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루감화서
w.규닝
06.
기침! 기침! 카랑카랑히 아침 공기를 가르는 재직의 목소리에 아무렇게나 발을 뻗고 자고 있던 우현의 눈이 슬그머니 떠졌다. 기침이요! 청재 앞마당을 뛰어다니며 이 방 저 방의 앞에다 대고 지르는 악소리가 우현의 방 앞까지 다가왔다 또 멀어져갔다. 우현은 졸음이 덕지덕지 묻은 얼굴로 멀뚱히 천장을 바라다보았다.
그러다가 문득 제 옆자리가 시원하게 걷혀진 것을 느껴 화들짝 옆을 돌아보았다. 서생원! 그러나 우현이 급하게 돌아 본 곳에는 가히 쥐새끼 한 마리의 그림자조차 내비치질 않았다. 우현이 어리둥절한 눈을 꿈뻑이며 다 식은 화로와 제 옆자리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끊이질 않는 생각과의 사투 끝에 까무룩 잠이 들었던 새벽, 그 때까지도 옆 자리에서 부스럭거리던 기척이 여적지 제 귓가에 들리는 것만 같은데 누웠던 이는 온데 간데 없었다.
꿈결인가 싶었다. 모든 게 꿈이었어서 애초에 이곳에 없어야 할 사람이 맞는 건지…, 그것이 아니면 파루(罷漏)가 울리자 참 쥐새끼처럼 반궁을 빠져나간 것인지를 알 수가 없었다. 워낙 어스름했던 새벽녘의 공기가 떠오르면서 제가 마치 꿈속을 다녀갔던 것이 아니었을까 하는 착각마저 자처하기를 시작했다. 우현이 한참동안이나 석고처럼 자리에 굳어 두 사람 몫으로 넓게 펴 두었던 이불의 남은 자리를 손으로 쓸어보았다.
“그래. 꿈이었다.”
우현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꿈이었기에 내가 그리했지…, 미치지 않고서야 제정신으로 내가,”
우현이 밤새 머리맡에 두었던 자리끼를 확 들이킨 후에 입술을 닦았다.
꿈이었기에 망정이지. 다행이다. 마침내 우현이 제 가슴을 쓸어내리며 허하게 웃었다. 자칫하면 제 스스로 도(道)가 아닌 길을 선택하려 했음에 자꾸만 제 입에서 헛웃음이 터져나오려는 까닭이었다.
*
어둑어둑한 새벽길에 뒤숭숭한 마음을 떠안고 집에 도착한 게 두 시진(4시간)도 지나지 않아 다른 옷으로 갈아입은 성규가 신을 갖춰 신었다. 다 헤진 신의 뒤축이 잘 맞아 들어가지 않아 한동안을 그것과 씨름하느라 성규가 앉은 오래된 마루가 삐걱거리는 소리를 냈다. 결국은 그것을 아무렇게나 구겨 신고 자리에서 일어나자 간밤에 뒤척이느라 결린 어깨에 통증이 느껴져 왔다. 성규가 뻐근한 어깨를 한 바퀴 돌렸다.
저잣거리는 아침부터 북새통을 이뤘다. 피곤한 발걸음을 재게 놀리던 성규가 북촌 웃마을을 돌아나가면서 자꾸만 넋을 잃다 챙기다를 반복했다. 성규의 뒤주머니에 들린 몇 권의 서책들이 달랑거리며 그의 등에 부딪혔다.
“안색이 좋지 아니하구나. 활인서에서 몸께나 썩히고 오는 게냐?”
수의 대감이 제 앞에 꿇고 앉은 성규에게 물었다. 성규가 자세를 고쳐 앉으며 도리질을 쳤다.
“아닙니다. 등창 환자들이 많아 고초를 겪었던 것은 맞사옵지만 그 탓이 아니오니 염려치 마십시오.”
“그 탓이 아니라 함은…, 역시 공부 쪽이로겠구나.”
대감이 제 턱수염을 만지작거렸다.
“네 뒤주머니가 무거워 보이는 걸로 봐서는 말이다.”
그 말에 흠칫 놀란 성규가 메고 있던 뒤주머니를 슬그머니 등 뒤로 밀어 넣었다. 혹 무엇이 들었는지를 규명해오기라도 한다면 큰일이기에 눈에 띄지 않게끔 뒤주머니를 보이지 않게 만든 성규가 어색하게 웃으며 그렇습니다, 하는 대답을 흘렸다. 대감이 상 중앙에 놓인 벼루를 옆으로 치워 놓으며 헛헛하게 웃었다. 좋은 일이지, 좋은 일이야. 어정쩡하게 고개를 숙인 성규에게 민망하리만치 따뜻한 말이 돌아왔다. 아무리 몸이 상한들 공부로 인해 상하는 것은 상해도 상하는 길이 아닌 것이다. 대감이 제 무릎에 가지런히 놓여진 손을 만지작거리는 성규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내 오늘 너를 불러들인 이유를 알겠느냐?”
성규가 잠시 뜸을 들였다.
“송구하오나 모르겠습니다. 혹 다음 번 취재 때문이 아니시온지…”
“그렇지. 취재도 중요하지. 허나 다른 연유다.”
멀뚱히 저를 보고 있는 성규에게 웃어 보인 대감이 곧이어 자리에서 일어나 병풍 옆의 벽장 쪽으로 걸어갔다. 대감의 행동반경을 눈으로 좇은 성규가 제 피곤한 무릎을 두어번 통통 쳤다. 대감이 벽장을 뒤적거리며 무엇인가를 찾아 자리로 돌아왔다. 허름한 천으로 꽁꽁 싸여진 나무 상자를 상으로 내려두자 성규가 제 눈을 키웠다.
