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민아. 지민아! 간호사님, 우리 지민이가 눈을 떴습니다. 어서 확인해주세요!"
"어머니 뇌사 상태는 그렇게 쉽게, 잠시만요. 지금 눈을 뜬 거 맞죠?! 환자분 보이세요?"
"지민아!"
"담당 간호사님!"
눈을 느리게 떴다. 하얗게 보이는 세상이 점점 제 색깔을 갖췄다. 하얀 방. 뚫린 창문. 밖에는 푸른 하늘. 상냥한 공기가 방을 부드럽게 매웠다. 하얀 공간에 차가운 공기의 온도. 눈물이 났다. 그냥 아무 이유없이.
내가 눈을 뜨고 처음 본 사람은 나의 하나밖에 없었던
어머니.
오천 년의 역사를 넘어서 온 곳에서 하얀 머리인 어머니를 볼 수 있었다.
머리는 하얀 색, 눈이 붉은 색. 피부는 희고 보드란…. 머릴 쓰담던 손길이 아주 따뜻하던 그녀는 홍의 중전. 내 어릴적 내가 떠나버린
나의 어머니.
하관을 덮은 호흡기 안의 표면에 뿌연 김이 그려졌다. 쇠로 된 침대, 하얀 침대보. 이상한 기계음이 숨가쁘게 달리는 소리가 귀를 울렸다.
흰 옷이 입혀진 나. 오랜만에 보는… 정말 오랜만인….
눈꼬리를 따라 한 눈물 줄기가 내려갔다. 호흡기를 천천히 떼어내 자리를 일어났다. 굳은 몸. 얼굴을 매만지는 어머니의 손길. 그녀의 눈에 가득찬 물이 안구를 채웠다.
이번에는 절 얼마나 기다리셨습니까. 조국을 떠나버린 못난 황자를 얼마나 기다리셨습니까. 이 천국에서 얼마나 기다리셨습니까.
일그러지는 내 얼굴은 어머니의 목덜미를 파고들어 묻었다. 내 손목에 있던 주삿바늘은 뽑혀지고 흰 옷에 피가 튀어졌다.
어머니는 오열을 하며 주황 머리를 휘저었다. 간호사와 의사들이 몰려와 내 몸을 확인하고 눈에 빛을 쏘았다. 동공이 작아지니 그들은 판때기에 무언가를 적었다.
그리곤 코 안으로 연결된 선을 제거하고 나를 침대에 눕혔다. 이게 무슨 대수라고 다들 몰려와서 구경하는 것일까.
수근거리다 얼굴을 손으로 가린 어머니의 등를 토닥이곤 자리를 떴다.
혼자 남은 간호사. 능숙하게 다가와 기계들을 만진다. 갑자기 몸을 움직여 우당탕 쓰러진 무거운 쇠덩이들. 손가락을 물은 집게를 빼자 삐-소리가 난다.
듣기 싫은 소음을 끊어낸 간호사는 고개를 저었다.
"진정하시고 팔 내밀어 보세요."
나와 같이 흰 옷을 입은 간호사는 피가 터진 손목을 잡고 붕대를 감는다. 그리고 신기한 도구로 종이에 껄쩍이는 여자. 무슨 조건을 충족했다는 듯 표시하는 굵은 소리.
눈을 굴리다 눈물을 주체하지 못해 방을 나가는 어머니의 뒤를 쫓았다.
사라진 반가운 사람. 순식간에 식은 가슴이 아렸다.
그녀의 가슴팍에 달린 명찰에는 신기한 이름이. 풀잎. 낯설지 않은 이름이다. 지위가 높아보이는 여자는 내 얼굴을 힐끔 보고 말았다. 냉정한 성격인 것 같다.
갈색 눈동자에 녹색계열 검은 머리. 언젠간 들었던 이름과 생김새. 그 누군가를 도왔던 여자. 그 누구와 함께 천국을 꿈꾸었던 여자.
머리가 깨질 것 같은 느낌에 인상을 썼다.
"제가 지민씨 담당 간호사입니다."
"아."
"괜찮으세요? 손가락 몇 개로 보이세요."
"…두 개."
"시력은 괜찮고, 숨쉬는 건 불편하지 않으세요? 수술 후유증은 없으세요?"
"수술?"
"가슴에 그 흉터 말입니다."
머리 속이 하얗다. 내 안에 있던 무언가가 꿈틀거리는 아픔. 세상이 바뀌어도 내게 남은 그것은 여전해. 간호사를 올곧게 올려다보는 내 눈빛은 눈물어려졌다.
어떻게 해서든 확인해야했다. 나는, 내게 남은 큰 상처처럼 네가 남아있을까. 나를 따라 무사히 왔을까.
풀잎이란 여자는 손을 능숙하게 움직이다 내 눈길을 느끼고 눈을 마주보았다. 그리고 그 눈을 다른 곳으로 돌리지 못하고 나를 뚫어져라 보았다.
벙찐 채로 중얼거리는 여자의 입.
주황 머리… 호박색 눈동자. 그 환자분이 말하던….
눈오는 저 창밖을 보고 그녀는 움직임을 멈췄다.
"…거북이?"
피로 물든 붕대. 침대를 박차고 일어나 방을 빠져나갔다. 차가운 돌바닥을 딛고 맨발로 뛰었다. 긴 복도. 저 밖은 하얀 눈으로 덮힌 동산. 건물 뒤 창밖엔 깊고 파란 바다가 펼쳐졌다. 미친 사람처럼 뛰어다니며 그녀가 있을 방을 찾는다.
네가 있길 바라. 네가 날 기다리길 바라. 어떤 모습이든, 어떤 얼굴을 하고 있든, 네가 나를 잊었든, 나는….
헉헉 거리며 뛰어다니다 나는 가슴을 쥐었다. 주체할 수 없는 심장이 터질 것 같아.
육감이 이끄는 곳을 향해 도착했다. 흰 옷이 펄럭이며 쇠문고리를 잡아돌렸다. 온 몸으로 밀듯이 들어간 병실.
옆 회색 의자에 앉아 눈을 감고있는 한 남자. 그리고 쇠로 만들어진 침대에 하얀 시트. 얇은 이불을 덟고 있는 검붉은 머리의 여자.
몸에 핏기가 없는 여자는 그 침대에 누워 눈을 감은채로, 그렇게 넌 눈을 꼭 감고 있다.
정국은 눈을 뜨고 나를 올려다본다. 너와 닮은 똑같은 눈 색으로. 너를 담은 똑같은 눈동자 색으로. 붉은 눈동자는 허망한 나를 담았다.
"…누구십니까."
잠을 자는 여자는 일어나지 않았다. 남자는 나를 기억하지 못한다.
서늘한 바람만이 파도에 이끌려 방으로 들어온다. 하얀 벽으로 된 방. 네 옆에 투명한 유리병에는 푸른 장미가 살아있었다. 네 대신 숨결을 내뱉고 있었다.
조용한 방 안에는 무릎을 털썩 앉은 나만 홀로 무너졌다. 심장을 누르는 고철덩어리들의 압력. 숨막힐 정도로 독해 견딜 수 없었다.
내 눈 앞에 펼쳐지는건 거짓이야?
