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항상 말이 없었다.
꽃샘바람이 거리에 추위의 찌꺼기를 남기는 3월. 빳빳한 새 교복이 왠지 모르게 불편해 조금 어색한 자세로 앉아있는 나. 새 학기였다. 새 교실, 새 친구들은 곧 낯선 공간, 어색한 인물들이었다.
이번 년도에는 반 배정이 아주 뭐같이 되어서 나 혼자만 이 반으로 쏙 빠지고 다른 친구들과 떨어지게 되었다. 나는 전 친구들과의 관계를 유지하려 쉬는 시간마다 다른 반으로 발품을 팔았지만, 어리석은 짓이었다. 결국 나는 혼자가 되었다. 반에서도 특별히 친한 친구가 없었다. 이대로 아웃사이더로 지내야 하나, 고민하던 찰나 나는 그제서야 옆자리의 김기범을 발견했다.
김기범이 내 옆자리에 앉게 된 이유는 별 거 없었다. 담임이 번호순대로 앉으라고 했으니까. 학기 초부터 그렇게 앉았지만 나는 5월 중순이 다 되어서야 옆의 김기범을 의식하기 시작했다.
김기범에게는 다른 남자애들과 확연한 차이가 있었다. 밖에 잘 나가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그의 피부는 남자치고는 희었다. 웬만한 여자애들만큼. 그는 반 애들과 잘 어울리지 않았지만, 그에 대한 주변인들-선생들을 포함한-의 평가는 모범적이다, 차분하다, 이성적이다, 따위의 좋은 말들이었다. 점심 시간마다 운동장에 나가 축구를 하는 남자애들 무리에 전혀 끼지 않으면서도 남자애들에게서 욕을 듣지 않고, 여자애들 무리에서도 뒷말이 나오지 않았다. 김기범은 집단에 속하지 않으면서 소외되지도 않았다. 철저한 자기 관리로 모두에게 미움받지 않는 김기범의 모습은, 모두에게 미움'조차' 받을 수 없게 된 나의 모습과 확연히 비교되었다.
그때부터 나는 김기범에게 접근했다. 덜 외롭기 위한 발악이었는지, 쟤도 혼자니까 만만할 거라는 착각 때문이었는지는 모르겠다. 놀랍게도 김기범과 쉽게 친해질 수 있었다. 그건 나 혼자만의 착각이 아니었다. 나는 나를 거부하는 사람의 의사를 읽을 수 없을 정도로 멍청하지 않다. 김기범은 나를 밀어내거나 싫다는 의사를 밝히지 않았다. 오히려 나에게 호의를 표현한 적도 ......있었나?
그 뒤로 그와 나는 함께하게 되었다. 점심을 같이 먹고, 조별과제를 같이 하고, 도서관에서 같이 공부하고......그런 것들. 물론 그는 항상 말이 없었다. 내가 한껏 재잘거리면 김기범은 그에 맞는, 짤막하지만 무게있는 답들을 해주었다. 나는 그런 대화마저도 좋았다.
김기범과 나는 손만 안 잡고 다녔지, 여느 동성 친구들끼리의 사이를 유지하며 하루 종일 붙어 다녔다. 남자와 여자의 조합이라는 특이점 때문에 뒤에서 우리 둘의 사이에 대해 수군거리는 무리도 있었지만, 초등학생마냥 앞에서 대놓고 놀리지는 않았다. 지금 생각하면 내 옆에 있는 남자애가 다른 사람이 아니라 김기범이어서일지도 모르겠다.
"저기......."
시간은 흘러 9월, 학교 뒤뜰 정자에 앉아 가을 바람을 맞고 있는 나를 낯익은 목소리가 붙잡았다. 그 소리에 뒤돌아본 나는 얼굴이 굳으려는 걸 애써 폈다.
