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오는 주말 밤, 오랜만에 내리는 비가 반가워서일까 아니면 다 같이 모인 이 시간이 주는 들뜸일까. 모두들 말은 안 해도 각기 다른 스케줄로 인해 어긋나던 순간들이 아쉬웠던터라 테이블 위로 부딪히는 술잔들이 잦았다. “우리 게임할래요?” 술기운이 살짝 오른 정국은 낮에 가져온 박스를 끌고 왔다. 박스에 담겨있는 보드게임들은 종류가 꽤 다양했다. 여주는 이것들을 품에 안고 왔을 정국을 생각하니 웃음이 튀어나왔다. 신나 했을 정국의 얼굴 표정이 눈앞에 선명하게 그려졌다. 술과 간단한 안주만 남기고 대충 정리한 테이블 위로 정국이 가져온 게임들을 펼쳤다. 그리고는 손에 잡히는대로 게임을 하나씩 시작했다. 벌칙으로는 묻는 질문에 대해 솔직하게 대답하기. 서로의 마음을 떠볼 수 있는 소중한 기회를 앞에 두고 여덟 사람의 눈동자는 바쁘게 움직였다. 진실게임이나 다름없는 벌칙에 여주는 긴장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벌써부터 긴장한 여주를 알아챈 석진은 룰을 하나 추가하기 위해 입을 뗐다. “딱 한 번 거짓을 말할 수 있는 건 어때?” “도망갈 구멍을 대놓고 만드시겠다?” 이어진 주연의 장난스러운 말에 다들 긴장이 풀린 듯 웃음을 터트렸다. 모두에게 필요했던 거잖아. 부드럽게 말을 받은 석진을 끝으로 게임은 시작됐다. 순조롭게 이어가던 게임의 첫 번째 희생양은 석진이었다. 걸릴 줄 몰랐다는 듯 당황함이 피어오르던 얼굴은 금세 태연한 얼굴로 돌아왔다. 누가 어떤 질문을 할 것인지 고민하던 차에 “내가 질문해도 돼?” 주연이 선수를 쳤다. 다들 석진을 향하는 주연의 마음을 어렴풋이 알고 있었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오빠는 첫 번째 데이트랑 두 번째 데이트 둘 다 같은 사람이랑 했잖아. 만약에 세 번째 데이트 상대를 오빠가 정할 수 있으면 누구랑 하고 싶어?” 조금의 휘어짐도 없이 제대로 날아간 직구였다. 적나라한 질문에 그 누구도 섣불리 입을 열지 못했다. 여주는 주연이 말한 석진의 첫 번째 데이트와 두 번째 데이트 상대가 본인이었으므로 앞에 놓인 술로 갈증을 해소하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여주를 제외한 모든 이가 대답을 해야 하는 석진을 주시 했지만 석진은 술잔을 기울이는 여주를 바라볼 뿐이었다. 이내 약간의 웃음을 머금은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음 글쎄. 나랑 데이트 안 해본 사람이면 다 괜찮을 것 같아.”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여주는 이 기분이 어떤 종류의 감정인지 알 수 없었다. 머리로는 두 번이나 같은 사람과 데이트를 했으니 석진에게도 다른 사람과의 시간이 필요한 게 당연한 거라 생각했지만 마음 속은 뿌연 안개가 가득해 갑갑한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반면 주연의 얼굴에는 숨길 수 없는 미소가 떠올랐다. 자신의 이름을 말해줬으면 하는 바람에 미치지는 못하지만 석진과 데이트를 ‘안 해본 사람’에 자신이 속하기도 하니까. 그거면 됐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여주의 맞은편에 앉은 정국은 술잔만 보는 여주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애써 속상함을 숨기려는 저 표정을 더 이상 보고 있을 수가 없어서 게임을 진행하려 했다. 석진의 목소리가 또 한 번 울려 퍼지기 전까지만 해도.
“이제부터는 진짜만 말해야 하니까 정신 똑바로 차려야겠네.” 혼잣말이라고 하기에는 석진이 뱉은 말이 모두의 귓가에 선명하게 내려앉았다. 예고 없이 날아든 목소리에 술잔만 보던 여주의 시선이 순식간에 석진을 향했다. 여주의 동그랗게 뜬 토끼 같은 눈망울과 옅은 장난기가 섞인 석진의 눈이 마주쳤다. 석진의 머릿속엔 맑고 투명한 여주의 두 눈을 조금 더 오래 바라보고 싶다는 생각만이 가득했다. 누구에게나 은은하던 석진의 시그널이 여주에게 반짝 켜진 순간이었다.
