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살, 그 불완전한 나이.
21
쉬는 시간이 거의 끝나갈 때쯤에야 최유진의 친구들은 이제 어떡하냐며 돌아왔지만, 최유진은 돌아오지 않았다. 아까 가방을 그렇게 싸고 나간 걸 보니 조퇴를 한 것 같았다. 더 이상 이 자리에 있지 못해서였겠지…? '남자에 미친 한 여자의 자작극.' 소문은 이렇게 또 입을 타고 빠르게, 퍼져나갔다. 사람이란 게 참 웃기다. 나를 죽을 듯이 깔 때는 언제고, 모든 게 최유진의 자작극이라고 밝혀지자 그제야 내게 사과를 하며 나를 동정했고, 자기들이 무슨 내 대변인이라도 된 것처럼 그토록 옹호하던 아이를 까기 시작했으니까. 친구는 오해가 풀려 다행이라고 좋아했지만, 왜인지는 몰라도 마냥 즐겁지만은 않았다. 이중적인 인간관계에 대해 한 번 데였기 때문이었을까. 아이들의 가십거리는 이제 내가 아니었다. 최유진은 내가 당했던 것처럼 한동안은, 힘들게 지낼 것이다.
마지막 수업을 끝으로 종례시간이 다가왔다. 선생님은 간단한 전달 사항을 말하신 뒤 해산을 외쳤고, 선생님의 말을 끝으로 아이들은 모두 가방을 챙기기 바빴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고. 내가 누명이 벗겨지자마자 든 생각은 딱 하나였다. 얼른 12반으로 뛰어가 김민규한테 모든 걸 설명해야겠다고. 사실 내게 이런 일이 있었는데, 내가 너무 바보 같아서 너를 피한 거였다고. 진작 털어놓지 못해 미안했다고. 이대로 불편하게 지내는 건 싫다. 상대가 더더욱 김민규였다면. 가방을 대충 싸고 반을 나가려고 할 때였다.
"여주야."
뒷문으로 딱 나가는 순간, 나를 기다리고 있었던 건지 전원우가 서 있었다. 전원우한테도 물어볼 게 많은데…. 그래도 지금은 김민규가 우선이야. 나를 부르는 전원우에 미안하다고, 지금 가봐야 할 곳이 있다고 말을 하고선 12반으로 가려고 하는데 전원우는 가지 말라며 내 손목을 잡아왔다.
"원우야. 나 진짜 급하게 갈 데가 있는데…."
"김민규한테 가려는 거지?"
"어?"
"걔 방금 나갔어. 어차피 가봤자 못 만날 거야."
…아, 그래? 내 말에 전원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혹시나 하고 핸드폰을 꺼내보지만, 연락은 하나도 없었다. 항상 학교가 끝날 때쯤이면 연락을 하던 그였는데, 요 며칠 내가 자기를 피해 다녀도 꿋꿋이 연락을 했던 그였는데…. 화 많이 난 거겠지. 하긴, 나 같아도 화나겠다. 오늘도 독서실에 갔으려나. 김민규에게 전화를 하려고 번호를 누르고 있을 때, 전원우가 번호를 누르고 있는 내 손 위로 제 손을 포갰다. 마치 전화를 하지 말라는 듯이.
"……?"
"잠깐 나랑 얘기 좀 하자."
잠깐이면 돼. 진지한 얼굴로 말을 하는 전원우에 나는 잠시 망설여졌지만, 이내 핸드폰을 집어 넣을 수 밖에 없었다. 어차피 전원우랑도 할 얘기가 있었으니까. 전원우랑 얘기하고, 김민규한테 모든 걸 털어 놓으면… 되겠지. '그래.' 라는 대답과 함께 나는 전원우를 따라 걸었다.
"여기 되게 오랜만이다. 그치?"
