에는 처음 말을 섞는 선배 둘도 함께 앉아있다. “그래서 말 좀 해봐. 너네 진짜 무슨 사이냐니까?” “몇 번째 물어. 승준이 통해서 알았고 그냥 같은 수업 듣는대잖아. 이젠 나도 대답하겠다.” 조금 전, 밥 먹으러 가는 거면 같이 가자는 그 제안을 흔쾌히 승낙한 게 지금에야 후회가 된다. 됐다며 그 둘을 보내던 김효진의 말을 따랐어야 했는데. 정말 괜찮겠냐고 재차 물을 때라도 거절할걸. “아니 우리 효진이가 여자랑 단둘이 있는 건 오랜만이니까. 그래서 그렇지.” “...근데 난 너 창윤이 여자친군 줄 알았는데 아니었나보네.” “창윤이? 그게 누구?” “너 군대 갔을 때라 모를걸? 있어. 우리 과 후배.” 끼어들 틈조차 주지 않는 두 남녀의 대화. 어색히 웃으며 슬쩍 바라본 김효진은 말없이 고기만 구우며 맛있게 먹는다. 지극히 내 취향인 옆태를 넋 놓고 감상하게 된다. 그나저나 저 언니는 어디서 봤다 싶었는데 이제야 기억이 났다. 제작년 엠티에서 창윤이 벌주 먹이는데 가장 적극적으로 동참했던 그 분. “참, 그럼 창윤이도 복학했겠네?” “아, 네. 걔도 이번에 같이 했어요.” “근데 있잖아. 너 창윤이랑 사귀는 거 진짜 아니야? 아니, 예전에 다들 그런 줄 알고 애들 은근 아쉬워했거든.” “왜... 왜요?” “왜냐니. 창윤이 귀여워서 인기 많았잖아. 뒤에서 좋아하는 애들 꽤 있었을걸?” 신난 표정으로 쏟아내는 말에 걔가요? 라고 되물음하려다 고개만 흔들어보였다. “진짜 그런 거 아니...” “친구래. 고등학교 때부터.” “......” “그치?” 순간 겹쳐 들려온 목소리의 주인공은 김효진이었다. 내 공기밥 위에 노릇노릇한 고기 한 점을 올려주며 싱긋 웃는다. 그 모습에 숨을 삼키고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하마터면 묘하게 흘러갈 뻔한 기류를 깨고 쌈을 입 안 가득 문 남선배가 끼어든다. “그래. 내가 봤을 땐 이 쪽을 더 의심해봐야 한다니까.” “넌 다 먹고나 말하지? 됐다. 이 얘긴 그만하고, 우리 소주나 한병 깔까?” “콜.” 나와 자신을 엮는 말엔 김효진이 별다른 부정의 표시가 없다는 것에 왠지 기분이 들뜬다. 벨을 누르는 틈을 타 힐끗 보다 눈이 마주쳤다. 약간 당황하자 여기 진짜 맛있지, 입모양으로 물으며 웃는다. 눈꼬리가 예쁘게 휘어진다. “소주 한 병이랑 잔 세 개요.” 설레는 마음을 애써 누르고 있을 때였다. 선배의 주문에 넵 하며 돌아서는 알바생을 김효진이 붙잡았다. “저, 잔은 그냥 두 개만 주시고 사이다도 주세요.” “...뭐야, 우리 둘만 마시라고? 여주도 원래 안 마셔?” “그런 건 아니고, 오늘은 그냥 사이다 마시고 싶대.” 오가는 대화에 멀뚱히 있으니 그치? 그러면서 김효진이 내 쪽으로 살짝 몸을 기울인다. 그렇게 가까워지자, “쟤네랑은 같이 안 마시는 게 좋아. 무조건 취할 때까지 먹이거든.” 몰래 내게만 들리도록 나긋하게 일러준다. 무섭다는 듯 말하는 그 말투가 꽤나 귀엽다. 그리곤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메뉴판만 만지작댄다. 그 모습을 포착한 선배가 의심의 눈초리로 물어온다. “왜, 너네 뭔 얘기했어.” “아냐, 우리 계란찜도 시킬까? 나 아직 배고픈데.” 