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련범벅 짝사랑 민윤기를 다시 만난다면-6
w. 쮼
윤기와 손을 꼭 잡고 집 앞까지 다다라서 겨우 헤어졌다. 모든 연인들이 그러듯이 먼저 가는 모습을 서로 보겠다며 웃음 섞인 실랑이를 하다 결국 내가 먼저 들어가는 결말로 끝이 났다. 집에 들어와 씻고 침대에 누워 핸드폰을 바라보니 '집에 잘 들어갔어?' 라는 카톡이 도착해 있었다. 내 집 앞에서 헤어져 놓고 집에 잘 들어 갔냐니, 윤기의 귀여운 걱정에 '응, 윤기는?' 이라는 답장을 보내곤 이불을 덮었다.
눈을 감고 잠을 청하려는데, 눈을 감아 깜깜한 배경에 아까 윤기가 내게 고백한 장면들이 그려졌다.
손을 잡으며 걷던 장면까지 생각이 나면, 내 손에서 괜히 윤기 손 감촉이 느껴지는 기분이었다. 부드럽고 단단한 너의 손, 하얗고 가느다란 윤기 손. 너의 손을 잡았던 그 때 무언가 따뜻하고 꽉 찬 느낌과 달리 지금은 꽤 헛헛한 내 손의 공허함이 너를 만나면 또 손을 잡고 싶다는 생각까지 들게 했다. 그러다가 다시 벤치에서 네가 내 이마에 입맞춤을 하던 장면이 떠오르면 이마에 열기가 돋았고 그 열기는 얼굴 전체에 퍼져 더워졌다. 내 이마에 말랑하고 촉촉한 감촉이 아직까지 생생하게 재생되는 것 같았다.
"아!! 민윤기 진짜 여우야!!"
이불을 발로 차며 '민윤기는 여우야!'를 외치자 옆 방에 있던 동생이 방문을 쿵 차며 제발 조용히 하고 자 제발 이라고 으름장을 놨다. 나도 민망해져 목을 가다듬고 조용히 했다.
'민윤기.. 너무 좋아서 어떡하지'
하지만 마음 속은 윤기 생각으로 시끄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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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데리러 갈게, 너 수업 끝나면 전화해]
윤기 생각에 밤잠을 설치다가 늦은 새벽에 잠들었던 나는, 1교시 수업을 하마터면 지각할뻔했다. 일어나자마자 씻지도 못한 채 모자를 눌러 쓰고 학교로 달려나갔다.
윤기의 문자엔 급해서 알겠다는 답장만 했다. 그 당시엔 이런 몰골로 너와 만나야 한다는 걸 자각하지 못하고 알겠다 답장을 했던 게 문제인지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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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옥 같은 3연강을 끝내고는 과실에 있다는 석진선배를 보러 갔다. 배가 고팠기 때문에 같이 밥을 먹을 생각이었다.
"여주 오늘 늦게 일어났니?"
"네, 보다시피... 근데 선배는 오늘 어디 가세요? 웬 정장?"
"아, 나 오늘 인턴 면접 있어."
아 선배도 내년에 졸업하지, 선배의 말에 놀라 언제 보냐고 묻자, 교수님 추천이라 저녁에 면접을 본다고 했다. 역시 선배는 성적도 좋고 성격도 좋으니까 저런 것도 금방 하시네. 나는 아직도 자리를 못 잡았는데. 괜히 편입한 학교에 적응만 하고 무언갈 아직 이뤄내지 못한 내가 스스로 초라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런 생각도 잠깐이었고 질투를 느낄 대상이 석진선배라 금세 아무렇지 않아졌다.
저 선배는 뭐, 그럴 자격이 충분하고도 넘치는 편이지.
"아, 그리고 여주야. 나 오늘 밥 사주는 거 맞지?"
한쪽 눈을 윙크를 하며 물어오는 선배에게 나는 고개를 저었다.