전원우가 나를 데리고 온 곳은 빈 음악실이었다. 한 네 달 전인가. 여기서 전원우랑 수업 땡땡이 치고 그랬었는데… 그때 참 재밌었지. 겨울방학 보충 수업 때가 생각이 나자 웃음이 픽 새어나왔다. 전원우는 그때처럼 아무 의자에 앉더니 제 옆에 앉으라며 자기 옆 의자를 손으로 툭, 툭 쳤다. 그 옆에 앉고 나서 우리는, 한동안 아무런 말이 없었다. 서로 물어볼 것도 많았고, 얘기해야 할 것도 많았으니까. 어색한 기류 속에 헛기침만 하고 있으니 전원우가 먼저 입을 열었다.
"…언제부터 그랬던 거야?"
"어?"
"최유진이 너 괴롭힌 거."
아…. 거의 3월 초부터? 배정을 받은 반엔 그 아이가 있었고, 그 아이는 처음부터 나를 슬슬 건드리다가 점점 일을 크게 벌리면서 여기까지 오게 됐어. 내 말에 전원우는 다시 말이 없어졌다. 힐끔 표정을 보니 아무래도 자기 때문이어서 그런지 조금 죄책감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았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괜히 내가 미안해졌다. 잘못은 최유진이 했지, 전원우가 한 건 아니니까. 지금은 그래도 네 덕분에 해결이 됐다고, 고맙다고 일부러 더 오바해서 말을 해도 전원우는 말이 없었다. 전원우가 다시 말을 꺼내기 시작한 건, 잠깐의 시간이 흐른 뒤였다.
"그때 네가 물었잖아. 나랑 최유진이랑 무슨 사이냐고."
"아… 응."
"섣불리 말을 못해준 이유가, 나뿐만이 아니라 다른 애들도 연관이 되어 있어서 그런 거였어."
그리고 그걸 들으면 네가 충격을 받을 수도 있다고 생각해서였고. 다른 애들도 연관이 되어 있는거면… 김민규도 연관이 되어 있는 건가. 내가 충격 받을 일은 뭐지? 이야기를 계속 해도 되겠냐며, 나를 바라보며 묻는 전원우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충격을 받는 한이 있어도 나는 그들의 과거를 들어야만 했다.
"너한테는 민규랑 고2 때 그저 같은 반이었던, 친하지 않은 사이라고 얘기를 했었는데 사실 아니야. 고2 때 나는 민규랑, 석민이라는 애랑 같이 다녔었어."
…아, 어쩐지. 뭔가 있을 거라고는 예상했었다. 그 둘 사이에는 알 수 없는 무언가가 있었으니까. 전원우는 잠시 인상을 찡그리더니 제 왼팔을 주무르며 말을 이어갔다.
"우리 엄청 친했어. 그렇게 잘 맞는 애들도 없었거든, 싸운 적도 없었고. 정말 얘네랑은 평생 친구해도 괜찮겠다… 라고 생각할 정도로 믿음이 가는 애들이었어."
"……."
"어느 날 석민이란 애한테 여자친구가 생겼는데, 진짜 이쁘다고 엄청 자랑을 하는 거야. 걔가 남자들끼리 있을 땐 친화력이 좋은데, 여자 앞만 서면 그렇게 낯을 가리는 애라 우리는 안 믿었었어. 너한테 무슨 여자친구냐면서. 그런데 진짜라는 거야. 그러면서 소개해준 애가 최유진이었어."
"……!!!"
뭐야. 최유진은 전원우랑 사겼다면서…? 뭔가 좀 이상한데…?
"나랑 민규, 석민이, 그리고 최유진까지. 나름 잘 지냈어. 그런데 일이 터진 거지. 갑자기 최유진이 내가 좋다는 거야."
"…? 왜?"
"나도 모르겠어. 나는 그냥 친구 여자친구니까 뭐 부탁하면 들어주는 거 밖에 없었거든? 그런데 막 문자로 내가 너무 좋다고, 자기는 당장이라도 석민이 버릴 수 있다고 자기랑 만나자고 그러는 거야. 말이 안 되는 거잖아. 걔가 친구 여자친구인 것도 있었고, 또 내가 최유진한테 마음이 하나도 없었어."