이윤혜, 학기 초 나를 버리고 떠나갔던 애들 중 하나였다. 얘가 왜 갑자기 나한테 말을 걸었지, 하는 생각보다 불편함과 적대감이 앞섰다. 자주 보지 못한다는 핑계로 사이가 소원해지는 와중에 나를 대놓고 소외시키는 데 동참한 한 명이었다. 당연히 호의적인 감정이 들 수가 없었다.
"이렇게 찾아와서 말하는 거 미안한데......그래도 말해야 할 것 같아서......"
팔짱을 끼고 가만히 이윤혜를 쳐다보았다. 보는 눈이 없는 곳까지 찾아와 한다는 말이 별 가치 없는, 속빈 말-때늦은 화해 신청 같은-이라면 가만 있지 않겠다는 무언의 경고를 담아서.
"할 얘기가 뭔데."
"......."
"네가 하는 말 오래 듣고 있는거 싫으니까, 요점만 말해."
"네 친구 중에......김기범이라고, 있지?"
".......?"
"걔랑 친하다며, 근데, 걔랑, 너무.......가깝게 안 지내는 게 좋아."
"무슨 말이야, 그게."
"걔 소문을 안 들어본 것 같은데, 걔......좀 밝힌대."
"밝혀?"
"여자를. 한 번 찍은 애는 자기랑 자 줄 때까지 쫓아다니다가, 자고 나면 버리고 다니는 짓을 중학생 때부터 계속했대. 그러다 중3때 여기로 이사오면서, 과거 다 묻고 고등학교 다닌 거지. 소름돋지 않아? 그런 과거도 있으면서 여기서는 깨끗한 척, 모범생인 척 다하면서 여자인 너하고 같이 다녔다는 거잖아. 너 지금부터라도 걔랑 연 끊고......."
"이윤혜."
"어?"
"닥쳐."
갑자기 봇물 터지듯 흥분해서 말을 쏟아내는 이윤혜의 입을 막았다. 더 이상 그 더러운 혀가 또 다른 사람을 중상하는 꼴을 두고 볼 수 없었다. 나를 벼랑 끝까지 몰아넣은 그 혀가 또 나를 밀어버리려 하고 있었다.
"뭐? 닥쳐?"
"......."
"야, 내가 너 엿먹이려고 구라치는 거 아냐. 이거 사실이야! 김기범이랑 같은 지역에서 중학교 다닌 친구가 말해준 거야. 걔 데려와 볼까? 걔 말 들으면 너도 믿을 수밖에 없을......"
"닥치라고 했어."
"그냥 소문이 아니고 진짜라니까! 내가 너 걱정돼서 말해주는 거야!"
뭐, 걱정? 네가 내 걱정을 해?
"걱정? 방금 걱정이라고 했어?"
"......."
"걱정한다고......야, 김기범이 도대체 어떤 애길래......걱정한다고? 니가? 나를?"
"......."
"씨발.......내가 진짜 어이가 없어서."
내 입에서 갑자기 튀어나온 욕설에 이윤혜는 벙찐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나는 정말로 어이가 없었다. 그 때도 이윤혜는 내가 걱정된다며, 어떤 소문을 나에게 들려주었다. 그리고, 어떻게 되었더라?
"너, 작년에도 이런 식으로 비슷한 얘기 하지 않았니?"
"......"
"난 그걸 곧이곧대로 믿었고."
"......"
"근데, 그래놓고 이번에도 또 이딴 소문 나부랭이나 늘어놓고 있으면."
"......"
"네가 나라도 네가 하는 말 믿을 것 같아?"
더 이상 들을 것도 없었다. 나는 최대한 한심함과 경멸이 가득 찬 눈으로 이윤혜를 노려보고는 그대로 몸을 돌려 교실로 돌아갔다. 힘없이 떨구어진 두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눈에 뜨거운 눈물이 들어차는 것이 느껴졌다. 또 한번 악마의 농간에 넘어갈 뻔 했다. 잘 했어, 잘 한 거야. 나를 다독였지만 흘러넘치는 눈물을 막을 수는 없었다.