“이게 무엇입니까?”
“네게 주려 남겨두었던 것이다. 이젠 네 것이야.”
성규가 멍청히 그것만을 바라보고 있자 대감이 어서 풀어보라는 듯 턱짓으로 물건을 가리켰다. 손등에 불이 떨어지자 주섬주섬 그것의 끈을 풀어헤친 성규의 눈에 낡아 빠진 나무 덮개가 눈에 들어왔다. 슬쩍이 그것을 열어보자 성규의 입이 천천히 벌어졌다.
“…대감마님께오서 쓰고 계시는 것들이 아니옵니까?”
“아니다. 한참 의술에 발을 들여놓았을 때 썼던 것들이지 지금은 네가 보았다시피 벽장 구석에 놓아두고 있었질 않느냐.”
오랜 손때가 묵어들어 녹이 까진 폄석이며 들쑥날쑥하여 각기 날이 다른 피내침과 약침들이 가지런히도 들어 있었다. 성규가 한뼘도 채 되지 않는 전침을 조심스레 집었다. 대감께서 쓰셨던 것…,
“대감마님께 의미 있는 것이라 생각됩니다. 이것을 어찌 감히 소인이…”
“의미 있는 것이라 네게 주는 것이다.”
“…….”
“받아 넣거라. 네 말마따나 의미 있는 것을 네게 주려 아껴 놓았던 것인데, 사양하는 것이 외려 도리가 아닌 것을 어찌 모르는 것이냐.”
전침을 집어 들었던 성규의 손가락이 차츰 떨려왔다. 그것을 내려다보던 대감이 제가 내려놓았던 낡은 상자를 천천히 손으로 쓸었다. 성규가 끄트머리만은 그 무엇보다 예리하게 날이 서 반짝이는 전침에서 그의 손으로 시선을 옮겼다. 비록 다른 시침들에 비해 턱없이 가치 없는 물건이라는 것을 나도 안다. 대감의 목소리가 천천히 늘어졌다.
“허나 그것이 비록 그리 남루하였지만 말이다…”
“…….”
“내 훗날, 주상전하를 바로 곁에서 보필하게 되었을 때 언젠가 그것을 써 보고도 싶었다. 내 의술을 처음 익히기 시작했을 적에 손에 익혔던 시침을 가지고 궁극적인 뜻을 이뤄보고 싶었음이야. 허나 그것보다 더욱 의미있는 일이 이것이라 생각되었기에 주는 것이다.”
“…….”
“아끼는 제자에게 내가 걸었던 길을 내어주는 것.”
성규의 심장이 걷잡을 수 없이 세차게 뛰어대기 시작했다.
전침을 든 손이 한층 더 심하게 떨리어 주체할 수 없었다. 순간 매일같이 새벽녘에 거리를 울리는 누고의 북소리가 제 귓가의 바로 앞에서 쿵쿵거리며 울리는 것 같았다. 덜덜 떨리는 손에 쥐었던 전침을 상자 안으로 집어넣은 성규가 저도 모르게 벌어졌던 입술을 손등으로 막았다.
“소인은…, 소인이.”
“같은 길을 걸어 오라.”
대감이 흡족하게 웃었다.
“과인의 길에 네가 발을 들여놓아 주었으면 한다.”
그 말을 끝으로 성규가 따뜻하게 데펴진 구들장 위로 제 이마를 넙죽 박아 엎드렸다. 화끈거리며 뜨거워진 눈시울이 바닥을 향하자 온 몸의 피가 머리 쪽으로 쏠려오는 것도 같았다. 마른 침이 목구멍으로 채 넘어가지도 않아 목이 멘 성규가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대감마님께오서 소인을 거두어 주신 것에서부터, 소인 이미…”
합하의 길에 소인의 모든 패를 던졌사옵니다. 성규의 눈에서 기어코 후들거리며 맺혔던 눈물이 떨어졌다.
대감의 집을 나서 그 고래등같은 기와 아래에 멀뚱히 선 성규의 발이 아주 천천히 걸음을 떼었다. 그의 뒤주머니 안에는 존경각의 오래된 서책 위에 파리하게 낡은 나무 상자가 덧이어 묶어졌다. 성규가 여전히 쿵쾅쿵쾅 뛰는 심장을 겨우 붙잡고 길을 나섰다. 제가 길바닥의 어느 곳을 보고 있는지도 분간을 못 할 만큼 벅차, 자꾸만 제 뺨을 때려 보아도 돌아오는 것은 얼떨떨하게 절여진 마음뿐이었다. 겨울에 접어들어 더 세차게 불어오는 바람이 갓머리를 건드려, 이마께로 흘러내린 갓이 성규의 두 눈을 깜빡 가렸음에도 불구하고 얼이 빠진 채 성규는 한참이나 그 길을 걸었다. 결국은 앞서 오던 어떤 이가 제 어깨에 부딪히고 나서야 제 앞이 깜깜하게 가려졌다는 것을 인지한 성규가 흘러내린 갓을 제 머리 위로 고정해 묶었다. 성규의 입가에 뒤늦게 얼떨떨한 미소가 걸렸다.