"……."
"그런데 최유진이 결국 일을 저질러버렸어. 석민이한테 내가 좋다고 헤어지자고 한 거야."
……하. 걔는 왜 이렇게 일을 만든다니. 전원우는 그때 일을 생각하는 듯 잠시 눈을 감았다. 뭔가 말하기 힘들어 보이는데… 괜찮은 건가.
"석민이가 걔… 정말 좋아했어. 그런데 최유진한테 그런 말을 들으니까 미치기 시작한 거야. 그 말을 듣고 온 석민이는 내 말은 듣지도 않고 나를 때리기 시작했어. 민규는 옆에서 말리기 바빴고. 석민이는 욕을 하면서 나를 때리는데 걔한테 맞아서 아픈 것보다도 나는 그냥 얘한테 이 정도였던 건가, 나는 정말 얘한테 믿을만한 사람이 아니였던 건가… 하는 생각에 더 슬픈 거야."
와… 나랑 똑같다. 나도 이번에 그랬었는데. 왜 아무도 내 말을 들어주지 않는 걸까. 왜 사람들은 항상… 한 쪽 말만 듣고 모든 걸 판단해 버리는 걸까, 하면서. 조금만이라도 내 이야기를 들어줬으면 그렇게 억울하지는 않았을 텐데.
"그렇게 석민이랑 틀어지고, 민규는 나름 중간에서 중립을 지킨다고 애썼어. 우리 둘을 화해시키려고도 했었고. 하지만 불가능했어. 석민이가 나에 대한 마음을 아예 닫아버렸거든."
"……."
"민규도 많이 힘들었겠지. 학교 끝나고 나랑 말 좀 하자고 하더라. 그래서 그때 이야기를 했었는데…."
전원우는 말을 하다 말고 제 왼팔을 꽉 쥐며 두 눈을 질끈 감았다. 그에 놀라서 괜찮아?! 하고 물으니 전원우는 이내 괜찮다며 쓰게 웃어보였다. 아, 너무 안쓰러워 죽겠다. 불쌍해 미치겠어. 너무나도 안타까운 마음에 나도 모르게 그의 손을 잡았다. 그는 잠시 놀란 듯 보였지만, 전원우도 그런 나의 손을 꽈악 잡았다.
"안 좋게 끝났어. 그래서 이렇게 다 틀어지게 된 거지. 둘은 잘못이 없지만 그래도 원망하게 되더라. 정작 최유진은 자기가 옆에 있으니까 걱정 말라 그러는데… 이해가 안 됐지. 모든 일의 시초는 걘데 말이야. 대체 내가 뭐라고 나한테 이러는 걸까 싶었어. 하다 못해 사실은 나를 좋아해서가 아니라 나를 싫어해서 이러는 건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고."
"……원우야."
"하루하루가 외줄 타기처럼 너무 힘들었어. 학교에 가면 눈치가 보이고, 답답하기도 하고. 그냥… 울고 싶었어."
……. 그의 모습과 내 모습이 오버랩이 되면서 나는 나도 모르게 눈물이 왈칵 쏟아져 나왔다. 전원우한테 이런 과거가 있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그리고 그가 느꼈던 감정을 내가 너무나도 잘 아니까. 그래서인지 눈물이 더더욱 끊기지 않았다. 내 눈물에 당황을 한 듯 전원우는 왜 우나며, 울지 말라고 나를 다독여주었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진정은 커녕 감정만 더 북받쳐 올랐다.
"그동안, 얼마나 힘들었어, 흐…! 그동안 얼마나…!"
"……넌 그동안 얼마나 힘들었니, 여주야."
전원우의 말에 무슨 말이냐는 듯한 표정으로 바라보니 전원우는 내 눈물을 닦아주며 말했다.
