三十
“멈추어라!”
액정궁은 금남의 구역이다. 태감과 황제를 제외하곤 어떠한 사내의 출입도 허용되지 않는 여인들만의 공간에 별안간 사내의 외침이 울려 퍼졌다. 지금 태형에겐 어떠한 법도도 원칙도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저 간신히 제 한 몸을 지탱하고 있는 소소 한 사람만 보였다. 그의 눈에 핏발이 섰다. 태형은 순식간에 걸어와 백야를 밀어내고 바닥에 무릎 꿇고 앉은 소소를 부축했다. 감히 그녀의 뺨을 쥐고 어깨를 잡았다. 소소가 정신이 없기에 가능했던 것이지, 만일 제정신이었다면 금세 내쳐졌을 손이었다. 일련의 행동에 주변이 술렁였다.
“누가 감히…!”
태형에게 밀쳐져 상궁의 부축을 받던 백야는 기가 막힌 얼굴을 했다. 백야가 사납게 태형의 어깨를 쥐고 몸을 돌리게 했다. 감히 액정궁에 들어와 황제의 후궁을 밀친 사내가 누군지 그 얼굴을 봐야했기 때문이었다. 순간 태형의 성난 시선이 그녀를 향했다. 백야의 눈이 놀란 듯 팽창되었다. 그녀는 단숨에 태형을 알아보았다. 지난번 황후의 석고대죄 때, 별감 주제에 무례하게 제 앞을 막아 세웠던 바로 그 작자가 아닌가. 백야의 눈이 게슴츠레 변했다.
“너는….”
“…….”
“황후전의 별감이로구나. 전에도 내 앞을 가로막았던.”
태형의 얼굴을 노려보며 말을 뱉던 백야의 시선이 그의 손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답지 않게 떨리는 손이 소소의 얼굴을 감싸쥐고 있었다. 별감이라면 액정궁의 규율을 모르진 않을 터, 헌데도 이리 물불 가리지 않고 달려든 이유라면… 하나뿐일 것이다. 저 발칙한 이의 속내가 상전이었던 소소에 대한 충이 아니라, 여인을 향한 정염이고 염려이니까. 백야의 붉은 입꼬리가 매끄럽게 올라갔다. 폐후와 별감이라니, 상상치도 못한 조합이었기 때문이었다. 허나 그녀에겐 반갑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태형의 행동이 불쾌하기도 했지만, 백야는 동시에 쾌재를 불렀다.
“오늘 네가 저지른 죄는 총 세 가지다.”
“…….”
“하나, 말단 별감 주제에 재인인 나의 앞을 가로막은 것. 둘, 사내는 절대 출입해선 안 되는 액정궁에 함부로 들어온 것.”
“…….”
“셋, 이 액정궁 안의 여인도 모두 황제폐하의 여인이지. 아무리 황후의 자리에서 폐위되었다 한들 이는 불문율이다. 헌데, 그런 황제의 여인에게 감히 무엄한 마음을 품은 것.”
백야는 이 상황이 즐거워 죽겠다는 듯이 웃으며 말했다. 허나 그럴수록 태형의 얼굴은 더 일그러질 뿐이었다. 비단 백야의 발언이 반응을 일으킨 것은 태형만이 아니었다. 바닥에 조아린 무수리들도 이게 무슨 말이냐며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별감과 궁녀의 사통도 들키면 장에 맞아 죽는 판국에 폐후의 염문이었다. 액정궁 전체를 뒤흔들 만큼 자극적이었고, 자극적인 만큼 흥미로웠다. 묘하게 돌아가는 분위기에 소소가 제 뺨에 있는 태형의 손을 쥐었다. 낼 수 있는 최선의 힘이었다. 그리곤 당장 이를 거두고 돌아가라 말하고 싶었다. 허나 태형이 먼저 그녀의 손을 놓고 일어났다. 그의 형형한 시선이 백야를 잡아먹을 듯 노려보았다. 소소에겐 전혀 익숙치않은, 사나운 눈빛이었다. 그의 이가 세게 맞물렸다. 간신히 화를 삭이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내명부 여인은 정치에 관여해선 안 된다, 이를 참 잘 지키고 계신가 봅니다.”
“무슨 소리냐?”
백야는 태연자약하게 태형의 말에 대꾸했다.
“연화궁 소식이 많이 느린 것 같아서요. 신은 이제 별감이 아닙니다. 역모를 처단한 공을 높이 사 폐하께서 연호부령이라는 작위를 내려주셨지요.”
연호부…. 백야가 살짝 의아한 얼굴을 하곤 입으로 이를 발음해보았다. 어딘가 많이 들어본 관서였다. 태부가 전에 언급한 적이 있는 것 같기도 했다. 백야의 시선이 미약하게 흔들렸다. 허나 이를 숨기곤 뻔뻔히 반문하는 듯한 시선으로 태형을 주시했다. 태형이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웃었다.
“연호부는 관리의 비리를 감찰하고 심문하는 곳입니다. 허나 비단 정계에서 벼슬하는 자뿐이 아니지요. 내명부도 엄연히 황궁의 일원이니, 그 대상입니다.”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것이냐!”
“공대.”
겁박의 의도가 다분한 태형의 말에 백야의 언성이 높아졌다. 그리고 순식간에 태형의 얼굴에서 다시 미소가 거둬졌다. 무정한 음성으로 공대를 읊조리고, 미약한 호의도 없이 그저 서늘한 얼굴로 백야를 보았다. 그 위압감에 백야는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공대를 하십시오. 연호부령은 정2품, 내명부에서 재인의 품계와 위치가 같은 신분입니다. 법도를 운운하는 재인께서 스스로 이를 지키시지 않는다면, 이 무슨 궤변이고 모순이란 말입니까.”
“…….”
태형의 말은 틀린 바가 없었다. 덕분에 백야는 반박 한마디조차 뱉지 못하고 순식간에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이에 대해 반문은 없었지만 그걸 차치하고서라도 태형의 눈이 너무도 사납고 무례해 화가 났다. 잠시 입술을 달싹이던 백야가 태형을 향해 눈을 부라렸다. 저 치의 코를 납작하게 해주고 싶었다.
“공의 말대로 제 소식이 느려 연호부령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지금부터 공대를 하지요. 허나, 나머지 죄는 어찌하실 겁니까?”
하대가 공대로 바뀐 것뿐 말에 박힌 가시는 전혀 거둬지지 않았다. 허나 태형은 그런 백야의 기세에 하나도 지지 않았다.
“나머지는 제가 먼저 재인께 묻지요. 무슨 근거로 신이 폐하의 여인에게 무엄한 맘을 품었다 단정하십니까?”
“그건….”
“재인께 맞고 있는 이를 구했다고, 그 마음을 단정 지으셨다면 지나친 비약이 아닐런지요?”
백야의 입술이 다시 다물렸다. 소소를 보던 네 놈의 눈길과 뺨에 닿은 손길이 그러했다 말하기엔 이는 물증이 아니라 심증이었기 때문이었다. 아무리 확실한 심증이라 한들 사통의 증거로 들먹이기엔 모자랐다. 곤란해진 백야가 제 입술을 감쳐 물었다. 태형은 당황한 백야를 놓아주지 않고 밀어붙였다.
“어떤 연유로 이리 가혹한 벌을 내리시는지는 모르나 이 분은 신이 전에 모시던 웃전입니다. 그런 분을 재인마마의 손에 죽게 놔두는 것이, 법도에는 맞을지 몰라도 제 신념에는 어긋나는 일이라서요. 해서 끼어든 것뿐입니다.”
“…….”
백야가 제 입술을 더 세게 깨물었다. 치맛단을 꽉 쥔 손이 잘게 떨리고 있었다. 태형은 위압적으로 백야에게 한 발 더 나아왔다. 가까워지는 만큼 태형의 얼굴은 더 굳었다. 백야는 작게 뒷걸음질 쳤다.
“마마께서 지적하신 두 번째 죄는 명백히 제 잘못입니다. 금남의 구역에 법도를 어기고 들어왔으니 이것에 대한 벌은, 폐하께 고해 직접 받겠습니다.”
마치 지난 빗속에서 주인을 지키던 그때의 모습처럼, 태형의 눈은 두려움 없이 공격적이었다.
“아, 그러고 보니 저도 재인께 여쭐 것이 있습니다. 마마께선 내사령이 뇌물을 받고 관직을 파는 것을 알고 계셨습니까? 내사령과는 충분히 긴밀한 관계를 맺으셨다 들었는데.”
갑작스런 태형의 말에 백야가 당황한 낯을 했다. 내사령이라면 태부의 오른팔, 즉 백야의 세력이었다. 내사령, 뇌물. 본능적으로 그리 좋지는 않은 일이라는 것을 직감했다. 그녀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대체 왜 그 자가 뇌물 받은 일을 제게 묻는 것이지. 물론 태형은 연호부의 사람이니 이러한 뇌물수수를 비롯해 비리를 감찰하는 것이 옳았다. 헌데 그걸 어찌 후궁인 자신에게 묻느냔 말이야. 짧은 시간에 백야의 머리통이 재빠르게 굴러갔다. 갑자기 화두를 바꾼 그의 의중을 좀처럼 파악할 수 없었다.
“연호부에서 수사한 결과 내사령이 뇌물로 받는 금전이 죄다 마마의 궁으로 들어간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뭐라?”
백야는 순간 머리를 한 대 맞은 것처럼 멍해졌다. 제 소호궁의 금전과 재물은 죄다 태부가 관리하기에 백야로서는 아는 바가 없었다. 게다가 뇌물을 받는다는 소식은 생전 처음으로 들었다. 이것은 참으로 억울한 일이었다. 이를 자각한 그녀가 금세 반문하려는데, 태형은 그 말을 차갑게 막아세웠다.
“이에 대한 마마의 말씀은 차후 연호부에서 듣지요. 이미 내사령의 수족들을 심문 중이니.”
태형이 심문을 힘주어 말했다. 관리들이 연호부를 두려워하는 것에는 이유가 있었다. 연호부는 단순히 비리를 감시하고 밝혀내는 것뿐 아니라 만들어내는 곳이기도 했으니까. 그는 황제의 재가 없이 관리를 잡아들이고 고문할 수 있었다. 또 잔혹한 고문을 받다 보면 없는 죄도 발설하게 되기도 했다. 이러한 세세한 사정까지 알 리 없는 백야도, 종잡을 수 없는 무력감에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허나 태형은 그런 백야를 두고 돌아섰다. 소소에게 다가가 몸을 굽히고 그녀의 얼굴을 살폈다.