자꾸만 웃음이 나서 견딜 수가 없었다. 가슴께를 찌르르하게 울리는 짜릿한 쾌감에 성규가 저의 주먹을 꾹 쥐어보았다. 대감의 목소리가 귀에 밟혔다. 아끼는 제자에게. 성규가 녹이 슬은 시침들을 차근차근 떠올려내다가 대감 못지않은 것을 다짐했다. 나도 언젠간…,
…나의 주군을 보필할 때 써야겠다. 성규가 벅찬 가슴을 손바닥으로 겨우 눌렀다.
*
구들장과 딱 붙어 드러누워 있던 우현은 비천당으로 나가야 할 시간이 가까워져서야 느릿느릿 몸을 일으켰다. 마침 그의 방우들이 아침 식사를 마치고 와 이제야 몸을 일으키고 앉은 우현을 보고 고개를 내저었다. 방우 하나가 혀를 끌끌 찼다.
“자네, 이리 매번 아침을 걸러서야 대과 한 번 치러볼 수 있겠는가? 도기 장부(식사 여부를 확인하는 장부. 300번이 넘어야 대과에 응시할 수 있음)에 자네 출석일이 절반은 넘게 비워져있다네. 평생 성균관에서 썩을 것도 아니고, 어찌 되든 시진은 해야 하지 않겠는가?”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염려의 목소리였다. 우현이 팩 하니 돌아앉으며 제 옷을 여몄다. 이미 귓등으로도 듣고 있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방우가 다시금 혀를 차며 우현과 반대 방향으로 돌아앉았다. 나머지 한 명의 유생이 껄껄거리며 웃었다. 어이, 도헌. 그의 목소리에 우현이 옷을 갖춰 입다 말고 고개를 올려 그를 보았다. 뭐야? 그가 우현의 유건을 던져 주며 사람 좋게 웃었다.
“어쩌다보니 오는 길에 황 박사(博士)를 만났는데 자네의 행방을 물으시더군. 내 자네는 오늘 몸이 좋지 않아 식당엔 오지 않았다고 핑계를 대 주었으이.”
“쓸데없이… 이번 강의가 황 박사 강읜데 팔자에도 없는 아픈 연기를 해야 되잖아!”
“그래도 괜히 미움털 박히는 것보단 낫다고 생각하네. 황 박사 눈에 들기 위해 안달인 상유들이 얼마나 많은지 자네도 잘 알잖나. 자네가 저번 책문(策問)에서 따 놓은 점수를 굳이 잃을 이유는 없잖는가?”
그럭저럭 옳은 말이라 우현이 대답 없이 제 유건을 머리에 썼다. 그의 방우가 허허 웃었다.
“그러니 내게 고맙단 말 한마디 정도는 하게.”
“뭐?”
우현의 목소리가 삐딱하게 올라갔다. 잘 매어지지 않는 유건의 끈을 붙든 우현의 손이 미끄러졌다.
“방금 뭐라 했나?”
“고마울 때 하는 인사말일세.”
우현의 온 몸에 소름이 돋는 것 같았다.
물론 그의 방우는 단지 고맙단 말을 바라고 한 말이었지만 우현이 받아들이는 바는 달랐다. 우현이 질겁하여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러자 그의 거칠한 피부가 눈에 들어오고, 그 다음은 투박한 눈이…,
“염병! 내가 왜?”
하나도 안 고맙네! 우현이 빽 소리를 쳤다. 그러자 그의 남은 방우 하나가 킥킥거리며 웃었고 졸지에 염병이라는 욕설을 들어먹은 방우도 고개를 저으며 웃었다. 내가 괜한 것을 해달랜 것도 아니고, 양반이 너그러운 말을 그리 아껴서야 되겠는가. 그가 장난스럽게 타박했다. 우현은 잔뜩 소름이 오른 제 팔을 싹싹 비볐다.
상상만으로도 미칠 노릇이었다. 내가 왜 저 양반한테? 그나마 잠시 동안 잊고 있던 어젯밤의 미친 기억이 우현의 머릿속을 어지럽혀놓고 있었다. 옷을 다 갖춰 입은 우현이 먼저 성큼거리며 툇마루로 나왔다. 무리지어 비천당으로 향하는 걸음들을 쳐다보다 제 신을 아무렇게나 구겨 신었다. 간밤에 마셨던 자리끼가 사실은 약주였다거나 했을 거다. 그렇지 않고서야 내가 제정신으로 그랬을 리가. 우현이 애먼 제 입술을 아프도록 물었다.
홀리듯 입을 맞췄던, 제 아래서 곱게 감겼던 눈꺼풀이 자꾸만 눈앞에 어룽거렸다. 우현이 강의 시간 내내 자꾸만 문득 문득 난리를 치는 바람에 그의 옆에 나란히 앉은 유생들이 황 박사의 따끔한 눈초리를 견뎌내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불현듯 떠오르는 어젯밤의 잔상을 잊혀내질 못해 우현은 괴로웠다. 정신이 나갔었다, 정신이 나갔었다, 정신이 나갔었다….
“도헌 도령 오늘 무슨 일이 있었던 겐가? 평소에도 그리 좋진 않았네만 오늘따라 상태가 심히 좋지 않으이…, 저 발버둥이 괜히 엉뚱한 곳에 시비를 틀까 무섭네.”
“우리도 어젯밤은 장안에서 묵느라 방에는 못 들어가 봤네만 아마 또 귀신 꿈을 꾼 게 아닐까 싶네.”
“귀신 꿈?”
