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씨, 짜증나. 미안하다고, 금방 가겠다고 사정하는 형에게 화를 낼 수가 없어서 나는 간신히 화를 삭히며 괜시리 허공에 한숨을 내뱉었다. 몸을 떠나간 온기가 몽글몽글 허공에 하얗게 뭉쳐졌다가 다시 사라지는 것을 바라보며, 나는 잠깐동안 그냥 가버릴까, 하고 고민했다. 이게 몇번째 지각이더라? 아무 대답이 없는 내가 불안했는지 핸드폰 너머에서 형이 조심스럽게 내 이름을 부른다. 욕이 목구멍 너머로 넘실거렸지만, 나는 겨우겨우 참고 빨리와, 라고 짧게 말하고 통화종료키를 눌렀다. 형과 사귀게 된지는 벌써 1년이 다되가고, 형이 데이트에 지각하는 것은 거의 언제나 있는 일이었다. 다른 날이었으면 근처 카페나 서점같은 곳에 들어가 느긋하게 기다렸겠지만, 오늘같이 추운 날은 형을 기다리는 것이 달갑지 않다. 사랑하지 않는게 아니고 이정도 지각이면 사랑을 떠나서 생각하게 되는거 아닌가 싶어 신경질이 나서 괜시리 하늘을 노려봤더니, 시야에 가득 차는 하늘은, 온통 회색이었다. 이거이거 아무래도 비나 눈이나 오겠구만. 시선을 내리고 휙휙 둘러보자, 역 입구 왼쪽편으로 우뚝 솟아있는 시계탑을 지나 더 가서, 정면의 벽이 전부 통유리로 되있는 테이크아웃 커피점이 보여서, 나는 망설이지 않고 그쪽을 향해 걸었다. 걸어가며 시선을 다시 하늘쪽으로 올리자, 하늘은 여전히 회색이다.
"아무래도, 눈이 올 것 같네."
갑자기 지끈, 마음이 아파서, 나는 후드를 뒤집어 쓰고 바닥을 보며 빠르게 걷기 시작했다. 떠오르기 시작하는 그 사람의 기억에, 나는 초조해져서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쉬지않고 빠르게 걸어서 몇분도 안되어 도착한 가게의 차갑게 빛나고 있는 은색의 문손잡이를 잡으며, 나는 내가 걸어온 길을 뒤돌아봤다. 어느새, 눈이 내리고 있었다. 갑자기 내리기 시작하는 눈에 우왕좌왕 하는 사람들을 보던 나는, 미련없이 단호한 손길로 문손잡이를 밀었다. 따뜻한 공기가 갑작스레 밀어닥친다. 아메리카노 한잔 주세요. 시럽 없이요. 간단하게 주문을 하자 곧 따뜻한 김이 몽글몽글 올라오는 커피잔이 금방 손에 쥐어졌다. 그 잔을 쥐고 나는 커다란 통유리 앞자리에 앉았다. 이 자리라면, 형이 날 금방 발견하고 이곳으로 올 것이다. 형을 기다릴때면, 내가 어디에 있는지, 형은 아주 잘 알고 있으니까.
멍하니 밖을 보고 있으려니, 여러 사람들이 거리를 지나가고 있다. 평일 낮시간이라서 그런지 거리의 사람들은 많지는 않았지만, 모두들 바쁘다는 듯 휙휙 지나가버린다. 그 모습이 왠지 매정한 것 같다…. 그런 생각을 한 내가 웃겨서, 나는 피식 실없이 웃었다. 시계탑 밑으로 왠 꼬맹이가 눈이 와서 신이 난 듯 아장아장 걸어가고, 그 뒤로 부모인 것 같은 젊은 부부가 웃으며 따라간다. 행복해 보이네, 지금쯤 그 사람도, 저렇게 평범하고 행복하게 살아가고 있을까. 순간적으로 입속으로 비릿한 맛이 퍼져서, 번뜩 정신을 차려보니, 아까부터 죽 잘근잘근 깨물던 입술이 기어코 터져서 피가 나고 있었다. 휴지로 닦아낼만큼 크게 나는 피는 아니었어서, 무시하고 커피를 마시자 입술이 지끈지끈 따갑다. 함께, 머리도, 마음도, 지끈지끈 아파온다. 나는 겨울을 싫어한다. 그와 만났던 계절이기 때문에. 나는 눈도 싫어한다. 그가 떠나간 날의 증표이기 때문에.