"왜 말을 안했어. 나한테 말을 했었어야지. 혼자 감당하느라 얼마나… 힘들었어."
……아, 그래. 오해가 풀려도 마냥 기쁘지만은 않았던 이유가 인간관계에 대해 상처 받은 것도 있었지만, 그 누구도 나에게 얼마나 힘들었냐며 위로해준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어. 내가 거의 오열을 하듯이 우니 전원우는 그런 나를 제 품으로 안으며 한 손은 머리를 감싸고, 다른 한손으로는 내 등을 토닥여주면서 말했다.
"이제 괜찮아… 괜찮아, 여주야."
그렇게 나는 한참이나 전원우의 품에서 울어야만 했다.
"이제 좀 진정 됐어?"
한참을 엉엉 울던 나는 어느 정도 진정이 되자 너무 민망해졌다. 내가 지금… 얼마나 운 거지. 정신 없이 울던 게 막 생각이 나자 전원우의 눈도 제대로 보지 못하고 그가 하는 말에 고개만 끄덕이고 있는데, 전원우는 어딜 보는 거냐며 내 볼을 잡고 저와 시선을 맞추게 했다. 그에 당황해서 막 버둥거리니 전원우는 큭큭 웃으며 손을 놓아주었다.
"그래도 울고 나니까 좀 시원하지 않아?"
"…응."
"그런데 최유진이 너한테 뭐라 한 거 없었어? 뭐 자기한테 돌아올 거라느니, 그런."
아, 맞아. 최유진이 나한테 했던 말. 이거 물어봐야 되는데… 말해도 되는 건가. 조금 고민이 됐지만 나는 이내 다 말해버렸다. 전원우는 예전의 자신처럼 너를 가지고 놀고 있는 거다, 자기는 원래 너랑 잘 만나고 있었는데 나 때문에 다 망했다, 그러면서 자기한테 돌아올 거라는 말도 하고…. 그 말을 듣던 전원우는 한숨을 내쉬었다.
"예전의 자기처럼 가지고 논다는 건 내가 걔를 받아주지 않으니까 걔 딴에는 내가 자기를 가지고 논다고 생각을 한 거야. 그리고 너 때문에 망했다는 건 우리 방학 때 기억나지? 내가 너랑 같이 교무실 간다고 거짓말 했던 거. 그때 보고 그러는 걸 거야. 자기 말고 너를 좋아한다고 생각을 해서."
"아…."
"그리고 그 놈의 돌아온다는 말은 진짜… 입에 달고 다녔어. 나는 애초부터 걔한테 간 적이 없었는데."
참 얘도 답답했겠다. 최유진은 그렇게나 전원우가 좋았던 걸까. 애처롭다고 말하기도 뭇한 최유진이 이제는 안타까운 것 같기도 하고…. 최유진에 대한 조그마한 동정심이 드려는 찰나에, 전원우는 나지막이 '여주야.' 하며 내 이름을 불렀다. 응? 나의 시선과 그의 시선이 맞닿았을 때, 그는 말했다.
"예전부터 말하고 싶은 게 있었어."
"뭔데?"
"눈치채고 있었는진 모르겠지만…."
'사실 나 너 좋아해. 그것도 아주 많이.' … 그 말을 듣는 순간 모든 사고 회로가 정지된 듯 나는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다. 항상 생각만 해왔었다. 전원우가 혹시 나를 좋아하는 게 아닐까? 하고. 하지만 항상 생각으로만 그쳤었지 그저 헛된 망상일 뿐이라고, 현실은 나 혼자서 막연히 그를 좋아하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지금 뭐라고…. 너무나도 얼떨떨한 이 상황에 전원우의 얼굴만 보고 있자 전원우는 내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나랑 사귀자. 여주야."