“남우현이 유별나게 악몽을 싫어한다네. 저번에 어쩌다 한 번 악몽을 꾸었는데 몇 날 몇 일이고 잠에 들지 않겠다면서 삼일 밤을 뜬 눈으로 꼬박 샌 적도 있었지.”
그의 방우가 별 일 아니겠거니 하는 말투로 껄껄 웃었다.
*
서촌 일대에 다시 들른 활인서(活人署)의 의관들이 차양을 설치하기에 바빴다. 걷어 올리기가 무섭게 다시 손목 쪽으로 흘러내리는 관복을 걷어 부칠 새도 없이 성규의 손도 바쁘게 놀려졌다. 선진 의관들을 따라 천막을 세우는 손등에 불이 떨어졌다. 활인서가 파견되었다는 소식을 접해 일찍이도 줄을 늘어선 무의탁 환자들이 그들의 주의를 더욱 산만하게 만들고 있었다. 초겨울의 찬바람이 무색하게 성규의 이마에 땀이 맺혔다. 강변이 떠나가라 울고 있는 어린 아이들의 목소리가 굼뜬 의관들의 행동거지를 채찍질하고 있는 듯 했다. 성규가 천으로 막대를 감는 손에 속도를 더했다. 어느 정도 차양이 설치되자 맨 앞에 선 이들부터 들이닥치기 시작했다. 앉아 있던 의관들의 앞으로 환자들이 줄을 섰다. 어느 정도 단단하게 천을 동여맨 성규도 한 숨을 돌리고서야 자리에 앉았다. 병막의 끄트머리에 자리를 잡은 성규의 앞에도 어느덧 저 멀리까지 줄이 세워졌다. 성규가 소매를 걷어붙였다.
한 명 한 명 환자를 구료하는 것도 마땅히 제가 해야 할 일이었지만, 의복이며 약제를 나누어주어야 하는 것도 전부 성규의 몫이었다. 가만히 앉아 시침을 뜬다는 것은 선진 의관들에게나 해당되는 말이었다. 성규는 제 환자의 팔에 천가지를 동여매다가도 길게 늘어져 있는 또 다른 줄 앞으로 달려가 줄이 밀리지 않게끔 얼른 약제를 나눠주어야 했다.
제생원은 고사하고, 성규가 그야말로 죽어나는 곳은 바로 활인서인 것이다. 숨이 찰 정도로 두 곳을 뛰어가던 성규가 느즈막히 도착한 다른 의관이 약제를 나누어주는 줄에 배정된 이후에서야 자리에 붙어 한숨을 돌렸다. 그에 반해 그늘 밑에 따로 설치해 둔 병막 아래에 앉아 신선놀음을 하고 있는 장 참봉을 알게 모르게 흘긴 성규가 제 앞에 막 도착한 어린 아이에 눈을 맞췄다. 막 여섯 살 정도로 되어 보이는 어린 계집아이가 멀뚱히 성규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저, 소녀는 어디가 아픈 것이 아니오라…”
계집아이가 손에 들고 있던 풀꽃을 불쑥 들이밀었다. 성규가 얼떨결에 그것을 받아들었다.
“나에게 주는 것이냐?”
“맞사어요. 먼젓번에 들르신 의관 나으리 덕에, 등창으로 누우셨던 소녀의 어머니가 씻은 듯 자리에서 일어나셨기에….”
아이가 또다시 말끝을 얼버무렸다. 어디가 아픈 것이겠거니 하고 시침을 집었던 성규가 그것을 상으로 내려두었다. 한 손으로 받아들었던 풀꽃을 눈앞으로 가져왔다.
“참으로 예쁘구나. 고맙다.”
“그리고, 저…”
앳된 목소리가 자꾸만 말끝을 흐리자 웃음이 터진 성규가 고개를 돌렸다. 그와 동시에 성규의 뺨에 작은 입술이 닿았다 떨어졌다. 낯선 인기척에 깜짝 놀라기도 잠시, 수줍게 떨어지는 계집아이의 얼굴을 마주하자 성규의 입가에도 미소가 걸렸다. 계집애가 자꾸만 저의 앞섶을 만지작거렸다. 소녀가 좋아해요. 그 말을 끝으로 후다닥 자리를 떠난 아이가 뒷사람의 성화에 밀려 저 끝까지 달아났다. 그러면서도 자꾸만 제 쪽을 뒤돌아 힐긋거리는 게 귀여워, 받아 든 풀꽃을 제 팔목에 묶은 성규가 다음 환자를 위해 다시 시침을 들었다.
말랑한 입술이 닿은 곳은 분명 뺨이었는데, 괜히 눈가가 불에 덴 듯 화륵 달아올랐다. 자꾸만 화끈거리며 난리인 눈꺼풀 위를 괜스레 손으로 매만진 성규가 대뜸 종기가 난 팔을 제 앞으로 들이민 환자에 정신을 차리고 그의 소매를 붙들었다.
어쩐지 기분 좋은 떨림이었다. 고마움과 연정으로 제게 닿은 계집아이의 입술과, 이유 모르게 달아 오는 제 눈가의 유령 같은 느낌마저도. 또ㅡ 사용할 마음도 없이 괜히 제 상 위로 놓은, 수의 대감에게서 받은 침술 상자를 쳐다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뛰어왔다. 의관들의 머리 위로 차양 위에 달랑거리는 발에 초겨울 바람이 걸러져 들어와 성규의 망건 끝을 간질였다.
*
원체 발길이 뜸한 성규이긴 했지만, 그로부터 나흘 정도가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코빼기 하나 비추질 않고 있는 성규에 괜히 우현의 심술에는 불이 당겨졌다.
