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기가 어둡고 일기(日氣)가 흐리다 하여 새벽부터 일어나 신당엘 들어가시더니만 해가 져 하늘이 퍼렇게 된 이때까지 꿈쩍도 하지 않고 있다.
거 참 요상한 노인네다 하면서도 늙은 이가 고만 훽 쓰러져 고꾸라진 것은 아닌가, 하고 신당 앞 마루에 걸터앉아 괜히 모랫바닥을 헤집어가며 분풀이를 하는 터였다.
신당엘 들어가 있는 동안에는 절대 말도 걸지 말고 들어와서도 안된다고, 그랬다간 신이 노해 벼락을 맞는다며 그리 겁을 줘대는 통에 확 들어가서 훼방을 놓아 버릴까 하다가도 에잇, 하고 쥐고 있던 나뭇가지를 탁 던져버린다.
그러자마자 하늘에서 투둑 투둑하곤 굵은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땅에 굵은 빗자국이 하나 둘 찍히는 것을 바라보는데 기분 참 더럽다.
"그래, 하찮은 종년팔자 무얼 좋다고 저기까지 쫓아들어가나. 쫓아들어가길."
들어갔다가 괜히 봉변당할까 무섭다.
벌써 삼년 째 이 산골 구석에 처박혀 마지못해 삶을 이어가고 있다만은 한때 이 나라 최고 무녀자리까지 앉았었다는 신씨였다.
하얗게 센 머리를 틀어 올리고 매일매일 기도터에 새 물을 떠다 바치는 그녀 뒤에 숨어 슬쩍 바라본 모습이 여간해 보이지를 않았다.
"여기, 누구 없소?"
"에엣....예?"
"누구 없소!"
"아아, 잠시만 기다리십쇼!"
아유 깜짝이야, 귀신인 줄 알고 간 떨어질 뻔 봤네.
고운 목소리를 따라 마당으로 나가보니 과연 웬 여인 하나가 굵어진 빗줄기 속에 홀로 서있다.
비단옷에, 쓰개치마까지 둘러쓰곤 꽤나 귀한 자태가 있는 여인이다. 헌데 어찌 양반댁 처자의 몸으로 이 험한 산골까지 몸소 찾아왔단 말인가.
"어찌 이 곳까지 오셨습니까, 아씨?"
"신씨.... 신씨는 어디에 있느냐?"
순간 우리 할매는 왜 찾는게요? 하고 물을 뻔 하였으나 천한 입을 간신히 막아냈다.
"무녀님은 지금 신당엘 가 계십니다. 나오실 때까지 아무도 들이지 말라 하셨습니다."
".....당장 불러들이거라."
귀한 댁 처자인가 보다. 하여 하늘 무서운 줄, 아니. 신씨 무서운 줄을 모르는가 보다.
그래 한 번 혼나보시오, 아씨가 시켜서 한 짓이니 내 탓 아니오.
"무어라 전해드릴까요?"
여인이 쓰개치마를 살짝 내리더니 나를 바라본다. 빗속에 보이는 것은 눈 뿐이었으나 순간 움찔 하고 움츠러들었다.
번뜩이는 눈빛이 예사 눈빛이 아니다.
".....희빈. 희빈이 찾아왔다 이르시게."
*
숙종 22년
시끄러웠던 궐안이 고요하다. 사람 하나 남지 않은 듯, 적막이 흐르는 궐마당에 하얗게 센 머리가 산발이 된 죄인이 의자에 묶여있고 그 앞에 금위대장이 굳건히 섰다.
그 뒤 높은 곳에 놓인 의자에 이나라 임금이 앉아 이를 지켜보고 있었다.
"도무녀 신씨는 죄를 고하라."
금위대장이 옆에 칼을 찬 채 엄숙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금위대에 대소신료, 거기에 임금까지.
벌벌 떨 만도 하건만 앞에 불려온 죄인 신씨는 피식하곤 조소를 보낸다.
"한낱 늙은 무녀일 뿐이옵니다, 도무녀라니요. 가당치도 않습니다."