'입술, 깨물지마. 상처나잖아.'
무뚝뚝해보이지만 다정했던 그 목소리가, 마음을 울린다. 어렸던 만큼 철부지였던 나와, 완벽한 어른이었던 당신, 당신에게 유일한 허점이었던 나. 불안정하던 나와 지나치게 완벽했던 당신은, 항상 위태로운 길을 걸었다. 사랑한다고 말해줘. 끝까지 어리광을 부리던 나에게 당신은 웃어주었다. 그것이 우는 모습이었단걸 몰랐던 나는, 아직도 당신을 찾아서, 눈을 감고 바닥을 더듬는 듯한 어리석은 삶을 되풀이하고 있어.눈이 하얗게 날리고 있는 바깥을 바라보다가, 나는 눈을 천천히 감았다. 닿아있는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는 것이 느껴진다. 모든 것이 어지럽게 흐트러졌다가, 침전물이 내려앉듯이, 무섭도록 차분하게 가라앉는다. 나는 또렷히 기억하고 있다. 당신의 눈매, 당신의 목소리, 내몸에 닿던 당신의 체온 하나하나 까지, 잊지 못해서, 나는 아프다.
지금 떠올리는 이것은, 그를 진심으로 사랑했지만 그의 감정은 똑바로 바라보지 못했던, 어렸던 나의 사랑의 기억이다.
*
어렸을 적부터 사람 많은 것을 싫어했던 나는, 우리집에서 열린 파티도 싫어서 뾰로통하게 큰 창문 앞에 서서 바깥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살얼음이 슬슬 얼던 추운 계절의 길목이었다. 엄마는 유명한 수입차 딜러였다. 홀로 나를 키워왔던 엄마는, 남자도 아닌 자신이 성공시킨 사업에 커다란 자부심이 있었다. 그때는 슬슬 회사를 세워 직원들을 키우고 있었고, 이것저것 예쁜 물건들을 파는 작은 가게도 가지고 있었다. 굉장한 추진력이었다. 나는, 우리 엄마여서가 아니고, 정말로, 우리 엄마는 무슨 일을 했어도 성공했을 사람이라고,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한다. 엄마는 사교적인 성격이었고, 그런 엄마의 성격은 고객을 끌어당겼다. 그래서인지 우리집에서는 이렇게 뭐다 뭐다 명분을 붙여가며 파티를 여는 것은 흔한 일이었다. 아빠도 없고, 어렸을적부터 엄마도 일이며 뭐며 바빠서 내 옆에 붙어있는 일은 거의 없었다. 그래서인지 나는 혼자 있는 것이 편했고, 사람과 부딪히는 일은 피했다. 은둔형 외톨이 정도는 아니었지만, 어렸을 적에 나는, 다루기 어려웠던 아이였다. 하지만 엄마에게 걱정을 끼치고 싶지는 않았어서 나는 엄마 앞에서만은 착한 아들이었다. 뭐든 바라는 것은 이루어졌고 필요한 사람은 마음대로 할 수 있다고 믿었던 철없고 기고만장한 시절이였다.
등 뒤에서는 여러사람들이 고귀한척 하며 인사를 나누고 있었지만, 난 그것은 나와는 전혀 별개의 일이라고 생각했었다. 음, 그냥 윗층 내 방으로 올라가 버릴까. 진지하게 고민하며 창밖을 내다보는데, 어떻게 들으면 가벼워 보이는 어머니의 웃음소리가 가까워진다 싶더니 아니나다를까 바로 뒤에서 내 이름을 부르는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린다. 생각같아서는 왜부르냐고 짜증을 내고 싶었지만, 나는 꾹 참고 뒤돌아섰다.
그리고 그곳에는, 그가 있었다.
"종대야, 인사드려. 이쪽은 엄마 중요한 고객님."