명색이 성균관 약방 전담 의관이라기에 신뢰해볼까 했더니, 하는 짓은 딱 한량이었다. 장차 조선을 휘어잡는 어의가 될 것처럼 도둑공부니 뭐니 하며 배짱 좋은 짓을 굴어놓고 정작 실천에 옮기고 있는 것은 한량들이나 하고 있는 신선놀음일테지. 딱 어불성설인 셈이었다. 산이나 뜰로 야유회나 나간 탓에 돌아오지 않고 있는 것이라 굳게 믿은 우현이 괜히 입을 비죽이며 청재 마루에 걸터앉았다. 어느새 어스름한 땅거미가 내려왔다. 우현이 코를 훌쩍이며 다리를 달달 떨었다.
그러다 재직 하나가 청재 앞마당을 가로질러 달려가는 것을 포착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하릴없이 괜한 담장 너머를 노려보고 있던 우현은 앞서 달려 나간 재직의 뒤를 따라, 개중에 가장 나어린 재직이 쫄랑거리며 좇아가는 것을 또 포착했다. 그런 꼬맹이 재직 옆으로 좀 더 큰 재직이 내달렸다. 우현이 차례대로 뛰어가는 재직들을 눈으로 훑었다.
“야! 그 쪽이 아니라 존경각 쪽이래!”
서재 뒷 켠에서 쏙 빠져나온 머리 하나가 외치자 저만큼 뛰어가던 세 명의 재직들이 발길을 돌려 다시 반대편으로 뛰기 시작했다. 우현의 귀가 낯익은 단어에 번뜩이며 반응했다. 존경각? 우현이 팔짱을 끼고 있던 손을 풀었다.
그러고보니 요사이 옥그릇에는 하루걸러 하루, 겨우 엽전이 놓아져있길 일쑤였다. 요새 형편이 좋지 않은 것인지 들르지 아니하는 것인지는 알 방도가 없었지만 그 어떤 연유이든 우현의 심기에 어긋나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가장 나어린 재직이 서재의 모퉁이를 돌아 사라지자 우현이 마루에서 일어났다. 저녁 식사를 마치고 청재로 돌아오는 발걸음들을 지나쳐 역으로 걸음을 옮긴 우현은 재직들이 사라졌던 서재 뒷켠으로 걸었다.
예상대로 눈에 보이는 것은 성규였다.
“혹 고뿔이 도진 것은 아니고?”
먼저 달려간 재직과 얘기를 나누던 중이었는지, 아이와 눈높이를 맞추려 몸을 숙여 앉은 성규가 그 동그란 눈을 올려다보며 묻고 있었다. 우현이 서까래 뒤로 몸을 숨겼다.
성규의 물음에 다 큰 재직 하나가 제 팔을 이만큼이나 벌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닷새도 전에 병이 나았다며 으스대는 게 퍽 귀여워 성규가 그의 머리통을 쓰다듬었다. 큰 재직의 옷깃을 붙들고 있던 어린 재직이 코를 훌쩍이자 이번에는 그에게로 시선을 옮겨간 성규가 조막만한 손에 화과를 올려두었다.
“이것은 내가 궐에서 받아온 것인데…”
성규의 목소리가 커졌다 작아졌다를 반복해 귓가에서 스러졌다. 서까래 뒤로 몸을 숨기고 그 곳을 훔쳐다보던 우현이 저도 모르게 귓가를 그 쪽으로 가져다 댔다. 무어라고 얘길 나눈 성규가 그렇잖아도 작은 제 눈을 반달로 접어 웃고 있었다. 우현의 짐짓 굳히고 섰던 얼굴이 자연히 풀어졌다.
자세히 들리지는 않고 있었지만, 네다섯명의 재직들에 둘러싸여 두런두런 얘기를 나누는 목소리가 귓가를 사근사근히 밟았다가 물러가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만나자마자 대뜸 서생원!하며 호령해야겠다는 심산으로 재직들의 뒤를 밟았던 우현의 입이 쉬이 떨어지지 않았다. 성규의 입에서는 계속해서 아이들의 병세를 묻는 말이 뱉어지고 있었다. 뒷짐을 쥔 우현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쪼그려 앉은 성규의 뒤주머니 끈에, 제가 주었던 향낭이 달랑거리며 단단히도 매여 있었다. 우현이 거짓말처럼 말을 잃었다.
그러다가 아이들의 어깨 너머로 보이는 우현과 눈이 마주쳤다.
어린 재직의 볼을 꼬집던 성규가 저만치에 서서 이쪽을 향해 보고 있는 우현과 눈이 맞자 천천히 손을 거두었다. 오랜만인 사람이었다. 거의 닷새 정도를 소식 없이 멀리한 사람이 눈앞에 갑자기 보인 탓에 반가운 마음이 덜컥 인 것도 같았다. 비록 제게 따뜻한 사람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바깥에서 말을 섞어 본 ‘나쁘지 않은 사람’을 오랜만에 만나게 되어 성규의 입가에 반가움이 서린 미소가 지어졌다. 성규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우현에게 알은 체를 했다. 그러나 잠시 후에는 작게 어렸던 웃음기가 씻겨졌다.
마찬가지로 저와 눈이 마주친 우현이 곧 시덥잖은 트집과 함께 다가올 것이라고 생각했건만 우현은 반대편으로 등을 돌려 서까래 뒤로 모습을 감추었다. 그 덕에, 어정쩡하게 몸을 일으켰던 성규의 입가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자꾸만 재직들이 제 옷깃을 흔드는 통에 본 사람이 거짓은 아니었을 텐데 방금까지 보았던 우현이 온데 간데 없었다.