하얀 구름무리들이 하늘을 떠돌았다. 눈송이마저 하얀 세상은 눈으로 덮힌다. 저 멀리 눈으로 덮힌 동산에 뛰어다니는 하얀 옷을 입은 아이들. 녹과 홍으로 된 연을 쥐고 뛰어다닌다.
조용히 방 안으로 눈송이들이 들어와 차가운 바닥에 앉는다.
나는 보이지 않았던 백의 나라의 존재를 확신했지만 눈 앞으로 보이는 사실에 믿을 수 없었다.
나도 너도 여기에 있다.
"설령아!"
눈꺼풀을 살며시 들어올린 여자에 정국이 놀라 그녀의 손을 쥐었다. 차가워보이는 손은 정국의 손을 쥐었다. 너는 나처럼 눈을 떴다. 너도 나처럼 오래 잠을 잔 듯했다.
그리고 너는 나를 잊었다.
"오라버니. 저 사람은… 누구?"
설령은 나를 모른다. 충격 받았다. 나와 같은 꿈을 꾸고, 우리의 소원을 이뤘지만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다.
나는 네가 나를 잊었다는 걸 이해할 수 없다.
*크리스마스 특집& 연말 특집.
-거북뎐 외전-
말할 수 없는 비밀- bicycle
네모난 것들이 땅 위에 서있다. 땅에 닿는 부분이 낡아서 조금 금간 듯. † 모양이 네모난 것들 위로 앉았다. 네모안에 또 작은 네모들이. 사람들이 네모난 것들 앞에 작게 그려져있다. 거북이가 내가 온 걸 아는지 모르는지 푹 빠져서 연못물을 울렁거렸다. 흰 옷을 입은 사람들. 긴 의자에 앉아 있다. 헐렁이는 흰 옷을 입은 아이들이 하얀 산으로 달려가 연을 날린다. 녹색과 홍색이 잘 어우려진 연을. 그러더니 하얀 동그라미가 땅으로 내린다. 만지면 뽀드득 거릴 눈이 내린다. 넓은 대지에 다른 네모난 것들이 정렬되어 눈을 맞이한다. 평화로운 분위기. 녹과 홍은 잠잠하게 눈에 녹아들었다. 낮은 산과 작은 마을 뒤로 푸른 바다가 펼쳐졌다. 항구와 함께.
네모난 것들은 건물. 오래된 듯한 건물에 금이 갔다. 백색병동. 네모난 건물 안 창이 층마다 여러 개씩 뚫려있다. 이 나라는 흰 옷을 입은 사람들이 가득하다. 하얀 옷은 병원복. 아픈 사람들이 가득한 이 백색병동은 어느곳보다 마음이 놓였다. 흰 옷을 입는 나는 병동 밖 쉼터 의자에 앉아 웅크렸다. 나무가 적은 하얀 동산에 아이들이 뛰어다닌다. 그들 손에 든 연은 죽음 속에서 보았던 그것. 녹과 홍이 어우러져 색이 물든 연이… 그 연이 점점 하늘로 떠오른다. 뛰어다니다 발걸음은 멈춘 아이들이 해맑게 웃는다. 간밤에 눈이 왔는지 얇게 쌓인 풀밭을 맨발로 밟아본다. 넓은 하얀 세상에 건물들이 가득하다. 건물에 작은 불빛이 음영지어 들어온다. 풀은 눈에 덮여 고개를 숙이고 불은 눈에 가려져 크기를 줄였다.
병원 뒤로 들리는 파도 소리. 푸른 바다. 녹과 홍의 나라보다 면적이 좁지만 훨씬 평화롭다.
무릎과 다리를 끌어안으며 고개를 묻었다.
너에게 했던 말을 끌어내 회상해본다. 희망차고 당당하게 말했던 그 나라를. 같이 꿈꿨으면 했던 그 나라를. 그리고 네가 이루어줬으면 했던 조건을.
'녹의 공주와 내가 꿈꿨던 그 나라가 있어! 새하얀 옷을 입은 아이들이 뛰어다니면서 그것이 내려! 눈이 항상 내리는 그런 나라. '백의 나라'말이야. 나는 보았어. 그곳이 정말 있었단 말야. 죽음과 동시에 나는 그곳을 봤어.'
'내가 말했지? 녹의 공주와 내가 꿈꿨던 그 나라가 있어! 새하얀 옷을 입은 아이들이 뛰어다니면서 그것이 내려! 눈이 항상 내리는 그런 나라. '백의 나라'말이야. 나는 보았어. 그곳이 정말 있었단 말야. 죽음과 동시에 나는 그곳을 봤어.'
'나와 녹의 공주가 꿈꾸었던 백의 나라로 가자. 네가 더이상 상처받지 않고 널 위한 눈이 내리는 그곳으로.'
그곳으로. 백의 나라로. 백의 나라란 가상의 세계가 가당키나 한 말일까. 그런 곳에 가기 위해선 한 가지 어려운 조건이 충족되어야했다.
'백의 나라라는 곳이 있다구요?'
'풀이 아닌 불을 가슴에 품을 때, 백의 나라로 갈 수 있다고.'
너는 나와 같은 꿈을 꾸게 되었다. 네가 희생한 후 결국 낯선 나라에 오게 되었다. 네가 사랑했던 사람들과 함께. 네가 놓치고 싶지 않았던 사람들과 함께 눈의 나라에 왔다. 수천 년을 달려 도착한 곳은 결국엔 내가 바란 나라. 녹의 공주와 도모했던 녹과 홍의 조화. 홍의 황자였던 내가 모든 걸 버리고 녹의 공주의 뒤를 따랐던 나를 조롱하던 말. 모든 걸 견딜 수 있었다. 믿음이 배신하지 않을거라 믿었어. 네 아팠던 날과 내 아팠던 날은 시간에 무뎌지고 모래시계처럼 사라진다. 더이상 우리는 없다. 괴롭다.
소원이 이뤄졌다. 불가능에 가까운 것을 이루어냈지만 두렵다. 나홀로 어떻게 해쳐나갈까. 남겨진 내 마음은 어디로 흘러보내야될까.
백의 나라에 왔지만 하나도 행복하지 않다. 얇은 흰 병원복을 입고 차가운 상온에서 웅크려 혼자 있었다. 내가 눈 뜨면 보이길 바란 사람은 어머니가 아니었다. 이미 홍을 떠낼 때부터 마음에 묻어둔 사람.
손을 내민 사람이 너이길 바랐다. 그때 거북이인 나를 만났을 때처럼. 네가 모든 걸 잊었다는 건 내가 이 세상에서 사라져가는 것과 같아.
거북이처럼 웅크린 몸 위로 내리는 눈에 나는 흐느꼈다. 네 눈이 너무 차가워 보여서. 내가 없는 그 눈이 너무 무서워. 어떻게 그 먼 길을 돌아가야할지 모르겠어.