아, 예. 하고 건성으로 꾸벅 고개를 숙이는 나를 못마땅한 눈빛으로 쳐다보던 엄마는 그를 향해 몸을 돌리며 어머, 그러고보니까 사장님이 후원하시는 학교가 우리 종대가 다니는 고등학교에요! 라며 너스레를 떨었다. 그런 엄마를 보던 그는 작게 웃으며 그렇네요, 하고 대답했다. 그런 사소한거라도 동질감을 이용해서 말이라도 더 해보고 싶나 우리 엄마는, 하고 속으로 비웃던 나는 그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우와- 하고 작게 탄성을 내뱉어버렸다. 그 소리에 의아한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는 그와 엄마에게 나는 베시시 웃어보이며 대답했고, 내 말을 들은 그는 안어울리게 얼굴을 붉히며 다시 작게 웃었다. 그때, 내가 뭐라고 했더라. 아, 그래. 목소리가 참 멋지셔서요. 라고 했었던 것 같다. 어렸을적의 나는, 골치가 아플 정도로 솔직했었다. 그것이 그와 나의 첫만남이었다.
"그나저나 부인분은 잘 계시죠?"
"예, 그럼요. 잘 있죠."
그리고 그는, 결혼을 한 사람이었다. 그것을 나는 처음부터,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그때 나의 나이가 열여덟이었고, 그의 나이는 스물아홉이었다. 어머니와 그의 대화를 들으면서, 그때 나의 기분이 어땠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
"있잖아요, 아저씨 나 처음 봤을때 어땠어요? 예뻤어? 귀여웠어? 어떘어?"
나른하게 내리쬐는 봄날의 햇빛이 기분이 좋아서 베란다에 몸을 둥글게 말고 누워있었더니, 그가 얇은 담요를 가지고와 몸 위에 덮어주었다. 라이너스마냥 그 담요를 꼭 쥐고 앉아있는 그의 품속으로 파고 들어서 비스듬히 앉았다. 허리아파, 그러다가. 그가 걱정스럽다는 듯이 말했다. 아저씨는 맨날 걱정이 많아, 입술을 삐죽이며 고개를 위로 치켜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그런 그가 좋고 따뜻한 햇빛이 좋고 함께있는 이 상황이 좋아서 베시시 웃으며 묻자, 그는 고개를 내려 내코에 살짝 입을 맞추었다. 그런 사소한 입맞춤이 그가 나를 너무나도 사랑한다는 표시같아서, 나는 항상 설렜다.
"눈과 참 어울리는 아이다, 싶었어."
그게 뭐야, 내가 웃었다.
"넌 하얀 눈처럼 반짝반짝 빛나는 아이였어, 종대야."
정말이야, 봄날의 햇빛보다 따스하게 그가 웃었다.
-
두번째 만남은 주말, 엄마의 회사에서 였다. 간만에 친구들이랑 놀려고 엄마에게 참고서를 산다고 거짓말을 하고 돈을 얻으려 왔다가 잔소리만 잔뜩 들었어서, 기분이 상당히 나빴었다. 오랜만에 친구들이랑 술약속이 있었던것으로 기억난다. 그 시절 나는 공부에는 그닥 취미가 없었다. 그리고 그것은 지금도 마찬가지다. 여하튼, 기분이 나빠져서 툴툴거리며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와 어쩌지, 하는 기분에 로비에 마련되어 있는 푹신푹신한 쇼파에 파묻혀 앉아있는데, '김종대…?' 하고 내 이름을 살짝 어눌하게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들자, 현실이 아닌 것처럼, 그가 서있었다.
"종대, 맞지?"
나는 허둥지둥 일어나서 꾸벅 인사했다. 밝은 낮, 쏟아지는 햇빛을 받고 우뚝 서있는 그는, 정말로, 진짜로, 너무나도 멋졌다. 어른이었던 그는 나보다 한뼘도 넘게 키가 더 컸고, 멋진 외모를 가지고 있었다. 특히나 날카로우면서도 서글서글한 그 눈매. 그는 정말로 멋진 외모를 가지고 있었다. 무슨 말을 해야하나, 괜시리 긴장해서 우물쭈물 서있는 나를 바라보던 그는, 작게 웃었다. 그리고 귀엽네, 라고 말했었다. 그 말에 왠지 더 부끄러워진 나는 아무말도 못하고 그의 구두 끝만 바라보고 있었다.
