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민형을 처음 만났던 날은 아주 생생하게 기억난다. 그날 나는 아빠의 외도와 엄마의 절규를 목격했다. 어렸던 나라도 상황이 좋지 않게 흘러간다는 걸 쉽게 알 수 있었다. 그래서 도망치는 걸 선택했다. 멀리 아주 멀리 가고 싶었지만, 그 어린아이가 갈 수 있는 곳이 어디가 있겠는가. 나는 겨우 집 앞의 놀이터로 달려가 통 미끄럼틀 안에 몸을 숨겼다. 그 안에서 내 속에 가득히 차오르는 슬픔을 억눌렀다.
그렇게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저 멀리서부터 누군가의 가벼운 발걸음 소리가 가까워지는 게 들렸다. 나는 혹시나 나를 부모님께서 나를 찾으러 오신 건 아닐까 하는 기대를 했지만, 아니었다. 그 발소리의 주인은 어떤 남자 아이였는데, 그 아이는 불쑥 미끄럼틀 안으로 얼굴을 들이밀었다. 놀란 내가 딸꾹질을 하자 그 아이는 괜찮다며 잔뜩 움츠러든 내 어깨를 토닥여주었다. 어린아이의 서툴기 그지없는 토닥임에 내가 참아왔던 눈물을 터트리자 아이는 당황한 표정을 짓더니 곧바로 어설프게나마 나를 끌어안아주었다. 아이의 위로에 내 호흡이 점차 안정되어 가자 아이는 내 얼굴을 확인하려고 나를 살짝 밀어 내려 했지만 나는 본능적으로 그 아이를 꽈악- 붙잡았다. 싫다는 의미를 가득 담아 고개를 세차게 저으며 그 아이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나 어디 안가. 계속 니 옆에 있을 거야. 괜찮아.”
나를 달래는 아이의 말에 고개를 든 나는 벅벅 눈물을 닦았다. 그제야 그 아이의 얼굴이 보였고, 이어 내 손과 그 아이의 손에 연결된 붉은 실이 눈에 띄었다. 난 그 붉은 실을 곧바로 외면했다. 저 붉은 실만 내가 보지 않았어도, 내가 안방의 문만 열지 않았어도. 또다시 우울에 빠져버린 내가 울먹거리고 있자 자신의 주머니에서 ABC 초콜릿을 꺼내든 아이는 손수 껍질을 까 내 입 앞에 가져다 놓고는 내게 아- 했다. 내가 아- 하자 내 입에 초콜릿을 먹여준 아이는 내게 쫑알 쫑알 말을 했다. 대답 없는 내가 답답하지도 않는지 오늘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아까 초콜릿을 어떻게 엄마에게 받았는지까지 쉴 새 없이 떠들어댔다. 그때 ‘ㅇㅇ아- 밥 먹자-‘ 하는 소리가 들렸다. 이 아이의 이름이었는지 깜짝 놀란 아이는 가봐야겠다며 내게 말했다. 혼자 있고 싶지 않았지만 그런 말을 할 용기가 없었던 나는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그런 나를 보더니 흘려 내려온 내 머리칼을 귀 뒤로 넘겨준 아이는 ‘내일도 여기서 만나자!’라고 말했다. 나는 작게 ‘응..’ 대답을 했고, 아이는 ‘시계 큰 바늘이 3에 있을 때 만나자! 내일 봐!’ 하며 경쾌한 발소리를 내며 뛰어갔다.
홀로 남겨진 난 어느새 어둑해진 하늘에 어깨를 축- 늘어트리며 집으로 다시 돌아갔다. 집으로 돌아갔을 때에는 이미 아빠는 없었고, 엄마는 눈물을 흘리며 짐을 캐리어 안에 짐을 챙기고 있었다. ‘엄마…’ 내가 작게 엄마를 부르는 소리에 뒤돌아 본 엄마는 나를 와락- 끌어안으셨다. 한참을 ‘미안해.. 영아.. 엄마가 미안해…’라고 중얼거리다 천천히 나를 떼어낸 엄마는 애써 웃으면서 ‘엄마랑 같이 외할머니 댁에 놀러 가자’ 라고 말씀하셨고, 나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짐을 다 챙기고 집을 나서 놀이터를 지나가는데 문득 그 아이와의 약속이 떠올랐다. 나는 엄마에게 다급하게 잠깐만! 이라 외치고 내 이름을 부르는 엄마를 뒤로 한 채 얼른 집으로 뛰어가 서투른 솜씨로 글을 썼다.