“소소,”
며칠 새에 얼굴이 더 상해있었다. 채찍에 맞을 때마다 입술을 물어 그런지 입술이 터져 피가 베어나왔다. 정신을 놓진 않았지만 힘이 빠져 감고 있던 눈을 소소가 천천히 떴다. 그녀와 눈이 마주치자 태형의 시선이 가차 없이 흔들렸다. 태형은 속상한 마음을 겨우 집어삼켰다. 그녀의 얼굴을 더듬는 손길이 떨렸다. 작은 상처 하나하나가 가슴을 짓눌렀다. 소소의 얼굴을 조심히 눈길로 살피던 태형이 그녀를 그대로 안아 들었다. 그리곤 망설임 없이 이곳을 떠나려는데, 그런 그의 앞을 공태감이 막아 세웠다. 서늘해진 태형의 시선이 그를 향했다.
“뭐하는 짓이냐.”
“연호부령, 백재인 마마의 말씀처럼 이 황궁에선 무수리조차 다 폐하의 여인입니다. 어찌 다른 사내의 품에 안겨 보낼 수 있겠습니까.”
공태감의 목소리는 미세하게 떨렸으나 또한 견고했다. 액정궁에서만 몇 십년 윤리와 원칙을 지켜 살아온 태감의 간언이었다. 허나 그 말에 태형의 미간이 순식간에 좁혀졌다. 황제의 여인, 황제의 여인. 그 소리가 지겨웠다. 그녀는 더이상 황후가 아니었는데도 여전히 그의 손아귀에 있는 것만 같았다.
“허면 그 황제의 여인이 이대로 맞아 죽게 뒀어야 했나? 태감의 일은 그것이라 좌시하고만 있었느냐?”
차갑게 날아드는 태형의 말에 이번에는 태감의 입이 다물렸다. 정말 태형이 말리지 않았다면, 백야는 소소를 죽일 수도 있었다. 그러는 동안 태감은 말로라도 백야를 막지 않고 지켜만 보았다. 한낱 무수리의 목숨쯤이야 웃전의 명에 죽는 것이 이 황궁에선 당연했으나, 분명 태감 자신이 방금 뱉은 말과는 논리가 맞지 않았다. 존귀한 황제의 여인이라면 그 목숨조차 가벼워선 안 되었을 테니. 자가당착에 걸려 미련하게 머뭇대는 공태감을 지나쳐 태형은 그대로 액정궁을 빠져나갔다. 소소를 안아 든 그의 뒷모습이 멀어질수록 무수리들의 수군대는 소리도 커졌다.
“…내가 분명 말하지 않았느냐.”
허나 그 속에서도 태형에게는 똑똑히 제 품의 소소가 작게 내뱉는 소리만 들렸다. 그녀를 안고 제 집무실로 가면서도, 태형은 모든 순간순간이 떨렸다.
“내 눈앞에 다신 나타나지 말라고.”
태형은 애써 비수 같은 그 미약한 말들을 무시했다. 답하지 않았고, 품의 소소를 들여다보지도 않았다. 그저 다른 이의 눈에 띄지 않게 빠르게 그녀를 안고 걸었다. 움직일 때마다 소소의 상처가 아리진 않을까 그저 조심스러웠다. 그렇게 한참을 걸어 어느새 연호부에 당도했다. 심문이 이뤄지는 곳은 지하에 있었고, 연호부령인 태형이 쓰는 누각은 높이 있었다. 태형은 소소를 데리고 그곳으로 향했다. 다행히 정무로 바쁠 시간이라 근처에는 밖을 지키는, 소소의 얼굴도 알아보지 못할 말단 병졸들뿐이었다. 태형은 가뿐히 그들의 인사를 받고 들어와 문을 걸어 잠갔다. 그리곤 밤까지 정무를 볼 때를 대비해 둔 침상에 그녀를 조심히 내렸다. 소소를 앉히고 태형은 한쪽 무릎을 꿇고서 그녀와 눈높이를 맞추었다. 태형의 울대가 천천히 움직였다.
“연호부령이라 하더구나, 네가 내 오라비와 아비의 목숨값으로 오른 자리가 그것이냐.”
“소소, 우선 상처부터….”
애타게 제 등으로 향하는 태형의 손길을, 소소는 쳐냈다. 태형의 손길에는 힘이 없었다. 그래서 아픈 소소조차 쉽게 쳐낼 수 있었다. 천천히 한숨을 쉬던 태형이 고개를 떨구었다. 지금 제 눈앞의 태형은 전에 알던 태형 같았다. 허나 전쟁터에서, 그리고 아까 백야의 앞에서 태형은 소소가 전혀 모르는 사람 같았다. 소소는 그게 태형의 본모습이라 믿었다. 애초에 내게 보인 모든 것이 거짓이라고. 태형이 모두의 위에서 태연히 명할 수 있는 것도 죄다, 윤기와 대승상의 목숨값이라고. 그저 자신의 죄책감을 씻으려 저를 놓지 못한다고, 그렇게 생각하자 소소는 어지럽던 머릿속이 차갑게 식는 기분이 들었다. 아직도 눈을 감으면 황제의 손에 목이 베이던 아비의 모습이 생생했다. 그 모든 게 자신의 탓 같았다. 이렇게, 울 것 같은 얼굴로 자신을 보는 태형의 눈에 속아 그를 거두었기 때문에 가문이 멸한 것이라고. 이젠 태형을 보면 괴로웠다. 죄책감과 원망이 정에 편협한 마음을 내리누르고, 결국 자멸할 것만 같았다.
“폐후가 되었다고 내 말이 우습게 들린 모양이지?”
“…….”
“속죄를 하려거든 네 목숨을 내놓으라 하지 않았느냐. 그리할 것도 아니면서 어찌 내 눈앞에 다시 나타난 것이냐?”
“…….”
“네가 내게 손길을 내밀면, 고마워하며 잡을 줄 알았더냐?”
태형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가시 박힌 말을 묵묵히 듣는 것이 제 죗값이고 업보라 생각했다. 다만 다정하지 않은 그녀의 눈은 자꾸만 익숙지 못하고 아파서 시선을 피하게만 되었다. 태형은 그런 제 스스로가 참으로 나약했다. 역모의 전날 밤 황제를 찾아가면서부터 모두 예상했던 것이 아니었던가. 모두 제가 감내해야 할 것이었다. 소소의 경멸도, 원망도, 미움도. 하물며 그녀가 짊어진 아픔조차 대신 지고 싶었다.
“할 말이 남으셨거든 다 듣겠습니다. …대신 상처부터 살피면 아니 되겠습니까.”
태형이 애써 담담히 말했다. 그가 소소의 무릎에 얹힌 손을 잡았다. 작고 흰 손이었다. 허나 차갑고 연약했다. 태형은 그 손을 내려다보며 마음이 아팠다. 피투성이가 된 등과 어깨로는 차마 시선이 가지도 못했다. 안쓰러움에 찌푸려지는 그의 미간을 보며 소소는 헛웃음을 흘렸다. 마음 한구석이 아림과 동시에 태형의 모든 것이 가증스럽게만 느껴졌다. 그녀가 태형에게 잡힌 제 손을 빼내었다. 작은 움직임에도 맞은 등이 쓰려와 그녀의 인상도 찌푸려졌다. 물기 어린 태형의 눈동자가 소소를 다시 올려다보았다.
“내 말을 다 들어준다 했지? 허면 내 묻는 말에도 답해 보아라. 애초에 왜 내게, 황후전에 온 것이냐.”
소소는 기억을 더듬어 태형이 제 눈앞에서 무릎 꿇은 날을 기억해 냈다. 정신없이 황제의 뒤를 따라가던 제 앞을 가로막곤 신이 마마를 사모한다는 겁 없는 고백을 뱉었다. 당돌한 별감의 그 말에 정신이 멍해지고 눈앞이 아뜩했다. 생전 처음으로 대가 없이 주어진 누군가의 마음이었다. 소소는 그게 참으로 버겁고 애틋하기만 했다. 태형을 볼 때마다 괜시리 마음이 욱신거렸던 것도 돌려받지도 못할 연정을 토하는 게 얼마나 아픈 일인지 스스로가 알았기 때문이었다.
“어찌하며 사모한다는 말로 내게 다가왔느냐 물었다.”
그에게 상처 주는 게 배로 속상해서 어떨 때는 얼굴을 보는 것조차 힘들었다. 그런데 그 연정이 거짓과 허상에 불구하다면, 애초에 대승상과 거짓으로 손잡기 위해 제게 접근한 것이라면… 그저 타버린 재처럼 허무하기 그지없었다. 억겁 같은 생도 결국 무형의 잔해뿐이었다.
“황제에게 외면당하는 황후전이라기에 날 휘두르는 것도 쉬워 보였니? 사모한다는 그 한마디에 내가 뭐든 다 해줄 것처럼, 그래서 진과 네 나라를 복위하는 데 힘을 써 줄 것처럼 그리 보였느냐?”
“소소 그건….”
쉬지 않고 날아드는 소소의 말에 태형이 마른침을 삼켰다. 그의 목소리는 어느새 형편없이 갈라져 있었다. 그녀의 말처럼, 처음 황후에게 다가간 것은 분명 의도적이었다. 태형은 황궁에 들어와 진의 유민들을 규합할 명분을 찾았고, 이를 위해 북방으로 가길 바랐다. 황후라는 높은 직위에, 대승상의 유일한 고명딸이라는 사실이 그녀에게 관심이 가게 만들었다. 그녀의 신의와 마음은 쉽게 얻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연모에 목마른 그녀는 쉽게 이용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처음 먹은 마음이 그래 태형은 스스로가 떳떳하지 못했다. 해서 쉽게 무어라 변명을 뱉을 수 없었다. 시작은 그러했지만 당신을 대하던 모든 마음은 진실이라고, 목숨도 내어놓을 수 있을 만큼 당신을 연모한다고, 서툰 고백도 못다했다. 소소가 그런 태형을 보곤 가소롭다는 듯이 웃었다.
“네가, 네 연모를 이용한 것이구나.”