"같잖은 말장난은 필요없다. 죄인은 당장 스스로 제 죄를 고하고 반성토록 하라!"
"소인, 하늘의 뜻에 따라 신을 내림받았기에 순응하여 받들었을 뿐이옵니다. 그런 제게 죄가 있다니요. 억울할 따름이옵니다."
바드득, 숙종이 이를 갈았다.
"금위대장 서성휘는 물러나라."
고개를 숙여 짧게 예를 표한 서성휘가 뒤로 무르자, 숙종이 직접 심문하겠다는 뜻으로 자세를 바로했다.
"죄인 신씨는 답하라. 얼마 전 죽은 왕후의 죽음에 네년이 부린 조화가 연루되어 있다는 것이 사실이냐."
"망극하옵니다, 전하. 사실이...아니옵니다."
신씨는 고개를 숙인 채 담담히 대답했다. 그 모습을 본 임금의 분노가 극에 달해 그 주먹이 바르르 떨렸다.
"죄인 신씨는 사실을 있는대로 고하라. 그 짓을 사주한 것이 희빈 장씨가 맞느냐?"
억눌린 임금의 목소리에 현장의 모든 신료들이 입을 다물고 목을 움츠렸다. 허나 신씨는 아니었다.
"아니옵니다. 그런 일은 없사옵니다, 전하."
쾅, 숙종이 의자 팔받이를 내리치며 소리쳤다.
"허면, 허면! 희빈 장씨의 마당 뒤켠에서 나온 이 물건들은 다 무어란 말이더냐? 그리고 네가 썼다는 이 부적, 이것은 또 뭐란 말이야! 네년이 감히 임금을 능멸하는구나."
시퍼런 분노에 모두가 굳어있었다. 그럼에도 신씨의 주름진 입가는 픽 하고 웃음을 지을 뿐이었다.
"모르는 일이옵니다."
"네가 네 명을 재촉하는구나. 여봐라, 죄인의 주리를 틀라!"
우락부락한 장정 둘이 족히 두 척은 되어 보이는 주릿대를 들고 죄인 양 옆에 섰다.
잠시 후, 조용하던 궐마당에 끔찍한 비명이 퍼졌다.
"아악! 소인은....! 억울하옵니다, 전하!"
"시끄럽다! 죄인이 제 죄를 상세히 고할 때까지 멈추지 마라!"
계속되는 비명에 임금 옆을 보좌하던 박 내관의 미간이 찌푸려진다.
그렇게 두어 시진이 흘렀을까, 신씨의 머리가 축 처졌다.
"소인....진정 억울하옵니다....."
"독하구나...어디 한번 끝까지 버텨 보거라."
숙종이 이를 악물고 그녀를 노려보자 그제야 신씨가 힘없이 고개를 들어 임금을 마주보며 입을 열었다.
"소인이 한 짓이..... 맞습니다! 희빈마마가 시켜서 한 짓인 것도 맞습니다! 아주 다, 다 맞습니다!"
끝까지 당당하다는 듯 제 죄를 터놓는 늙은 무녀에 대소신료들은 기함을 했다.
저 년이 드디어 미친게로구나.
용안을 마주하고 핏발이 선 눈으로 감히 임금을 똑똑히 노려보며 신씨는 말을 이었다.
"허나 내가 한 저주는 죽은 왕후를 향한 것이 아니오!"
"무...무어라?"
"이 나라, 조선을 향한 것이지. 나는 이 왕실을 저주하고 또 내가 그러도록 만든 희빈마마를 저주했소!"
"네 이년! 감히 여기가 어디라고 함부로 입을 놀리는 것이냐!"
금위대장 서성휘가 앞으로 한 발짝 나오며 칼에 손을 올리는 순간, 숙종이 한 손을 들어 그를 저지했다.
숙종의 입에는 불같은 분노와 그로인한 조소가 담겨있었다.
"해서, 한낱 무녀인 네가 무엇을 어떻게 한단 말이냐? 어디 한번 말해보라."
"이제 이 왕실에 음양의 조화란 없을 것입니다, 내가 그리 하였으니. 열흘 뒤, 7월 초하룻밤 새벽별이 이를 보여줄 것입니다."