‘나 외할머니랑 놀아야 돼서 같이 못 놀아! 다음에 같이 놀자 친구야!’
메시지를 아까 앉아있던 미끄럼틀 근처의 틈새에 끼워 넣고는 뿌듯한 미소를 지어며 내가 걸어오니 살며시 미소를 지은 엄마는 내게 손을 건넸다. 고사리 같은 손으로 엄마의 손을 꼬옥- 잡았고, 우리는 외할머니 댁으로 향했다. 그리고 우리는 다시는 우리의 집이라고 불렀던 곳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여기까지가 아마 이민형은 기억하지 못할 이민형과의 첫 만남이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어느새 난 고등학생이 되었다. 새 학기가 시작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 반으로 전학생이 온다는 소문이 돌았다. 처음엔 고3에 무슨 전학이냐며 다들 의아해했지만 금세 전학생에 대한 기대를 가득 머금고 떠들어댔다. 나는 관심이 없었다. 그저 평소에는 느슨하게 늘어져있던 내 붉은 실이 점점 날이 갈수록 팽팽해지는 것 같았기에 그 아이를 다시 볼 수 있을까 하는 생각만이 가득했다. 그 아이를 만난다고 달라지는 것은 없겠지만, 그냥 고마웠다고 그 한마디를 꼭 하고 싶었다.
아침 조례 시간에 선생님과 어떤 한 남자애가 같이 들어왔다. 그리고 나와 눈이 마주쳤다. 나를 향해 씨익- 웃어 보인 남자애는 자기소개를 하라는 선생님의 말씀에
“안녕, 나는 마크라고 해. 한국 이름은 이민형이고, 앞으로 잘 부탁해.”
분명 그 아이였다. 나와 그 아이를 연결하고 있는 붉은 실이 그 증거였다. 피해야만 했다. 내 눈에 보이는 붉은 실이 운명끼리 연결되어 있는 거라고 해도, 그 어떤 질긴 운명일지라도 나는 나를 지킨다는 명목으로 도망치기를 선택했다.
전학을 온 날부터 이민형은 학교의 인기 스타였다. 쉬는 시간마다 반 아이들은 물론 다른 반 아이들도 이민형을 구경하기 위해 어슬렁거렸다.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아니- 내가 마음에 안 들면 어쩔 거야. 그냥 좀 이상했다. 처음 느껴보는 감정이었다. 그렇게 이민형이 머릿속을 떠다녔다. 아- 오늘 하루의 시작과 끝은 이민형이었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붉은 실이 보이는 게 뭔지. 이것만 안 보였어도 이민형이 그 아이인 줄 몰랐을 텐데. 그런 생각들을 하며 주번이었던 나는 이미 아이들이 집으로 돌아가 텅 비어버린 교실 문을 잠그고 나서야 학교를 나설 수 있었다.
우리 학교 근처에는 길고양이들이 좀 많은데, 나는 틈틈히 그 고양이들을 돌보고 있다. 오늘도 어김없이 공원 한쪽 구석에 있는 길고양이들의 집으로 가 물도 갈아주고 밥도 주려는데, 누가 길고양이들의 집 앞에 쪼그려 앉아 있었다. 우리 학교 교복에 익숙한 뒷모습이라 슬쩍- 옆으로 가 얼굴을 확인하니 이민형이었다. 난 순간 인기척을 느껴 돌아본 이민형에 놀라 뒷걸음질을 쳤다.
“어? 안녕? 너 우리 같은 반 맞지?”