…내가 여기서 정말 '그래' 라고 대답을 해도 되는 걸까. 나한테 너무 과분한 사람이 아닌가? 그리고 전원우랑 사귀어도… 김민규랑은 여전히 친하게 지낼 수 있을까. 여러 고민이 내 발목을 잡아왔지만 나는 이기적이게도, 고개를 끄덕였다. 내 대답에 전원우는 활짝 웃었다. 그리고선 말했다. 너무 고맙다고. 자기가 정말 잘하겠다고. 오히려 고마워할 사람은 난데…. 아직은 믿기지 않는 이 상황이 어색해 하하 웃고 있다가 점점 밀려오는 민망함에 얼른 화제를 돌려야겠다 싶어서 눈을 이리저리 굴리고 있을 때였다. 아까 세게 잡아서 그런지 한껏 구겨져 있는 왼팔 와이셔츠 소매를 보며 나는 물었다.
"그런데 원우야. 너 어디 아파?"
*
전원우와 헤어지고 나서 나는 바로 김민규한테 전화를 걸었다. 더 이상은 지체할 수가 없었다. 얼른 김민규랑 화해를 하고, 다시 예전처럼 지내고 싶었다. 이제는 방해하는 것들이 없었으니까. 우리가 학교에서 만나도 뭐라할 사람이 없었으니까. 김민규가 화를 풀지 않는다면 무릎을 꿇고 사과를 할 것이라는 각오까지 나는 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그 정도로 나는… 김민규와 장난치던 그 때로, 돌아가고 싶었다.
신호음은 꽤 오래 지속되었다. 독서실이라서 전화를 못 받는 건가…? 혹시라도 공부를 하고 있으면 내가 괜히 민폐가 아닌 걸까 싶어 문자로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전화를 끊으려고 하는데, 그 순간 상대편에서 '여보세요.' 하고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 민규야! 지금 어디야?"
-집.
"집? 아, 오늘 독서실 안 갔어?"
-어, 왜.
솔직하게 말하자면, 나는 너무 당황스러웠다. 화가 났을 거라고 예상을 하고, 마음을 단단히 먹고 전화를 한 거였지만 너무나도 차갑고 딱딱한 그의 목소리에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말은 해도, 목소리와는 다르게 손은 덜덜 떨려왔다. 지금 집으로 찾아가도 되냐는 내 말에 김민규는 또 '왜.' 하고 물어왔지만, 할 말이 있다고 하니 김민규는 알겠다면서 전화를 끊었다. 김민규랑 싸우고 나면 항상 걔가 먼저 사과를 했던 터라 이러한 모습의 김민규는 익숙지 않아서 나는 어떻게 해야 할지 도통 감이 잡히지 않았다. 김민규도 나한테 사과하기 전에는 늘 이랬었겠구나….
김민규네 집으로 걸어가면서 별의별 생각을 다했다. 좋게 끝나겠지 싶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이대로 영원히 남남이 되어버리는 건 아닐까, 내 말을 듣고 김민규는 이해를 해줄까 싶으면서도 이해를 하지 못할까, 하면서. 그의 집 현관 문 앞에 섰을 때, 나는 두려움이 밀려왔다. 김민규 얼굴을 어떻게 보지…. 기껏 집 앞까지 찾아왔는데 갑자기 엄습해온 두려움은 초인종을 누를까 말까 망설이게 했고, 그 앞에서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을 하고 있을 때, 내가 온 건 어떻게 알았는지 갑자기 문이 철컥- 하고 열렸다. 평소의 그와는 어울리지 않는, 차갑도록 굳은 얼굴로 나온 김민규는 문이 닫히는 소리가 난 후에야 입을 열었다.
"뭔데. 할 말 있으면 빨리 말해."
"…미안해, 민규야."
"뭐가?"
"요즘에 말없이 너 피한 거. 사실 내가 어떤 소문에 시달리고 있어서 너한테 다가갈 수가 없었어…."
"무슨 소문."
"…… 그게."