“한량은 아니었던 모양이지….”
성규에게서 뒤를 돌아 왔던 길을 되돌아 밟던 우현이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그동안 워낙에 함흥차사였어서 그러한지, 심술이 났던 탓에 성규를 저 혼자 한량이라고 치부해버렸던 것을 정정하는 것이었다. 우현이 재직들의 병세를 물으며 눈을 접어 웃던 성규의 헤진 짚신 끝을 떠올렸다. 그의 발걸음이 자꾸만 느려졌다.
순수하게 제게 정해진 길을 걷는 의학도였다. 몰랐던 것은 아니었지만 문득 우현의 정신을 울린 장면은 꽤나 새삼스러운 충격을 안겨 주었다. 원래 그런 아이였다. 의관으로서 성균관에 드나들던 사람이었고, 의술을 배우고자 하는 열정으로 도서고를 드나들던 사람이었으며ㅡ 그 동안 모른 체 넘겼던 것이지 사실은 장안 밖을 나다니며 백성들을 구휼하는 데에 바쁜 관리라는 것도 알았다. 성균관에 들른다 해도 무엇보다 가진 것 없는 자들의 병세를 챙겨 묻는 것이 먼저인 사람이라는 것도 알았다. 우현의 가슴께가 불이 인 듯 아프게 스러졌다.
그 동안 제가 괜한 트집을 잡고 있었던 것이라는 걸 문득 깨달아버린 탓이었다. 올곧은 기개 하나로 맡은 일에 최선인 의학도를 괴롭히고 건드리는 것은 오롯이 저 쪽이었다. 우현의 심술을 받아내기에는 너무도 순수한 열정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새삼스레 깨닫게 되자 우현의 마음에 알 수 없는 괴리감이 일었다.
그런 사람을 상대로 저는 순간의 헛된 사심을 가졌던 것일지도 모른다.
모른 체 하고 싶었지만 분명 그 날 밤의 일은 전적으로 제 잘못이라는 것을 알았다. 출처를 알 수 없는 사심이었다. 누군가가 어째서 사심이 일었느냐고 묻는다면 저도 모른다는 대답을 돌려주었겠지만 어찌 되었든 그것은 사심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정말이지 애석하게도, 순수한 열정으로 제 일에 열심인 면모를 발견하자 동시에 깨우쳐버린 자책감이었다. 우현은 한 때, 그런 의학생도를 상대로 말도 안 되게 파렴치한 사심을 가졌던 것이었다.
우현은 갑자기 제 마음에 짜증이 이는 것에 가슴께가 답답해져왔다.
성규가 우현이 돌아선 곳에 한참이나 눈을 두고 있었다.
평소에는 오시라 아니 일러도 먼저 불쑥불쑥 다가오셨으면서…. 여러 명의 재직들이 옷깃을 흔드는 통에 흔들흔들 흔들리는 와중에도 성규의 머릿속에는 야속하다는 생각이 들어차기 시작했다.
*
그 후로도 우현의 행동은 이상하기 짝이 없었다.
도대체 왜 이러시는 거야! 성규가 명륜당 앞에서 마주친 우현에게 화사히 웃어보였음에도 불구하고 금세 홱 고개를 돌려버리는 우현에 급기야는 울상을 지었다. 금방 약제를 놓고 나오는 길이라 제 손에 묻은 약제 가루를 탈탈 털어내며 한숨을 내쉬었다.
우현의 태도가 이상해지고 나자 외려 마주치게 되는 횟수가 늘었다. 약제를 놓으려 반궁에 들르게 되는 날이면 하루에 세 번은 족히 마주쳤던 것은 고사하고ㅡ 반촌 어귀를 걷고 있노라면 저만치에 몰려있는 상유들 속에서 단연 튀는 그와 눈이 마주쳤던 일도 허다했다. 그러나 이상한 것은, 본디 눈이 마주치기가 무섭게 제 앞으로 걸어와 별 같잖은 일로 이것 저것 따져 물었어야 하는 우현의 태도가 정 반대로 돌변했다는 것이었다. 눈이 마주치기가 무섭게 시큰둥한 시선이 다른 쪽으로 돌아갔다. 성규는 그 때마다 휑하게 허전한 기분을 느껴야 했다. 무언가 심심한 헛바람이 자꾸만 성규의 허한 속으로 들이치고 있는 것 같았다. 성규가 알게 모르게 서운한 마음을 누르고 제 신 끝으로 시선을 떨어트렸다.
어느 날은 일부러 옥그릇 속에 엽전을 놓아두지 않기도 했다. 이러면 그 불같은 성격에 다음번에 마주친다면 이런 저런 말로 제게 불호령을 내릴 것이라고 생각했기에 저지른 장난이었다. 그러나 다음 날, 장안에서 마주친 우현은 그런 성규와 눈이 맞길 무섭게 고개를 돌렸다.
애써 알은체를 해 주어야 하는 것도 아닌데 괜히 서운한 마음이 물밀듯 일어왔다. 도리어 제 쪽에서 먼저 환히 웃은 것이 민망해 표정을 굳힌 성규가 제 갓끈을 당겨 묶었다. 이어 바쁠 것도 없는 걸음을 괜스레 재게 놀려 궐에 닿은 성규가 어쩐지 답답해져 오는 마음에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다 정확히도 한 걸음도 채 안 되도록 면전에서 마주친 것은 그로부터 사흘이 지난 날이었다.