귀엽게 배를 문지르는 김효진을 보며 내 입가에는 미소가 퍼진다. 별 것도 아닌 작은 일에 이렇게나 기분이 한껏 부푸는 것. 이런 게 바로 누군가를 좋아하는 감정일까. 스무 살 때 몇 달간 술집 알바를 했던 이창윤 말에 따르면, 취한 사람 관찰하는 재미가 생각보다 쏠쏠하다던데. 맞는 말 같기도 하다. 거하게 취한 두 사람을 보고 있자니 한 방울도 입에 대지 않은 나까지 취하는 기분이다. 잠시 계산서를 뽑으러 간 김효진이 자리를 뜬 틈을 타 밖으로 나왔다. 서늘한 바람이 머리카락을 흐트려놓는다. 그와 함께 문득 낮의 기억이 파고든다. 이상하리만큼 자꾸만 머릿속을 차지하려하는 이창윤 생각을 밀어내보려던 그 때, “여기서 뭐해?” 언제 따라 나온 건지 내 옆자리에 앉는 김효진이었다. 잔잔했던 공기에 사뭇 긴장감이 더해진다. 잠깐 바람 좀 쐬려고요 얼버무리며 대답하면, 기다렸다는 듯이 또 한 번 바람이 인다. 머뭇거리다 입을 열었다. “저기 오빠, 그 엠티 있잖아요... 창윤이 이름은 빼야할 것 같아요.” “.....” “창윤이한테 제대로 안 물어보고 말씀드렸던 거든요. ...죄송해요.” 말할 타이밍을 못 잡고 있다가 이제야 꺼내놓은 이야기였다. 이랬다저랬다 민폐만 끼친 것 같아 미안해지는데 그는 외려 고개를 갸웃거리며 묻는다. “창윤이 갑자기 무슨 일 생긴 거야?” “아뇨? 그런 건 아닌데 왜요?” “아까 전화 돌렸을 땐 간다고 했댔거든. 그래서 같이 갈 수 있는 줄 알았는데.” “어... 아까 언제요?” “아까 네 시쯤이었나. 우리 회의할 때쯤.” 그 때라면 정말로 안 갈거라던 이창윤을 내가 같이 가자고 열심히 졸랐던 때 이후다. 결국 실패했었는데 뭐야 이창윤. 언제는 절대 안 갈 것처럼 하더니. 들려온 말에 기분이 묘해진다. 아 그럼 같이 가는 건가봐요, 얼버무린 내 표정변화를 읽은 김효진이 살풋 웃는다. “그런 거였어도 미안할 거 없어. 오히려 같이 가준다고 해줘서 내가 더 고맙지.” “......” “그러니까 미안해하지말고, 알았지?” “네에...” “대신 앞으로 나한테도 편하게 대해줘. 여주야.” “......” “나도 너랑 친해지고 싶거든. 많이.” 머리 위에 앉은 나뭇잎을 떼 주는 손길에 심장이 내려앉는다. 마음을 잔뜩 흔들어놓고선 무해하게 웃는다. “저, 전 먼저 들어가볼게요.” 더 있다간 심장이 터질 것 같아 벌떡 일어섰다.그러자 김효진이 당황한다. 그 모습을 보며 도망치듯 자리를 떴다. 아마 지금 거울을 보면 얼굴이 잔뜩 붉어져있을게 분명하다. 그 돌아서는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던 효진은, 그 때를 떠올린다. 서툴렀던 스물한살, 첫사랑이었던 누나와 헤어지고 무작정 신청했던 입대를 일주일 앞뒀던 날. 그 누나는 다른 사람에게로 마음이 돌아서놓고 되려 효진의 탓을 했다. 하지만 헤어진지도 벌써 한달이 다 되어갔기에 무뎌지고 있는 줄 알았는데, 우연히 누나가 그 사람과 함께 있는 모습을 보자 괜찮지가 않았다는 걸 깨달았다. 발길이 닿는 대로 걸어 도착한 곳은 누나를 처음 만났던 도서관이었다. 비가 올 것 같았다. 멍하니 벤치에 앉아있으니 정말로 얼마 지나지 않아 툭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삽시간에 빗줄기는 굵어졌으나 피할 생각이 들질 않았다. 