임금의 눈썹이 꿈틀였다.
"무슨 말이냐."
신씨가 다시 한번 픽 하고 웃는다.
"적어도 다음 왕이 될 분의 시대에, 오늘과 같이 여인이 왕실 기운을 흐릴 일은 없을 것입니다."
현장에 모여있던 신하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저게 지금 무슨 뜻이란 말이오?
"군은 있어도 빈은 없을 것입니다. 왕실에 새 여인이 들어오는 순간, 혈통이 끊어질 테니까요."
"!"
투둑, 툭. 빗방울이 떨어진다. 꽤 굵다. 한 방울 두 방울, 궐마당 바닥을 적신다.
"허나 나라의 안주인 자리를 비워둘 수도 없을 노릇이지요."
"네 년이 지금....실성을 한 게로구나."
"크큭...크크큭....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전하! 주상전하!"
숙종이 참지못하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당장, 당장 저 년을 처형하라! 저 입을 갈기갈기 찢어 한양 바닥에 널어놓을 것이다!"
"하! 하하....하하하하!"
그렇게 흠뻑 젖은 궐마당에는,
신씨의 광기어린 웃음만이 남았다.
*
7월 초하루.
한양의 온 학자들이 궁궐로 불려온 듯 했다.
천문을 연구하는 자, 서역에서부터 점성술을 배웠다는 자까지.
"아니, 희빈마마도 사약을 받고 다 돌아가신 마당에 겨우 실성한 무녀의 유언 하나 때문에 이렇게나 많은 사람을 불러다 모은단 말인가?"
"어허, 이 사람 말 조심하게. 어쩌겠나, 내용이 내용이니만큼. 주상전하께서 신경을 곤두세우실만 하지 않아?"
모두가 모여 웅성이고 있을 때 즈음, 임금이 행차해 준비되어있던 자리에 앉았다.
"전하,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모여있던 이들 전부가 사배를 하고 제 지정된 자리에 꿇어앉았다.
"끄응....."
숙종은 심기가 불편해 보인다. 한낱 무녀의 말 한마디에 한 나라의 임금이 이리도 불안해하다니, 아직도 덕이 모자른 것인가 아니면 그 핏발선 눈에 정말 혹하기라도 한 것인가.
그렇게 잠시 후, 새벽별이 떠오를 시각이 되었을 때였다.
"어어...? 아니, 저것은!"
"저....저, 저것을 좀 보시게!"
"마, 말도 안 돼!"
금성이 원래 제 길을 따라가지 않고 정 반대로 향하고 있었다.
"박 내관....무, 무슨일인가?"
떨리는 숙종의 목소리에 왠지 모를 불안과 긴장이 서려있었다.
"저....전하...!"
잠시 뒤 어둑어둑하던 새벽하늘에 번쩍하고 빛이 났다.
해보다도 밝고, 강한 빛이 꽤 오랜 시간 쨍하고 비쳤다. 궐안의 모든 이들이 감히 하늘을 보지 못하고 부신 눈을 가린 채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한참 뒤, 빛이 사라졌을 때 궁궐은 온갖 소리로 시끌벅적해졌다.
땅에 엎드려 아직까지 떨고 있는 자가 있는가 하면 주변 이들을 붙잡고 흥분에 겨워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자도 있었다.
"모두 정숙하라!"
순식간에 소란하던 궐내가 쥐죽은 듯 가라앉았다.
"방금 일어난 이 기이한 현상이 무엇인지 어디 한번 설명해 보라."
임금과 가장 가까운 자리에 엎드려있던 자가 일어나 가운데로 나섰다.
"전하,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소신, 나주에서 온 김기수라 하옵니다."
"그래, 그대가 나와 섰으니 한번 말해보라. 지금 이 한양 하늘에서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이더냐?"
김기수는 엎드려 땅에 푹 박고 있던 머리를 슬쩍 들어 감히 용안을 살피더니 입을 열었다.
"입에 담기에도 망극하오나... 이는...."