“이용, 이용이라니요, 당치 않습니다. 마음만으로 당신께 다가간 것은 아니지만 연모하는 마음을 이용할 생각은, …추어도 없었습니다.”
가만히 소소의 말을 듣고 있던 태형이 처음으로 다급히 대꾸했다. 그마저도 자꾸만 목이 메여 힘겹게 흘러나왔다. 연모를 말하는 목소리가 거칠게도 떨려 왔다. 태형은 모든 게 다 거짓이어도 당신을 사모하는 마음만은 진심이었노라 말하고 싶었다. 그저 이용의 수단이 아니었다고, 연정이 오해받고 거짓이 되는 것은 견딜 수가 없었다. 염치없게도, 그 마음은 유구했고 여전히 그는 소소를 사랑했다. 소소가 그걸 알아주기 바랐다. 핏발이 서 붉어진 태형이 눈이 소소를 똑똑히 바라봤다. 그녀의 무정한 시선조차 다잡고자 애썼다. 소소는 몸을 지탱하는 것이 힘이 들어 침상을 간신히 짚었다. 몸이 힘든 것만큼 마음도 힘들었다.
“…소소 당신이 황후라서, 당신의 사람이 되게 해 달라 청했습니다. 황제의 마음을 얻지 못하는 당신이기에 그조차 쉬울 줄 알았습니다.”
“하.”
“허나 당신 곁에 있었던 매순간 진심이 아니었던 적이 없어요. 곁을 지킬수록 당신을 연모했고, 황제와 손잡는 그 순간까지도 당신만 마음에 걸렸습니다.”
“그걸 믿으라고?”
무력하게 떨리는 음성을 소소는 애써 무시했다. 소소는 자신이 울 것 같았다. 태형의 마음을 부정하는 것은 태형만큼 소소에게도 상처였다. 그럼에도 그녀는 태형을 몰아붙였다. 오라비를 잃고도 그를 놓지 못한다면 그게 더 죄악처럼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연모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신을 끝까지 원망하셔도 좋아요. 허나,”
“…….”
“허나, 은애하는 마음까지 거짓으로 치부하시는 것은… 견딜 수가 없습니다.”
말의 마지막을 뱉을 때 발음이 뭉개졌다. 그 연유를 알기 위해 얼굴을 보고 싶었지만 그러기 전에 태형은 소소의 허리에 제 이마를 기대었다. 의복이 축축하게 젖어 드는 게 느껴졌다. 소소가 깊은 한숨을 내뱉었다. 울고 싶은 건 자신인데, 어째서 태형이 이러는지 몰랐다. 이럴수록 자꾸만, 자꾸만 그가 하는 말이 진실이라 믿고 싶어졌다. 아직 시린 손으로 몸을 기대 우는 태형의 머리를 쓰다듬고 싶었다. 허나 소소는 마음을 다잡았다. 연민을 거두고 정을 버렸다. 소소가 차갑게 태형의 몸을 밀어냈다. 애틋하게도 옷자락을 쥐던 손이 놓였다. 소소는 그대로 그의 턱을 치켜들었다. 눈물에 짓물린 눈이 연약하게 떨리며 소소를 올려다보았다. 손끝이 닿은 것만으로 태형의 얼굴은 당황과 떨림으로 물들었다. 붉게 번진 눈이 가슴 아팠다.
“날 아직 은애해?”
“…….”
태형의 입술이 버석하게 말라갔다. 연모를 말하고 싶어 안달 난 얼굴이 소소를 더 버겁게 했다.
“허면 폐하를 쳐라.”
“…….”
“이미 한 번 한 배반을 두 번이라고 못하겠느냐. 이번엔 천자를 치고 그를 죽여보아라. 어찌 보면 폐하는 네 연적이 아니냐? 진의 복위에도 그게 더 좋을 테고.”
잠깐의 긴장과 기대에 물든 태형의 얼굴이 무너졌다. 비릿하게 미소 짓던 소소의 표정도 차차 굳어갔다. 태형이 입술만 달싹이며 아무런 말도 못 하자, 소소는 손을 다시 차갑게 거두었다. 태형이 떨어지는 그녀의 손을 붙잡고 싶었다. 마지막으로 쥘 수 있는 미련 같았다.
“못 하겠느냐?”
“…….”
“죽는 것도, 황제를 죽이는 것도 못하겠다면서 어찌 날 연모한다는 게지?”
“…소소.”
태형이 신음처럼 괴롭게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이미 헤지고 난도질당한 마음이 상처를 호소했다. 그래서 태형은 더 이상 소소를 마주할 수 없었다.
“…….”
“…….”
한참을 그녀를 눈에 담던 태형이 일어났다. 그리곤 느리게 돌아섰다. 뜨거운 마음이 잠식해서 온몸을 누르는 느낌이 들었다. 당장 그녀가 앞에 있는데, 마음이 불안해 그녀를 안고 싶은데, 그럴 수가 없었다. 태형은 속을 삭이며 머리를 거칠게 쓸어 넘겼다.
“…의원을 부르겠습니다. 가시더라도 치료는 꼭 받고 가십시오.”
그가 힘겹게 마른 침을 삼키는 게 느껴졌다. 소소는 아무런 답이 없었다. 적막하고 무거운 공기가 두 사람을 가로막았다. 손만 뻗으면 닿을 거리에 있었는데도, 천만 리 떨어져 있는 것처럼 멀게만 느껴졌다. 태형은 그저 숨이 멎고만 싶었다. 소소의 말처럼, 목숨으로 속죄를 하면 이 터질 것처럼 답답한 숨통이 조금이나마 트일까. 그럼에도 그의 어깨엔 진의 유민들의 미래와 누이가 달려 있었다. 죽는 것조차 그의 맘대로 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천천히 감은 눈을 짚던 태형이 그대로 누각을 나갔다.
/ 皇后列傳
붕대를 갈아주던 태의가 인상을 옅게 찌푸렸다. 폐후가 겨눈 칼날에 베인 황제의 어깨가 제법 곪아있었기 때문이었다. 전장에서도 이 정도의 자상은 입은 적 없던 황제였다. 태의는 폐후의 배포가 꽤나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가문이 역모를 일으켜 폐위된 처지에 이렇게 황제의 몸을 흠집 내었으니 말이다. 헌데도 황제는 그를 본 상궁 내관들을 철저히 입막음 시키고 폐후에게 아무런 죄도 묻지 않았다. 대체 그의 심중을 종잡을 수 없었다.
붕대를 다시 매는 동안 제법 고통이 강했던지 정국의 이가 세게 맞물렸다. 그런 정국의 눈치를 살피던 태의는 잡생각을 버리고 손을 더 빠르게 놀렸다.
“폐하!….”
그때 내시백이 다급하게 정국을 부르며 대명전 안으로 들어섰다. 붕대를 고정하고 다시 용포를 걸치던 정국의 눈썹이 미세하게 들렸다. 허나 내시백의 표정이 나름대로 급한 사안 같아 일단은 치료를 끝낸 태의를 먼저 내보냈다.
“무슨 일이냐.”
“그것이….”
용포의 매듭을 묶고, 앞에 놓인 찻잔을 들던 정국이 시선을 내시백에게 주었다.
“백재인마마가 폐하께서 다치신 것을 아신 모양입니다.”
거사가 끝난 후 태부와 또 무슨 계략을 꾸미는 것인지 대청전에서 나오지 않던 백야였다. 괜히 제 어깨가 다친 것을 알면 시끄러워질까 정국은 그 사실을 백야의 귀에도 절대 들어가지 못하게 했다. 헌데 백야가 그걸 알았다라. 또 골치 아파 지겠다고 생각한 정국은 한숨을 내쉬며 차를 한 번 음했다.
“그래서 백야가 짐을 알현하러 왔다는 것이냐?”
“그게 아니오라, 그 사실을 알자마자 액정궁으로 행차하셨다합니다.”
‘액정궁’이라는 말에 정국의 얼굴에 파문이 일었다. 내시백이 조용히 황제의 눈치를 살폈다. 예상대로 단단히 굳은 표정이 그의 심기를 말해주고 있었다. 어깨를 다친 이후로 한시도 평안한 적 없는 황제였다. 거기에 백야가 기름을 들이붓고 있었다.
“액정궁으로 가서 무얼 했느냐.”
“태감의 말로는… 소임을 다하지 못한 무수리를 훈육하겠다며 채찍을 가져왔다고 합니다.”
정국이 찻잔을 세게 내려놓았다. 옥음이 한층 낮았다.
“그 무수리가 소소인가?”
“그렇사옵니다….”
입밖으로 내지 못하던 이름을 기어코 백야가 불러왔다. 내시백의 답을 듣자마자 황제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허나 그가 걸음을 옮기기도 전에 내시백이 소리쳤다.
“폐하! 아니 되옵니다! 폐후가 액정궁으로 간 지 얼마나 되었다고 이리 갑작스레 냉궁에 행차하시면…. 황궁에 보는 눈이 많습니다.”
몸도 성치 않은 정국의 발걸음이 행할 곳을 예감한 내시백은 그 자리에 납작 엎드려 고했다. 천자의 냉철한 판단력을 믿어 의심치 않아 평소에는 간언 한마디 올리지 않았다. 허나 내시백은 지금만큼은 그를 중재해야만 옳다고 생각했다. 황제는 언제나 폐후와 관련된 일에는 판단력이 흐려졌다. 내시백도 그것을 잘 알았다. 황궁은 겉으로는 그 어느 곳보다 고요하고 평화로운 곳 같아도 살얼음판이 따로 없다. 황궁의 모든 눈과 귀가 황제의 행태를 주시하고 있었다. 가뜩이나 정계가 흉흉한 판국에 미끼를 물려주어선 안 되었다.
“…내시백.”
내시백의 뜻을 모르지 않는 황제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상처가 채 아물지 않아 몸이 고되었다. 그럼에도 액정궁의 소식을 듣고 차갑게 식은 머리는 도저히 진정되지 않았다.
“예, 폐하.”
“지금 당장 백야를 짐의 앞에 데려오라.”
제 손 안에 두기 위해 이 황궁에 있게 한 것이었다. 증오에 찬 소소의 눈동자가 낙인처럼 새겨져 잊히지 않아도, 그를 감내하고서라도 한 제 선택이었다. 백야 때문에 그것을 후회하고 싶지 않았다. 소소를 다치게 한다면 백야를 가만히 두지 않을 작정이었다. 황제의 명에 급하게 자리에서 몸을 일으킨 내시백이 대명전을 나갔다.