"점심 아직 안했으면 같이 먹을까? 밥사줄게."
네? 아니요, 그게요…. 우물쭈물해 하는 나를 보던 그는 괜찮아, 괜찮아. 라고 말하며 내 손을 잡고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 갑작스레 그와 점심을 같이 먹게 되었다는 것보다 잡고 있는 손이 너무너무 떨려서, 나는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하고 지하주차장에 있던 그의 차까지 얼떨결에 타버리게 되었다.
"뭐 좋아하는거 있니? 뭐 먹을래? 고기? 초밥?"
차에 시동을 거는 그를 바라보다가, 나는 조용히 말했다. 초밥이요. 그가 살풋 웃었다. 가슴이 확연히 크게 떨리기 시작한 것은, 그때부터였다고, 나는 정확하게 기억한다. 여러가지 대화를 했던 것 같은데, 정말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심장이 너무 쿵쾅거려서, 나는 분명 엄마가 팔았을, 이 엔진소리 없이 조용한 차를 원망했다. 이러다가 심장 소리가 그에게 들릴 것만 같아서, 나는 내내 조마조마했다. 도착한 초밥집은 나도 몇번 와 본 곳이었다. 방안에 자리잡고 그와 마주 앉았다. 그때 나는 지나치게 긴장했어서 물컵도 쏟았던 것으로 기억이 난다. 그런 나와는 다르게 그는 차분하게 주문도 알아서 해주었고, 종업원에게 부탁을 해서 새 컵을 가져다 주고, 마른 수건을 가져다 주었다.
"있잖아요, 아저씨."
손을 물수건으로 닦고, 젓가락을 집어들던 그를 멍하니 바라보던 내가 입을 열자, 그가 응? 하고 나를 바라보았다. 난 입안에 침이 바짝바짝 마르는 듯한 기분이었다. 불러놓고 도저히 말을 할 수가 없어서 입술을 잘근잘근 씹는데, 그의 손이 입술에 닿았다. 손이 굉장히 차가웠어서, 나는 깜짝 놀랐다.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더니, 그는 미간에 주름을 잔뜩 잡고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입술 깨물지마, 상처나잖아. 자상한 목소리였다. 나는 참을 수가 없어서, 덜컥 일어나 상을 짚고 상체를 숙여 그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 이제 이걸 어쩐담, 고민하고 있던 찰나에 그가 먼저 혀를 내밀어 내 입술을 핥았다. 그것이 신호로,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의 입을 거칠게 탐했다. 입술을 떼자, 거친 숨이 트여져 나왔다.
"아저씨, 지금 아저씨의 아내…, 사랑하고 있나요?"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나도, 사랑해주세요."
그는, 대답없이 나에게 짧게 키스했다.
-
눈을 뜨니, 온통 푸른 밤이었을 때가 있었다. 여름이었지만, 에어컨이 신나게 돌아가고 있어서 전혀 덥지 않았다. 그와 하루종일 뒹굴거리다가 잠들어버렸었던 것으로 기억난다. 평소같으면 다시 자버렸겠지만, 그와 있는 시간 하나하나가 굉장히, 너무도 소중해서, 너무나도 애달파서, 그의 얼굴을 일초라도 더 보고 싶었던 나날들이었어서, 나는 망설임없이 침대에서 일어나 앉았다. 그의 부인에게서 그가 오랜만에 얻은 휴가였다. 함께하는 순간순간이 애절하게 빛나던 시간들이었다. 침대에서 일어나, 옆자리에 없는 그를 찾으러 잠이 덜깨서 비척비척 거리는 걸음을 애써 거실로 옮기려다가, 나는 습관처럼 책상 위에 놓여져있는 필름카메라를 손에 들었다. 그때의 나는, 광적으로 사진찍는 것에 집착하고 있었다. 어떤 한순간이라도 잊어버리고 싶지 않았다. 사진은, 나의 간절하고도 애절한 행복이었다. 거실로 나가니, 그는 베란다에서 창문을 열고 전화통화를 하며 담배를 피고 있었다. 평소에 그가 담배를 피는 것을 굉장히 싫어했던 나는, 단번에 미간을 찌푸리고 그에게 다가가려 했다.