그가 머뭇거리는 사이 임금의 미간이 찌푸려진다. 이 나라 최고의 권력의 주인, 그의 심기가 불편해지고 있다.
"감히 이 미천한 입을 열어 말씀 올리건대, 이...이는 흉조이옵니다!"
"흉조라... 어찌된 연유이냐."
"새벽별, 즉 금성은 본래 이 시간대에 동에서 서로 이동하는 길에 북두칠성의 여섯 째 별과 겹쳐지게 되어있나이다."
"헌데?"
"허나 작금의 일은 아무래도....."
"망설이지 말고 말을 이으라!"
"아무래도.... 북두의 첫째 별과 부딪히매 일어난 폭발이 아니올는지...."
말을 끝낸 그는 다시 땅바닥에 머리통을 쿡 처박았다. 그와 동시에 자리에 모인 천문학자란 천문학자들은 죄다 입을 열어 논쟁을 펼치기 시작했다.
'어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단 말인가!'
점점 더해지는 불안감에 쿵쿵 뛰는 관자놀이를 두 손가락으로 지그시 누르며 임금이 입을 열었다.
"해서, 그게 어찌 흉조인지 말해보라."
"예컨대, 예로부터 새벽별은 아침이 되기 직전, 해의 양기를 듬뿍 받아 양의 기운을 가장 많이 갖고 있는 별이라 하였나이다. 또한 북두의 여섯 째 별은 칠성중 가장 빛이 어둡기에 음의 기운을 머금은 별이라 하여 새벽별과 북두의 여섯 째 별이 만나는 시간을, 청 황실에서는 합궁시로 정해 현재까지 지키고 있나이다."
"헌데?"
"반대로 북두의 첫째 별은.... 칠성중 가장 밝은 빛을 띠는 양의 별이옵니다."
숙종이 고개를 들고 김기수를 노려보았다. 그는 왕의 노기에 부들부들 떨리는 팔다리를 주체하지 못하고 있는 채였다.
"양기를 머금은 금성이 음기를 채운 여섯 째 별과 만나는 것은 하늘의 이치이온대, 어찌 급작스레 본래의 길을 바꾸어 양기를 뿜는 첫째 별과 부딪히매....큰 빛을 내었으니 이는 섭리에 맞지 않아 흉조라 아뢰었나이다."
말을 마친 김기수가 왕 앞에 엎드려 떨고있다. 그야말로 온 몸을 불쌍하리만치 떨고 있으나 왕은 물러가라 명하지 않았다.
아니, 차마 입을 열어 명할 수 없었다. 그에게 죄를 묻기 위함이 아니다.
그 순간, 조선의 왕은 떨고 있었다.
*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이란 말이냐.'
'아뢰옵기 황송하옵고 감히 이런 불경한 말을 올리기가 천부당 만부당 하오나.........'
'......그게 무슨 말이냐. 그걸 지금 말이라고 뱉는게야! 박 내관 네가 한낱 내관의 몸으로 지금 죽고 싶은게로구나!'
'전하... 그 날, 그 무녀의 말을 듣지 않으셨습니까. 다음 세대 이 왕실에, 여인은 없다 하였나이다!'
'그렇다하여, 천한 무녀의 말 한마디에 지금 성리학의 기본 질서를 무너뜨리고 국본을 어지럽히겠다는 말을 그렇게 쉽게 하는 것이냐?'
'그리 하지 않으면 모두 죽을 것입니다! 이미 하늘의 질서도 어지러워졌나이다! 전하,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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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한달이 지나고 숙종이 조정관료들을 불러 모아 한양 전체에 금혼령을 내릴 것을 명하니 이것이 바로 무더운 8월 보름.
저잣거리에 세자와 죽은 무녀의 유언에 대한 이런 저런 추문이 그득그득 나돌아 다니던 그 때에, 왕실에서 급히 준비해 내놓은 방책으로 세자빈 간택이 시작되었다.
*
철벅철벅.
"이러다 정말, 하늘이 무너져버리면 어떻게 한다우?"
"어찌 그런 말을 함부로 하느냐."
