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 말이 뭐야?"
아침부터 느닷없이 잠시 보자는 지선이의 문자에 잭슨이 말 없이 고민하다 <알았어.> 라는 딱딱한 답을 하나만 보내고는 깊은 생각에 잠겼다.
요 몇 일을 거의 감정없이 지낸 듯 하다. 지선과 있어도 의무적으로 대답하고 의무적으로 밥을 먹고 그랬던 것 같다. 거의 3년을 만난 지선이라 그런가 이제는 딱히 그런 설렘이 없던 것 같다. 연애 초반의 수줍음이나 뭔가를 하나하나 같이 해간다는 설렘.. 그런 거. 아마 공부를 같이 하거나 일을 하며 가볍게 만나는 친구들을 만나는게 더 재밌고 설렜던 것 같다. 사실 그래서 잠시 다른 여자와 만났었다. 나쁜 짓이지만 지선과는 다른 감정이였다. 의무적인 그런 관계보다는 뭔가를 시작하는 도전하는 기분이였다. 첫 연애를 시작한 사람들은 아마 알테지, 그런 설렘의 기분이 무엇인지. 물론 지금은 그녀와의 관계를 끝냈다. 내 스스로도 잘못된 것이란 걸 알았고, 지선에 대한 감정과 그녀에 대한 감정이 다른만큼 그녀에겐 내 맘이 그리 오래 붙지 않았다. 아마 지선과 나 사이에는 권태기가 온 것일까? 정말 단순한 권태기일까? 아님 정말 헤어질 때가 온걸까. 지선이 싫거나 미운건 아니다. 좋다. 아직까지도 지선이 이쁘게만 보이고 멋있다 느낀다. 지선이는 정말 아름답고 사랑받을 자격있는 여자다. 근데 그 사랑을 줄 사람이 내가 아니라는 거지. 요즘 들어 그런 기분이, 생각이 자주 든다. 과연 지선이의 곁에 내가 있는게 옳은걸까? 사실 복잡하다. 지선을 두고 이런 고민을 한다는 자체도 지치고 뭣하러 이런 생각을 할까 라는 생각도 들지만, 생각이 끊이질 않는다. 지난 3년의 시간이 허비인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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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선이의 연락에 잭슨은 당연한 듯 자연스럽게 지선이의 자취방으로 갔고 지선을 마주했다. 꼴에 커플이라고 그런걸까, 둘은 전체적으로 검정색이 가득한 옷을 입고 있었다. 어서와, 오느라 수고했겠다. 지선이 잭슨이 집 안으로 들어올 수 있도록 문을 활짝 열어줬다. 지선이의 말에 잭슨은 실실 웃으며 너희 집 오는게 한두번이냐-, 안 힘들어. 라며 집 안으로 들어온다.
"차 끓이고 있는데, 녹차 먹을꺼지?"
"그래."
"앉아있어. 금방 준비해갈게."
역시. 잭슨은 속으로 생각했다. 역시 지선이는 날 잘 알아. 지선이 금방 차를 내오고는 잭슨의 앞에 차를 내놓는다. 고맙다는 형식적인 대화가 오가며 잭슨은 탁자에 앉아 차를 조금씩 들이켰고 지선이는 탁자의 건너편에 있는 침대에 앉아 가만히 잭슨을 쳐다봤다. 잠시 정적이 있자 둘은 가만히 서로가 아닌 다른 곳을 응시했다. 아마 서로 무슨 마음인지 알아서 그런걸까. 정적은 더 짙어져갔다.
"할 말이 뭐야?"
잭슨이 먼저 정적을 깼다. 잭슨의 물음에 지선이는 잭슨을 바라봤고 그렇게 또 잠시동안 둘은 서로를 뚫어져라 응시했다. 그리고 지선이 먼저 픽- 하며 살짝 웃음을 보였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너, 기억나니?"
"뭐?"
"우리 마지막으로 싸운 날."
"......."
"기억나지?"
기억이 안날 수가 없지. 둘의 마지막 싸움은 저번주였다. 사실 별 거 아닌 싸움이였다. 지선이 실수로 잭슨의 옷에 물을 흘렸었고 그날따라 기분이 좋지 않았던 잭슨이 크게 화를 냈었다.
"... 기억나지."
"무슨 이유였는지도, 기억나?"
"응. 그건 내가 미..."
"우리 그렇게 별 거 아닌걸로 몇 번을 싸웠는지 알아?"
"......."
"... 나도 몰라."
대답 없는 잭슨을 보고 지선이 대답했다. 근데, 모를만해. 우린 너무 수도 없이 싸워왔어. 너무 많이, 싸워왔어. 벽을 보고 말을 뱉는 지선에 잭슨은 아무 말도 뱉지 못했다. 왜냐면 잭슨 또한 지선이의 말에 공감했고, 그의 말에 둘 다 이 상황에 지쳤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처음 싸웠을 땐 지선을 사랑하는 맘에 화를 냈었다. 지선이 걱정되서, 지선이 다른 남자들과 엮이는게 싫어서, 지선이 다치는게 싫어서. 그런 이유로 화냈었다. 그리고 그땐 내가 화를 내면 지선이 울기도 했는데 그 모습을 보면 바로 맘이 사그라들어 오히려 내가 더 미안했었다. 지선을 울렸다는게 너무 싫었고 미안했다. 후에는 화내는 이유가 달라졌다. 그냥 욱하는 거 뿐이였다. 내가 싫어하는 걸 해서, 귀찮아서. 뭐 대부분 그런 이유로 화냈었다. 그리고 역시나 그런 상황이 생길 때마다 지선이는 눈물을 보였었고 난 그런 상황이 반복되다보니 나중엔 지선이 우는 모습을 봐도 지겨웠고 드는 생각이라곤 '재는 또...' 라는 생각 그 뿐이였다. 그때부터 지선이 울어도 달래주지 않아서 그런가 나중엔 지선도 우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아, 지금 생각해 보니 나의 중심이 지선에서 나로 변했던 것 같다. 아마 지금 이런 생각을 하면서도 지선이에게 화가 나는 것 또한 나의 중심이 지선이 아니기 때문이겠지?