정국이 천천히 눈을 감았다. 대승상과 문하시중이 죽었고 태형을 주축으로 한 태보와, 백야를 앞세운 태부세력이 적절히 균형을 유지하며 권력을 나눠 쥐고 있었다. 이는 황제가 거사를 계획할 때부터 꿈꿔왔던 판도였다. 단 하나의 변수이자, 유일한 난제인 액정궁의 소소를 제외하고는 황제의 신경을 건드릴 일이 없었다. 정국은 그럼에도 그녀는 어깨에 새겨진 자상처럼 벗을 수 없는 굴레라고 생각했다. 폐후가 감히 천자의 몸에 칼날을 박아 넣어도, 바뀔 수 없는 불가항력이라고 생각했다. 어깨가 아니라 가슴이 욱신거리는 통증이 그를 증명했다. 그녀의 일이면 이성이 흐려지고 마음이 앞섰다. 그래서 행복하게 만들지는 못하더라도 제 곁에 두고 싶었다. 이기적이고 복잡한 감정이 황제를 갉아먹는 가운데 오늘 같은 백야의 행동은 정국을 충분히 자극할 만했다. 더 이상 폐후와 관련된 일을 좌시하지 않을 것이라 황제가 마음먹었기 때문이었다.
“폐하, 백재인 마마께서 오셨습니다.”
“들라.”
잠시 뒤 백야를 데려온 내시백의 음성이 들렸다. 정국은 어깨를 감싸 쥐고 다시 침상에 앉았다. 긴장한 낯빛의 백야가 천천히 걸어 들어왔다. 그녀가 천천히 눈을 들어 정국을 보았다. 정국의 가라앉은 눈동자도 백야를 향했다. 백야는 자신이 액정궁에 가서 한 행태를 그가 모다 알고 있다는 것을 직감했다. 정신이 아찔했다.
“폐하.”
“꿇어라.”
황제의 낮은 목소리에 백야가 서둘러 치맛자락을 움켜쥐고 그의 앞에 부복했다. 폐후를 위해 제게 독까지 삼키게 했던 황제다. 그가 얼마나 화가 난 상태인지 백야는 느낄 수 있었다. 성화와 같은 천자의 분노는 재앙이었다. 이런 것을 예상하지 못하고 저지른 일은 아니지만 직접 겪게되자 눈 앞이 아뜩했다.
“어찌하여 액정궁에 간 것이냐.”
“폐하….”
“앞전에 짐이 잘 알아듣게 이야기했다고 생각했는데, 틀렸느냐? 어찌해서 폐후를 건드렸느냐!”
황제의 호통에 백야가 두 눈을 질끈 감았다. 황제의 말에 비정하게도 그가 제 목을 조르던 그때의 기억이 떠올라서였다. 폐후가 감히 천자를 해한 것도 눈감아준 그가, 제게는 매섭게 질책하고 제 행동을 꾸짖었다. 백야는 서러웠다. 이미 황후의 친족을 모두 앗아가 놓고, 어찌해서 그 한 자락 미련만은 놓지 못하는지 정국이 원망스럽기만 했다. 백야는 황제가 두려웠으나 동시에 고달팠다. 이제는 잃어야 할 것도 없었다. 그래서 겁도 없이 질책을 받는 와중에 입을 열었다.
“…그 계집은 더 이상 폐하의 황후가 아니옵니다.”
“뭐라?”
“한낱 무수리일 뿐이옵니다. 폐하의 후궁이 고작 무수리 하나 벌하였다고 어찌 이리 화를 내십니까.”
겁을 내면서도 제 할 말을 멈추지 않았다. 백야의 당돌한 말에 정국은 조소했다.
“그 아이가 한낱 무수리가 아니라는 것은 백야, 네가 가장 잘 알 터인데.”
“폐하께서 그리 만드셨지 않습니까.”
“…….”
“폐하의 손으로 가문을 멸하시고 제게 수모당해도 아무도 뭐라할 수 없는 신분에 그 계집을 밀어 넣으셨습니다. 헌데 어찌, 어찌 신첩에게 책임을 돌리시는 것입니까?”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르고 설치는 꼴을 조소하며 관망하던 황제가 동요했다. 백야의 목소리가 떨려왔다. 헌데도 멈출 수 없었다. 제가 지금 뱉고 있는 말이 황제의 무엇을 건드리는 말인지 알면서도.
“폐하의 여인은 신첩입니다! 수렁에 빠진 그 천한 계집이 아니라…, 신첩입니다.”
“백야.”
“모두 폐하께서 만드신 일입니다. 그 아일 내치는 대신에 신첩을 택하셨습니다. 연정을 지키는 것 대신에 용상을 택하셨습니다.”
“…….”
“그러니 이제 버리셔야지요…, 손에서도 마음에서도 놓으셔야지요….”
그동안 쌓였던 섭섭함이 터져 백야의 거의 흐느끼며 말했다. 정국은 그 무엄한 질타에도 아무런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소소를 수렁에 밀어 넣은 것이 자신이다. 그 말에 소소의 음성이 겹쳤다. 참으로 이기적이고 편협하다고 원망하던 그녀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정국도 알았다. 끝까지 놓지 못한 것도 자신의 욕심이라는 것을. 자신을 마주할 수록, 황궁에 남을 수록 지금처럼 소소의 고통은 더욱 커질 것이라는 것을. 그럼에도 였다. 그럼에도.
“선황의 유언, 제국의 안녕, 백성의 안위. 짐이 이 모든 것을 책임져야 한다면, 그래서 마음 가는대로 살 수 없다면, …내게도 어느 하나쯤은 허락되어야지."
“…….”
"그 하나는 내 것이어야지. 그래야 옳지.”
“…….”
“아니 그러하냐? 백야.”
부황에게 왜 대승상의 여식을 살렸느냐고 뺨을 맞았을 때부터, 아니 숨 막히는 황궁이 싫어 피 냄새 낭자한 전장을 전전할 때부터 정국은 제 마음대로 할 수 있었던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하물며 보고 싶을 때 황후전을 찾는 것조차 허락되지 않았다. 대승상을 견제해야하니까. 그에게 더한 힘을 실어줄 수는 없으니까. 수많은 밤을 곁에 두고도 그리움에 속이 닳았다. 정국은 이제 그게 신물이 났다.
백야가 멍하게 정국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허탈한 웃음을 내뱉는 황제가 왜인지 눈물을 흘리고 있는 자신보다 더 슬프게만 보였다. 그래서 아무런 대꾸도 할 수 없었다. 자신이 정국의 속살 같은 진심을, 알고 싶지 않던 마음을 건드린 것 같아 더없이 무력했다.
“설령 그 아이의 칼이 다음번엔 내 목을 겨누더라도, 내 것임에는 변함이 없다. 황후는 짐이 확신한 처음이자 마지막 선택이다.”
“…폐하.”
“백야. 마지막으로 경고하지.”
잠시 보였던 연약함이란 백야의 우매한 착각이었다는 듯이 정국의 목소리는 다시금 단단해졌다. 그 누구도 거역할 수 없는 천자의 명, 틀림없었다.
“짐의 여인에게 다시 한 번 손을 댄다면 그때는 네 목을 칠 것이다.”
“…….”
“알겠느냐?”
마주한 시선 속 그 말은 진심이었다. 백야가 그 자리에서 허망하게 주저앉았다. 정인의 그 무정한 명이 그녀를 끝내 무력하게 만들었다.
三十一
공태감은 소소가 그 지경이 되도록 보고만 있었던 것에 대해 죄책감이라도 느낀 것인지, 다시 액정궁으로 돌아온 소소에게 아무런 질책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상처가 아물 때까지 쉴 수 있도록 편의를 봐 주었다. 소소는 이미 다른 무수리들의 적의 어린 시선을 받는 와중에 이러한 특혜까지 누릴 생각은 없었지만, 며칠 정도는 정말 움직일 수도 없이 아파 누워만 있었다. 가끔 가혜나 용아가 미음을 툭툭 던지며 짜증난다는 눈빛을 쏘아댔다. 그러나 지난 번 손목을 그었던 일 때문인지 쉽사리 불만을 토하지는 못했다. 소소는 그들에게 미리 경고해두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미움은 받을지언정 시끄러운 일은 없을 것이니 말이다.
무수리들이 대놓고 소소를 괴롭히진 않았지만 이번에는 새로운 화두가 불을 지폈다. 이는 바로 폐후인 소소와 연호부령이 된 태형 사이의 염문이었다. 백야에게서 소소를 구해 안아들고 가던 뒷모습을 기억하는 무수리들은 모일 때마다 연신 그 얘기를 수군거렸다.
“그건 단순히 충심만으로 되는 게 아냐. 역모를 처단한 공도 인정받았고 연호부령까지 됐으면 앞으로 출셋길 탄탄대로인데, 애초에 뭐하러 옛 주인을 찾아와?”
“헌데 폐후의 혈족을 죽이는 데 앞장 선 게 그 자 아니야? 가문을 멸한 자인데, 그런 자와 사통이라니….”
“그러니 환장하겠다는 거 아냐! 이뤄져선 안 되는 사인데, 마음은 이미 깊어진 걸 어떡해! 사내는 얼씬도 못하는 액정궁에 들어와서, 감히 폐하의 후궁도 밀치고 구했는데 이게 연모가 아니면 무어냔 말이야.”
일과를 마치고 이불을 펴며 혼의방 무수리들이 서로서로 목소리를 높였다. 마치 염정소설을 읽는 마냥 몰입해 소리치는 통에 잠깐 잠이 들어선 소소의 정신도 돌아올 정도였다. 소소가 눈을 뜨자 잔뜩 흥분해서 웅성거리던 무수리들은 합이라도 맞춘 양 입을 다물었다. 그러나 소소는 이미 그들이 떠들어댄 이야기를 모두 들은 이후였다. 소소의 입에서 미약한 실소가 흘러나왔다. 하물며 액정궁에까지 이러한 이야기가 나돌 줄은 몰랐다. 이 정도면 자신을 제외한 모두가 태형의 마음을 연모라 인정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머리가 아팠다. 그녀가 누운 자리에서 일어나려 몸을 일으켰다. 일련의 행동에 가혜를 비롯한 무수리들이 흠칫했다. 소소는 그런 반응에도 의연히 그들을 향해 버석하게 마른 입술을 열었다.