"아이, 아씨. 모르십니까, 그 무시무시한 소문을요. 무서워서 그러지요. 이렇게 비도 오는데요."
"덕순아. 입을 함부로 여는 것이 아니라 했다. 더구나 곧 궁궐 안으로 들어갈 아이가 그런 저잣거리 헛소문 따위를 감히..."
"죄, 죄송합니다요. 아씨. 허, 허지만..."
하염없이 비를 맞으며 가마 뒤꽁무니를 졸졸 쫓아가던 여종이 풀죽은 표정으로 고개를 슬쩍 들어 어둑어둑한 하늘을 바라본다.
삼간택이 시작되던 날, 억수로 비가 쏟아졌다. 왕실 어른들 앞에 직접 나아가 심사를 받기 위해 궁궐로 향하는 세 가마가 있었으니
빠지지 않는 대감댁 곱디 고운 처자 셋이 각각 가마 안에서 궁궐에 닿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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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꺄아아아악! 아, 아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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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뭐라!"
"방금 뭐라 하였는가!"
임금과 중전이 함께 들어앉아 세자빈 후보를 기다리던 침전에 예상치 못했던 소식이 날아들었다.
소식을 전하러 뛰어들어온 홍 내관 또한 숨을 떨고 있었다.
"구.... 궁궐로 향하던 세 명의 처자 중 둘이 오는 길에 짐승에게 습격을 당해....."
"아아...."
중전이 머리를 쥐고 힘없이 주저앉았다. 중전을 부축하는 숙종의 팔에 힘이 들어갔다.
"어찌 한양 한복판에서 짐승의 습격을 받을 수가 있단 말이냐!"
"허나, 남아있는 흔적, 처자와 그 시종의 시신을 확인해 본 결과, 짐승에게 물어 뜯긴 상흔이 발견되었다 하옵니다."
"그, 그만! 이 이상 듣고 싶지 않으니 그만두세요!"
"소, 송구하옵니다."
왕의 한숨이 깊어졌다.
".......우연일 뿐이다. 궐 내에서 소란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고 남은 처자를 들이거라."
"예, 전하."
"이 일을 어찌하면 좋단 말입니까, 전하...."
혹여나 저주가 사실이 될까, 순식간에 무너져 내린 일국의 어미는 왕의 품에 안긴 채 흐느끼고 있었다.
"너무 걱정하지 마시오.... 다, 다 잘 될 것이니....."
*
"이게... 말이나 된단 말이냐!"
"저하, 고.... 고정하시옵소서!"
그시각 동궁전에서는 한바탕 소란이 벌어지는 중이었다.
소란의 주인공은 다름아닌 동궁전의 주인이자 이 나라 조선의 세자로서 마땅히 처신을 지켜야 할 그.
한빈이다.
"일국의 세자다, 내가 세자란 말이다! 헌데.... 일개 무녀의 농간 한마디에 나라의 왕실이 이리도 흔들리다니, 이게 말이 되는가!"
"저, 저하.... 너무 심려치 마시옵소서..."
"심려? 심려라니! 내가 지금 그 일을 걱정하고 있다고 생각하는겐가?"
본래 성정이 불같기로 궐내에 소문이 파다한 세자였다.
평소 더없이 냉정하고 사욕이 없어 왕의 재목이 되기에 전혀 부족하지 않다 알려진 그라고 해도 아직 성년도 채 맞지 못한 소년일 뿐이었다.
그렇기에 갑작스레 결정 된 국혼이 그의 심기를 건드린 것도 당연한 일일지 모른다.
그래, 어쩌면 아직 그저 어린아이일 뿐이었는지도.
"허, 허나 저하, 주상전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서둘러 채비를...."
"싫다."
"저, 저하... 어찌 이러시는 겝니까.... 오늘은 세자저하께도 이 나라 백성 모두에게도 중요한 날이 아니옵니까..."
세자가 시강원에 들어갈 무렵부터 그를 쭉 모셔온 박 내관이다.
누구보다 세자의 성정을 잘 알고 있다.
"간택된 세 명의 후보들 중에, 박대용 그 자의 여식이 있다지?"