쌓이는 눈을 외면하고 자리에 일어나 병원 가장자리를 맴돌았다. 그런 병원 쉼터에서 보이지 않던 작은 연못을 찾았다. 내가 머물렀고 잠을 잤던 그곳. 우두커니 서서 내려다 봤다. 금지의 연못과 유사한 곳. 기억이 지나간다. 얼마나 아팠었는지 생생하다. 달빛 아래서 기도했던 오천 년의 기도, 녹의 공주에게 거짓사랑을 알고 그 손에 심장이 터져버리던 기억. 칼이 꽂히기 전 먼저 터져버린 심장은 일찍 그 날카로운 말에서 터져버렸다. 거북이가 되고 싶었다는 말을 읊조리던 그때. 오천 년을 홀로 잠으로 버티고 거북이 등껍질안에서 웅크리던 그런 시절. 얼마나 시간을 넘어서 도달했을까 가늠 안 되는 이곳은 또 나 홀로. 백의 나라, 이 곳은 눈꽃 머금은 바람이 쎄하게 분다.
맑은 물의 표면은 실망과 아픔으로 가득한 얼굴을 비춘다. 네가 사랑했던 호박색 눈은 그렁그렁 물기로 가득 차올라 후엔 웅덩이에 작은 파동을 인다.
외롭다. 외로움을 넘어서 괴롭다. 난 괴롭다.
혹시
그 전의 기억들이 거짓이 아닐런지.
내 아픔과 네 아픔이 거짓이 아닐런지.
병동의 쉼터에 숨겨진 작은 물웅덩이에 발을 내밀었다. 축축하게 젖어가는 병원복. 얼음같은 차가움은 아무렇지 않았다. 어깨까지 차오른 물의 선을 외면하고 머리 끝까지 적신다. 몸 전체를 연못으로 담군다. 보글보글 올라가는 물방울. 작은 몸집으로 변해 등껍질 안으로 들어간다. 물 안에 떠있는 나는 숨죽여 울었다.
내가 자라여도 괜찮다. 내가 거북이어도 괜찮다.
다시 한 번만 나를 거북님이라고 불러주련.
다시 한 번만 더 나를 찾아와 손을 내밀어주길.
아무도 들을 수 없는 소리는 물에서 진동하고 사라진다. 난 그렇게 용기 있는 사람이 아니야. 기댈 수 있는 버팀목처럼 행동했지만 아파. 아파서 죽을 것 같아. 속이 위액으로 녹아들어가는 느낌이야. 바람만 불어도 살갗이 아파서 사람의 모습으로 있지 못 했어. 두꺼운 껍질이 모든 걸 막아내는 느낌이었거든.
그런데 네가 다 돌려놔버렸잖아…. 널 만난 순간 굳게 쌓아온 벽이 한 순간 와장창 내려앉았다고.
숨어있던 껍질이 갑자기 바깥의 충격으로 움직인다. 누군가 쑤욱 물 밖으로 건졌다. 혼란스러워 밖으로 고개를 내밀자 보이는 건
"거북아, 왜 여기서 외롭게 숨어있니."
풀잎이란 명찰을 단 간호사 여자.
왜 이 차가운 곳에 잠겨서 외롭냐고, 왜 숨어있냐고 물어보는 말에 모든 게 터져버렸다. 젖은 몸으로 변해 눈을 가리고 꺽꺽거리며 눈물을 쏟아냈다.
어깨가 들썩임을 얽매 속으로 슬픔을 삼켰다. 무섭고 두렵다. 다시 마주할 힘이 없다. 네 공허한 눈을 보면 얼마나 상처받을지 예측이 되지 않는다.
"으… 으, 우우…."
젖은 주황 머리카락. 흰 병원복이 몸에 달라붙어 더 외소하게 만든다. 세상은 나를 더 작게 만든다. 먼저 폭포처럼 우수수, 상처받은 후엔 좋은 일만 있을 줄 알았다. 크기는 동등할 줄 알았다. 하지만 공평하지 않다. 아픔과 기쁨의 크기는 공평하지 않았다. 내 삶은 끝내 아픔으로 시작하고 아픔으로 완료. 울음에서 시작한 삶은 울음으로 끝난다.
내가 녹아서 물로 사라졌으면 좋겠다. 다음 생 따위 없었으면 좋겠다. 더이상 무언가로 태어나고 싶지 않아.
만약, 어쩔 수 없이 신이 환생시킨다면 난 구름으로 태어나고 싶다. 눈을 내려줄게. 그럼 네 손에 닿겠지? 한 번은 내 생각을 떠올려주길 바라. 그럴 수 없겠지만 그 눈 한 송이를 잊지 말아줘.
여자는 웅크린 가여운 몸에 따뜻한 담요를 덮어 어깨를 토닥인다. 어머니의 품 같이 따뜻하다.
"커피 마실래요?"
"왜 울고 계셨는지 여쭈어봐도 될까요?"
"아니."
"알겠어요."
담요를 몸에 두르고 긴 나무 의자에 앉아있다. 여자의 손과 내 손에 든 컵. 컵이라고 부르는 종이로 된 것 안에 김이 오르는 갈색 액체. 엉켜있던 진한 가루 알갱이가 컵을 천천히 돌리니 뜨거운 물에 퍼진다. 하늘엔 구름무리가 서서히 움직인다. 추운 바람이 서늘하게 분다. 하얀 발이 백의 나라 땅에 닿인다. 갓 눈이 온 듯 축축한 풀. 정원의 의자에 앉아 마음을 가라앉힌다. 가라앉힌 기분은 한 없이 내려갔다. 침묵을 깬 여자의 기특함은 거절에 바닥쳤다. 조용히 병원에서 조금 먼 언덕을 본다. 즐겁게 뛰어다니는 아이들의 웃음 소리. 하얀 머리, 하얀 피부. 눈처럼 하얀 아이들이 맨발로 뛰어다닌다. 병원복이 조금 커 펄럭이는 게 아이의 작은 몸집을 돋보이게 만들었다.
아래 공기완 다르게 빠르게 달리는 바람에 탄 연. 녹과 홍이 조화롭게 칠해진 연은 풀을 먹어 빳빳한 실을 믿고 날았다. 사실, 기뻐해야 되는 건지 슬퍼해야 되는 건지 어느 쪽도 못 고르고 있다. 복잡 미묘한 기분은 밥그릇에 이가 깨진 듯 어느 것으로 빈부분을 채우려고 해도 맞춰지지 않았다. 꼭 그 깨진 조각이어야만 했다. 심지어 나도 치료할 방법을 모르겠다. 무얼 해야 기분이 그나마 나아질까.
여자와 거리를 두고 앉아 백의 나라를 바라본다. 경치가 아름답구나. 하얀 건물들이 낮게 모여 새로운 문명으로 펼쳐진 이 나라. 낯설지만 우리의 터전이 바뀐 것 같아 보인다. 좁았지만 녹과 홍은 하나가 되어 더 큰 세상이 되었다. 근처에 빵빵 거리는 소리. 검은 고철 덩어리가 바퀴를 움직여 거리를 달린다. 나다니는 사람들 머리는 흰 색으로 가득했다. 하얀 옷을 입고 다니는 하얀 머리의 사람들.
내 옆에 앉은 간호사는 녹색빛 검은 머리. 하얀 머리들중에서 눈에 띄었다. 여자는 종이컵에 있는 커피란 것을 홀짝였다. 그녀를 따라해본다. 입 안에 도는 유려한 단 맛, 처음 느껴보는 것이다. 따뜻한 냄새는 기분을 좋게 만드는 것처럼 돌다 순식간에 사라진다. 일시적이다. 따뜻한 기운이 퍼짐은 좋았다. 물이 뚝뚝 떨어지는 주황 머리는 살얼음으로 언다. 몇 천 년만에 느껴보는 평화인가.