저 능청스러움도 자격 중 하나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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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맛있는 걸 사주겠다고 했지만 후배에게 돈 뺏는 거 아니라며 학생 식당으로 향했다. 우리 학교 학식은 오천원에 매일 다른 메뉴가 한 달을 주기로 돌아가며 나오는 시스템이었다. 하지만 메뉴가 매일 다른 만큼 매일 맛도 달랐다. 맛있을 땐 맛있고 맛없을 땐 맛없고.. 주문을 마치고 대충 아무 자리에 앉아 밥을 먹기 시작했다. 밥에 집중하느라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선배와 밥을 먹는데, 윤기에게 전화가 왔다.
화면에 찍힌 '윤기♥' 를 보는데 (어제 새벽에 민윤기에서 윤기♥로 바꿨다) 아침에 윤기의 수업 끝나면 전화하라는 문자가 생각났다. 정신 없이 수업 듣느라 그만 너의 문자를 까먹은 것이었다.
완전 까먹어서 윤기가 전화를 하게했다는 사실에 나도 모르게 놀라 먹던 숟가락을 멈추곤 전화가 오는 화면을 바라보고만 있자 선배가 '윤기♥' 라고 적힌 내 핸드폰을 들어 전화를 받았다.
"아니 선배, 뭐해요!!"
아무 말도 않고는, 내 핸드폰을 내게 내밀었다. '받을 거면 빨리 받아라, 어제 연애 시작한 거 다 티 내네.' 라는 말도 빼놓지 않았다.
"어, 윤기야 왜?"
"아니 너 수업 끝날 시간인데 연락이 없어서, 뭐해?"
"아 선배랑 밥 먹구 있었어. 미안, 내가 오늘 아침에 늦게 일어나서 급하게 나오느라 네 문자 까먹었다.."
"아.. 선배면 그 석진선배..?
다정하던 목소리가 선배라는 단어에 조금은 딱딱해졌다. 아무래도 선배의 그 질투 작전 때문에 오해가 단단히 쌓인 듯 했다. 이걸 풀긴 해야 하는데.. 어제는 분위기에 휩쓸려 선배와 어울리지 않겠다고 말했지만, 그 깐깐하다는 필수 교양의 조별과제 같은 조였고, 내년에 4학년이라 계절 학기를 듣는 동기는 적었기에 사실상 지금 친구는 선배 뿐이었다. 하지만 지금 너에게 전화도 하지 않고 어제 거리를 두겠다던 선배와 밥을 먹고 있으니, 네가 화가 날 만도 했다.
"아, 응 근데 윤기야 진짜 그런 거 아닌 거 알지..? 선배랑 교양 같은 조라서 같이 있는 거야!"
내 말에 알겠다며, 일단은 나를 데리러 오겠다고 했다. 조금은 굳은 말투였지만, 너의 말에 웃으며 답했고, 그럼 밥 먹으라는 너의 말에 통화를 마쳤다.
"하트가 붙여진 걸로 봐선 역시 내 작전이 통할 줄 알았어, 그 친구 어? 멋지더라 야, 눈에서 레이저가 나오는데 나 오늘 면접 보기도 전에 죽는 줄 알았잖어"
능청스럽게 축하한다는 말을 건네는 선배에게 고맙긴 했지만, 아까 통화의 딱딱한 말투가 신경 쓰였다. 아무래도 오해는 풀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 민윤기가 질투쟁이라는 걸 누가 알았겠어..
"선배 근데.. 오해는 좀 풀고 가야 할 것 같아요.. 윤기가 생각보다 질투가 많네요..?"
"그래, 이 잘생긴 용모를 봤으니, 불안 할만 하지"
"아..예.. 하하.. 제 눈엔 윤기가 더 잘생겼거든요?"
"어련하시겠어"
"그래서 오늘 윤기한테 오해 좀 풀어주실 거죠..? 커피도 쏠게요"
"그래. 나도 굳이 네 남친이랑 적 두고 싶지 않다."
"윤기도 선배 제대로 알면 좋아할 거에요, 질투는 많아도 마음은 태평양 이거든요."
"에휴.. 말이나 못하면, 밥이나 먹자."
"네."