"..그러하옵니다."
박대용, 이미 권력의 중심에 선 자. 온갖 부정부패의 중심에 있는 자. 그렇게 이 나라의 영의정 자리에까지 오른, 탐욕스러운 자.
그 자가 지금 다음 대를 준비하고 있다는 말인가.
발 한번 빠르군.
"아주 대단한 자야, 이제 부원군까지 노린다 이건가."
'불 같다, 불 같다는 것은 즉....'
그냥. 지랄맞다는 것 아니겠는가.
"이미 꽤 늦으셨사온대.... 이대로라면 전하께서 크게 노하십니다."
"허, 그것 참 오랜만에 구미가 당기는 제안이로구나. 좋다, 지금 당장 너의 그 주상전하께로 달려가서 아주, 아주 크게 노하시라고 아뢰고 오도록 하라."
아아, 평생을 바쳐온 박 내관의 모든것이 무너져 내리는 듯 했다.
그러나 그가 이 궁에서 본연의 의무를 섭섭치않게 해온지도 어언 16년. 그의 청춘 대부분을 이미 이 어리석은 세자놈에게 쏟아부은 바.
"박 내관, 내 말이 지금 우스운겐가. 당장 아뢰고 오란 말이다, 당장! 뛰어나가란 말이야!"
"저하...."
그리고 그 본연의 의무란 바로 세자의 비위를 설설 맞춰주는..... 아니, 그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는 범위 내에서 그를 잘 보필하며 성군의 재목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곁을 지키는 그런 막대한 임무를...
"저하, 이제 투정은 그만 두시고 어서 옷매무새를 단정히 하시지요... 다른 날과 다름없이 그저 문안을 올리는 일일 뿐이옵니다."
그렇기에 이런 바보 세자의 말같지 않은 어리광에도 이리 온화한 미소로....
"아아, 싫다고 하질 않았느냐! 왜 내 말을 곧이 듣지 않는게야!"
....온화한 미소에 날아온 세자의 버선 한 짝마저도 다 받아줄 수..
..... 없다, 도저히 없다! 아무리 일국의 세자라지만 이것은 노인공경을 벗어나는 일! 이렇게 버르장머리없고 처신이 바르지 못한 세자가 이 나라의 왕이 된다면 그 얼마나 통탄을 금할수 없을 일인가!
박 내관, 그의 안에서 16년간의 수모, 16년간의 고생, 그 모든것이 엄청난 굉음을 내며 밀려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동안 굳게 닫혀있던 입이 열리려 하고 있었다.
단전 깊숙한 곳에 힘이 들어가는 것이 분명 굉장한 소리가 곧 성대를 울릴 것이었다.
'더 이상은 못 참는다, 이런 3살짜리 세자같으니!'
그 순간,
"저하! 세자저하, 큰일이 났사옵니다!"
벌컥 열린 동궁전 문에, 박내관도 세자도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이 얼마나 무례한 짓이란 말인가, 방금 막 잠에서 깨어나 속곳차림인 이 나라 세자의 방에. 한낱 아전놈이 뛰어들다니.
"...휴우."
그러나 동시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자 있었으니, 박 내관이다.
하마터면 한 순간의 실수로 평생을 의지했던 궁 생활을 매듭짓고 길바닥에 내앉을 뻔 했다는 것을 방금 막 깨달은 터였다.
역시, 이 한양 하늘은 아직 나를 버리지 않았다.
"...이 무슨 소란이냐."
"그, 그것이... 삼간택 후보자 처녀 셋이....!"
세자의 깊은 한숨소리가 방을 울린다.
"하, 어찌 다들 아침부터 내 신경을 이리 거스른단 말이냐. 이름도 없는 무녀에 아바마마 어마마마, 한 날을 빼놓지 않고 떠들어대는 대소신료, 박내관, 거기에 이젠 하다하다 궐의 아전까지?"
동궁전 바닥에 엎드려 서슬퍼런 세자의 분노를 온몸으로 받아내던 그는 입을 덜덜 떨며 말했다.
"그것이 아니오라, 처녀 셋이 궁으로 향하던 도중 습격을 당했다 하옵니다!"