“아 응 맞아. 안녕.”
“이름이 뭐야?”
“아- 나는 유영이야.”
“아... 이름 이쁘다..”
어색한 자기 소개를 끝내고 할 말이 없어서 그냥 이민형을 지나쳐 물을 갈아주고 통조림 캔을 따놨다. 뚫어져라 내가 하는 행동을 보던 이민형은
“혹시 나도 고양이들 돌봐줘도 돼?”
“응? …어차피 내 고양이들 아니라서 내 허락 안 받아도 돼. 근데 나도 못 올 때가 있으니까. 돌봐주는 사람이 더 있으면 좋긴 하겠다.”
무슨 큰 대단한 결심을 하듯이 고개를 거세게 끄덕인 이민형은 열심히 해보겠다며 말했다. 그렇게 우리는 통조림 캔을 먹는 고양이들을 나란히 벤치에 앉아 구경했다. 고양이들이 통조림 캔을 다 먹고 사라지자 빈 캔을 쓰레기통에 버리고 온 이민형은 내게 물었다.
“집이 어디야? 가는 길 같으면 같이 가자.”
“아 나 저쪽으로 조금만 걸어가면 돼.”
“어?! 나랑 똑같네~ 같이 가면 되겠다~”
뭐가 그렇게 좋은지 배시시- 웃으며 말하는 이민형을 거절할 수가 없었다. 끊어질 듯이 팽팽하게 우리를 연결하고 있는 붉은 실이 계속해서 눈에 거슬렸지만, 애써 모른 척을 하며 먼저 앞서나갔다. 내 옆으로 달려온 이민형은 혼자 TMI를 남발해댔고, 나는 대충 대답을 해주다 보니 아파트 단지 앞에 도착을 했다. 여기가 우리 집이라고 하니 놀란 표정을 한 이민형은 자신의 집도 여기라고 했다. 그것도 같은 동이었다. 우리는 같이 엘리베이터를 타고 이민형은 11층, 나는 5층을 눌렀다. 띵- 5층에 도착을 하고 먼저 내가 내렸다. 손을 흔들며 이민형에게 잘 가라고 인사를 하니 이민형이 내일 보자며 내게 인사를 했고, 그렇게 엘리베이터의 문이 닫혔다.
집으로 돌아온 나는 씻고 침대에 누워 생각을 해보았다. 어릴 때 만났던 그 남자아이가 이민형이다. 그리고 이민형은 나를 기억하지 못한다. 또 내 눈에만 보이는 이 원망스러운 붉은 실로 이민형을 알아볼 수 있었다. 좋은지 싫은지 모르겠다. 나도 내 마음을 하나도 모르겠다. 생각을 정리하려고 할수록 꼬여가는 듯한 머릿속에 머리가 지끈- 아픈 듯했다. 그냥 생각하기를 포기한 나는 두 눈을 감고 잠에 빠져드는 것을 택했다.
드디어 주말이었다. 하지만 대한민국의 고3으로서 늦잠을 잘 수 없었던 난 일찍이 일어나 독서실을 갈 준비를 했다.
“영아~”
“응-? 왜?”
엄마의 부름에 주방으로 나가봤더니 처음 보는 접시가 있었다. 또 그 옆에는 과일이 담긴 종이 가방이 있었다.
“엄마 이번에 우리 동으로 이사 온 11층 사람들이 떡을 돌려가지고~ 빈손으로 그릇 돌려주는 건 아니니까~ 과일 좀 주려고~ 그니까 영아 이거 좀 1102호에 주고 와.”
“응?”
뭐 문제 있냐는 듯이 나를 바라보는 엄마의 눈빛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던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접시와 종이 가방을 챙겨들고 1102호로 향했다. 제에발 이민형 네가 아니길.. 뭔가 거의 100% 이민형 네일 것 같았지만 실낱같은 희망을 붙들고 빌었다.
띵- 11층에 도착한 나는 1102호 앞에 서서 심호흡을 한번 한 뒤 벨을 눌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