"아니라니까, 여보. 요즘 왜그래, 도대체? 전에는 안그랬잖아. 아니야, 됐어. 그래, 시간 늦었는데 이만자…. 그래, 나도 사랑해. 끊어. 잘자."
나는, 조용히 그의 뒤에서 카메라를 들어 그의 뒷모습을 찍었다. 흠칫, 하고 놀라서 뒤를 돌아본 후 그는, 안심한 듯 웃으며 나를 향해 팔을 벌렸다. 나는 그 품에 뛰어들어, 소리도 내지 않고 한참 울었다. 그런 나를 그는 조용히 안고만 있었다.
-
그 후로 그와는 아슬아슬한 관계를 지속했다. 그가 좋았다. 그도 나를 좋아한다고, 나는 그렇게 한결같이 믿었다. 어렸어서 무모했었다. 마음 깊은 곳에서는 분명히, 이 위험한 관계를, 분명히, 뚜렷하게, 경고하고 있었을텐데, 어렸던 나는 나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 그 경고를 무시하고 있었다. 그를 만나면 만날수록 욕심이 늘어갔다. 조금만 더 함께 있고 싶었고, 조금만 더 사랑받고 싶었다. 위험수위가 간당간당해졌다고, 스스로 알고 있었다. 어느 날 저녁, 퇴근하는 그를 만나기 위해 몰래 집을 나서는데, 김종대 하고 내 이름을 부르는 엄마의 목소리에 흠칫 현관에서 멈추고 말았다. 도둑질을 하다 걸린 사람처럼 손이 떨리고 심장이 쿵쾅쿵쾅 뛰었다.
"그만해."
엄마의 목소리가, 평소와 똑같이 차분하게 들려와서, 나는 차마 뒤도 돌아보지 못했다. 그게 무슨 소리냐고 물을 수도 없었다. 엄마의 목소리가, 나에게 단단히 일러두고 있었다. 그만해.
"그 사람이 너를 사랑할 수도 있겠지."
그만해.
"하지만 그 사람은 자신의 아내도 사랑하고 있어."
엄마의 말이 끝나고, 나는 뒤돌아보지 않고 대답했다. 알고있어요. 그러고 나서 나는 망설임없이 현관문을 열고 밖으로 나섰다. 그를 만나기 위해서. 알고 있었다. 그는 그의 아내를 사랑한다. 하지만 나도 똑같이 사랑해주고 있어. 그것만으로도 나는, 괜찮다고, 스스로 위로하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내가 그 사람을 사랑하고 있어요, 엄마."
대문 밖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던 그에게 가서 안겼다. 무슨 일이 있냐고 묻는 그에게, 나는 대답하지 않고, 더욱 그의 등을 꽉 그러쥐었다. 놓치고 싶지 않았다.
-
문닫아, 종대야. 감기걸려. 그의 잔소리에 나는 못이기는 척 창문을 닫았다. 슬슬 날씨가 차갑다고 느껴지던, 낙엽이 눈처럼 날리던 가을의 끝자락이었다. 야간자율학습을 몰래 빠져나온 나에게 그는 무섭게 화를 내고 있었다. 당장 수능이 눈앞인데 그렇게 공부를 안해서 되겠냐고 화를 내는 그에게 나는 대충 반성하는 척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한두번 속아넘어간 것이 아니었던 그는, 신나게 열변을 토하고 있던 중이었다.
"공부 좀 해, 종대야. 자식이라고는 너 하난데, 너 잘못되면 어머니가 얼마나 슬퍼하시겠어."