"....허읍."
방정맞은 입이 내뱉었던 한숨을 재빨리 주워담는 박 내관이다.
".....방금, 뭐라하였느냐."
"저, 저하....."
순식간에, 방은 고개를 숙인 두 사람보다 훨씬 어린 나이의 세자가 내뿜는 분노로 가득 찼다.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상세히 고하라."
*
눈 깜짝 할 새 준비를 마치고 강녕전으로 향하는 세자의 발걸음이 급박하다.
태풍을 맞은 바닷물살마냥 일렁이는 그의 도포자락을 뒤따르는 박 내관의 발걸음 또한 그에 맞춰 빨라진다.
"그래서, 알아는 보았느냐."
"예, 저하. 세 처녀 모두 각자의 집에서 시종 하나씩을 붙여 궐까지 출발한지 약 한 시진 쯤 지난 시각에 짐승의 습격을 받은 것으로 사료되옵니다."
숨을 헐떡이며 대답하는 박내관이지만 걸음을 늦출 틈은 없다.
"짐승....짐승이라... 각각 한 시진쯤 되는 일정한 거리에서 말이지..."
"예, 더불어 습격을 당한 두 처녀는 물론 시종까지 모조리 잔인하게 물어뜯겼다 하옵니다. 하여,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지경이라 하는데...."
세자가 얼굴을 잔뜩 찡그린다.
"비위상하는 이야긴 그쯤 해두고 나머지 무사한 한 처녀에 대해 말해보라."
"아, 영의정 박대용 대감 댁 처녀인데 궐에 도착해 소식을 듣자마자 충격을 받은 터인지 안정을 취하는 중이라 하옵니다."
도포자락 속에 숨겨진 세자의 주먹이 꽉 쥐여진다.
"영의정.... 영의정 대감댁의 처녀라......"
허, 순간 뜻 모를 코웃음을 친다.
'박대용, 그 자가 감히....?'
*
"아니된다."
"아바마마!"
강녕전 바닥에 납작 엎드려있던 한빈이 주상의 불호령에 고개를 번쩍 든다.
"그것만은 아니된다."
"어째서이옵니까."
거듭되는 세자의 질문에 심기가 불편해진 숙종은 미간을 찌푸리며 고개를 틀었다.
"몰라서 묻느냐, 그것은 왕실의 법도가 아니니라."
".....허면, 세자빈 후보가 한 명인 것은 어찌 생각하시는지요?"
"...세자.."
왕의 옆자리를 지키고 앉아있던 중전이 그를 만류했다.
한빈의 어미였던 희빈이 죽고 중전의 자리에 올라앉게 된 그녀에게도 아들이 있다.
세자 자리에 올리고자 하는 욕심이 없었던 것도 아니다. 허나 상황이 이렇게까지 된 마당에 제 아들을 그 자리에 세우고 싶지 않았다.
한 아들의 어미로서, 아들이 행복하기를 바랐다.
그런 것을 보면 한낱 붉은 비단 옷을 몸에 걸친 저 세자라는 자리가 어찌나 불쌍한 자리이던가.
"중전마마. 소자는 마땅히 올려야 할 말씀 올리고 있을 따름입니다."
제 얼굴을 보며 이를 악문 채 내뱉은 한 마디, 어미가 아닌 중전. 그 안에 무수히 많은 뜻이 담겨있을테지.
그 차가운 눈빛아래 서려있었다.
한낱 무수리의 신분으로 내 어미를 가르고 그 자리에까지 올라 앉았다고 해서, 이 나라 세자를 뛰어넘으려 들지 말라.
잘 알고 있기에, 틀린 말도 아니기에 고개를 숙이고 말을 삼간다. 어쩌면 내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데에는 이런 태도가 한 몫 했음이 틀림없음이라.
"나는 지금 법도에 관한 말을 하는 것이니라. 후보는 셋이었다. 그 중 둘이 불의의 사고로 죽었으니 어쩔 수 없는 바가 아니냐?"
지친 목소리로 숙종이 말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물러날 한빈이 아니다.