빗소리에 다들 분주하게 뛰어다니던 그 때, 조금 떨어진 곳에서 남녀의 목소리가 오갔다. “야 이창윤 비 많이 오잖아. 그러게 너도 우산 챙기라고 했지.” “이 정도면 하나로 써도 돼. 금방이니까 그냥 가자.” “내 우산 작아서 저번에 둘이 쓰다가 다 젖은 거 기억 안나?” “아 알았어 알았어. 그럼 기다리고 있어봐.” 뛰어가는 발걸음 소리가 점차 멀어졌다. 아마도 남자의 것인 듯 했다. 그런데 얼마 후, 뒤에서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까 남자와 투닥대던 그 여자였다. “저기요.” “.....” “저기요?” 뒤돌아보지 않았는데도 굴하지 않고 말을 잇는다. “이쪽으로 들어와 계시는 게 좋지 않을까요. 비 다 맞고 계신데...” “...괜찮아요.” 상대할 기분이 아니라 짤막하게 대답하니 더 이상 말이 없길래 간 줄 알았는데, “그러다 감기 걸려요.” 여자는 다짜고짜 뒤에서 우산을 내밀며 쥐어주더니 무슨 말을 할 새도 없이 재빨리 제자리로 뛰어갔다. 황당해 우산만 붙들고 있는데, 곧이어 돌아온 남자가 놀란 표정으로 여자를 이리저리 살폈다. “뭐야 너 왜 비 맞았어? 우산은?” “이거 크니까 그냥 이걸로 같이 쓰고 가자.” “어? 야.” 그 여자는 남자의 팔을 잡고 무작정 휙 반댓 방향으로 이끌었다.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봤다. 고맙다는 말도 못했는데. 그게 효진이 기억하는 여주와의 첫만남이었다. 그렇게 시간은 속절없이 흘러갔다. 간만의 휴가라 학교를 잠깐 들렀다. 도서관에 두고 올 게 좀 있어서 들렀다 나오는데, 반대편에서 어디선가 들어본 목소리가 들려왔다. “응. 나 지금 올라가려고. 방에 있어? 안 먹었지. 같이 먹자. 그래.” 천천히 뒤를 돌았다. 그 때 봤던, 자신에게 우산을 내밀었던 그 여자애가 맞았다. 책을 머리 위로 올리며 한숨을 쉬는 그 애를 향해 자신도 모르게 다가섰다. “저기요.” “......” “이거 쓰고 가세요.” 이유 모를 행동이었다. 누나에게 이별을 통보당한 그 날 이후, 상처받는 게 두려웠다. 누구도 좋아하지 않기로 다짐했었다. 분명 그랬는데. 자꾸 다가서게 만드는 여자애가 있다. 고깃집 안으로 들어간 그 뒷모습을 눈으로 곱씹는다. 지금 이 기분은 뭘까. 효진은 그 답을 알 것만 같아 복잡해졌다. 화장실 거울을 통해 들여다 본 얼굴이 아직도 발그스름하다. 또 도망은 왜 친거지 나. 한숨을 내쉬며 자리로 돌아가는데 술 좀 깼는지 무언가 대화 중인 두 선배들의 모습이 보였다. “근데 효진이는 왜 연애 안하지? 자기 좋다는 애들도 많은데.” "그러게. 근데 걔가 워낙 철벽이잖아." “설마 아직 못 잊은 건가.” “누구... 아. 그 언니?” “어. 많이 좋아했던 것 같던데...” 방금까지 하늘로 둥둥 떠다녔던 심장이 덜컹 추락하는 기분이었다. 듣지 말아야 할 걸 엿들어버린 기분. 뒤를 돌아 나가려다 누군가의 따스한 품과 부딪쳤다. “아직 안 들어가고 있었어?” 하필 그건, 조심스럽게 잡아주며 다정하게 웃는 김효진이다. 아니에요,하며 그의 뒤를 따랐다. 마음이 물에 젖은 솜뭉치마냥 무거웠다.
이런 글은 어떠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