말이 오가지 않는 평화는 마음만 어수선할뿐이다.
"설령을 만났어요?"
"……."
"설령은 당신 이야기를 많이 했어요."
"…무슨 이야기를?"
"거북이. 지민이라는 거북이의 이야기를 하루에 하나씩 해줬어요. 설령의 당담 간호사가 저라서 자주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어요. 지민도 제 환자죠."
"……."
조금씩 기억을 잃어간 건가, 날 모르던데.
"지민도 설령을 알아요?"
"…아니."
거짓말.
"설령은 지민이 자신을 알,"
"내가 알 리가 없잖아."
말을 딱 잘라 단호하게 말해버렸다. 간호사는 말없이 나를 쳐다본다. 시선을 피해 병원 주위에 자란 나무들을 본다. 얇은 잎이 바늘처럼 가늘다. 추위에 떨지 않게 자란 나무는 죄가 없지만 노려봤다. 커피를 다 마셔버리고 독한 상처를 향기롭게 감싼다. 그래도 일시적이었다. 독하게 새겨진 상처에 점점 표정이 일그러졌다.
그딴 식으로 말해버리면 말하는 나도 괜찮을 리 없잖아. 내 말에 내가 상처받고 슬펐다. 내가 어떻게 너를 잊니. 얼굴을 감싸 눈물을 흘렸다. 시간이 갈수록 괴로워지는건 난데 어떻게 보내. 어떻게 깨끗이 잊어. 아픔을 훔치고 하늘을 올려다본다. 간호사는 거짓임을 눈치챘겠지. 적어도 사연은 있다, 라 생각하겠지.
역시나.
"입원을 하고 몇 년 뒤 깨어난 설령이 처음으로 꺼낸 이야기가 있어요. 자기 오빠도, 동생도 아닌 딱 한 사람 이야기."
"……."
"미친 소리라고 생각해도 좋으니 들어달라고 했어요. 그리고 자기 대신 기억해달라고."
"……."
"한 연못에 거북이가 있었대요. 그 거북이는 사람으로도 변할 수 있고 자신이 다치면 치료도 해줄 수 있대요."
"그 거북이가 왜?"
"거북이는 무한한 사랑을 줬대요. 설령은 그게 좋았대요. 자기가 못난 모습을 보여도 거북이만은 자기 편이었대요."
"……."
차오르는 눈물. 하늘에 구름들이 커피위에 떴던 설탕처럼 핑 돈다. 눈물이 환각을 만든다. 벌써부터 울면 안 되잖아.
"저도 어느새 눈을 떠보니 여기, 하얀 눈으로 가득한 곳이었어요. 이전의 기억은 나지 않더라구요."
"……."
"설령도 자기가 어떻게 여기 왔는지 생각이 잘 안 난다고 했어요. 기억나는 건 오직 하나, 거북이. 거북이라고 했어요."
"……."
"그 사람도 꼭 왔을거라면서 소리를 지르고 난동을 벌이다 진정시켰죠. 그녀는 밤새 울면서 잠들었어요."
"… 그 사람도 꼭 왔을 거라, 그랬구나."
"설령은 그 다음날 자기가 어제 무얼 했는지 잊고, 좋은 기억만 남았으면 좋겠다고 웃으며 이야기를 해줬어요."
"…잊어?"
"설령은 기억을 조금씩 잊는 병에 걸렸어요. 그래서 자기가 했던 말을 잊고, 또 잊는거죠. 그래서 설령의 보호자인 정국 님이 계속 동생 곁에 남아 지켜보고 있어요."
잊는 병. 정국은 우리보다 일찍 왔을까? 이 나라에 어울리고 익숙해보이던데. 그리고 정국은 이번 생에서도 설령의 오라버니다. 벗어날 수 없는 운명. 설령은 언젠간 정국, 그리고 모든 걸 잊어버리겠지. 자신도 잊고 나조차 잊어버렸잖아. 왜 우린 행복을 누릴 수 없는 걸까. 왜 신은 기회를 주지 않는 걸까. 뭘 더 바라길래 고통을 선사하는 걸까. 너무 잔인하잖아. 이제야, 이제서야 난 모든게 끝난 줄 알았다.
마음껏 사랑해줄 수 있을줄 알았다. 착각이었다고 속삭이는 듯한 결과는 내게 무너짐을 안겨주었다.
"설령은 시간만 되면 제게 이야기를 해줬어요. 주황 머리, 혹시 그가 오면 자신을 찾아와달라고 대신 말해달라했죠."
"……."
"전 그게 설령의 꿈이라고 생각했어요. 주황 머리, 호박색 눈동자, 흑장미색 얇은 도포. 거북이가 될 수 있는 남자. 그런 사람을 이곳에서 어떻게 찾을까, 그래서 잊었어요."
"……."
"설령은 그 쪽을 정말 사랑했어요. 연못에서 만난 거북이, 설령은 운명이라고 생각했대요. 설령은 휴지에 무언갈 그리더니 이불을 덮고 뿌듯하게 눈을 감았어요."
작은 거북이 한 마리. 입에 붓을 물고 무언가를 그리던 거북이를 그리고 꿈속으로 들어갔어요. 설령은 하루하루 잊어가는 자신을 알고 그런 사실마저 잊으며 거북이에 대한 기억을 제게 전달해줬어요. 마지막 거북이에 대한 말을 전해줬어요. 그는 후박나무 박, 지혜 지, 하늘 민. 박지민이라고 꼭 기억해. 주황 머리가 아주 예뻐. 호박색 눈동자는 보석같이 빛나. 항상 그녀는 주황 머리, 호박색 눈동자를 외우곤 했어요. 잊지 않기 위해서 되뇌이고 되뇌이다 결국엔 잊어버렸어요. 야위어가는 설령의 팔목에 주사바늘을 바뀌어 꼽다 거북이 얘기를 꺼냈지만 설령은 눈만 깜빡였어요. 아무 것도 모르겠다는 눈망울에 괜히 제가 죄책감을 느꼈죠. 대신 그녀의 바람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푸른 장미 한 송이를 사 머리맡에 두었어요.
거북이를 꼭 찾아주겠다고 생각했지만 가능성은 없었죠. 주황 머리, 호박색 눈동자. 거북이로 변하는 사람이 이 세상에 어디 있겠어요.
어느날 제 담당 환자 리스트가 늘어나면서 새로운 환자의 이름을 확인했는데 설령이 말한 그 사람이 있는겁니다.
후박나무 박, 지혜 지, 하늘 민.
긴가 민가 했어요. 하지만 깊게 생각하지 않고 넘겼죠.
당신이 깨어나고 처음으로 마주한 날, 저는 깨달았어요.
설령이 말한 게 거짓이 아니었구나.
주황 머리에 호박색 눈동자.
하얀 피부는 얼음장같았고 이마에 점 두 개, 볼에 하나.
설령이 말하던 거북이의 모습은 지금 제가 보는 사람과 같으니까요.
후박나무 박, 지혜 지, 하늘 민. 박지민.
바로 당신이요.
확신의 눈빛. 다 알고 있는 듯한 눈이 밉지 않다. 그 눈이 설령이었으면 좋으련만.
좋아, 그럼 이제 내 얘기를 해줄게.