말해. 말해, 김여주. 오늘 다 밝히려고 찾아온 거였잖아. 그동안 비밀이라고 숨겨왔던 것에 대한 대가라고 생각하면 돼. 나는 차마 김민규의 얼굴을 쳐다볼 수가 없어 고개를 푹 숙이곤 말했다.
"최유진이 안 좋은 소문을 냈었어. 내가 너랑 원우 사이에서 양다리를 걸친다고. 그러면서 너랑 원우랑 만나지 말라고 뒤에서 협박같은 것도 하길래 나는 너를 만날 수가 없었어. 그런 소문따위 안 들어버리면 그만이었지만, 머리랑은 다르게 나는 너무 위축되고, 또 위축됐었어."
"……."
"최유진이 그런 소문을 낸 이유는 원우를 좋아해서였어. 내가 원우랑 같이 있는 게 싫었대. 그래서…."
"그럼 네가 전원우랑 같이 안 있었으면 됐잖아."
고개를 숙이길 잘한 것 같다.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 진 모르겠지만 내가 지금 그의 표정을 봤다면, 이야기를 하다가 피해버렸을 지도 모른다. 그치. 내가 전원우랑 같이 안 있었으면 됐지. 나도 잘 알고 있었어, 그런데….
"…그런데 있지, 민규야. 전에 네가 물었던 거 기억 나? 좋아하는 사람 생겼냐고."
"응."
"나 사실 원우 좋아해. 그때는 너무 부끄럽기도 했고, 또…."
"…좋아? 걔가?"
"…어?"
"대체 왜?!"
내 어깨를 붙들며 말하는 김민규에 깜짝 놀라 나도 모르게 고개를 들어버렸다. 고개를 들고 마주한 김민규의 얼굴은 뭐라 딱 정의를 내릴 수 없는 그런 얼굴이었다. 화가 난 건가 싶으면서도 왠지 슬퍼 보이는 그의 표정에 당황해서 왜 이래… 하고 떨어지려고 해도 김민규는 나를 더 세게 잡았으면 잡았지, 절대 놓지는 않았다.
"대체 그 자식이 어디가 그렇게 좋은 건데? 내가 말했잖아. 너무 믿지 말라고!"
방학에, 독서실에서 나와 편의점에서 컵라면을 먹고 있을 때 김민규가 내게 했었던 말이었다. '너무 믿지 말라고.' 나중에 이야기를 하겠다던 그는 저 힌트만 남겨둔 채, 이야기를 마쳤었다. 그런데 저게 전원우를 믿지 말라는 거였어…? 왜? 어째서?
"…무슨 말이야. 그럼 저번에 그 얘기가 원우 얘기였어?"
"그래. 그러니까 지금부터라도 걔랑 가까이 지내지 마!"
"내가 왜?"
"뭐?"
"내가 왜 걔랑 가까이 지내면 안되는데?"
"그건…!"
김민규는 무언가를 말하려는 듯 하다가 이내 제 입술을 꽈악 깨물었다. 왜 말을 못해. 뭘 믿지 말라는 건데. 내가 왜 전원우랑 가까이 지내면 안되는 건데? 말도 안해주면서 그렇게만 말을 하면… 나는 네 말을 들을 수가 없어. 나는 내 어깨를 잡고 있는 김민규의 손을 있는 힘껏 뿌리치며 말했다.
"나 원우랑 사귀어."
"……뭐?"
"원우랑 사귄다고, 오늘부터."
"김여주. 너 진짜 미쳤어?!"
"그러면 너도 안된다는 말 말고, 다른 얘기를 좀 해보던가!!!!"
내 말을 듣던 김민규는 허… 하고 실없는 웃음을 흘리더니, 조금은 애처로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냥 내 말 한 번 믿어주면 안 되냐…?"