선배에게 정말 의미 없는 윤기 자랑을 하곤, 다시 밥을 먹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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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배와 카페에서 윤기를 기다리는데, 이번에도 생각보다 빨리 온 윤기였다. 역시 카페에 들어온 윤기가 석진선배를 보자마자 얼굴을 굳혔다.
"어, 윤기씨 왔나?"
"아, 네."
누가 봐도 표정이 좋지 않은 윤기에게 얼른 자리에 앉으라며 내 옆 의자를 팡팡 쳤고, 윤기는 그런 내 행동을 보고 조금은 표정을 풀곤 자리에 앉았다. 대신, 날카로운 소리는 빼고.
"근데 할 일 없으시나 봐요? 볼 때 마다 여주랑 있는 것 같으신데" 정말 싫다는 듯이 비꼬듯 묻는 윤기에 나는 안절부절 못했다. 벌써 이렇게 싸우면 안되는데...
"뭐, 한가하긴 하죠. 아 그리고 어제 일은 내가 사과할게요, 저 여주 안 좋아하고, 그런 거 전혀 없으니까 경계 하지 마요. 어제는 그냥 정말 장난이었어요."
"아..뭐, 장난도 재밌어야 장난이죠."
말에 뼈가 있는 윤기였다. 하지만 석진선배는 능글과 능청의 대명사였기 때문에 그런 건 신경 쓰지 않는 듯 보였다.
"흠,, 그럼 어떻게 해야 윤기씨가 화가 풀리시려나? 저 진짜 여주 여자로 안 봐요. 제 사촌 동생이 여주랑 나이가 비슷해서, 그냥 챙겨 준 게 다에요."
"네. 뭐.."
"아, 그리고 번호 교환 안되나?"
윤기의 표정은 제가 왜요? 라는 표정이었지만, 석진선배는 특유의 눈웃음으로 다시 부탁했다.
"아끼는 동생 한 명 더 만들고 싶어서?"
석진의 호의에 윤기도 더 이상 거절할 방도가 없었다. 그리고 사실 생각해보면 나중에 여주와 연락 안 될 때 연락할 연락망이 생기는 것이었으니, 꽤 괜찮은 제안이기도 했다. 그래서 결국 윤기는 석진이 건넨 핸드폰을 잡고 번호를 눌렀다. 물론 자신에게도 전화를 거는 것도 잊지 않았다.
나는 아무 말도 못하고 둘의 번호 교환 장면을 보는데, 조금 기분이 이상했다. 아니 잠시만 왜 선배가 윤기 번호 따가는 게 기분이 이상하지. 둘이 친해지길 바랬는데 분명 선배의 저 말도 능청스럽게 친해지려 하는 특유의 말투가 맞는데도 불구하고 마치 다른 모르는 사람이 윤기의 번호를 따간 현장이라도 본 것 마냥 내가 괜히 질투가 났다. 아무래도 윤기의 질투심보다 큰 건 내 질투심이 아닐까..
윤기와 번호를 교환하고는 자신도 눈치가 있다며 간다는 선배에게 인사를 했고, 윤기도 대충 목례로 인사했다.
선배가 나가고도 윤기는 굳은 표정을 유지하고 있었다. 어제의 약속과 달리 내가 선배와 있어서 화가 난 것일까, 선배가 나 안 좋아한다는 말을 했음에도 너의 표정은 좀처럼 풀릴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아, 이래서 사람들이 사람 마음 가지고 떠보면 안된다고 하는 거구나.. 당연한 진리를 몸소 체험하고 나서야 깨달은 나였다.
"윤기야아.. 화 났어? 나는..그냥 오해 풀고 싶어서"
"아니, 화 안 났어."
화가 안 났다는 윤기의 말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딱딱한 말투였기에 내가 계속 되지도 않는 애교를 섞어가며 윤기 이름을 불러 대자 결국 윤기가 고개를 숙이며 참았던 웃음을 터트렸다.
