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같은 만남이 운명같은 만남이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한 것이 있다. 비현실성. 자연스럽고 익숙한 마주침들은 '우연' 으로 치부하고 웃어 넘기기 쉽지만, 비현실적인 요소들로 가득한 익숙하지 않은 마주침들은 쉽사리 잊혀지지 않는다. 그것들은 일상 속에 녹아들기는 커녕 항성처럼 우리의 주변을 맴돈다. 그리고 마침내 그 낯선 감각을 인지했을 때, 우리는 비로소 사실 여부와 관계 없이 그것을 '운명' 이었다, 고 믿게 되는 것이다.
오세훈과의 만남에는 분명 그런 비현실성이 있었다. 뭐랄까, 일단 그 '포장마차' 라는 공간부터가 그랬다. 빨간 지붕에 비닐로 대충 막을 둘러서 세운 그 포장마차는 여느 겨울 길거리에서나 볼 수 있을 법한 흔한 모양새였지만, 그 시간, 그 공간, 하필이면 두 남녀가 그 곳에 있었다는 사실이 그 공간을 특별하게 만들고 있었다. 두 번째 만남은 더더욱 그랬다. 한 번 보고 말 사이라 생각했던 남자가 자신의 직장에 떡하니 나타난다. 그리고는 자신이 맡고 있는 프로그램에 출연하게 될, 데뷔를 목전에 둔 연습생이라고 소개한다. 이쯤되면, 은근한 확신이 생길 법도 하다.
이거, 운명인가?
< < R E A L - X - D I A R Y > >
Episode 01. " A t t a c k " 2/2 cut
"자, 30분 뒤에 고수 부지 자전거 대여소 앞에서 집합입니다!"
PD 의 우렁찬 목소리를 시작으로 여섯 멤버가 뿔뿔이 흩어졌다. 아, 야 그거 내 옷이잖아! 형! 준면이 형! 내 모자 어딨어요! 모두가 바쁘게 집구석을 여기저기 들쑤시고 다니는 와중에도, ㅇㅇ는 작가로서 자신의 본분을 잊지 않기 위해 충실했다. 그 직업 정신을 십분 발휘한 ㅇㅇ는 백현과 찬열이 함께 사는 방 안으로 조심스레 진입했다. 한 손으로는 바쁘게 자막 제작을 위한 초안을 써나가고 있는 참이었다.
"누나, 이거 봐봐요! 후드 완전 귀엽죠!"
어느새 다가온 백현이 파스텔 톤의 후드를 뒤집어 쓰고 카메라 앞에서 깡총 깡총 뛰어댔다. ㅇㅇ는 백현의 후드 모자 위에 토끼 귀 같은 것이 달려 있는 것만 같았다. 아니. 그런데 그보다, 누나 아니라니까 그러네. 언젠가 꼭 말해야겠다. 옆에 있는 카메라를 흘긋 본 ㅇㅇ는 마음 속으로 그 말을 삼키고, 옆에 있던 찬열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카메라가 따라서 움직였다. 찬열 씨, 여기 봐요. 카메라. 맨투맨을 꿰어 입고 있던 찬열이 홱, 고개를 돌렸다.
"안녕하세요. 저희가 다들 방금 일어나서 굉장히 졸리네요...그런데 한강은 왜..."
동굴 같은 목소리에서 아직도 잠기운이 뚝 뚝 묻어 나왔다. 미안하지만 이건 아직 시작에 불과하답니다. 잽싸게 손바닥만한 노트를 찢어 [숙 소 안 내 !] 라고 휘갈겨 쓴 것을 들어 보여주자, 눈을 비비면서도 카메라를 향해 따라오라며 손짓하는 찬열이었다. 제가 숙소 투어시켜드릴게요...여러분이 처음이에요. 진짜.
"아까 저 방은 저랑 백현이가 같이 쓰고 있구요. 여기는 준면이 형, 아니, 그러니까 수호 형이랑 카이가 쓰고 있어요."
방 문을 열자마자 후끈한 열기가 뺨에 와 닿았다. 그리고 다음으로 보이는 것은 창문 앞에 서서 아침 댓바람부터 투닥대고 있는 종인과 준면.
"아, 형. 창문 좀 열자, 어? 여기 완전 찜질방이야 지금."
"밖에 날씨 쌀쌀하다고 몇 번 말하냐! 좀! 환절기에는 방심하는 순간 감기라고 감기."
아, 그냥 무시하세요. 저 둘 맨날 저래요. 쿨하게 둘을 지나친 찬열이 이내 서랍장을 하나씩 열어보기 시작했다. 어, 이건 뭐지? 하필 찬열이 열었던 것이 준면의 속옷 서랍이었던 것은 절대 방송용 공작이 아니었다. 순전한 우연이었을 뿐.
"와하학! 여기 준면이 형 핑크 팬티 있어요!"