“황궁에는 숨은 귀가 많아 어떤 은밀한 소리던 다 엿듣는다 하던데, 너희들은 내가 당장이라도 처형당해 죽었으면 싶은가 보지?”
“뭐, 뭐가?”
“그래, 연호부령이다. 그런 자와 폐후의 사통이라… 과연 이 일로 나만 죽겠느냐.”
“…….”
“아니면, 겁도 없이 사통을 입에 올린 너희들도 함께 죽겠느냐?”
가혜의 입술이 굳게 다물렸다. 대꾸하고 싶지만 할 말이 없어 꾹 다문 입술만 실룩였다. 무수리들의 목숨은 바람에 낙엽보다 가볍고 천한 존재다. 소소의 말처럼 그들이 떠들던 염문이 사실이라 할지라도 감히 배덕한 사통을 입에 올린 죄로 목숨을 잃을지도 몰랐다. 이 염문이 더 자극적이고 흥미로웠던 이유는 무수리들도 그걸 알았기 때문이었다. 들키면 경을 칠 것이라는 걸 알기에, 목소리를 낮추고 은밀하게 수군거리는 것이었다.
“고작 염문 때문에 죽기엔 목숨이 아깝지 않아?”
“….”
“아예 멍청한 것은 아니니 내 말은 알아들었다고 생각하마.”
서로 불안한 눈빛을 주고받는 무수리들을 무시한 채 소소는 이부자리를 갰다. 사흘이면 많이도 쉬었으니 이젠 일어나 밥값을 해야 했다. 여전히 움직일 때마다 맞은 등이 미세하게 아려왔으나 입술을 다물고 감내했다. 해서 겉으로 보기에 그녀는 며칠을 앓은 사람답지 않게 멀쩡해보였다. 침묵이 내려앉은 혼의방에서 침상과 의복 정리를 마친 소소가 비로소 일어났다. 그리곤 무리 지어 앉아있는 무수리들에게로 시선을 던졌다.
“그리고 너희들의 추측이 틀렸다.”
“….”
“그것은 연모가 아니야. 내 가문을 멸문시킨 죄책감을 덜고자 내게 적선을 하고자 하는 것이지.”
소소의 음성이 나직하게도 내려앉았다. 그녀의 눈이 생기 하나 없이 무정해서 무수리들은 그 말에 어떤 대꾸도 할 수 없었다. 침묵을 견디다 못한 가혜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아무리 생각해도 저 폐후의 당당한 눈빛에 자꾸만 주도권을 빼앗기는 것 같단 말이야. 염문으로 인해 경을 치는 것은 치는 것이고, 저 뻔뻔한 계집을 못살게 구는 것은 못살게 구는 것이었다. 흔들리던 눈빛을 다잡고 소소를 노려보았다. 가혜는 여전히 소소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래. 이제 입신양명만 남은 연호부령이 미쳤다고 너 따위를 연모하겠니.”
아까는 연모가 틀림없다고 수군거리더니 이제는 그것을 부정했다. 뻔뻔스레 말을 번복한 가혜가 소소를 쏘아보았다.
“너도 이만큼 쉬었으면 일을 해야지? 상궁마마들의 의복 빨래를 할 시간이야. 빨래터로 어서 따라오기나 해.”
톡 쏘듯 제 할 말을 내뱉은 가혜가 먼저 저벅저벅 문밖으로 걸어 나갔다. 눈치 보던 다른 무수리들도 일제히 그녀의 뒤를 따랐다. 잠시 그곳에 서있던 소소도 발을 움직였다. 가혜가 아니면 소소는 빨래터가 어디 있는지 알 길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가혜는 빠른 걸음으로 액정궁을 나섰다. 수도승을 속세에서 분리해놓듯, 액정궁을 황궁에서 분리해놓은 문을 넘었다. 빨래터가 위치한 곳은 웃전의 처소와는 꽤나 먼 곳에 떨어져있는 세답방 근처였다. 가혜와 무리들을 따라 오랜 시간을 걸어 나가니 황궁 뒤 산에서부터 흘러나오는 시내와 연결된 큰 빨래터가 보였다. 수류 가장자리의 큰 소쿠리에는 상궁들이 입는 의복과 적삼이 가득했다. 그걸 보고 가혜는 입꼬리를 끌어 천천히 웃었다.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함부로 저 계집에게 손을 썼다가는, 그때처럼 제 손목을 그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되면 벌을 받는 것은 자신이 될 터였다. 해서 그녀는 소소를 다른 방식으로, 눈에 띄지 않게 서서히 말려죽일 생각이었다. 그게 혼의방만의 질서고 규칙이라고, 가혜는 생각했다.
“네가 누워 쉬는 동안 다른 일감이 밀려, 우린 그걸 하러 가야해.”
“그래서?”
“유시까지 다 빨아놔.”
태연한 가혜의 말에 소소가 어이가 없다는 듯이 웃었다. 빨래를 해본 적은 없지만 저 양은 누가 봐도 홀로 유시까지 다 할 수 있는 양이 아니었다. 이런 식으로 건드리는 방식을 바꾼 건가. 유치하기 짝이 없었다. 마치 백야가 하던 짓이 떠올랐다.
“하지 못하면?”
“태감어른께 혼이 나겠지.”
가혜가 깔깔 웃음을 터뜨렸다. 용아도 입을 가리며 웃었다. 이마를 잠시 짚던 소소가 대꾸하기를 포기하고, 그녀들을 향해 손을 휘휘 저었다. 도와주지 않을 거면 빨리 꺼지란 말이었다. 능력도 없으면서 자존심은. 그 행동에 잠시 표정을 일그러뜨리던 가혜가 어차피 못할 것이란 악담을 늘어놓으며 휙 돌아섰다. 그리고는 걸음을 옮겼다. 그녀를 뒤따르는 무수리들은 끝까지 저들끼리 소소를 힐끔힐끔 돌아보며 큭큭댔다. 소소는 신경도 쓰지 않고 머리를 쓸었다.
소소가 소매를 걷으며 일감을 향해 갔다. 가까이서 보자 양이 더 많았다. 불행 중 다행이라면 웃전의 옷감과는 달리 상궁들의 옷감은 그리 심혈을 기울여 세탁할 만큼 비싼 옷감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한숨을 내쉰 소소가 우선 첫 번째 바구니를 가지고 돌다리에 올라 시내 가운데로 왔다. 세답방망이를 비롯한 빨래도구는 그 옆에 놓여 있었다. 분명 여러명이 할 수 있게 많은 양이 있었는데 안타깝게도 소소는 지금 혼자였다. 하는 수 없이 그걸 쥐고 먼저 의복을 흐르는 물에 적셨다. 빨래라곤 생전 해본 적 없는 소소는 그마저도 서툴렀다. 이젠… 이걸 두드리면 되는 건가. 대충 예전에 눈으로 봤던 것을 떠올리며, 방망이로 적신 의복을 두드렸다. 돌과 나무가 닿으며 쾅쾅 커다란 소리가 빨래터를 울렸다. 돌을 치는 손목이 시리게 아팠다. 이렇게 하는 것이 맞나. 소소가 인상을 찡그렸다. 적어도 숱한 잡일 정도는 미리 익혀둘 것을 그랬다. 이렇게 해서 어느 세월에 저걸 다 끝낸단 말인가. 옷감이 깨끗해지고 있는지도 의문이었다.
“빨래를 하시는 겁니까, 화풀이를 하시는 겁니까?”
한참을 빨랫감과 씨름을 하고 있을 무렵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소소가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눈이 놀란 듯이 팽창되었다. 반색인지 아니면 단순한 놀람인지, 그도 아니면 기다림이었는지 모를 얼굴로, 소소는 제 앞의 지민을 잠시 바라보았다. 참으로 오랜만에 마주하는 얼굴이었다.
“익위사.”
“이제 신은 익위사가 아니라는 것을 아시지 않습니까.”
지민이 작게 웃으며 말했다. 소소는 몰랐다. 지민의 웃음이 얼마나 보기 드물고, 무거운 것인지. 그러니 의연하게 그 표정을 놓치고, 말에 담긴 의미부터 파악하려 들겠지. 지민은 대승상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 소소를 황후전에서 나오지 못하게 막는 것이 황제로부터 받은 명이었다. 그러나 소소가 자기 파편을 제 목에 가져다 대고 겁박한 탓에 그녀를 그대로 보내주었다. 황제는 소소를 지키지 못한 벌로 지민을 익위사에서 제명했다. 그는 다시 병부로 돌아갔다. 정국은 조정이 잠잠해질 때까지만 거기서 버티라 하였으나, 지민은 나름대로 지금의 생활에 만족하고 있었다. 단 하나, 소소의 소식을 늦게 알 수 있다는 것만 빼고. 소소가 액정궁으로 가게 되었다는 소식을 지민은 이레 전에야 들을 수 있었다. 그 사실을 알았을 때 지민은 바로 아래 병사들을 훈련 중이던 목검을 버리고, 액정궁으로 달려오고 싶었다. 허나 그럴 수 없었다. 어차피 가도 도움 하나 줄 수 없을 것이란 생각 때문이었다. 자신은 일개 익위사, 일개 병부시관에 불과하니까. 전에도 자신이 소소를 보내준 탓에 반란과 엮여 그녀가 곤란하게 되었다. 지금도 자신이 찾아갔다간 그녀에게 피해를 줄 것이란 생각에 지민은 자신을 억누르고 달랬다. 헌데 끝내 이렇게, 소소에게 오고야 말았다. 풍랑처럼 어지럽던 마음속이 그녀를 눈에 담자 파란이 아물고 고요해졌다. 신기한 노릇이었다.
“그러는 너도, 이미 폐후가 된 내게 존대를 하고 있지 않니?”
“…….”
“허니 나도 널 계속 익위사라 부를 것이다.”
그 고집은 정말 변함이 없다. 지민은 다시 한 번 저항 없이 웃고야 말았다. 그가 천천히 다가가 소소의 옆에 앉았다. 시내를 따라 졸졸 흐르는 물소리가 귓전을 청명하게 울렸다.