" 여주야 나 진짜 화 안 났어. 그냥 처음에 정장 입고 너랑 있는데, 괜히 멋진 모습으로 니한테 접근 하는 건 아닌가 생각도 들고, 그리고 하필 또 너 지금 그런 무방비한 모습 나한텐 안 보여줬던 모습이잖아. 그걸 저 사람이 봤다고 생각 드니까, 괜히 심술이 나더라. 그래도 나는 네 말 믿어. 그 분도 나한테 얘기 해줬고, 그래서 진짜 잠깐 질투했을 뿐이야."
아 맞다, 나 지금 머리를 안 감아서 대충 모자를 눌러 쓰고 옅은 색이 있는 립밤만 바른 상태였지 참... 윤기가 무방비한 내 모습을 언급하자 갑자기 내 몰골이 생각나 고개를 살짝 숙였다. 그러자 이번엔 윤기가 부끄럽냐며 고개를 숙여 내 얼굴을 보려고 했다.
"너 때문에 부끄러운 것도 맞고, 생얼도 지금은 좀 보여주기 싫어.."
"왜, 예쁘기만 하구만 뭘,"
"아 진짜 연애 첫 날 부터 이게 뭐야... 예쁘게 입고 데이트 하는 걸 바랬는데"
"왜? 여주 그럼 듣는 나 속상해. 너 보려고 여기까지 왔잖아."
"응..근데 어제 내가 잠을 못 자서 늦게 일어나는 바람에 아침에 정신이 없었거든..그래서 준비도 못했는데 너한테 만나자고 한 게 스스로 속상한 거야.."
내가 괜히 칭얼거리며 얘기하자, 윤기가 속상해하지 말라며 고개를 숙인 내 모자를 토닥였다. 그리곤 또 입을 열어 왜 잠을 못 잤냐고 걱정이 가득 담긴 말투로 물었다. 그거 다 윤기 너 때문인데..
"너 때문에.."
"응?"
"민윤기 너 때문에 설레서 못 잤잖아.. 책임져."
밑도 끝도 없이 책임지라는 내 말에 네가 당혹스런 표정을 짓다가 이내 허- 하곤 허탈하게 웃었다. 여주야 내가 너를 어떡하면 좋을까 진짜.. 라는 말도 덧붙인 윤기가 내 손을 잡아왔다. 얼음이 잔뜩 들어간 커피 잔을 만지작 거리던 손이었는데, 너의 손은 따뜻했다. 윤기의 목소리도 그리고 나를 바라보는 눈빛도. 윤기의 모든 게 따뜻해서 지금이 겨울이라는 걸 잊어버릴 정도였다.
"근데 나도. 나도 여주 너 때문에 잠 못 잤는데, 그럼 서로 쌤쌤인가?"
윤기가 따스하게 웃으며 말하는데, 새삼스레 또 네가 예쁘다는 생각이 들어 얼굴이 또 달아올랐다.
참 좋아한다는 감정은 이상하다. 남들 앞에선 별 것도 아닌 게 윤기 네 앞에만 서면 이리도 부끄러워 지다니. 연애를 하면서 또 다른 내 모습을 많이 보게 되는 것 같아 기분이 이상하면서도 설레었다. 이래서 다들 사랑 사랑 하는 거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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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애 초기의 아쉬움이라고 한다면, 헤어짐이다. 이별이 아니라, 집 앞에서의 헤어짐.
내 집 앞에 도착해 헤어지려는 윤기를 붙잡고는, 이번엔 내가 너를 데려다 주겠다고 우겨보았다. 계속해서 안된다며 밤이 늦었으니 들어가라는 윤기가 미워지기 시작했다. 마치 나만 윤기를 더 오래보고 싶어하는 사람이 된 기분이었다. 오늘이 그래도 나름 첫 데이트였는데, 윤기는 아쉽지도 않나.
"윤기야, 난 너 오래 보고 싶어서 그런 거잖아.. 응?"
