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구주장 정택운X양궁요정 차학연
02.
랭킹라운드가 딱 하루 남았다. 런던에 와서 치룰 첫 번째 공식적인 개인 경기였다. 약 70명 중 개인전 토너먼트를 할 64명을 뽑는 경기라 대부분의 선수들이 마음놓고 활을 쏘지만 나름의 기싸움을 하게 된다. 개막 전에 치뤄지는 대한민국 남자 양궁 단체 예선에서 파죽지세로 결승까지 올려 놓은데에 꽤 중요한 역할을 한 학연과 상혁을 세계는 주목하고 있었다.
어쩐지 일찍 눈이 떠졌다. 대충 씻고 나왔는데도 넉넉하게 급식을 먹을 수 있는 시간이었다. 하지만 어제 저녁으로 나온 이상한 생선이 들어가있는 샌드위치가 떠올라 캐리어 깊은 곳에 코치도 상혁도 몰래 쟁여두었던 컵라면을 뜯고 커피포트에 물을 올렸다. 내 소듕한 라면인데 눈을 뜨자마자 한 입만 달라고 덤벼들 상혁이 두려워 후다닥 국물까지 먹어 치워버리고 세상 모르게 자고 있는 상혁을 깨웠다.
"상혁아 일어나."
"아 10분만..."
"우리 효기 안일어나면 뽀뽀한다?"
헉 앙대!를 외치면서 부은 눈을 비비며 후다닥 일어나 욕실로 들어가는 상혁을 확인하고 핸드폰을 키고 익숙한 초록창을 열어 습관처럼 '차학연'을 검색했다.
[분석] 양궁신예 18살 '한상혁' 과연 '차학연'을 누를 수 있을 것인가?
제일 먼저 뜨는 기사를 눌러 들어가보니 자신의 얘기는 하나도 없고 상혁의 탄탄한 기본기와 잠재력을 칭찬하는 내용 뿐이었다. 이 기자는 왜 같은 우리나라 선수끼리 라이벌 구도로 붙이고 난리람. 제 아무리 아끼는 막내동생이라지만 그래도 괜히 기분이 상해서 물소리가 들리는 화장실 문을 힐끗 노려봐주고 다른 기사를 찾았다.
[런던] 한국 양궁의 기둥 '차학연' 금메달 사냥 나서나
막상 기사엔 그다지 특별한 내용이 없었다. 국가대표 선발전에서 꺾은 선수에 대한 얘기도 있었고, 출국 직전 공항에서 한 인터뷰에 대한 얘기도 있었다. 그래도 어쩐지 기둥이라는 단어가 제게는 조금 버겁게 느껴지는 학연이었다. 연관 기사에도 죄다 금메달 금메달. 금에 환장하는 사람들처럼 보이기도 했다. 이 시즌이 지나가면 제가 양궁 월드컵에서 우승을 하던 예선 탈락을 하던 관심조차 주지 않을 것이 뻔했다. 양궁신예라고 불리는 상혁도 그랬다. 2년 전, 중학교 3학년 때 학연도 못해본 월드컵 개인전에서 당당히 1위를 꿰찬 베테랑인데 신예라니. 공식적인 양궁선수로 활동한 것만 2년은 되어서 이 쪽 선수들사이에선 이름 날린 상혁에게 신예라는 수식어는 그저 웃기기만 했다. 그 만큼 주목 받지 못한다는 게 억울했고 금메달이 아니면 잊혀질 자신들의 처지가 서글펐다.
[단독] 한국 축구의 주장 '정택운' 알고보니 '차학연'과 절친?
그래서 학연은 택운이 썩 마음에 들지 않는다. 티는 내지 않았지만. 태릉 내의 유일한 동갑내기라 꽤나 빠르게 친해졌고 국가대표로 뽑혔을 때 서로 축하해주기도 했지만 축구가 싫었다. 하루종일 땀을 뻘뻘 흘리며 힘든 연습을 하는 축구선수들에 비해 양궁선수들의 훈련은 비교적 양반이지만 큰 대회에 나가서 떨지 않는 담력을 갖기 위해 옷 속에 뱀도 집어 넣고 10점을 맞추기 전까진 절대로 빼주지 않던 훈련을 생각해보면 억울하기 그지없다. 차라리 땀 흘리고 말지. 축구를 비난하는 것은 아니다. 양궁이 무시 당하는 것이 싫을 뿐이지. 비인기 종목에 종사하는 선수들이 구기종목을 미워해본 적이 없다고 하면 거짓말이다. 그 쟁쟁한 선수들 사이에서 금메달을 따와도 종합 4위에 오른 축구팀에게만 스포트라이트가 간다는 이유때문에. 택운과 분명 절친은 맞다. 서로 평생지기라고 칭할 정도로. 그렇지만 요즘 부쩍 미워하는 마음이 생기는 것은 어쩔 수 없나보다.
'우리 대표팀 주장! 몇 골 넣으실건가요?'
'전 중요한 순간에 골을 넣겠습니다.'
핸드폰 화면 속 정택운이 말했다. 괜히 얄미워 신경질적으로 핸드폰 화면을 껐다.
"형 뭐봐요?"
어느 새 상혁이 옷까지 갈아입고 양말을 꺼내들고 있었다.
"아니 그냥 기사. 준비 다했어? 아침 먹을거야?"
"여기 온 뒤로 아침은 거르게 되더라구요. 음식에 대한 거부반응을 최소화 시킨달까."
"그럼 바로 훈련장 가있자. 코치님이 9시까지 오신대."
"전 오후부터 가요."
"오전에 안하게?"
"저 지금 노란 원에 노이로제 걸릴 것 같거든여. 휴식이 필요하죠."
"그게 양궁국대가 할 말이냐 이 자식아."
"장난이구 축구가 1시 30분에 시작한대요. 그 전에 원식이형이랑 택운이형도 만나고 이씨 형제 빼돌려서 경기보러 가야죠."
"야 홍빈이는 여유있을 지 몰라도 재환이는 출전 이틀 남았어."
"거 참 빡빡하시네. 푸른 잔디밭 보면서 눈을 힐링하면 결과에 더 좋아요. 재환이형 이거 보고 금메달 딴다에 만원?"
"콜. 만원이 뭐야 난 3만원."
"오예, 꽁돈 벌게 생겼네. 그나저나 형 진짜 안가요?"
"어제부터 몇 번 말하냐. 안가."
"택운이형 또 열흘동안 말도 안하고 형만 보면서 눈으로 피슈우웅 하고 레이저 쏠 걸요."
"됐어. 너 혼자 가. 나 먼저 나간다. 좀 있다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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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젯 밤에 반질반질하게 닦아놓은 활이 다시 더러워질 때까지 미친듯이 활만 쏴댔다. 옆자리의 선수가 세번 째 바뀔 때 쯤엔 저 멀리 과녁판의 노란색 원은 구멍이 너무 많이 나서 몇 개의 화살은 꽂히지 않기까지 했다. 오늘 컨디션 좋은 것 같은데 좀 쉬었다 해야하지 않겠냐고 벌써 한시라는 코치에게 멋쩍은 웃음을 지어주는 찰나 주머니에서 진동이 울렸다.
발신인: 평생지기 [왔어?]
아 맞다. 나 간다고 했었지.
[응 상혁이랑 같이 앉아있어! 잘 해!]
이건 가식섞인 선의의 거짓말이자 자신을 위한 일이었다. 미안해 택운아. 전설이라고 불릴 너같은 애들은 이해 못하겠지.
시위를 놓는 순간 강해진 바람을 화살은 이기지 못하고 5점을 겨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