“이번에는 나부터 다시 시작할게.” 숨 막히는 정적을 깨부순 건 다름 아닌 윤기였다. 그의 행동은 주연의 얼굴이 굳어지는 걸 보았기 때문도, 석진을 바라보느라 주변의 시선이 본인에게 꽂혀 있다는 것을 알아채지 못한 여주 때문도 아니었다. 윤기는 그저 여주의 시선이 한곳에 오래도록 머무는 게 싫었을 뿐이다. 이후로 진행된 게임에서는 차례대로 유정과 호석, 하은이 걸려 질문과 대답이 오고 갔다. 다음으로 진행한 게임에서 정국이 힘차게 꽂아 넣은 빨간색 칼에 통아저씨가 퐁- 튀어 올랐다. 덕분에 질문은 정국에게 돌아갔다. “나! 질문!” “뭔데?” 눈치를 보다 손을 든 하은은 메기로 입주하게 된 이후 계속해서 궁금했던 질문을 머릿속에 떠올렸다. 하은이 입주 했을 때에는 이미 정국의 시그널은 확실하다 못해 단단했다. 그래서 시선이 갔다. 무엇이 저렇게 견고한 전정국을 만들었을까. 한쪽만 콸콸 쏟아내는 애정인데 버겁진 않을까. 과연 저렇게 단단한 전정국이 여주가 아닌 다른 누군가로 인해 부서지는 순간이 올 수 있을까. 이 모든 물음을 한곳에 모아 입을 열었다. “네가 가진 마음에 변화가 생겼거나 앞으로 생길 수 있을 것 같아?”
“그럴 일 없어. 그리고 난 거짓말 안 해.” 깊게 생각해 볼 필요도 없다는 듯, 일말의 망설임 없이 튀어나온 대답이었다. 하은은 못 말린다는 표정으로 네가 한 번 더 안 짚어 줘도 거짓말 아닌 거 알아. 하고 대꾸했다. 정국의 맞은편에 앉아 있던 여주는 온몸에서 쿵쿵 울리는 심장 박동 때문에 정신이 없었다. 처음부터 올곧았던 정국의 마음을 모르지 않았다. 다정하게 물어보던 하루 일과도, 고개만 돌리면 마주치는 눈빛도, 식사시간 자주 손을 뻗었던 음식을 기억해 다음 식사에서는 처음부터 내 앞에 놓아주던 손길까지. 모를 수가 없었다. 그래도 이렇게 짙은 붉은색을 띤 마음을 확인 받는 것은 익숙하지 않았다. “이제 마지막으로 한 번 더 하고 정리할까요?” “그래 시간이 늦었네. 내일 출근하는 사람들도 있으니까.” 화끈거리는 열감을 달래기 위해 아무 말이나 던진 거였는데 다행히 잘 맞아떨어졌다. 그렇게 마지막 게임이 시작되고 질문의 주인공은 지금까지 단 한 번도 걸리지 않았던 윤기였다. 윤기는 담담하게 술을 넘기며 질문을 기다렸다. “오빠는 추가로 얻은 데이트 권 쓸 사람 정했어요?” 유정의 질문은 간단 했지만 여자 출연자 모두, 어쩌면 남자 출연자들까지 궁금했던 질문이었다. 윤기 또한 하은처럼 메기로 시그널 하우스에 입주했기 때문에 윤기에게는 원하는 상대에게 데이트를 신청할 수 있는 데이트 권이 존재했다. 본의 아니게 입주 첫날부터 모든 여자 출연자들의 시선과 마음을 뒤흔든 윤기라 윤기를 제외한 모든 사람들이 신경 쓰고 있는 부분이기도 했다. 그래서일까. 거실을 메우는 정적에 긴장감이 진하게 녹아 있었다. “아니.” 긴장했던 것에 비해 돌아오는 대답은 짧고 허무했다. 윤기의 대답에 유정은 묘한 표정을 지었다. “우리 한 번만 더 해요.” 갑작스레 한 번만 더 하자고 말하는 유정의 시선은 윤기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유정의 시선을 똑바로 마주 본 윤기는 웃으며 말했다.
“나한테 물어볼 질문이 있는 거면 그냥 해. 대답할 테니까.” 유정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었던 다른 사람들은 두 사람의 대화를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유정은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혀끝에 맴도는 질문을 입 밖으로 꺼냈다. “방금 전 질문에 대한 오빠 대답, 진실이었어요?” 윤기는 아무렇지 않게 옆에 놓인 컵에 물을 따르며 대답했다.
“아니. 거짓말이었어.” 그리곤 물이 찰랑이는 컵을 술기운에 볼을 발갛게 물들인 여주 앞으로 밀었다. 컵에는 물 대신 그의 다정한 시그널이 가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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