“액정궁은 일이 많고 고되기로 유명하다던데, 빨래 하나 못하셔서 어찌합니까.”
지민이 소소의 손에 있던 의복과 방망이를 앗아 들었다. 마냥 젖은 옷감을 돌 위에 얹고 두드리던 소소와 달리, 지민은 천천히 옷감끼리 충분히 물살에 겹치고 적셔가며 두드렸다.
“병부에서 네게 허드렛일만 시켰느냐?”
노련한 모습을 빤히 보던 소소가 대뜸 질문했다. 지민은 순간 황당하다는 얼굴로 소소를 바라보았다. 너무 어이가 없어서 할 말을 잃었다. 뻔한 칭찬을 할 줄 알았는데, 역시 종잡을 수가 없는 사람이었다.
“그게 무슨….”
“분명 넌 전장과 황궁에서만 평생을 보냈을 텐데, 어찌 이리 잘한단 말이냐.”
생각보다 단순한 소소의 사고에 지민은 얼굴을 쓸며 웃었다.
“전장에서 오랜 시간을 보냈기에 이리 능합니다. 그곳에선 피 묻은 옷을 직접 빨아 다시 입어야 하거든요. 전쟁이 길어질수록 더합니다.”
지민의 말에 소소가 그렇구나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헌데 이걸 혼자 다 하셔야합니까?”
“그렇게 되었구나.”
아무렇지 소소의 대답에 지민이 의아한 얼굴을 했다. 보아하니 액정궁 내에서도 소소를 안 좋게 보는 시선들이 많은 것 같았다. 허니 이 많은 빨래감을 홀로 떠맡고 있는 것이겠지.
“걱정마라. 이걸 다 못한다고 죽진 않을 것이니.”
자신 있게 말하는 소소에 지민은 걱정스러운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소소의 시선도 잠시 지민을 향했다. 참으로 오랜만이었다. 덕분에 눈이 마주치면 항상 시선을 내렸던 지민은 지금은 그조차 잊어버렸다.
“미안하구나.”
물끄러미 시선을 던지던 소소가 입을 열었다. 그 음성은 금방이라도 물소리에 흩어질 듯이 나긋했다.
“…무엇이 말입니까.”
가슴께가 욱신거렸다. 지민은 처음 그녀가 제 목을 그러안고 숨결을 불어넣었던 그때부터, 이리될 줄 알고 있었다. 전보다 야윈 얼굴에 아파할 거라는 것을. 칼날이 육신을 헤치고 지나갈 때보다 더 앓게 될 것이라는 걸.
“날 보내주는 바람에 익위사 네가 곤란해지지 않았느냐.”
“….”
소소의 차분한 말에 지민은 씁쓸하게 웃으며 고개를 떨구었다. 자신은 이렇게 사과를 받을 자격이 없었다. 그때 소소를 보내준 것은 그녀를 위한 일이 아니었다. 진정으로 그녀를 위했다면 보내주어선 안되었다. 정신을 놓게 해서라도 붙잡아 두었어야 했다. 허나 지민은, 소소가 파편으로 제 목에 흠집을 내었던 순간 사고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 그녀가 울 때면, 자신을 상하게 할 때면 머리가 돌아가지 않았다. 본능대로만 행동했다. 그러니 익위사에서 제명된 것은 소소의 탓이 아니라 제 탓이었다. 지민은 작게 당치 않습니다 하고 읊조렸다.
“액정궁은 지낼만 하십니까?”
그 일로는 할 말이 남지 않아 지민은 화제를 돌렸다. 정국이 처음 소소를 액정궁으로 보낸다고 하였을 때, 지민은 당장이라도 알현을 청해 황제에게 제정신이냐 따져 묻고 싶었다. 냉궁 중에 냉궁이라던 액정궁은 소소가 버티기 쉽지 않을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었다. 허나 소소는 나름대로 견디고 있는 듯해 보였다.
“이곳도 사람 사는 곳이니 아무렴.”
소소가 의연하게 대답했다. 아비와 오라비를 눈앞에서 잃은 그녀는 어차피 살아있는 동안은 모든 곳이 지옥이리라 생각했다. 그녀에겐 모든 곳이 똑같았다. 허나 액정궁은 몸이라도 고되니 생각을 잊을 수 있어 좋았다. 또한 황제를 볼 일도 없으니, 원치 않게 마음이 무너질 일도 없었다. 황제는 당장 얼굴을 떠올려도 속이 쓰렸다. 잠깐의 표정을 읽은 지민이 소소의 눈치를 보며 입을 열었다.
“이리 살게 두시지 않을 겁니다.”
누가 그렇게 할 것이라는 건지는 말하지 않았다. 허나 소소는 알 수 있었다. 지민이 황제를 말하고 있다는 것을.
“폐하께서 정녕 내가 자결하기를 바라신다면 다시 제 곁으로 부르시겠지.”
“마마….”
메말라버린 얼굴로 그리 말하는 소소에 지민이 인상을 조였다. 사랑하는 여인이 제 마음에 두었던 사내를 완전히 놓아버렸다는 얼굴을 하는데도 전혀 기쁘지 않았다. 그녀의 마음이 지옥이라는 것이, 사내로서의 투기보다 더 고통스러웠기 때문이었다. 지민은 황제가 원망스러웠다. 소소의 정인으로 사는 대신, 비정한 군주가 되길 선택한 정국이 야속했다. 그 마음은 자신 같은 이는 아무리 원해도 얻을 수 없는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떠나 드리겠습니다.”
소소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지민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 말에 소소가 고개를 들어 지민의 얼굴을 바라봤다. 굳은 신의를 보이는 그의 표정이 무엇보다 단단했다.
“…….”
“마마께서 액정궁이 싫다 하시면, 황궁이 지겹다 하시면 신이 언제든 마마와 함께 떠나드리겠습니다.”
충신의 입에서 제 주군을 두고 황궁을 떠나겠다는 말이 나왔다. 소소가 쓰게 웃었다. 허나 지민은 허튼 소리가 아니었다. 그녀가 함께라면 평생을 쥐었던 검을 손에서 놓아도, 목숨도 바칠 수 있는 주군을 마음에서 놓아도 아깝지 않을 것 같았다. 설령 마음을 주지 않아도 좋고, 손길을 주지 않아도 좋으니 소소가 아프지만 않았으면 했다. 자신은 그저 입술 한 번 닿았던 그때의 기억으로 평생을 살아도 좋으니, 울지 않았으면 했다.
“더이상 누군가를 불행하게 만들고 싶지 않구나.”
“…….”
“나는 익위사 네가 불행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지민의 눈동자가 옅게 떨렸다. 마음이 일렁여 괜시리 손으로 얼굴을 쓸어 만졌다. 소소는 그리 많은 짐을 짊어지고 있으면서도 여전히 다정하고 사무치게 애틋했다. 지민은 왜 자신이 이렇게 되었는지 다시 한 번 깨닫고야 말았다.
“나중에 마음을 바꾸셔도 좋습니다.”
그래서 기어코 기다리겠노라고, 언제가 되어도 좋다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 소소는 옅은 미소를 흘리며 눈길을 거두었다. 그녀도 지민이 진심이라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 황 후 열 전
유시가 다 되어갔다. 가혜와 용아를 비롯한 무수리들은 잠시 혼의방에 앉아 쉬다가, 시간이 다 되자 빨래터로 향했다.
“다 못했겠지?”
“당연하지. 그게 며칠 치 일감인데 저 혼자는 절대 못해.”
서로 수군대며 빨래터에 도착하자 그 중앙에서 열심히 옷감을 두드리고 있는 소소가 보였다. 훈련시간이 다 된 지민이 간 이후로도 몇 시진째 그 자세 그대로 일을 했다. 덕분에 이마에는 식은땀이 송글송글 맺히고 머리는 흐트러져 잔머리가 시간을 간지럽히고 있었다. 팔짱을 끼고 선 가혜가 빨랫감을 천천히 훑었다. 지민의 도움으로 다는 아니지만 제법 많은 양을 빨아놓았다. 살짝 놀란 얼굴의 용아가 가혜의 팔을 툭툭 쳤다. 열심히 손을 놀리다 그들을 발견한 소소가 고개를 들었다.
“거의 다 끝나가니 조금만 기다려.”
두드리는 것을 멈추지 않고 소소가 말했다. 가혜와 소소가 눈이 마주쳤다. 잠시 그녀를 바라보던 가혜가 깔깔 웃음을 터뜨렸다.
“됐어. 어차피 사흘치 옷감이니까.”
“뭐?”
“상궁마마님들 의복이 그거 하나뿐이겠니? 사흘 뒤까지만 가져다주면 되니까 그만하라고.”
태연하고 당당한 가혜의 말에 순식간에 얼이 빠진 소소는 손에 쥐고 있던 옷감을 놓았다. 너무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도 나오지 않았다. 아까는 유시까지 모두 빨아 태감에게 검사를 맡아야한다고 지껄이던 가혜였다. 저 아이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은 자신이 잘못이라 생각했으나 열이 뻗치는 것은 어찌할 수 없었다. 곤히 숨을 뱉는 소소를 쳐다보던 가혜와 무수리들은 숨죽여 웃었다.
“유시까지 해야 한다고 했잖아.”
“내가? 일은 무엇이든 빨리 끝내놓으면 좋으니 그리 말한 것이지. 언제 못하면 죽는다 했니? 그래도 제법 많이 했구나. 나머진 네가 내일 자고 일어나서 하면 되겠어. 그렇지?”
“…….”
애초에 자신을 골탕 먹이기 위한 계획이었음을 알아차린 소소는 더 따질 기운도 없어 입을 다물었다. 가혜는 이겼다는 듯이 눈썹을 슬쩍 들어 올렸다. 소소는 지금만큼은 백야보다 저 작은 아이가 더 얄밉다고 생각했다.
“저녁 시간이니 얼른 처소에나 들어와.”
“괜히 늦어서 쫄쫄 굶지 말고.”