내 어린 칭얼거림을 듣던 윤기가 그럼 그냥 또 동네를 걷자고 제안했다. 윤기가 꽤 단호하게 거절했기 때문에 나도 어쩔 수 없이 윤기의 제안을 따랐다. 윤기에게 나를 더 오래보고 싶지 않은 거냐며 투닥거리면서 걷는데, 옆에서 윤기의 손이 계속 스쳐지는 게 느껴졌다. 아까 카페에서는 잘만 잡던 손인데, 괜히 또 신경이 손으로 몰리는 게 기분이 이상했다. 분명 내 입은 계속해서 재잘거리느라 바쁜데, 머리는 손을 잡을까 말까에 대한 싸움으로 바빴다. 결국 말을 멈추고 윤기의 손을 덥석 잡았다. 내가 윤기 손을 먼저 잡은 건 처음이라 윤기도 놀란 것 같았지만 옅은 미소를 보이며 다시 내 손에 깍지를 꼈다. 따뜻한 윤기 손과 내 손의 온도가 차가운 겨울 밤 공기와 섞였지만, 우리 둘의 손은 더 뜨거워졌다.
손을 잡고 너와 어제의 일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다가 문득 고백할 때 네가 해야 할 말이 많았다는 게 생각이 났다. 해야 할 말? 그게 뭐지? 정말 갑자기 생각나더니 정말 갑자기 궁금해져서 윤기를 불러 물었다.
"근데 윤기야, 네가 나한테 해야 할 말들이 많다고 생각해서 고백을 못하고 있었다 했잖아, 그게 뭐야?"
"아, 음.. 근데 그건 이야기가 너무 긴데, 궁금해?"
궁금하다는 나의 말에 윤기가 어제 앉았던, 그 이마 키스의 벤치로 데려가 앉았다. 물론, 이번에도 손을 계속 잡고 있었다.
"너, 유수아 알지?"
유수아..? 윤기의 말에 익숙한 그 이름이 나와 놀라서 윤기를 바라보았다. 2년 전이나 지금이나 네 입에서 다른 여자 이름이 나오는 건 아직 익숙하지 않았다.
"그리고 너 나한테 새벽에 술 취해서 전화 했던 거 기억나?"
술 취해서 전화했던 날이라면... 내가 술에 취해 너에게 전화를 했지만, 무슨 통화를 했는지 기억이 안 나는 그 날을 말하는 듯 했다.
"그 날 너가 나한테 다짜고짜 유수아라는 애를 아냐고 물어보는 거야, 그 때 처음 알았어, 너가 나 좋아하는 거."
윤기가 다 알고 있었다고..? 조금은 당황스러운 전개에 눈을 굴렸다. 아니, 그런데 왜 이걸 이제서야? 그 때 말하지 않고? 그럼 윤기는 그 때 날 좋아한 게 맞는 거야 아닌 거야? 머리 속에 수많은 물음표가 떴으나, 윤기도 내 표정을 읽었는지 일단 들어보라며 깍지 낀 손을 쓰다듬었다.
"원래 내가 너 좋아하고 있었는데, 너는 그것도 모르고 말이야, 어디서 이상한 소리를 듣고 와 가지고 술에 취해서 '윤기야아.. 걔 좋아해애..?' 이러는데 진짜, 아주 내가 너를,"
웃으면서 내 말투까지 따라하며 나를 놀리다가 그 때의 내가 조금 미운 짓을 했는지 나를 살짝 째려보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
"하여튼, 걔는 교양 과목에서 조별 과제 하다가 친해졌고, 그 조 네 명이서 모두 친해졌는데, 그 안에서 그 유수아라는 여자애랑 준우라는 선배랑 썸을 탔어. 그거 연인으로 이어준 게 어찌 보면 나고, 근데 그 안에서 일어난 일을 너가 오해해서 마치 내가 널 어장에 가둔 것 마냥 굴었잖아."
"잠시만, 근데 윤기야 어떻게 새벽에 술 취한 애 데려다 주고 같이 야밤에 술 마시는 게 도와주는 거야..?"