슬슬 그의 잔소리가 지겨워졌던 나는 턱을 괴고 있다가, 피식 웃었다. 거짓말, 자기 때문에 내가 대학을 못가면 그 책임을 지고 싶어 하지 않는거잖아. 약한 사람. 나는 건성건성 네, 공부할게요. 하고 대답했다. 내 태도가 정말 못마땅했는지 버럭 화를 내려던 그를 보다가 무심코 시선을 앞으로 던졌는데, 갑자기 우리 교복을 입은 애들이 차 앞에 있는 아파트 벽에 기대서 뭐라뭐라 말을 하더니 키스를 하기 시작했다. 교복을 입은 애들이, 아니 게다가 그 교복이 우리 학교라는 놀라움과, 너무 진하게 키스하는 탓에 난 깜짝 놀라버렸다. 그도 깜짝 놀라 굳어있는 것이 느껴졌다. 좀처럼 떨어질 생각을 안하는 커플을 보다가 나는 결국 키득키득 웃어버렸다.
"우와, 대단한 커플이네."
내 말에 이번에는 그가 웃었다. 우리가 그런 말할 처지가 될까. 장난스럽게 물어보는 그에게 나는 다시 크게 웃으며 짧게 키스했다. 우리가 더 대단한 커플이에요, 그렇죠? 내 말에 그가 당연하지. 라고 말하며 그 큰 손으로 내 뒷통수를 슥 잡아당겨 깊게 키스해왔다. 키스를 하고 나니, 어쩐지 모르게 차 앞 유리에 낙엽이 너무 우스꽝스러운 모습으로 붙어있어서, 나는 더 크게 웃었다.
-
이게 도대체 몇번째야, 나는 한숨을 푹 쉬었다. 그 날은 엄마의 새로 오픈한 가게의 축하파티가 열리는 날이었다. 엄마의 가게에서는, 여자애들이나, 아가씨들이나, 여하튼 여자들이 좋아할 만한 물건들을 잔뜩 팔고 있었다. 비누라던지, 향수라던지, 자그마한 장식품들. 나는 강한 향기를 싫어하는 편이라서, 비누와 향수의 향기가 섞여있는 그 공기를 계속해서 맡으니 속이 미식거리는 느낌이었다. 금방이라도 토를 할 것만 같았다. 수능을 치루고 나서, 나는 그저그런 대학에 붙었다. 엄마는 내가 4년제 대학을 간 것만으로도 감격스러워 했다. 그도, 나름대로 만족해했다. 사람들과 최대한 부딪히지 않으려 노력하며 나는 엄마의 가게를 구경하기 시작했다. 그런던 중, 마음에 쏙 드는 넥타이핀을 발견했다. 손을 들어 그것을 들고 눈을 가늘게 뜨고 쳐다보며, 그것을 한 그를 떠올려봤다. 근사할 것 같아. 기분이 좋았다.
"어머, 사장님!"
엄마의 목소리에 나는 반사적으로 웃으며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내가 사랑하는 그와,
"안녕하세요. 처음 뵙죠? 평소에 말씀 많이 들었어요."
화사하게 웃으며 그의 손을 잡고 있는, 그가 사랑하는 그녀가 있었다.
-
탄성이 저절로 나오는 풍경에 나는 와아, 하고 멍하니 바보처럼 서있었다. 눈이 많이 내렸던 그날, 나는 그와 함께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넓은, 눈에 잔뜩 뒤덮여있는 평지에 서있었다. 작고 경쾌한 소음에 뒤를 돌아보자, 그가 카메라를 들고 웃으며 날 바라보고 있었다. 평소 내가 그의 사진을 찍는 경우는 많았어도 그가 내 사진을 찍는 경우는 거의 없었으므로, 나는 잠깐 의아해졌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정말로 아름다운 이곳에, 내가 사랑하는 그와 함께 있다. 세상은 아름답고 그는 날 바라보며 웃고 있다. 너무너무 행복해서, 나는 그를 보며 다시 한번 환하게 웃었다. 그러자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그가 다시 한번 셔터를 누른다. 그는 셔터를 누를때마다, 인상 깊을 정도로 진지한 표정이 되어서, 나는 결국 눈물이 맺힐 정도로 크게 웃어버리고 만다.
"도대체 왜 내가 사진 찍을 때마다 웃는 거야?"