눈물을 남들 모르게 슬쩍슬쩍 훔치며 들어간 교실에는 아무도 없었다. 점심 시간이라 남자애들은 축구를 하러 나갔고, 여자애들은 어디로 몰려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아니, 아무도 없는 게 아니라 한 명이 있었다. 김기범.
나는 김기범의 옆자리로 가서 의자를 당겨 앉았다. 앉자마자 누르고 있던 눈물들이 찔끔찔끔 나오기 시작했다. 내 쪽을 돌아본 김기범은, 내 눈물을 보고도 별다른 행동을 취하지 않았다. 그저 읽고 있던 책을 덮고 나를 쳐다볼 뿐이었다. 눈물을 닦아주지도, 위로의 말을 건네지도 않았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무슨 일이 있었길래 우는 거니. 김기범은 눈으로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별 일, 없었어."
"......"
"별 일 아닌데 좀 슬퍼서 우는 거야."
신기하게도, 눈물은 금세 그쳤다.
그 뒤로 나는 이윤혜에게서 들은 그 소문에 대해서는 일절 떠올리지 않았다. 아니, 않으려 했다. 그러나 그 이야기는 시간이 지날수록 나의 뇌리에 깊숙하게 박혔다. 나도 나를 잘 이해할 수가 없었다. 믿을 가치도 없는 허무맹랑한 소문에 대헤 내가 의문을 가지는 이유는 뭘까. 나는 곧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그 원인은 나의 김기범의 대한 무지에서 오는 의심이었다. 김기범과 친구가 된 지 1년이 다 되어가는 시점에서도 나는 김기범에 대해 아는 게 없었다. 특히 과거에 대해서는. 김기범은 처음부터 자기에 대한 이야기를 잘 하지 않았다. 내 이야기를 들어주기만 할 뿐.
김기범의 실체에 대한 호기심과 그 호기심을 갖는 것으로부터 비롯되는 죄책감 사이에서 괴로워하면서, 나는 중대한 결정을 내렸다. 김기범이 말하지 않는다면, 내가 알아내기로.
김기범과 나는 많은 곳을 쏘다녔지만 가지 않은 곳이 한 군데 있었다. 김기범네 집. 나는 김기범이 혼자 사는지, 가족과 함께 사는지조차 알지 못했다. 그의 집에 가보자. 그의 주변 인물들을 알아가다 보면 김기범에 대해서도 언젠가는 알게 되겠지. 나는 단순하게 생각하기로 했다.
"집?"
"너네 집에 한 번도 가본 적이 없어서."
"그럼 그렇게 해."
"그럼 토요일에 간다?"
"그래."
그는 그에 대해 잘 드러내지 않았지만, 드러내지 않으려고 애를 쓰진 않았다. 생각보다 쉽게 떨어진 허락에 나는 안도하다가, 또 자신을 채찍질했다. 이러다가 김기범이 진짜 나쁜 놈이면, 뭐 어쩔 건데. 나 왜 이러니?
김기범의 집은 지어진 지 얼마 안 된 듯한 깔끔한 아파트였다. 내부도 꽤 넓었다. 여기서 가족들이랑 같이 사는 건가, 그런 내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김기범의 목소리가 들렸다.
"자취방이야."
자취방이라고? 여기가? 이 넓은 곳이? 김기범네 집안은 꽤 재력이 있나 보다. 남자 한 명 쓰라고 이 좋은 집을 사주는 걸 보면. 그 정도 재력이면 안 좋은 과거쯤은 어떻게 잘 덮을 수, 난 또 이딴 생각이나 하고 있구나.
"뭐 할래?"
뒤이어 이어진 김기범의 물음에 나는 잠시 어안이 벙벙해 있다가, 공부를 하자고 했다. 그렇게 공부를 하다가, 책을 읽고, 영화를 보고 나니 어느새 저녁 시간이 되었다.