“소인 서생원입니다.”
이번에도 걸음을 비켜 가려는 우현을 묶어두기 위해 덜컥 꺼낸 말이었다. 성규의 옆으로 비스듬히 지나쳐가려던 우현의 걸음이 딱 멈추었다. 성규의 안절부절한 손가락이 필낭의 끈을 매만지고 있었다.
“소인, 서생원이라고요….”
“안다. 네가 서생원인들 나더러 어쩌라는 거냐?”
거의 열흘만에 듣는 목소리였다. 전처럼 까칠하게 뱉어진 목소리였음에도 불구하고, 그 와중에 반가움이 덜컥 인 성규가 우물쭈물거리며 대답을 망설였다. 저와 비스듬하게 엇갈린 어깨를 보고 있다가 먼저 걸음을 옮기려 몸을 움직인 우현의 팔을 성규가 다급히 붙들었다.
“소, 소인의 양심 값은 확인 하십니까?”
“뭐?”
“그…, 며칠이 지나도 소인이 넣어두었던 엽전이 거둬지지는 않고 자꾸 쌓여만 가기에….”
그러자 우현의 고개가 완전히 성규 쪽을 향해 돌아왔다. 드디어 열흘 만에 마주친 눈이었다. 성규가 소리나게 침을 꼴깍 삼키면서 우현의 대답을 기다렸다. 우현이 저의 팔을 붙든 손과 그의 얼굴을 번갈아 보다가 입을 열었다.
“그걸 내가 어찌 알아?”
“예?”
“되짚어 생각해보니 어인 이유로 내가 너에게 수금을 해야 하는지를 묻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네가 반궁 앞으로 지불하는 양심 값이지 내게 조공으로 바쳐야 하는 돈이 아니다. 너는 너대로 그렇게 옥그릇에 너의 양심을 지불하면 되는 것이고, 나는 나대로 반궁에 바쳐진 네놈의 양심을 거둬 가면 안 되는 것이 마땅한 것이라 생각한다.”
“…….”
“네놈과 나의 연결고리는 없어야 한다는 말이다.”
우현의 눈이 제 팔을 붙든 성규의 손으로 내려갔다. 놓으라는 무언의 말이었다. 잠자코 우현의 말을 듣고 있던 성규의 입은 풀칠이라도 한 듯 봉해졌다. 성규가 천천히 제가 잡았던 옷깃을 놓았다. 성규의 손이 붙들었던 도포 자락에 주름이 졌다. 우현이 구겨진 제 옷감을 두어번 툭툭 털었다. 이내 다시 가던 길로 옮겨지려는 발길을 다시금 붙잡은 것은 성규의 손이었다. 제가 놓았던 자리를 다시 붙들은 성규가 우현의 고개가 저를 향하게끔 만들었다. 저!
“소인, 도헌께 드릴 것이 있습니다.”
그리고는 혹 매정한 발걸음이 저를 두고 가버릴까 두려워 허겁지겁 제 향낭 안을 뒤지기 시작했다.
그 안에 넣어 놓고 다니던 갖은 약제와 뒤섞여 찾고자 하는 것이 쉬이 나타나지 않아 잠시 시간이 지체되었다. 허둥대는 성규의 갓머리에 시선을 두던 우현이 다급함이 묻은 손길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곧이어 찾고자 하던 것을 꺼낸 성규가 우현의 손을 끌어와 그 손바닥에 제 물건을 올려두었다.
“이게 무엇이냐?”
“향입니다.”
공깃돌처럼 작은 향 조각을 두 개, 우현의 손바닥 위로 올려 둔 성규가 우물쭈물 목소리를 내었다.
“도헌께오서 제게 향낭을 주셨으니 늦었지만 소인은 향을 드리는 겁니다.”
“…….”
“꽃잎을 응축시켜 작게 눌러 만든 것입니다. 물에 타 놓거나 양초 위에 놓아두시면 금세 향이 퍼질 것이니 머리가 답답할 때 쓰시면 안성맞춤입니다.”
우현이 잠자코 향 조각을 내려다보고 있자 그의 안색을 살피던 성규의 말소리도 작아졌다.
“도련님의 방에 신세를 졌던 날, 공기가 많이 찬 데에다가 방 안이 어딘가 심심한 구석이 있었기에….”
이렇다할 반응이 떨어지지 않자 민망한 성규가 제 턱 끝을 손가락으로 간질였다. 향이라도 피우시면 공기도 조금 훈훈해지고, 좀 더 괜찮을 것 같아서요. 성규의 설명을 잠자코 듣고 있던 우현이 제 손바닥 안에 놓여진 향 두 개를 보다가 주먹을 쥐었다. 갑작스러운 인기척에, 온 신경을 우현의 반응에게로 쏟고 있던 성규가 화들짝 놀라 그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오랜만에 우현의 얼굴에 낯선 표정이 어렸다.
“내게만 주는 것이냐?”
“예?”
“내게만 주는 것이냐고 물었다. 반궁 안의 온 유생들에게 돌리는 향인거냐, 아니면 내게만 주는 선물인 것이냐? 청재 안의 모든 방들은 내가 묵고 있는 방과 같이 공기도 차고 분위기도 심심하다. 헌데 어찌 모든 방에 돌리는 것이 아니라 내게만 이런 성의를 보이는 것이냐?”