그리고 그 서랍 안 가장 잘 보이는 곳에 준면이 아끼는 분홍색 팬티가 떡하니 놓여있었던 것도, 모두 기막힌 우연이었다. 우왁! 박찬열 너 뭐해! 창문 앞에 서서 열을 내던 준면이 후닥닥 뛰어와서는 찬열에게 헤드락을 걸었다. 하지만 찬열은 핑팬! 핑팬! 준면이는 무슨, 분면이다 분면이! 하며 나불대는 입을 나물지 않았고, 틈새공략을 적절히 한 종인은 그새 방의 창문을 활짝 열었다. ㅇㅇ는 그 모습이 모두 카메라에 잘 담긴 것을 확인하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1화 시청률은 이걸로 보장이요.
"아, 콜록. 콜록. 여기는 경수랑 세훈이, 콜록, 가 사는 방이에요."
분면, 아니 준면에게 한참 동안 목을 졸린 찬열이 기침을 하다가, 웃다가 하면서 도착한 곳은 경수와 세훈의 방이었다. 나무로 된 그 문 앞에 선 ㅇㅇ는 마치 금기의 영역에 발을 들여놓는 아담과 같은 마음이었다. 젠장. 문을 열고 들어갔을 때 보일 침대는 자신이 술에 취했던 다음 날 아침, 눈을 떴을 그 침대일 터. ㅇㅇ는 잠시 그 날 아침의 기억을 되살려 보았다. 아무래도 뭔가 이상했다, 이 상황은. 그러니까, 우연이라기엔 너무... 과했다. 찜찜한 기억을 겨우 의식의 경계 밖으로 밀어낸 ㅇㅇ가 찬열을 따라 방문 안으로 들어섰다. 거울 앞에서 머리를 정리하던 경수와 그 옆 침대 맡에 걸터 앉아 있던 세훈이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아. 숙소 투어 중이에요. 세훈 씨, 한 마디 해주세요."
"안녕하세요. 세훈입니다."
"아 뭐야. 재미 없게. 이 쪽은 경수가 굉장히 아끼는 앨범들이구요. 여기는 옷장."
뚝뚝한 대답에 찬열이 꿍얼대며 옷장 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옷장 문을 열어선 찬열이 갑자기 카메라 쪽으로 가까이 얼굴을 가져다 댔다.
"제가 비밀 하나 알려드릴까요?"
"...(대답 없는 카메라)"
"경수랑 세훈이가 기럭지 차이가 확실해서, 대강 봐도 누구껀지 알 수 있어요. 와하하!"
국보급 기밀이라도 말해줄 것처럼 비밀스럽게 다가온 찬열은 그 동굴 목소리로 아주 커다랗게 (옷장 밖에 전부 들릴 만큼) 속삭였다. 곧 이어 들어온 경수에 의해 자행된 또 한 번의 진압. 아, 왜 나만 가지고 그래애! 찬열의 억울한 외침이 숙소에 공허하게 울려퍼졌다.
[오전 08:30. 한강 고수 부지 자전거 대여소 앞.]
"와, 안녕하세요! 저희가 이렇게...이른 아침부터! 한강에 나온 이유가 궁금하실 것 같아요! 왜죠, 찬열 씨?"
"네! 오늘이 바로 저희의 첫 리얼리티, 리얼 엑스 다이어리 첫 촬영인데요! 그 첫 번째 미션을 수행하기 위해서 여기 나왔습니다!"
각 멤버와 프로그램에 대한 간략한 소개가 끝나고, 본격적인 미션이 시작되었다. 첫 번째 미션은 '릴레이 자전거 레이스'였다. 팀은 도착한 순서대로 종인, 경수, 세훈. 그리고 찬열, 백현, 준면으로 나누어졌다. 아! 늙은이랑 같은 팀이야! 찬열의 스스로 매를 버는 외침과 동시에, 본격적인 촬영이 시작되었다. 카메라가 돌아가기 시작하고, 멤버들이 몸을 풀고, 스탭들이 바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카오스 속에서도 불변의 법칙은 예외 없이 적용되는 법.
"어, 자전거 페달이 좀 이상한데?"
"그러게요. 이거 왜 안 돌아가지."
"막내야! 자전거 두 대만 좀 끌고 와라!"
그래. 제일 적게 산 내 죄지. 속으로 욕을 씨부린 ㅇㅇ가 허겁지겁 대여소로 다시 향했다. 자전거를 빌리는 데에는 그럭저럭 문제가 없었지만, 그것을 다시 촬영 장소로 끌고 가는 일은 꽤나 벅찼다. 그대로 전달되는 자전거 두 대의 무게가 꼭 '막내작가' 라는 이름이 가진 무게마냥 무거웠다. 양 손에 자기 몸뚱이만한 자전거를 하나씩 끌고 걸어가는 ㅇㅇ의 걸음이 조금 위태하다 싶을 무렵, 한 쪽 손이 가벼워지며 균형이 무너졌다. 어어? 오른 손으로 질질 끌고 가던 자전거가 어느새 세훈의 손으로 훌쩍 옮겨가 있었다. 안 오길래. 자전거에 훌쩍 올라 탄 세훈이 시원시원하게 페달을 밟으며 순식간에 멀어졌다. 하지만 세훈은 아무리 페달을 밟아도 감감무소식인 뒷편에 이내 자전거를 세우고 뒤를 돌아봤다.