"나 이제 간다. 저녁 먹으러."
"먹고 가."
"뭐?"
"해줄 테니까 먹고 가라고."
잠시 동안 정적이 흘렀다. 나는 아주 잠시 동안 그냥 갈지, 아니면 여기 있을지 고민했다. 이유 없이 밀려오는 오싹함에 그냥 도망갈까도 했지만, 생각해 보면 여기 온 목적은 그의 과거에 대해 조금이라도 알아내는 것인데, 다른 일에 정신이 팔려 그것을 잊고 있었다. 결국 저녁을 먹고 가기로 했다. 나는 조용히 식탁에 앉아 저녁을 준비하는 김기범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보기만 했다.
그가 해준 요리는 꽤 맛있었다. 식사를 마치고 소화도 시킬 겸 잠시 tv를 보았다. 그런데 배가 불러서 그런지, 어젯밤에 잠을 제대로 못 이뤄서 그런지, 점점 잠이 온다. 잠들면 안 되는데. 조그마한 정보라도 알아내고, 집으로 돌아가야 하는데......졸리다.
일어나 보니 이미 창 밖의 풍경은 칠흑같이 어두워져 있었다. 휴대전화로 시간을 확인해 봤더니, 맙소사, 자정이 넘은 시각이었다. 버스도 끊겼을 텐데, 이제 집으로 돌아갈 방법이 없다. 정말 다행히도 부모님은 지금 여행을 가신 상태라 어디 있었냐고 추궁을 당할 일은 없지만 더 문제는 그게 아니었다. 이대로라면 김기범과 하룻밤을 보내야 한다. 하룻밤! 왜 오늘따라 이 단어가 더 외설적으로 느껴지는지 모르겠다.
김기범이 덮어준 듯한 담요를 걷어내고 소파에서 일어나 거실을 벗어났다. 이 집에는 방이 총 세 개. 공부방, 침실, 서재로 쓰인다. 김기범은 남은 공부방과 침실 중 하나에 있을 것이다. 집안의 불은 모두 꺼져 있는 상태고.....그렇다면 공부방이 아닌 침실에 있겠지. 침실의 문이 약간의 틈을 두고 열려 있었다. 문을 밀어 보니 예상대로 김기범이 있었다. 벽을 보고 누워있는 김기범의 뒤통수를 확인하고 서재로 향했다.
김기범에 대한 것들을 알아내려는 나의 계획은 서재를 뒤져 그의 과거 기록들을 찾아내는 것이었다. 하다못해 졸업 앨범이라도 뒤져볼 생각이었다. 운이 좋으면 아는 얼굴을 발견할 수도 있다. 그가 다닌 중학교는 우리 학교에서 멀지 않은 지역에 있으니까. 혹시나 하는 마음에 서재의 불을 켜지는 않고 휴대전화 불빛에 의존해서 앨범을 찾기 시작했다. 앨범을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김기범의 얼굴을 찾는 것도. 다른 반도 아니고 1반일 건 또 뭐람. 그의 반을 중심으로 얼굴들을 하나하나 확인했다. 어? 아는 얼굴이 있는 것 같다. 이름이......김종현?
"여기서 뭐해."
새로운 사실을 알아냈다는 기쁨도 잠시, 뒤에서 들려오는 나직한 목소리에 그 자세 그대로 얼어붙었다.
"여기서, 뭐 하냐고."
그 목소리는 따뜻한 숨결과 함께 내 귓가로 다가왔다.
불과 한 뼘도 안 되는 거리에 김기범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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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는 진지하게 시작했는데.....고등학교 얘기로 빠지고.....내용이 점점 이상해지네요. 하하 망했다
어떻게 이어가야 되는지도 모르겠다......하.....
기범이 빙의글인데 기범이 분량도 없고.....이윤혜랑 말 많이하고....엉엉....김종현 떡밥은 어떻게 회수해야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