눈물을 닦고 닦아도 멈추지 않았다.
"날 미친 놈이라고 생각해도 좋아."
"……."
"난 설령을 좋아했다. 처음엔 사랑하는 정도는 아니었고 신경 쓰였어. 최초로 내 벽을 깨고 들어온 아이니까 신경 쓰일만도 하지."
"연못… 말하는 거죠? 禁池 금지 말입니다."
"맞아. 완벽하게 사랑하기는 어려웠어. 녹의 공주 모습을 설령에게서 계속 찾았거든. 녹의 공주가 경고했듯 가슴에 또 칼을 박힐걸 예상하고 사랑을 시작했어. 난 녹의 공주를 버리고 홍의 나라의 설령을 사랑해버렸고, 설령은 녹의 사람이길 거부하고 자신의 몸에 타오를듯 아픈 상처를 남겼어. 소원은 우리가 이룬 거야."
"이곳으로 오는게 소원이었나요?"
"맞아, 꿈 꿨어. 꿈 꿔왔어. 백의 나라를 하염없이 바랐어."
"혹시 그곳엔 저도 있었나요?"
"네 이름은 들은 적 있어."
"…설령을 처음 봤을 때 낯설지 않았거든요. 보자마자 눈 앞이 가려졌어요. 가슴이 시린 게 동정을 하는 느낌이었나, 그래요."
"그런 거 다 소용 없어. 이제 다… 사라져버려서. 증거조차 없거든. 근데 다 기억하고 있는 건 이, 이 머리랑 가슴 뿐이야."
"도전해보세요. 아직 끝난 게 아니에요. 설령은… 기억해낼거에요."
그것도 거짓말.
"틀렸어."
"당신, 소원을 이뤄줄 수 있다 했죠?"
"아니."
"그럼에도 제 소원은 기적이에요."
"하지만 네 소원, 이룰 수 없다는 것만 알 것 같군."
풀잎은 부정했다. 나는 풀잎을 부정한다.
"한 번만이라도 설령 곁에 있어주세요."
"이제 와서 그게 다 무슨 소용이야."
"사실 무서운 거잖아요."
"그래. 무서워. 무서워서 못 다가가! 그 텅빈 눈을 보고 있으면 내가 없는 것 같아!"
내가 없었던 것 같아.
"포기하지 마요."
"지쳤어. 힘들어. 아파서 못 견디겠어."
다 알면서 거짓말을 하는 건 참 힘든 일이다.
아름다웠던 정원도, 날 담았던 붉은 눈동자도 잊어줄게.
낙인, 검붉은 머리, 붉은 칼, 상처투성이 얼굴, 이마의 흉터.
네가 내밀었던 손도 잊을 수 있을까.
지금 하고 있는건 정리? 이별? 이별은 나 혼자 하는걸로 되겠어.
눈이 쏟아질 것만 같던 하늘이 어두워지고 빗방울이 하나둘씩 뚝뚝 떨어진다.
눈물도 섞여서 떨어져 풀잎들이 머리를 맞았다.
점점 폭수처럼 떨어지는 비. 풀잎은 나를 병원 내부로 데려가려했지만 나는 웅크려 앉아 끄떡도 하지 않았다.
이대로 있으면 저 소나무라도 될까. 한파에도 지지않는 소나무가 될까. 상처에도 꿋꿋한 소나무.
눈을 억지로 감기는 물방울들이 밉다.
난 아직 잊지 못하겠는데.
"여기서 기다리고 있어요."
풀잎은 나무 의자에서 일어나 병원 안으로 걸어갔다.
죽어라 내리는 비. 동산에 뛰어다니던 아이들은 도망쳤다.
사실 나도 도망치고 싶다. 웬만하면 설령처럼 기억 못 했으면 좋겠다.
살을 때리는 비는 굵직해서 아팠다. 좀 더 아프면 다 잊으려나.
얼굴을 묻고 떨었다. 추위따위에 아프지 않았다.
설령아.
설령.
지민.
난 지민이다.
마지막으로,
한 번만 곁에 있어도 될까.
"이런 비 맞고 있으면 죽습니다."
멈춘 비, 폭력. 축축한 고개를 들자 한 남자가 서있다. 우산을 든 검은 머리의 남자.
끝까지 모른 척 하려고 했는데, 당신이 너무 안쓰러워서 어쩔 수 없네. 표정을 보아하니 당신도 다 기억하는 모양이야. 의자에 손수건을 두고 앉은 정국은 큰 우산을 씌운다.
사건의 중심에 있던 우리는 우산대 하나를 사이에 두고 나란히 앉았다. 멍하니 앞만 바라본다. 비로 가려지는 백의 나라. 하늘이 무너질 듯 내리는 빗소리가 거칠다.
빗줄기를 가르고 온 검은 고철덩어리. 그 아래에 달린 바퀴들이 굴어오다 멈춘다. 빠앙-. 크게 들리는 소음에 정국은 익숙해보였다.
"이 세상에 눈을 떴을 땐 나는 있는 집의 아들이더군. 눈 뜨자 마자 설령을 찾았지. 이 세상에도 내 부모님은 존재하지 않았고 난 그 집의 가장이었다. 잃어버린 동생을 찾아서 돌고 돌다 고아원에 있던 설령을 발견했지. 나는 이번 생에서도 설령의 오라버니이구나. 난 영원한 설령의 오라버니이구나, 씁쓸했지만 그 마저도 좋았다. 설령을 데리고 병원을 찾아가 입원부터 시켰어. 여러모로 치료가 필요한 아이니까."
"……."
"머리 속이 어지러웠어. 저번 생은 설령을 지켜주지 못해 괴로웠지만 이번 생엔 지켜보는 것만으로 위태해. 알아. 당신 마음, 나도 알아. 서서히 잊혀져 가는 기분이란, 정말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으니까. 처절하지. 고통스럽지. 무게를 참지 못 해."
"……."
"그땐 왜 서로 잡아먹지 못 해 안달이었을까."
저 고철덩어리 문이 열리더니 성인 남자와 아이가 내린다. 붉은 끼도는 머리의 남자와 녹색 머리의 여자 아이. 조금 아파보이는 여자 아이는 남자의 등에 업혀진다. 검은 우산을 든 남자는 아이를 업고 병원으로 걸어온다. 비를 뚫고 걸어오는 두 인영.
"근데 그거 알아? 끔찍하게 싫어했던 녹의 공주가 이번 생엔 내 동생이야. 내겐 동생이 2명이지."
"오라버니!"
병원 입구까지 온 남자 등에서 내려온 아이가 우산을 쓰고 달려온다. 짧은 다리로 달리다가 계단에 넘어진 아이는 울먹인다.
"오라버니-. 으아아앙-."
정국은 우산을 내게 건내고 급히 걸어간다. 얼굴이 하얗게 질린 아이를 일으켜세운다. 비를 온 몸으로 막아내고 아이를 안은 정국은 제자리로 돌아왔다.
푹 젖은 정국은 우산 안으로 들어와 의자에 앉았다. 눈꼬리에 눈물을 단 여자 아이의 눈이 녹색이다. 정국의 품에 꼭 안겨 나를 훔쳐보는 아이는 눈이 마주치자 가슴팍에 얼굴을 부빈다. 어리광을 부리는 아이 무릎팍에 흙이 묻어있다. 정국은 아이의 머리를 쓰담아주면서 울음을 멈추게했다. 손길이 따뜻해 금방 잠든 아이는 새근새근 숨을 쉰다.