불만 섞인 표정으로 말하는 그의 볼에 입을 맞추고, 나는 눈밭으로 뛰어들었다. 너무 좋아, 정말! 소리치며 눈위로 누워버리는 나를 어이없다는 듯 바라보던 그가 내쪽으로 저벅저벅 걸어와서는 다시 한번 셔터를 누른다. 그리고서는 자신도 내 옆에 누워버린다. 기분이 너무 좋아. 마주보며 웃는다. 눈의 차가움이, 따듯함이 되어서 서로에게 흐른다. 나는 가만히 눈을 감아보았다. 하나님, 시간이 멈추게 해주세요. 이 사람과 함께라면, 영원히 겨울이라도 좋아요. 내 볼을 부드럽게 쓰다듬는 그의 체온이 느껴진다. 행복하다고, 나는 눈물이 날만큼 행복하다고, 그렇게 생각했다.
"종대야, 눈이 올때마다 난 항상 너를 생각해낼거야."
그 말을 하고, 그는 감은 내 눈 위로 입맞추었다. 기분이 좋아서, 빙긋 웃었다. 그가 나를 감싸 안는다. 한참 그러고 있더니, 그가 흐느끼는 소리가 들리고, 그의 몸이 사정없이 떨린다. 왜, 왜 우는거야? 그는 그렇게 날 안고 한참동안 울었다. 그러고나서는, 아무일 없다는 듯, 날 잡아 일으켜서 옷에 묻은 눈들을 털어주었다. 불안한 내 눈빛을, 그는 끝까지 모른척 했다.
-
그의 전화를 받고, 나는 기쁜 마음으로 약속장소인 자주가던 카페로 향했다. 정말로 오랜만에 만나는 날이었다. 만나면, 맘껏 땡깡 부려야겠다. 그리고 보고 싶었다고 말해야지. 나는 신나게 집을 나섰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몸이 너무나도 떨려서, 추위 때문인가 생각했지만, 마음은 알고 있었던 것이다. 밖으로 나가서 버스를 탔는데, 눈이 잔뜩 날리기 시작했다. 우산도 갖고 나오지 않았어서 걱정은 됐지만, 나는 그를 만난다는 사실에 너무나도 들떠 있었다. 카페 문을 열고 들어서자, 그가 먼저 와있었다. 나는 망설임 없이 그의 맞은편에 앉았다. 그는 늘 그렇듯 내가 좋아하는 핫초코를 먼저 주문시켜놓은 후였다. 그러고 나서 아무렇지 않게 말하려고 했는데, 이상하게 잔을 잡은 손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
"아저씨, 왜이렇게 오랜만이에요. 나 안보고 싶었어요?"
내 말에, 그는 대답하지 않고 종대야, 하고 내 이름을 불렀다. 그의 목소리가, 내 손처럼 떨리고 있었다. 왜요? 하고 쳐다보는 나에게 그는 조용히, 차분하게 그만하자. 라고 말했다. 그렇게 말하는 목소리도 형편없이 떨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눈빛만은 너무나도 올곧게 나를 바라보고 있어서, 나는 금방이라도 울어버릴 것 같았다.
"뭘 그만해요, 나 오랜만에 만났는데 장난칠꺼에요?"
내 말에, 그는 결국 시선을 떨구고 말았다. 그와 함께, 나도 눈물을 뚝 떨구고 말았다. 그러고 나서, 나는 울음과 섞여 짓뭉게진 발음으로 그에게 사정했다. 아저씨, 이러지 말아요. 내가 잘할게요. 이제 귀찮게 안할게요. 대학가서 공부도 열심히 할게요. 한달에 한번, 아니, 일년에 한번 만나도 괜찮아요. 안돼요. 나 그만 만난다는 말만 하지 말아요. 안돼요, 아저씨. 주먹을 꾹 쥐고 더듬더듬 말하는 날 바라보던 그가, 결국 눈물을 뚝뚝 떨구고 말았다. 그는 항상 그런 사람이었다. 무뚝뚝한 듯, 그렇게 행동하면서, 나중에는 꼭 약한 모습을 보여주고 만다. 그는 부정했지만, 그는 자신의 감정에 솔직한 사람이었다.