의중을 알 수 없는 타박이었다.
성규가 당황한 눈을 빠르게 깜빡이며 입술을 달싹였다. 그건…, 그게…. 생각지도 못했던 질문에 머릿속이 황망해져 성규의 눈이 도륵 굴러갔다.
“먼젓번에 이르지 않았습니까? 소인, 도헌께 향낭을 선물 받았던 데에다가… 그 날 밤, 존경각에서 도련님이,”
“향낭은 나를 위한 약제를 담아 오라고 줬던 것이니 나를 위해 베푼 투자였고, 그 날 밤 너를 빼돌려 준 것은 꼭 네가 아니라 혹 다른 이가 그런 상황에 처했어도 나는 그리 했을 것이니 아무 뜻 없다. 지극히도 당연한 일인거란 말이다. 그러니 앞으로 섣불리 너와 나 사이에 연결고리를 만들지 말아라.”
그러면서도 향을 챙기려 주먹을 쥔 모습은 모순이었다. 우현의 말에 이해가 느린 성규가 멍청히 눈을 깜빡이고만 있자 우현이 그에게서 먼저 시선을 거두었다. 대답하는 법을 잊어버리기라도 했는지, 입이 얼어 가만히 선 채로 굳어 있던 성규가 급기야는 서운함이 가득 찬 눈을 바닥으로 떨어트렸다.
“고맙지 아니하십니까?”
순전히 저의 본심에서 우러나온 말이었다.
성규는 사실 제가 뱉은 말임에도 제가 놀라 가슴이 쿵쿵 뛰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우현과 저의 사이에 있어서 ‘고맙다’는 것에는 여러 가지 의미가 겹쳐 있음을 알았다. 그만큼 예민하기도 한 단어였는데 제가 섣불리 고맙지 않느냐는 말을 어두에 올린 것은 경솔했다. 순간 두 사람의 머릿속에 그 날 밤의 일이 회오리처럼 섞여 들어가며 떠올랐다.
제가 뱉어놓고도 모르겠는 말이었다. 혹 제 본심이 무엇인가를 바라고 물은 것이었나 되짚어 볼 새도 없이 우현의 대답이 떨어졌다.
“네가 무슨 뜻으로 물은 것인지는 알지 못하겠으나….”
“…….”
“내게 자꾸 여지를 주지 말아라.”
우현이 저와 가까운 곳에 다가와 있는 오목조목한 얼굴을 쳐다보며 중얼거리듯 말을 이었다. 당황감에 빠르게 깜빡이는 눈꺼풀과 미려한 입술선이 자꾸만 눈에 띄어 그의 말이 느려졌다. 우현이 얄궂게 가늘은 성규의 눈매에 홀리듯 눈을 담았다가 시선을 비켰다.
“너는 도둑이니 이 기분을 알 거라 생각한다.”
“…예?”
“가까이 하면 할수록 훔치고 싶은 게 많단 말이다.”
그게 무엇이 되었든 간에. 우현이 그의 입술을 아프게 물었다.
네놈의 순수한 열정을, 나조차도 의중을 모르겠는 사심으로 괴롭히고 싶지 않았다. 오롯이 제 길을 걷고 있는 사람의 앞에 책임도 지지 못할 마음을 가지고 걸리적거리고 싶지 않았다. 우현이 저만큼이나 답답한 얼굴을 하고 섰는 성규에게서 얼른 눈을 돌렸다.
“서생원은 서생원답게 숨어 살 것을 권한다. 자꾸만 내 눈에 띄려 들면 안 된다는 것이다.”
“…….”
“본디 밤말은 쥐가 듣는다질 않느냐. 너에게 어울리는 것은 밤이다.”
마지막 말만큼은 본연에 그랬던 것처럼 삐딱하게 내뱉은 우현이 아무렇지도 않은 뒷모습으로 육일각 뒷마당을 돌아 나갔다. 제 앞에 섰던 인기척이 사라지자, 방금 우현에게 건넸던 향이 다녀간 손바닥을 자꾸만 쥐었다 폈다를 반복했다.
성규가 묻고 싶은 것은 많지 않았다. 갑자기 어인 이유로 이리 차갑게 구는 것인지를. 혹 제가 잘못한 게 있어 그의 눈 밖에 난 것인지를 알고 싶었다. 딱히 이렇다할 이유는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싹 바뀐 우현의 태도에 견딜 수 없을 만큼 마음 한 구석이 허전하고 휑했다. 그런 것을 아마, 서운이라고 했다. 마냥 괴롭힘 받고 싶었던 것도 아니었는데…. 막상 우현의 손아귀에서 벗어나자 제가 본래 가졌어야 할 틀에서도 벗어난 것 같아 해방감이라기보다는 어색하고 섭섭한 마음이 먼저 들었다.
꼭 제가 건넸던 향 조각이 초를 만나 향을 피우고 있는 것처럼 성규의 마음이 녹진녹진하게 문드러졌다.
*
제생원[ 濟生院 ]
조선시대 서민 의료기관
책문[ 策問 ]
활인서[ 活人署 ]
활인서(活人署) 또는 동서활인원(東西活人院)이라고 불리우며 조선시대빈민들의 구제와 치료를 맡던 관청. 의료활동 이외에 무의탁 환자를 수용하고, 전염병이 발생했을 때는 병막을 가설하여 환자를 간호하며 음식과 의복·약 등을 배급하기도 하고, 또한 사망자가 있을 때는 매장까지 담당했던 관청
ㅇㅑ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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