"그 당시 죽었던 사람들은 기억을 못 하나봐. 설령은 그 중간에 있었으니 잊어가는 게 이치에 맞을 지도 몰라. 하지만 너무 가혹하지."
"……."
"원수가 내 동생이라니 말이 돼? 내가 모르는 설령은 사실 모두를 좋아했을 거야. 그러니 이 사람까지 함께 이 세상에 왔지 않을까? 그래서 받아드리려고 억지로라도 정말 노력했다. 집착했던 마음도 버리고 과하게 미워했던 마음도 버리려고 안간힘을 썼지. 나중에 와보니 그렇게 힘쓸 일도 아니었다. 과거의 분노에 사로잡혀 아이에게 억정를 낼 때, 상처받은 눈망울을 봤다. 그 안에는 아직도 녹과 홍의 기억에서 살고 있는 내가 비춰졌다. 울음을 참는 아이가 내게 아장아장 걸어와서 다리를 잡았지. 오라버니, 내가 잘못했어 라고. 그 아기가 뭘 잘못해서 내게 빌었던가? 모든 건 내 마음에 달려있어. 불가능했던 일도, 하지 못했던 일도. 나한테 달렸어. 어떻게든 뭘하든 다 마음 먹은 대로 되는거야. 내가 그 아이를 사랑할 수 있는 방법은 없었어. 그저, 바라만 보아도 좋은 아이에게 무얼 용서하고 화를 내야된단 말이다. 시간이 약이야. 다 필요 없어."
"결국엔 지금 이 시간에 충실하게, 이 시간을 타고 같이 흘러가는 게 현명한 답이더군."
정국은 사랑으로 가득한 눈으로 아이를 훑었다. 쪽머리를 한 아이는 작은 손으로 꼬옥 정국의 옷깃을 쥐었다. 작은 몸은 정국에 폭 안겨 뒤척인다. 큰 손은 눈물 맺힌 눈꼬리를 비밀스럽게 훔쳤다.
"나는 당신이 그러길 바라."
슬픈 웃음은 입꼬리에 머문다. 어느새 폭우가 보슬비로 잦아들었다. 하늘의 색을 되찾고 내 슬픔을 되찾는다. 멎은 하늘의 눈물은 땅의 균열에 고였다. 날이 개어 회색빛 세상은 다시 하얗게 돌아온다.
정국은 아이를 조심스럽게 안아올려 일어난다. 병원 입구에서 나오는 남자와 풀잎, 그리고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보인다. 바퀴달린 쇠 의자에 앉은 설령. 손잡이를 잡고 이끄는 풀잎은 설령을 데리고 우리 근처로 온다.
"설령은 황자님을 끔찍하게 사랑했다."
"……."
"오늘이 지나면 나마저 잊겠지만…. 나머지 시간은 황자, 당신에게 부탁할게."
"……."
"너무 힘들다면 포기해도 돼."
너희가 이룬 백의 나라란 기적은 헛된 게 아닌 것만 알아둬.
추적거리는 땅에 새싹이 고개를 들었다. 동산에 푸른 빛이 돈다. 눈이 녹았지만 또 내릴 눈을 기다린다.
하지만 내가, 어떻게?
"남준, 가자."
"예."
정국은 아이를 업고 남준과 계단을 내려가 차에 탄다. 풀잎은 휠체어를 끌고 가며 내게 눈짓을 했다. 이리오라, 말이다. 마른 마음이 흔들린다. 고개를 천천히 저었다. 우산을 접고 설령의 뒷모습을 지켜본다.
머뭇거리는 나를 기다리지 못하는 풀잎은 곧장 이쪽으로 오려 한다. 잡아먹을 듯 덮쳐오는 두려움에 주춤거렸다.
눈을 감고 있는 설령. 손에 땀이 차 주먹을 쥐었다. 천천히 휠체어를 모는 풀잎을 따라 걷는다. 산산한 바람. 덜컹거리는 쇠바퀴.
쓸쓸하다. 뒤에서 지켜보는 너는 다가가기 너무 멀다.
"풀잎."
"네."
"비가 왔네요."
"그러게요. 누가 슬퍼서 그런가봐요."
"내가 슬퍼서였으면 좋겠어."
"왜요?"
"제일 중요한 걸 잊어버린 거 같아서."
"설령은 그게 뭐라고 생각해요?"
한참 고민하는 듯 음- 소리를 길게 낸다. 숨이 막혀오는 나는 몹쓸 생각을 하고 또,
"음…. 계속 생각해봤는데 하나 밖에, 그러니까…
'저, 저기 잠시만 기다려 주시겠습니까?'
'가라니까.'
'당신과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무슨 이야기를?'
물 밖으로 고개를 번복해 빼낸 나는 의아한 눈빛으로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의문으로 가득찬 호박색 눈동자가 네 눈에 맺혔다. 너는 바동거리는 초록색 다리에 눈길이 갔다가 말을 이었다.
'무슨 말이냐면… 아, 거북님이 알고 있는 모든 것. 말씀해주시면 돼요.'
'왜.'
'솔직히 말하면, 소원만 생각하고 들어왔지만 당신을 만나고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그래서.'
'저와 다른… 무언가에 대해 알고 싶습니다. 이를테면….'
"거북이…?"
소리를 죽인다.
볼을 타고 흐르는 뜨거운 눈물.
"거북이란 단어가 생각나. 왜 하필 거북이일까요?"
"그러게요. 설령이는 왜 거북이가 생각날까요?"
"혹시 풀잎은 알 것 같아?"
"글쎄요…."
"중요한 거라면 잊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내일이면 제가 잊는 것마저 잊겠죠? 거북이도."
"저도 설령이 어서 나았으면 좋겠어요."
"제가 과연 기억해낼 수 있을까요. 오늘 내일 하는 내가 기억해낼 수 있을까."
네가 과연 기억해낼 수 있을까.
알아.
날 잊고 모든 걸 잃어버릴걸.
식은 땀을 흘리는 너에 병실로 돌어가야 함을 인지한다. 눈물을 닦고 시간을 잰다. 얼마 남지 않았다.
어느 정도 걷더니 풀잎은 입모양으로 말한다.
'자연스럽게. 자연스럽게 잡아요.'
그리고 내 손에 손잡이를 쥐어준다.
"설령아. 이번에 새로 온 분인데 너랑 걷고 싶대. 그래도 될까?"
"네. 괜찮아요."
"먼저 갈게. 조금 있다 돌아와."
뒤로 빠진 풀잎을 대신 해 휠체어를 천천히 몬다. 지켜보는 풀잎은 미련을 버리고 병원으로 간다.
먹먹한 마음을 억누르고 평온하게 몬다. 새들이 하늘을 돌아다닌다. 바람으로 흔들리는 나뭇잎들은 물기를 털어낸다.
손잡이 쇠에 눈물이 묻어났다. 소매로 닦아낸다.
내 마음도 닦아낸다.
"설령아."
"누구세요?"
가슴이 찢어진다.
"나는 오늘 하루만 같이 있는 사람이야."
"하루만요?"