"겨울이 되면, 널 기억하게 될거야. 겨울이 아니더라도, 난 언제까지라도 널 잊지 못할거야. 네가 너무 소중해, 종대야. 너의 기억이 너무 소중해, 종대야. 내가 따뜻함을 주었던 사람이…, 나에게 그런 감정을 주었던 사람이 너라는게 너무 다행이어서…그런데, 내가 너무 약한 사람이라서, 아내를 포기할 용기도, 아내의 뱃속에 들어있는 아기를 포기할 용기도 없어. 이대로 계속 사랑해달라고 너에게 말하고 싶지만, 난 너의 미래를 망치고 싶지 않아, 종대야."
그가 울음을 필사적으로 참으며 말했다. 나는 어린아이처럼 엉엉 울었다. 분명, 얼굴은 엉망이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의 표정이 너무 아파서, 나는 더이상 그를 붙잡는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난 탁자 위로 올려져 있는 그의 손을 잡고서, 말했다. 사랑한다고 말해줘요. 하지만 그는, 주륵주륵 눈물을 흘리며 웃었다. 고개를 도리도리 흔들었다. 그래, 알고있다. 이건 말하지 못해. 가 아니고, 안돼. 라는 뜻이다. 나도 울며 웃었다. 그래, 나를 기억해줘요, 눈이 내리는 계절이면. 이 눈은, 내가 당신을 만나고 싶어서, 좋아하고 있어서, 그래서 내가 당신에게 전하는 거라고.
"나는, 당신을 사랑했어요."
당신도, 나를 잊지 말아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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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대야…?"
익숙한 목소리에 눈을 뜨자, 형이 눈 앞에 서있었다. 뭐야, 왜 눈을 감고 있어? 묻는 형에게 아니야, 아무것도. 라고 대답하며 나는 차갑게 식은 아메리카노 커피를 눈 앞에 두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 후, 나는 그를 찾지 않았다. 눈을 잔뜩 맞고 집에 들어선 나에게 엄마는 아무것도 묻지 않고 등을 토닥여 주었다. 그것이 서러워서 나는 더 울었었다. 그 후에는 엄마도 나도, 약속한 것처럼 그의 이야기는 전혀 입에 올리지 않았다. 그 후에도 여러번 열린 엄마의 파티에도, 나는 참석하지 않았다. 나는 이제 스물다섯이다. 스무 살의 김종대는, 그날 그 눈 속에 묻혀버렸다.
"우와, 눈이 엄청 내렸네."
유리문을 밀고 나오며 말하자, 형이 그렇지? 징하다, 진짜. 라고 말하면서 우산을 핀다. 공주님, 이리오세요. 형의 장난스러운 말에 내가 지각한 왕자님은 싫습니다, 하고 말하자 형의 얼굴이 울상이 된다. 미안하다니까! 꽥꽥 자기 성질에 북받쳐 소리를 지른다. 재밌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그와 헤어진 이후, 많은 사람을 만났다. 지금 사귀고 있는 사람이 남자라는 것이, 그의 영향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그를 사람으로써 사랑했다. 남자라는 것은, 우습게도 그와 만나면서 염두에 둬본 적이 없다. 형과 투닥거리며 걸어가다가, 나는 무심코 뒤를 돌아봤다. 걸어온 나의 발자국이, 새하얗게 지워지고 있었다. 당신은 지금 어디서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나는 지금도, 그날과 같은 풍경 아래서, 당신을 찾고 있어요.
"어? 종대야? 너 울어?"
형이 옆에서 놀라는 것이 느껴졌지만, 나는 뭐라 말도 못하고 그 자리에 주저 앉아 펑펑 울고말았다. 당황해하는 형의 목소리가, 멀게 느껴진다. 아무리 그 날의 꿈이 헛된 것이더라도, 당신과 함께 했던 추억이 새하얗게 타버렸다고 해도, 지금의 내 발자국처럼 언젠가는 사라져버릴 운명이라도, 나는 이 계절이 지나가버리기 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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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때문에 자꾸 바람피는걸 쓰는거죠...?
여하튼 오늘은 구희수씨가 애기네 애기 쓸애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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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GM은 long long ago 입니다
안들리면 찾아서 들어주시면서 읽어주세요.......들어주시면 안될까요...? 부탁드립니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