"뭐야. 너 자전거 못 타요?"
이상하게 존댓말과 반말이 섞인 질문에, ㅇㅇ는 기분이 나빠야 하는 건지, 아닌지, 묘한 기분이 되었다. 대답을 존댓말로 해야 할까, 반말로 해야 할까 망설이고 있는 찰나였다. 자전거에서 내린 세훈이 이내 그것을 끌고 옆으로 걸어온 것은.
"그동안 자전거도 안 배우고 뭐했나 몰라."
"...보조바퀴 달린 건 탈 수 있거든?"
투박한 소리를 내며 굴러가는 두 대의 자전거 아래로 옅은 바퀴 자국이 남았다. 조금 전 양손 가득 무겁게 들어차 있던 무게가 조금은 가벼워진 탓에 ㅇㅇ는 한결 편하게 숨을 내쉬었다.
"저기. 야, 근데...내가 누나야."
"근데요?"
"그러니까, 어...너, 왜...슬쩍 말 놓냐구."
"생명의 은인한테 지금 그게 할 소린가?"
"아니, 그러니까! 너가 싫다는 게 아니고, 약간의...애로 사항 같은 거랄까?"
불만 신고 접수됐으니까 앞이나 똑바로 보고 걸어요. 어어. 세훈의 말에 때 맞추어 ㅇㅇ의 발 아래 돌부리 하나가 나타난 것은 우연이라 치기에는 조금 드라마 같은 구석이 있었다.
배틀 종목인 자전거 레이스는 엇비슷하게 진행되었다. 그 승패가 갈린 것은 마지막, 준면과 종인의 차례에서였다. 엎치락 뒤치락 하는 듯 싶더니 이내 앞서나가기 시작하는 종인의 자전거에 승자와 패자 간에 극명한 희비가 갈렸다. 으어어! 준면이 형을 마지막으로 내보내면 안 됐어! 찬열과 백현의 포효가 한강의 쌀쌀한 아침 공기를 갈랐다.
"진 팀의 벌칙은 한강 입수입니다!"
선언처럼 내려진 PD의 말에 패자 셋의 얼굴이 마치 사망 선고라도 받은 냥 굳어졌다.
"한강 입수요!?"
"말도 안 돼! 이 날씨에?"
"아침부터 이게 뭐야..어헝..늙은이 때문에.."
찡찡대던 백현과, 다크서클이 턱 밑까지 내려올 것 같다며 턱 언저리를 문지르던 찬열, 그리고 마지막으로 해탈한 듯 평온한 미소를 띠고 있던 준면까지. 결국 한 바탕 난리를 치르고서야 무사히 반포대교 근처에 구명조끼를 입고 선 셋이었다. 남의 불행은 나의 행복이요. 그들을 무사히 연행한 기쁨에 뿌듯하게 웃고 있던 나머지 멤버들이 쑥덕대는가 싶더니, 이내 풍덩! 아주 발랄한 음향효과와 함께 사방으로 물이 튀었다.
"우와아악!"
"아침부터 냉수 마찰한 기분이 어때요!"
"아. 헐. 아. 진짜. 대박!"
"드으럽게 춥다!"
춥다며 필사적으로 육시 상륙을 노리던 백현의 안간힘은 번번이 멤버들에 의해 저지되었다. 인천 상륙 작전 당시 맥아더 장군이 이런 심정이었을까. 백현은 올라가기만 해봐라, 내 당장 저 사악한 전우들의 목을 따버리겠어, 하고 속으로 이를 갈았다. 아, 좀 올라가자고! 하지만 어떤 상황이든 남의 고통은 나의 행복이요, 더군다나 그것이 정정 당당하게 쟁취한 승리의 결과라면 마음에 걸릴 하등의 여지가 없었다. 공감의 시대? 옘병. 개나 주라지. 나머지 멤버들과 스탭들에게 한강 물에 동동 떠 있는 세 명의 동그란 머리통은 그저 배꼽 빠질 만큼 웃긴 광경이었을 뿐이었다. 자신도 모르게 터져나온 웃음에 푸흐흐, 웃던 ㅇㅇ의 눈이 물 맡에서 백현과 실랑이를 벌이다 눈을 접으며 웃는 세훈의 옆 모습에서 멈추었다. 그리고 천천히 돌아가는 고개. 옆 얼굴에 콕 박혀있던 시선이 어느새 세훈의 눈을 그대로 마주보고 있었다. ㅇㅇ는 문득 자신이 귀향오기 전 열심히 대본을 썼던 드라마의 한 장면을 떠올렸다. 남자 주인공과 여자 주인공이 딱 세 번째로 만났을 때, 복잡한 군중 속에서 우연히 눈이 마주치던 로맨틱한 장면이었으나, ㅇㅇ는 그 장면의 대본을 쓰며 시나리오가 진부하기 그지 없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지금, 편집실에서 본 완성된 장면이 자신의 앞에 펼쳐진 현실과 묘하게 겹쳐 보였다.
이거, 운명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