가혜의 말에 장난스레 덧붙이던 용아도 그녀의 뒤를 졸졸 따라갔다. 소소가 입술을 깨물고 세답방망이를 던지듯 놓았다. 그리고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한참을 몸을 굽힌 자세로 앉아 있었더니 관절 마디마디가 뒤틀리는 느낌이었다. 지금까지 시간에 맞추느라 정신없이 일했던 시간이 헛일처럼 느껴졌다. 허망했다. 그러나 저들의 말처럼 지체할 수는 없어 물이 튀긴 치맛자락을 천천히 털고는 걸음을 옮겼다. 태연자약한 혼의방 아이들의 얼굴을 다시 마주하는 것이 싫었지만 갈 곳이 그곳뿐이니 어쩔 수는 없었다. 왔던 길을 다시 걸어 반나절 만에 혼의방에 도착했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이미 자기 자리에 앉아 저녁끼니를 먹고 있는 무수리들이 있었다. 힐끗대는 그들의 시선을 무시하고 소소가 제 자리를 찾아왔다. 놓여진 밥을 보기도 전에 일단 빨리 몸을 뉘이고 쉬고 싶어 자리에 앉았다.
“…….”
소소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본능적으로 가장 먼저 느껴지는 축축함과 차가움. 순식간에 불편하고 꺼림칙한 감각에 휩싸였다. 온종일 몸을 혹사하다 왔더니 반기는 것이 이거라니. 소소의 자리와 이불이 죄다 젖어있었다. 누가 일부러 오물이라도 뒤집어씌운 것처럼 불쾌한 냄새 또한 코를 찔렀다. 소소의 일그러지는 표정에 그녀의 반응을 훔쳐보던 무수리들이 숨죽여 웃음을 터뜨렸다. 소소는 천천히 시선을 들어 가혜 쪽을 바라보았다. 그녀도 소소를 보고 있었던 것인지 눈이 마주쳤다. 가혜는 무슨 문제라도 있냐고 묻는 듯이 태연한 낯짝으로 반문했다. 분명 전에 경고를 해줬었다고 생각하는데, 그게 아니었나. 하는 짓들이 유치하다 못해 도를 넘었다. 소소는 제 인내가 짧다고 생각했다.
“혼의방 다 있느냐?”
한참동안 둘의 시선이 맞물리다 소소가 입을 떼기도 전에, 밖에서부터 공태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무수리들이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혜에게서 시선을 놓지 않은 소소도 천천히 그들을 따라 일어났다. 공태감이 들었다.
“태감어른, 유시(酉時) 혼의방 전부 있사옵니다.”
방장인 가혜가 중앙으로 가서 점오를 했다. 태감은 잠시 혼의방 무수리들을 눈으로 훑은 후에 고개를 끄덕였다. 소소는 애써 아무런 내색도 하지 않았다.
“그래. 내일은 서국(徐國)에서 사신들이 오는 날이다. 매년 그랬듯이 사신들은 예부에서 마련한 별채에 묵을 것이고, 대부인(大夫人)들은 우리 액정궁이 맡아 모셔야 한다.”
이맘때면 주나라의 부마국에서는 사신들이 공물을 가지고 온다. 올해는 가장 먼저 시작을 끊는 것이 서국(徐國)이 될 모양이었다. 아무리 조공을 받는 나라라 하나 변방의 안정을 위해서는 그 사신들에게도 적절한 예우를 다해야 했다. 그래서 예부는 그 전부터 사신 맞이로 분주했다. 사신들의 내자(內子)인 대부인들은 액정궁 안의 가장 큰 처소를 내어주고, 액정궁 무수리들이 수발을 들게 했다. 그래서 이 즈음이면 예부와 함께 가장 바빠지는 것이 이 액정궁이었다.
“대부인들이 보름동안 편히 쉬실 수 있게 각별히 정성을 다해야 할 것이야.”
“예, 태감어른.”
“내일 묘시가 되면 늦지 않게 집합해 처소를 청소하고, 음식을 준비해라. 알겠느냐.”
“예.”
태감의 명에 대답하는 무수리들의 얼굴에는 화색이 가득했다. 대부인들을 모시는 것이 매우 바쁘고 까다로운 일이긴 했으나, 그들은 일 잘하는 무수리에게 섭섭지 않게 포상을 내렸다. 심지어 제 마음에 드는 아이가 있으면 사신행차가 끝난 후 돌아갈 때 속량시켜 직접 데리고 가기도 했다. 사신들의 사노비가 되는 것은 이 액정궁에서 무수리로 평생을 사는 것보다 훨씬 나은 일이었다. 사가의 일은 덜 고되고, 때가 되면 혼인도 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무수리들은 일 년을 손꼽아 사신행차만 기다렸다. 올해는 반드시 대부인마님의 눈에 들어 황궁을 뜨고 말겠다는 다짐을 한 가혜가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그러나 태감이 나간 후 제 앞에 다가온 소소를 보고 그 표정은 금세 굳고 말았다. 살짝 당황한 기색의 가혜가 새초롬한 시선을 던졌다.
“뭐야?”
“할 얘기가 있지 않나?”
“…난 없는데.”
이야기를 회피한 가혜는 뻔뻔하게 자리를 정리하며 다른 체를 했다.
“그때처럼 큰 소리를 내야 할 말이 생기겠느냐?”
소소는 때를 놓치지 않고 다시금 입을 열었다. 그 말에 가혜의 머릿속에는 지난 일이 스쳐지나갔다. 소소가 제 팔을 그어 혼의방이 온통 시끄러워진 일. 젠장. 내일 당장 중요한 사신행차가 있는데 저 계집 때문에 모든 것을 수포로 돌릴 수는 없었다. 하는 수 없어진 가혜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 꼴을 지켜보던 소소가 먼저 혼의방을 나섰다. 가혜가 그 뒤를 따라갈 때까지 처소 안에서는 다른 무수리들이 침을 꼴깍 삼키는 소리만 들렸다.
소소는 혼의방과 옆 무수리들이 쓰는 방 사이 창고로 들어갔다. 가혜가 따라 들어가며 처소 문을 닫았다. 먼저 걷던 소소가 몸을 돌려 가혜를 마주했다.
“네 짓이지?”
가타부타 말도 없이 들어오는 질문에 가혜가 태연하게 어깨를 으쓱였다.
“뭐가?”
“굳이 그 수고까지 해가며 나를 못살게 구는 연유가 무엇이냐?”
가혜의 반문에도, 범인이 가혜임을 확정지은 소소는 진심으로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물었다. 그 질문에 표정을 구긴 가혜는 헛웃음을 내뱉었다. 싫은 것에는 이유가 없었지만, 명분을 만들라면 그게 무엇이든 만들 수 있다. 세상물정 모르는 폐후는 그러한 이치에 대해선 잘 모르겠지만.
가혜(佳慧) 그 아이는 열 살이 되던 해에 제 아비가 조세를 내지 못해 대신 붙잡혀 관노가 되었다. 그때부터 이 액정궁에서 십년을 넘게 무수리로 살았다. 손이 재빠르고 눈치가 제법 있어 어린 나이에도 제 살길을 찾을 줄 알았고, 태감들에게도 잘 보였다. 그런 가혜가 가끔 일감을 가지고 액정궁이 아닌 황궁으로 갈 때면 연희궁의 후궁마마들을 보았다. 그들은 생전 본 적도 없는 귀한 옷감을 몸에 두르고 한가로이 시간허비를 하고 있었다. 저 옷은 무수리에게 세탁조차 허락되지 않는 것들이었다. 가혜는 그들을 보고 팔자 한 번 좋다고 생각했다. 같은 사람일진데 생이 어찌 이리 다를 수가 있나 기가 막히기도 했다. 헌데 후궁보다 더 높은 황후는, 저 깊은 황후전에서 잘 나오지도 않는 황후는, 더 귀한 것들을 누리고 있다 하였다. 무수리들끼리 수군거리는 그 이야기에 가혜는 지금처럼 인상을 팍 찡그렸다. 이야기만 들어도 온실 속 난초 같은 그 여인이 부럽고 한편으론 괘씸했기 때문이었다.
내명부의 여인들은 대체 무슨 복을 타고났기에 태초부터 그러한 지위에 올랐는지 궁금했다. 대체 저와 다를 바가 무엇이기에, 추운 겨울 손이 부르틀 정도로 일하는 자신과 천지상간의 위치에 있는지. 가혜는 불공평하고, 또 억울하다고 생각했다. 평생을 일해서 액정궁을 벗어나지 못하는 자신의 운명이 고달팠다. 허나 무수리에게는 그런 생각조차 사치이기에 열여섯이 된 이후로부터는 아예 내명부 여인들이 있는 처소 쪽으로는 눈길도 주지 않았다. 관심을 가지면 배만 아파올 뿐이니 아예 무관심을 택했다.
그런데 몇 년이 지나 그 자리에 있던 황후가 폐위되어 혼의방으로 들어왔다. 하늘과 땅만큼 멀다 생각했던 존재가 저와 같은 옷을 입고, 저와 같은 신분이 되었다. 가혜는 마치 한순간의 꿈같다고 생각했다. 폐후, 소소를 보면 사람 일이란 참 알 수 없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그동안 누릴 것을 모두 누린 그 고고한 낯짝에 묘하게 열이 올랐다. 분명 자신과 같은 무수리임에도 태생부터 다른 것처럼 행동하는 꼴이 신경에 거슬렸다. 그것은 잠깐의 시기, 불편함의 역치를 넘어섰다. 그래서 답지 않게 악을 썼다. 제 분수를 모르는 폐후에게 이 액정궁이 얼마나 혹독한 곳인지, 저와 같은 무수리들이 그동안 어떻게 살아왔는지 똑똑히 알려주고자 하는 못된 마음이 들었다. 가혜는 제 속에 응어리진 한을 입 밖으로 내기 부끄러워 괜시리 성을 내었다.
“내가 너 따위를 뭐하러 시간 내어 못살게 군단 말이냐? 웃기는 소리 말고 들어가 잠이나 자.”
가혜의 고양이처럼 시원스럽게 뻗는 눈이 휘어졌다. 그러나 입매가 미세하게 떨렸다. 소소가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이곳에 처음 온 날 분명 말했잖아. 시끄럽게 하기 싫다고. 헌데 왜 자꾸만, 나를 건드는 것이냐?”
볼 장을 다 봤다는 듯 나가려는 가혜의 말을 붙잡은 소소가 물었다. 다시 한 번 시선이 엇갈렸다.
“허, 네가 아직 상전 노릇하던 버릇을 못 버린 모양인데 여긴 액정궁이다. 모든 걸 네 입맛대로 하려는 생각은 말아야지. 여긴 애초부터 내가 있던 곳이고, 내 말이 법인 곳이야. 네가 조용히 있고 싶다고 널 가만히 놔두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니까 대관절, 무슨 연유로?”