"봐봐, 내 이럴 줄 알았어. 너 기억 못하지. 내가 그 때 그거 다 해명했거든? 술 취한 애 데려다 준건, 썸탈 때 준우 형이 사정이 생겨서 학생회 일로 밤새던 나한테 잠깐만 부탁한다고 전화해서 간 거였고, 내가 걔랑 있다가 얼마 안 지나서 준우 형이 다시 데리러 왔고"
"그 다음에 술 마신 건, 둘이 이어져서 고맙다고 술 사준다고 해서 나간 거고, 사진은 준우 형이 오기 전에 찍은 거고! 이제 됐지? 그 때 너가 취해서 전화 했을 땐 연락도 안 하는 사이였어."
"저번에 동기들이랑 술마셔서 너 취했을 때, 네가 다정하게 굴지 말라고 한 게 마음에 걸려서, 혹시 아직도 이걸 계속 신경 쓸까 봐 얘기하고 고백하려고 했는데, 어쩌다 보니 이렇게 됐네."
항상 내가 다가가지 못했던 이유에 그 '유수아'라는 이름이 있었는데, 윤기에게 이렇게 다 듣고 나니 내가 정말 바보 같은 짓을 했구나 라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정말 지선이의 말처럼 썸을 탈 때 다른 여자와 같이 있는 걸 참견할 일이 아니었나 보다. 다른 이들 같았으면 오히려 누구냐고 물으며 마음을 표현한다고 하던데, 나는 그럴 용기가 없어서 숨기 바빴으니, 이제서야 윤기가 이해 될 것 같았다.
하지만 왜 윤기는 다 알고도 내게 고백을 하지 않았을까, 내가 전화를 다시 걸었을 때 받지 않았던 건 윤기였다.
"그럼 왜 그 때 좋아한다고 말 안 했어? 내가 너 좋아하는 거 알았다며. 너도 나 좋아하고"
"군대 영장이 나와서... 그래서 일단 갔다 와서 천천히 다시 시작 할 생각이었지, 그 때 학교에서 우리 둘 얘기가 자꾸 나오기도 했고.. 그리고 난 네가 편입 생각 하고 있던 건 꿈에도 몰랐으니까."
어쩌면 2년 전에 좋아했던 윤기에 대해 나는 아는 게 없었을 지도 모르겠다. 윤기를 알면 알 수록 참 신기했다. 날 원래 좋아하고 있었다는 사실도 그리고 그게 2년 동안 이어져 결국 지금에서야 사귀고 있다는 사실도. 내가 학교를 바꾸고 나서야 이런 오해들이 풀렸다는 사실이 조금은 어이가 없었다. 그 때 왜 나는 그렇게 겁을 먹었던 것일까? 서로에게 확신이 없는 사랑이 이래서 무서운 것인가 보다. 모아니면 도니까.
"그래도 윤기랑 이렇게 다시 만날 수 있어서 참 다행이다."
내 말에 또 다시 따뜻하게 웃어 보이며 그러게, 라고 답했다. 괜히 윤기도 나와 그 동안 계속 같은 마음이었을 거란 사실은 기분을 좋게 만들었다. 그 동안 윤기의 마음을 추측하느라 혼란의 파도에서 헤엄쳤던 나날들도 지금은 설렘으로 다가왔다. 그렇게 잠시 너와 나의 추억을 곱씹어 보다 궁금한 점이 생겼다. 윤기는 날 그럼 언제부터 좋아했을까? 유치한 질문이지만 궁금했고, 나는 그걸 숨기지 않았다.
"그럼 윤기는 나 언제부터 좋아한 거야?"
"음..글쎄, 어느 순간 보니까 내가 너를 좋아하고 있더라."