"남은 한 명의 처자가, 권력의 중심. 영의정의 여식인 지금의 상황도 어쩔수 없는 바였다는 말씀이십니까."
숙종은 이미 노기가 치밀고 있었다. 어쩌면 아직 어린 세자가 선을 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세자, 네 이....!"
"그랬겠지요, 아바마마. 세 대감 모두 어디 가서 빠지지는 않으나 그 중 단연 최고는 영의정 박대용 대감이니, 그 여식이 살아남아야 하는 작금의 상황 또한, 어쩔 수 없는 바였지요."
"네가 무얼 알고 있기에 감히 그런 망발을 뱉는게냐!"
숙종의 주먹이 팔걸이를 내리쳤다.
"심기를 불편하게 만든 것이라 하면 소자, 백 번 잘못이라 하겠사오나 이번 사건을 취조하지 않으시겠다는 분부는 따를 수 없습니다."
"허, 따를 수 없다.... 너는 한낱 세자 신분에 불과하다. 지금 왕명을 거역하겠다는 것이냐?"
"....거역이 아니옵니다. 다만, 이대로 진상을 밝히지 않고는 절대. 절대 영의정의 여식을 받아들일 수 없나이다."
숙종은 당돌하기 짝이 없는 어린 아들의 으름장에 코웃음을 쳤다.
"해서, 국혼을 없던 일로 하겠다?"
"....예. 아바마마."
"그것은 아니된다."
"....그게 안된다면 처음부터 다시 진행해 주십시오."
"그것은 더더욱 아니된다."
아니된다, 아니된다. 도무지 타협할 기미조차 보이지 않는 아비에게 한빈은 울컥하는 마음에 소리쳤다.
"어째서! 어째서 아니된단 말씀이십니까! 국혼 절차에 문제가 생겨 삼간택 전에 국혼을 되돌린 선례는 이미 수없이 많지않사옵니까?"
"네가, 네가 모르는 것이 있다! 지금 대소신료들이 저 근정전에서 무어라 떠들어대는지는 알고 하는 말이냐? 그들은 감히 음과 양따위를 입에 올리며 빈 대신 군을 맞으라며 이 왕실을 능멸하고 있느니라. 네가 아직 어리다하나 이리 한 치 앞을 살피지 못하니 그 정도가 지나치구나."
숙종도 결국 화가 폭발했다. 이 나라 정상에 선 두 남자의 언성이 높아지자 주변의 모두는 심장을 졸이고 있는 터였다.
"알고 있사옵니다."
".....!"
".....되돌려주시옵소서."
"소자, 후회하지 않을 자신이 있사옵니다."
"네가...."
"소자, 이대로 영의정의 부마가 될 순 없사옵니다. 아바마마. 이는 후대를 위해서도 절대 있어서는 아니 될 일이옵니다."
모르는 바 아니었다. 숙종이 탕평이랍시고 구현했던 정치는 결국 당파간 싸움을 부추기는 데 지나지 않았고 그 중심에 박대용이 있었다.
이미 차고 넘치는 권력을 이기지 못해 감히 왕에게 도전할 무모함을 가진 자, 저 조정에 그 하나 뿐이었으니.
숙종 사후, 부원군 자리에 올라 이 나라를 마음대로 주무를 그는 분명 한빈의 힘으로 막을 수 없을 거대한 힘 그 자체일 터.
"아아... 아니된다, 아니된다 세자..."
"아바마마. 소자를 믿어주시옵소서."
한빈이 어느새 고개를 들고 그 아비의 얼굴을 똑바로 마주했다.
"그 자와의 겨루기에서 승리를 거두고 나면 이 나라 사직에 누가 되지 않도록, 모든 것을 온전히 돌려놓을 것이옵니다."
숙종 또한 제 아들의 눈을 마주했다. 어쩐지 오늘따라 총기가 느껴지는 눈이다.
"왕위에 오르기 전, 저 또한 한번은 넘어야 할 산이옵니다."
"......"
"제 힘으로, 증명해보이겠나이다."
*
처음인데요
그래요 잘부탁해요
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