그 말이 뭔가 가슴 깊이 찔렸지만, 더 이상은 말이 통하지 않을 거 같아 나는 이만 가 보겠다며 발걸음을 돌렸다. 원래는 이러려던 게 아니었다. 물론 좋지 않은 방향으로 이야기가 흘러 갈 수도 있겠다 예상은 했었지만, 그래도 나는 어떻게든 너랑 화해를 하러 온 거지 더 싸우려고 온 게 아니었단 말이야. 그리고 소문에 대한 오해가 풀리고 나서 제일 위로 받고 싶은 사람은 너였다고. 솔직하게 얘기를 하면, 못해도 전원우처럼 나를 다독여주진 않을까. 조금은 기대를 하고 온 거였는데 너는 왜… 전원우를 믿지 말라는 말밖에 하지 않는 거니.
나는 얘기할 만큼 했어. 밝힐 것도 다 밝혔고, 오늘 사귀게 된 것까지도 다 말했으니까 나는 이제 너한테 숨기는 게 없어. 더 이상 너한테… 죄책감을 가질 필요가 없단 말이야.
그런데 민규야. 너는 왜 말하지 않았어? 원래부터 최유진이랑 아는 사이였다는 걸, 전원우랑도 친한 사이였다는 걸. 그리고, 그리고….
'그런데 원우야. 너 어디 아파?'
'어?'
'아니, 아까 얘기하면서 계속 왼팔 잡고 있길래.'
'아… 별 거 아니야.'
'뭐야, 뭔데!'
'… 안 듣는 게 좋을 텐데.'
'아… 뭐야, 사람 궁금하게. 말해줘, 응?'
'……사실.'
나는 전원우의 팔에 자리한 길고도 흉측한 흉터를 떠올렸다. 한참을 머뭇거리다 단추를 풀고 소매를 걷어서 보여줬을 때 얼마나 놀랐던지. 팔이 부러져 수술을 받았었는데 시간이 지나도 흉터는 사라지지 않았다고 했다. 그 흉터는 마치 그 날의 잔상처럼 남아, 무슨 트라우마가 생긴 건지 그때의 일을 얘기하거나 기억하려고 하면 왼팔이 아파서 견딜 수가 없다고. 흉터도 흉터였지만 더욱 충격적인 것은 그거였다.
'이거 민규가 그런 거야.'
대체 누가 그런 거냐고 놀라서 물은 내 말에, 전원우는 저렇게 대답을 했었다. 그 말을 듣고 한동안 아무런 말을 할 수가 없었지만, 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너한테는 정말 미안한데, 나는 김민규를 믿는다고. 무슨 사정이 있었을 거라고.
'그냥 내 말 한 번 믿어주면 안 되냐…?'
민규야. 난 널 믿어. 사실 아까 다 말해버릴 수도 있었어. 전원우한테서 이야기를 듣고 왔다고. 왜 나한테 거짓말을 하면서까지 숨기고 있었냐고. 그런데 얘기를 하지 않은 이유는, 네 입으로 직접 듣고 싶었으니까. 네가 최유진을 아는 데도 모른다고 한 이유, 전원우를 믿지 말라고 한 이유, 전원우 팔을 그렇게 만든 이유, 그리고 이 모든 걸 내게 말해주지 않았던 이유. 너는 지금 내가 모른다고 생각을 하니까 말을 하지 않는 걸 거야. 나중에 너에게 물어본다면, 너는 빠짐없이 다 이야기를 해줄 거야. 그렇게 이해를 하면서 너를 믿어보려고 노력을 하고 있어. 그런데 있지, 민규야….
대체 나한테 그렇게까지 숨기는 이유가 뭐야?
[일공공사님/명호엔젤님/달봉님/여남님/아봉님/선뉴님/원우야밥먹자님/또렝님
/꽃소녀님/천상소님/최허그님/호시기마리치킨님/예고생님/뀨블님/민규사랑님/몽글몽글님]
참 파란만장한 하루입니다...^_ㅠ
암호닉 아니신 독자님들도 정말 사랑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