원하던 구체적인 답은 아니었지만, 그것 마저 좋았다. 그래, 누가 먼저 좋아했는지 뭐가 중요해. 지금 이 순간 서로가 좋아하고 있고, 그걸 확인했다는 사실이 중요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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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벤치에서 일어나 다시 집으로 향했다. 윤기와 헤어지는 건 싫었지만, 윤기가 지하철을 탈 수 있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 윤기와 손을 잡고 걷는 이 순간이 너무 좋고 아쉬워서 그리고 아까 윤기의 진심도 너무 좋아서 시간을 멈출 수만 있다면, 너와 나만 두고 시간을 멈추고 싶었다. 하지만 시간의 흐름은 어쩔 수가 없는 것, 결국 집에 도착한 윤기가 추우니 얼른 들어가라며 나를 배웅했다. 깜깜한 밤 아파트 현관 불 등만 반짝이는데, 안 들어 가고 너를 바라 보고 있으니 마치 2년 전 너가 날 기숙사 앞 계단까지 데려다 준 것이 생각 났다. 그 때 윤기가 눈을 봐 달라며 나를 멈춰 세웠는데, 그 당시 너의 행동이 나를 설레게 했다는 걸 너는 알까? 과거의 일이 떠올라 내가 너의 눈을 아무 말 없이 쳐다 보았지만, 윤기도 그런 내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윤기도 그 당시 나를 좋아했다니, 윤기의 눈을 바라보는데 참 많은 감정들이 몰려왔다. 너를 바라보려면 고개를 들어 바라봐야 했으나, 목이 아프거나 하지 않았다. 그 아픔까지 좋았을지도. 윤기의 눈, 코, 입... 그 때 너의 눈을 바라보다가 입술에 신경이 쏠렸던 것 처럼, 이번에도 내 신경이 너의 입술로 갔다. 늘 등불은 너의 입술을 반짝이게 했다. 그 순간 알 수 없는 충동에 휩쓸려, 너에게 입을 맞추려 까치발을 들고 얼굴을 들이밀었다.
"아!.."
하지만 내가 캡모자를 쓰고 있다는 걸 까먹은 나머지, 내 입술이 네 입술에 닿기도 전에 모자의 챙이 윤기의 코에 부딪혔고, 너가 아파서 아! 하는 소리와 함께 코를 매만졌다.
"억, 어 윤기야 미안..! 많이 아파? 아니 그냥 나는 그.."
내가 욕심을 부려 너에게 뽀뽀를 시도 하다가 그만 너에게 화를 입힌 게 너무 부끄럽고 민망했다. 아까 상황이 떠올라 얼굴은 달아오르고, 당황스러움과 설렘으로 심장은 두근거리는데, 윤기의 이마가 걱정되는 마음까지 섞여 엄청나게 큰 동작으로 허둥대자 윤기가 크게 웃었다.
"아, 김여주 너무 웃겨 진짜."
"아씨... 놀리지 마.. 그냥 갑자기 그러고 싶어져 가지고.."
갈수록 줄어드는 목소리에 윤기가 나를 놀리며 응? 뭘 하고 싶어졌는데? 응? 계속 질문해왔다. 윤기의 짓궂은 장난에 내 얼굴은 터질 것 같이 빨개졌고, 아니야! 아무 말도 안했어! 라고 말하며 손사래를 쳤다. 그런 나를 보며 한참을 웃던 윤기가 두 손으로 내 양 볼을 잡았다. 내 시선에 윤기의 얼굴만 들어오자 너무 당황해 모든 동작이 그대로 멈춰버렸고, 볼에 따뜻한 감촉이 느껴져 머리 속에선 알 수 없는 경고음만 나오기 시작했다.
"뽀뽀는 이렇게 했어야지."
윤기가 모자에 얼굴이 닿지 않도록 고개를 꺾어 입을 맞췄다. 내 입술에 말랑하고 촉촉한 감촉이 닿자 심장은 더 빠르게 뛰었고, 내 얼굴은 끝을 모르고 빨개지기만 했다. 윤기의 얼굴이 내 얼굴에서 멀어지고, 나는 당황해 아까 그 허우적 대던 손을 올린 채 가만히 있으면 내 콧잔등을 손가락으로 살짝 튕기며
"뽀뽀도 못하면서 무슨 용기가 났대?"
나를 또 놀리는 윤기였다.
ㅎㅎㅎㅎㅎㅎㅎ뽀뽀도 했다ㅎㅎㅎ
독자님들 모두 즐거운 추석되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