"설령이 오라버니가 그러라고 했어."
"좋아요. 오라버니 말이라면."
감으로는 너의 기억력 속 정국의 유효기간이 오늘일 것만 같다.
병원 옆 언덕 위로 올라가 천천히 바람을 쇤다. 눈이 섞인 바람이 불어 언덕을 오른다. 하늘에서 눈이 금방이라도 쏟아질듯 구름이 가득하다.
피로 말라붙은 마음을 추스린다. 아이같은 미소를 짓는 너는 눈이 살짝 녹은 풀을 만진다. 휠체어에서 내려와 땅을 만진다. 비가 그치니 가까이 하얀 머리의 아이들이 뛰어다니기 시작했다. 구름에 닿을 듯 높이 높이 오른 연에 녹과 홍이 어우러졌구나. 언덕 뒤로는 깊고 검은 바다가 철썩였다.
어때, 네가 보기에는?
속으로 말을 삼킨다.
나를 잊은 너는 어때?
"좋다…."
잔디에 앉는 너는 하얗게 앉은 눈을 만진다.
손 온도에 녹아 사르륵 녹는다. 사라져버리는 눈에 설령의 눈꼬리가 쳐진다.
"설령아."
"네."
"반지 하나 껴보겠느냐."
"반지요?"
잔뜩 기대하는 창백한 얼굴. 너야말로 웃을 때 입술에 꽃잎이 물들었다.
풀에 숨은 푸른 들꽃 하나 꺾어 꽃반지를 만든다. 갑자기 눈물이 차올라 눈물을 닦는다.
네 번째 손가락에 매듭을 진 꽃줄기. 소소한 나의 마지막 선물이다.
해맑게 웃는 네가 어색했다. 내 앞에서 웃어 주지 않았으면서. 항상 우는 얼굴, 항상 아픈 얼굴.
그렇다면 네가 보는 내 모습은 어땠을까?
설령은 꽃반지를 끼고 자유롭게 동산을 돌아다닌다. 자유로운 맨발의 설령은 누구보다 활기차보였다.
그러면 된 거야. 네 눈 속에서 나는 없어져도 돼. 내가 없어져도 탓하지 않을게.
"이름이 설령이 맞아?"
"네. 설령이요."
"뜻이 무언줄 아느냐?"
고개를 젓는 너. 쓰디 쓴 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하늘을 올려다 본다.
"눈구름이 이는구나."
"눈구름인지 어떻게 알아요?"
"보이지 않아? 가득 희망을 묵직하게 품고 떠다니는 구름들이."
아름답잖아.
비가 아닌 눈을 가득 안고 구름들은 때를 기다리는 것 같아.
마치 내 마지막을 기다리는 것처럼.
"아, 잊은 게 있어요."
"……."
주머니에서 꽃 하나를 꺼낸다. 푸른 장미.
"풀잎이 줬어요. 이거 오라버니 주래요."
"정국은 이미 갔는데…."
고개를 젓더니 내 손에 장미 줄기를 쥐어준다.
당신을 말하는 거에요.
이름은 모르지만.
덩그라니 손을 가득채우는 크기의 파란색 장미. 향이 곱구나. 커피보다 더 향긋하고 진하게 남는다.
사랑처럼.
죽어도 너마저는 잊지 못 할 난데.
"이 꽃을 보니 생각나는 이야기가 있어. 들어줄래?"
"저 이야기 좋아해요."
이건 우리들의 이야기야.
오래 전, 꽃을 피웠을 적. 천천히 읊어본다.
"옛날 옛 적, 오천 년 된 거북이 한 마리가 살았다."
홀로 연못에서 짧은 팔다리로 젓고 있었지. 가슴을 채운 얼음꽃을 녹일 사람을 기다리고 있었어. 자신이 쳐놓은 결계를 부수고 들어올 사람을. 무서움을 깨버리고 나를 사랑해줄 사람.
웅크려서 연못에서 잠들었을 때, 누군가 우당탕 거리며 금지의 구역을 침입했지. 어벙한 얼굴. 하지만 상처 가득하고 성할 데 없어보이는 사람은 주저하며 이 곳으로 다가왔어.
거북이조차 당황하여 무뚝뚝하게 대했지. 겉과는 다르게 속의 거북이는 그 사람을 놓지 않고 싶었다. 두 번째 시작하게 된 마음은 눈이 내림으로 새싹을 피웠어.
사랑했지. 지켜주고 싶었다. 나처럼 상처받지 않고 곁에 두고 잠재우고 싶었어. 감히 등을 바닥에 두지 못하는 네가 안타까워서 억지로 눕혔어. 같이 보는 밤하늘은 어떤 날의 하늘보다도 아름답고 별이 쏟아질 것만 같았다. 감히 닿지 못 하는 손가락 끝이 미안했다. 전생에서 배운 아픔이 선을 넘는걸 두려워하게 만들었다.
그녀는 거북이의 호박색 눈동자를 사랑했어. 거북이도 그녀의 자수정 눈동자를 사랑했지.
그녀가 거북이의 본 모습을 좋아하기에 거북이는 용기를 내 사람의 모습으로 기다렸어. 나를 볼 때 빠르게 뛰는 심장 소리를 들을 때 마다 기분이 이상했지. 거짓이 아닌 순수함은 거북이를 사로잡았어. 전생의 거짓 사랑일리가 없다고 거북이는 그렇게 생각했지. 그 거북이는 진심을 다해 그녀를 돕기로 마음먹었어.
그래서 그녀가 아파하는 것을 보고 있지만은 않았어. 손길이 거두는 상처는 다 거북이의 가슴에 전해졌어. 어떤 일이 있었는지, 어떤 고통이 있었는지. 고스란히 느꼈지만 참고 치료해줬어. 그 사람 몸에 남아있던 고통들을 모두 회수해 받아들였지. 무슨 아픔이든 너라면 괜찮았거든.
어떤 추악한 일이 있더래도 그녀만 있으면 다 괜찮을 거라 생각 했었어.
심장에 있는 말을 다 꺼내서 보여주지 못 하지만 너는 내게 소중한 사람이었다.
너무나 불행했던 사람.
나도 마찬가지.
나도 불행하다.
어물쩡하게 이야기를 끝내버렸다. 네가 알아들을 리는 만무하다. 변하지 않는 그 표정을 읽을 수 없다. 나는, 사실 모른 척 하고 싶다.
뭘 기대해서 꺼냈을까.
가슴에 난 흉터를 보여줘야 넌 그제서야 알아줄까.
난 여기서 살아 숨 쉬고 있다고 울부짖어야 알아줄까.
그 마저도 할 수 없어 울음소리만 삼켰다.
휠체어에 앉은 너는 동정하는 얼굴을 한다. 싫어. 동정 말고 사랑. 사랑하는 얼굴. 그걸 보여줘. 마지막으로 제발.
무너진다. 네 몸짓, 표정, 음 하나 하나에 나는 와르르 모래성마냥 부서진다.
"사랑하는 사람이 있었어요?"
응.
"……."
"고인이에요?"
네 안에 내가 죽었으니
"그럴지도."
"오라버니는 이름이 뭐에요?"
이름이라. 내 이름.
내 이름은 말이다,
네가 잊어서
"궁금해?"
"알고 싶어요."
기억하지 못하는 것이다.