한참을 서로의 대화가 오가지 않았을까. 지선이 다시 먼저 입을 열었다.
"너는 도대체 누굴 생각하니?"
아마도 내가 생각하는 건.. 그래, 정말 누굴까? 나도 모르겠다. 난 도대체 누굴 그리워하고 누굴 생각할까? 예전의 나를 그리워하는걸까? 아님 예전의 지선을 그리워하는걸까. 난 나를 생각하는걸까, 지선을 생각하는걸까. 사실 나도 잘 모르겠다.
"... 넌 도대체 뭘 생각하는거야?"
사실 요즘 별 생각 없다. 아, 가끔 그 생각은 한다. 나와 지선이 같이 가정을 꾸린다면 어떨까? 행복할까? 아니 지금 같을까? 사실 그것도 잘 모르겠다. 아니, 사실은 답을 알고있다. 근데 아마 부정하고 싶은 것 같다. 인정하기 싫은 거 겠지. 서로가 서로를 놓고있다는 걸. 언젠가 한 번 지선이 내게 물어본 적이 있다. 왜 자기보다 자신의 엄마에게 더 잘하고 사랑하냐고. 왜냐면.. 지선이의 엄마에게서 지선이의 모습이 보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마 그 분이 지선이의 미래와 닮지 않았을까. 난 사실 지선이 행복하길 바란다. 지선이 행복하면 된다. 지선이의 행복이 내 목적일 수도 있다. 내가 이렇게 열심히 공부하고 일을 하는 것도 지선이에게 행복을 주기 위해서일거다.
"넌 날 사랑하니?"
....... 사랑한다. 아마 사랑할거다. 아마.. 아마도, 그럴거다. 아니, 사랑한다. 그러는 너는, 날 사랑하나? 우린 지금 같은 곳을 보고 걷지 않지. 우린 연인이란 이름으로 각자 다른 길을 보고 있지. 사실 우린 이미 지칠대로 지쳤어 서로에게. 우린 이미 오래 전부터 각자의 길을 가려 길 앞에 서있어. 우린 여기서 끝내야하는게 맞아. 정말로 이제 서로의 관계를 정리하고 각자의 길을 가야 해. 내가 아닌 다른 남자가 널 위해 꽃을 사고 웃을을 줘야하고, 나 또한 너가 아닌 다른 여자와 함께 행복을 느껴야해. 우린 서로가 낳은 최고의 실수야. 우린 너무 먼 길을 와버렸고 다시는 돌아갈 수 없어. 우린 서로에게 너무 많이 지쳤어. 우린 서로에게 맞지 않은 답이야. 우린 정말 헤어져야해. 각자 갈 길을 가야해. ....... 다만 문제는, 서로 손을 놓지 못한다는 거야.
지선과 잭슨이 대답없이 서로를 가만히 응시한다. 잭슨은 생각만 가득했지, 입 밖으로 아무 말도 뱉지 않았다. 그에 역시나 지선이는 다시 지쳤다는 듯 한숨을 뱉었다. 도대체 뭘 바란걸까. 지선이 다시 한 번 한숨을 쉬고는 바닥만 뚫어져라 쳐다본다. 잭슨은 여전히 그런 지선이만 쳐다봤고, 끝내 지선이 고개를 들어 입을 열었다.
"우리 이제 그만, ... 헤어지자."
이제 그만, 우리 서로 각자 갈 길 가자. 지선이 뭔가 많은 걸 포기한 듯 어깨를 축 쳐버리고는 다시 고개를 떨군다. 잭슨은 놀란 듯 눈만 커지고 역시나 아무 말도 뱉지 못했다. 지선이 자리에서 일어나 중얼거리며 발을 옮겼다. 난, 난 모르겠다. 우린 이만 아닌 거 같아. 난, 난... 도저히 모르겠다. 지선이 중얼중얼 거리며 눈망울에 눈물을 고인 채로 지친 듯한 말투로 말들을 뱉으며 옷을 슬슬 챙겨 입고는 현관문 쪽으로 향한다. 난, 난.. 정말 모르겠다.
"안 헤어져."
집을 나가려는 듯 급히 현관문으로 발을 옮기는 지선이의 팔목을 잭슨이 단단히 잡는다. 그리고 잭슨이 말을 뱉자 둘이 눈을 마주한다.
"안 헤어져."
"......"
"사랑해."
".... 뭐..."
"내가 너 사랑해. 사랑해."
잭슨이 흔들림없이 지선을 바라보며 말을 뱉었다. 그에 지선이의 눈이 이리저리 흔들렸고 끝내 눈물을 보였다. 아마 둘은 언제까지 이 짓을 반복할거다. 그리고 서로 그럴 거라는 걸 알고있다. 예전같이 사랑하지 않고 감정이 많지 않겠지. 하지만 그렇다고 서로를 절대 놓을 수 없다. 결국 자신의 반은 서로이니까. 그냥 서로는 서로의 최고의 실수인 걸. 그냥 그대로 서로가 지고 가야할 짐인거다. 복잡한 생각 뒤로 마음 먹먹해 울고있는 지선을 잭슨이 가만히 지켜보다 안아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