"내가 누군지 궁금해?"
"당신이 누군지 알고 싶어요."
목이 매였다.
그 투명한 눈에 모든 걸 내려놓는다.
미련을 버린다.
여기까지야.
날
하얗게 잊어버려.
호박색 눈동자.
흑장미색 얇은 도포.
주황 머리까지.
네가 사랑했던 것까지.
내 이름은.
'흉터다.'
'다시 올 줄 알았어.'
나는
'때리쳐.'
내가 너에게 가르쳐줬던 이름은,
'어때, 똑같지 않아? 넌 붉은 것보다 하얀 게 더 잘 어울려. 이 종이의 인물처럼.'
후박 나무 박 朴,
'기껏 네가 보라고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었거늘, 눈을 가리고 있으면 어쩌자는 거냐?'
지혜 지 智,
'그럼 내 안에 누가 살았으면 좋겠는데.'
네가 오지 않은 지 나흘이 지났다.
'바닥에 있더니 좋더냐.'
'나와 녹의 공주가 꿈꾸었던 백의 나라로 가자. 네가 더이상 상처받지 않고 널 위한 눈이 내리는 그곳으로.'
하늘 민 旻.
'네가 제일 먼저 알아야 될 것.'
"후박나무 박, 지혜 지, 하늘 민."
"내 이름은 박지민이다."
속이 시원할거라고 생각했는데 슬픔이 토악질처럼 나오고 그 말 끝으로 겉잡을 수 없이 눈물을 흘렸다. 가슴을 턱턱 쳐도 목에 무언가 걸린 듯 아프다.
너는 이런 마지막을 알고 있었어?
자살할 거야. 내가 이대로 떠날 거라고 알고 있었어?
눈 앞으로 하얀 얼음 알갱이가 내려왔다.
너 없이는 살 수가 없어. 옛 기억 없이는 내가 살 수 없어. 네 기억에 없는 나는 살 수 없어.
누군가가 이름을 불러줌으로써 자신이 살아있음을 느낀다고 한다.
누군가의 기억 속에 내가 살아있지 못 한다면, 내가 살아있을 이유가 없다.
입술을 물고 슬픔을 감춰봐도 손가락 사이로 눈물이 비집고 나왔다. 네 눈동자가 무서워서 난 더이상 다가갈 수가 없어. 내가 사랑했던 그 자수정같은 눈동자에 내 존재가 사라질 것만 생각하면 미치도록 아파. 떠나야하는데, 이 세상의 소풍을 끝맺어야 하는데 발걸음이 떼이지 않는다. 언덕 위 네 앞에 우두커니 서서 한 없이 작아졌다.
눈가를 적시는 눈물을 누군가가 닦아준다. 휠체어에서 일어선 너는….
설령아.
설령.
마지막으로 부를 설령아.
내 인사가 마음에 드느냐.
내 마지막으로 하는 사랑이 괜찮느냐.
어째서 그런 표정을 짓는 게야.
너는 어째서?
"나도 사랑해요, 지민."
잊었을 텐데.
얕게 웃는 너는 볼이 붉게 물들었다.
내 눈시울도 함께 붉어졌다.
바람이 크게 분다. 파도는 바람결을 따라 물결을 움직인다.
하늘을 타는 녹과 홍의 연은 아이들 손짓에 따라 당찬 춤은 췄다.
시간이 멈추었는가.
아님 내 심장이 멈추었는가.
병원 창가에서 종이 수천 장이 바람에 실려 날렸다.
朴智旻이라 가득찬 종이가 바람을 타고 언덕 너머 바다를 향해 날아간다.
내 이름 수천 장이 날아간다.
그리고 우리 머리 위로 눈 한 송이가 내린다.
너는 아픔을 깨뚫고 미소를 보여준다.
"지민 없는 동안 외로웠어요."
일그러진다.
"정말로 다 잊어버리기 전에 손 내밀어줘서 고마워요."
거북아.
네가 좋아한 주황 머리를 쓰담는다.
지민을 잊었던 저를 용서해줄래요?
괴로움에 일그러진다. 머리에 쌓이는 눈이 나를 녹인다. 막아놓았던 슬픔이 터져 쏟아졌다. 슬픔이 나가 빈 자리에 눈이 쌓였다.
설령.
온 세상에 네가 내린다.
내 세상에 네가 내린다.
항상 네가 내리지 않은 적이 없다.
내 손에 든 장미가 푸른 색으로 빛났다.
그렇구나.
신은 이걸 원했던 거였나.
아니야.
내가 이걸 원했던 거였다.
시공간을 넘어서라도
네가 날 사랑하기를 바랐어.
비가 온 뒤에 땅이 더 굳건해지듯,
마음도 그렇게 되길.
바람에 날려 사라질 것만 같았던 너를 안는다. 너도 나를 팔로 꽉 옭아맨다.
서로 심장의 소리가 들렸다.
나즈막히 늘리는 아이들의 웃음 소리.
나보다 네가 더 중요했어.
나한텐 네가 하나뿐이었어.
괜찮아.
무슨 일이 있어도 내가 다 고쳐줄게.
그러니까 제발 내 곁을 떠나지마.
아픈건 다 감당할게.
천천히 하나씩.
천천히 조금씩.
천천히 아껴서
눈처럼 사랑해줄게.
우리의 백색 세상에서.
'사랑해 공주님.'
"사랑해 설령아."
함박눈이 쏟아지자 동심으로 가득한 아이들을 언덕을 너머 바다로 달려간다.
연은 공기를 가로질러 앞으로 강직하게 날아간다.
무너질 것만 같았던 세상을 너로 채운다.
때를 기다렸던 구름은 희망이란 눈을 흩뿌리운다.
차 안, 정국은 잠든 아이를 안고 밖을 본다.
남준은 운전을 하다 정국을 백미러로 올려다 봤다.
"도련님, 무슨 일 있으십니까."
눈이 내린다.
경이롭구나.
녹과 홍의 광기를 잠재우는 눈이.
아까는 우리를 잡아먹을 듯이 내렸던 비.
무어가 바뀌었을까.
"아니. 아무것도."
설령이 태어난 날, 눈이 내렸었지.
오늘은 설령의 생일이다.
언제나, 나는 널 걱정해.
네가 자살을 택했을 때 세상이 무너져 내리는 줄 알았다.
내가 너에게 짐이 되었구나 라고 깨달았을 땐 이미 늦었던.
아무 것도 못 해줬다.
정말 아무 것도.
따뜻한 밥숟갈 하나 떠 먹여보지도 못 했고
그깟 거짓말에 화나 너에게 손찌검을 했다.
못났구나.
참으로.
"남준."
"예."
"설령에게 제대로 된 생일상을 차려주고 싶어."
"차 돌릴까요?"
"……."
나를 잊은 모습을 생각하니 두려움이 가득찼다. 하지만 황자가 기적을 만들어준다면,
난 더이상 바랄 게 없어.
행복한 결말을 원해.
네가 행복하다면 충분하다.
큰 걸 원하지 않았다.
이미 네 존재가 내게 기적인 걸.
너에게 나는 다만,
"아니."
오직 따뜻한 사랑을 주고 싶었다.
오라버니로서.
오라버니는 그저 네가 행복하길 바랐다.
-단편 거북뎐 외전 (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