“네가 마음에 들지 않으니까.”
허. 그제야 당당하게 터지는 가혜의 진심에 소소는 어쩔 수 없이 다시금 실소를 내뱉을 수밖에 없었다. 황후일 적에도 제 입맛대로 할 수 있었던 일은 단 하나도 없었다는 것을, 저 아이가 알 리가 없지. 이런 반응이 그저 황당할 뿐이었다.
“난 네가 정말 싫어. 그 고고한 태생도, 고생 한 번 해본 적 없는 손도, 고상한 척하는 말투도.”
“…….”
“끝까지 황후전에 버티고 있을 것이지 이곳까지 미끄러져 내려온 건 너야. 그러니 견뎌라. 폐위된 것도, 여기서 내 괴롭힘을 받는 것도 네 운명이니 말이다.”
“…….”
“난 반드시 이번에 대부인 마님의 눈에 들어 이 액정궁을 나갈 거야. 그때가 되면 잘난 네 소원처럼 이곳에서 죽은 듯이 조용히 지내는 것도 가능해지겠지. 허니 오늘부터 물이나 떠다놓고 빌어라. 반드시 내가 나가도록 말이야.”
이유 없이 악에 받친 가혜의 음성을 소소는 묵묵히 들었다. 도저히 대화가 통할 것 같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제 할 말을 마친 후 미련 없이 뒤돌아선 가혜는 먼저 방을 나섰다. 그 뒷모습을 잠시 바라보던 소소가 천천히 숨을 내뱉었다. 뭐 몸이 편한 것이 마음을 더 불편하게 만드니 어쩔 수 없었지만, 소소는 성정상 이 상황을 두고만 볼 수는 없었다. 당하고만 있지는 않을 것이다. 그 방도가 어찌 되었건. 잠시 남아 감정을 추스르던 소소가 천천히 방을 나섰다. 나와 문을 닫던 중 오늘 일을 끝낸 옆방의 무수리들이 삼삼오오 모여 들어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지나쳐 혼의방으로 다시 향하려던 소소의 발걸음이, 어느 대화소리 잠시 느릿해졌다.
“서국 대부인들은 뭘 좋아하신대?”
“푸흡, 왜? 네가 대부인 맘에 들어보려고?”
“아니 뭐…, 어차피 곁에서 시중 드는 거야 혼의방 계집애들이 다 빼앗아갈 거고, 취향이라도 맞춰보려고 한다. 왜!”
대부인들의 액정궁 행차는 다른 방에서도 화제인 듯 모다 그 얘기를 하고 있었다. 소소는 그들 무리를 지나쳐가며 귀를 기울였다.
“뭐 서국에서 먹던 것을 좋아하고, 서국에서 나는 향을 선호하겠지. 백단향으로 향낭이나 만들어 방에 두는 것이 어때? 서국에서 그게 유명하니까.”
“좋아. 아, 그리고 옥진각(玉眞閣)을 쓰시는 대부인께선 견과를 못 드시니 각별히 조심하라고 하던데?”
“그거야. 다과상 차리는 궁녀들이 어련히 알아서 하겠어.”
“어휴, 마마님들 여독이 심하지 않으셔야 할 텐데. 그분들 기분이 좋아야 포상도 한 웅큼씩 떨어지지!”
한 아이의 푸념 섞인 말까지 모두 들은 소소는 그들이 제 처소에 들어가는 것까지 확인하고서야 발을 급하게 놀렸다. 소소는 천천히 생각을 정리했다. 대부인들의 시중을 곁에서 드는 것은 혼의방이 할 것이라고 했다. 가혜가 상전의 눈에 들어 속량을 염원하고 있으니 반드시 앞에 나서려고 할 것이다. 소소 자신만으로는 가혜의 기세를 함부로 꺾을 수 없다. 이 곳은 가혜의 말처럼 원래부터 그녀의 공간이었고, 소소가 이방인인 처지였으니까. 그래서 소소는 꾀를 내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뒤늦게 혼의방으로 들어서는 소소를 무수리들이 힐끔힐끔 쳐다봤다. 반면 가혜는 소소를 본 체도 하지 않고 이부자리를 펴기 바빴다. 소소는 성큼성큼 제 자리로 걸어가 오물에 젖은 이불과 베개를 집어들었다. 그리곤 그것을 가혜 쪽으로 던졌다. 그를 맞은 가혜가 외마디 비명을 내질렀다.
“뭐야?!”
“태감어른께 가서 다시 침구를 받아올 거야. 네가 내 침구에 오물을 뿌렸다는 말은 하지 않으마. 내일이 사신행차인데 시끄러워지는 것을 너도 바라진 않겠지.”
“…….”
“그러니까 그건 네가 빨아놔.”
당당하게 떨어지는 말에 가혜가 얼척 없는 얼굴을 했다. 허나 소소는 한 치의 동요도 하지 않았다.
“내일, 유시까지.”
“허.”
제 할 말을 마친 소소는 망설임 없이 뒤돌아섰다. 그 숨막히는 접전에 다른 무수리들은 입술을 꾹 다문 채로 두 사람을 바라보고 있었다. 소소는 그대로 새 침구를 받기 위해 혼의방을 다시 나섰다. 그 뒤로 들리는 가혜의 악에 받친 소리를 무시한 채.
三十二
찢어질 듯한 비명소리가 났다. 광인(狂人)은 불길하다 하여 황제께서 계신 황궁에 둘 수 없고 죄를 씌워 출가시켰다. 허나 태화는 그런 황궁 안에서, 흡사 미친 사람처럼 몸부림쳤다. 힘이 꽤나 억세 양쪽에서 그녀의 팔을 부여잡은 수복들이 애를 먹었다. 태형이 태화를 아무도 모르는 연호부 전각에 두라 한 뒤로, 그녀는 어디에도 나갈 수 없이 이곳에 갇혔다. 태화는 틈만 나면 제 혀를 깨물고 손목을 그어 자결을 시도했다. 수복들이 그녀를 뜯어 말리면, 복수을 하지 못하느니 낭군을 따라 죽겠다며 악을 질렀다. 황제의 배려 안에 진나라 유민들이 차차 도성 안에 정착해가고 있었다. 여기서 태화가 말썽을 일으키면 큰 분란이 일어날 것이 뻔하다. 그래서 수복들은 태화의 곁을 떠나지 않고 그녀는 말리느라 애썼다.
“매일 울부짖다 탈진해 잠들기 일쑤입니다.”
“어제도 잔을 깨 손목을 긋는 바람에….”
수복들의 보고에 태형이 옅게 미간을 좁혔다. 연호부의 일을 끝내면 태형은 반드시 태화에게 들렀다. 허나 시간이 지나도 그녀의 상태는 호전될 줄 몰랐다. 오늘도 악을 쓰다 기절해 잠든 누이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태형이 손을 뻗었다. 이불 바깥에 놓인 태화의 손목을 잡았다. 생채기가 가득했다. 엄지로 손목을 천천히 쓸었다. 안쓰러움을 머금은 태형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증오가 누이를 갉아먹는구나.”
태화는 황제를 죽여야만 편히 눈을 감을 수 있을까. 그녀는 황제가 제 부군을 죽였다고 했다. 원망에 차 소리치던 태화의 얼굴이 눈앞에 생생했다. 황제는 태화의 부군을 죽이고, 그녀가 몇 번이고 제 손목을 긋게 만들었다. 그 사실을 상기하자 머릿속이 차갑게 굳었다. 이상한 욕심이 떠올랐다. 태형은 자신이 이러는 이유가 다른 곳에 있음을 알고 있었다. 황제를 적대할 명분과 정당성을 찾는 일에 몰입하는 까닭은, 그녀가 했던 말처럼 그가 연적이니까. 소소의 얼굴이 떠올랐다. 태형은 한숨을 내쉬며 뜨거운 손으로 얼굴을 쓸었다. 태화를 향한 시선을 돌리지 않은 채,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휘가 추오군의 지휘권을 받았다. 대장군들도 차차 군에 편입되고 있고.”
태형이 황제를 도와 역모를 처단한 이후 진나라 유민들은 더 이상 망국의 유민으로만 홀대 받지 않았다. 황궁 중요한 자리를 내맡았고, 주나라에 스며들어 저마다의 역할을 하고 있었다. 태형은 연호부령이라는 가장 높은 자리에서 진나라인들이 기반을 잡아갈 수 있도록 돕고 있었다. 그러기 위해 가장 먼저 할 일은… 바로 진의 유민들에게 적대적이었던 정계 세력들을 서서히 무너뜨리는 일이었다. 태형은 더 이상 순전히 당해줄 생각이 없었다. 연호부 안에서의 태형은 흡사 야차(夜叉)였다. 비정하고 포악하여 무슨 짓을 해서라도 자신이 원하는 답을 반드시 듣고야 말았다. 잠시 태화의 곁에 있던 태형에게 연호부 시관이 달려왔다. 그리곤 중요한 소식을 그의 귓전에 전했다. 그 말을 들은 태형의 표정이 차갑게 식었다.
“다시 한 번 자신을 해하려 하거든 바로 내게 고해라.”
“예, 합하(閤下)”
태화를 맡겨둔 뒤 그는 시관을 따라 연호부로 향했다. 연호부의 지하, 취조와 고문이 이뤄지는 피비린내 나는 곳에 태형은 망설임 없이 발을 디뎠다.
“감히 내가 누군지 알고 잡아 놓는 것이냐! 내 네놈들을 전부…”
계단을 내려가자마자 우렁찬 목소리가 안을 다 울렸다. 태형은 미간을 좁혔다. 지금 이 곳에 잡혀 있는 이는 내사령. 태부의 오른팔이자, 태부의 재정을 담당하고 있다는 소문이 있는 바로 그 자였다. 정 일품 밑으로는 백 척이 넘는 기와집을 지을 수 없음에도 당당히 도성의 그 집을 점거한 그는 상단에서 큰 손 중에 큰 손으로 통했다. 태형은 그 자의 뒤에 비리가 있음을 확신했다. 그래서 집요하게 그가 거래를 튼 상단과 여객을 파고들었고, 이내 백야의 소호궁에 상단의 수익과 뇌물이 자금으로 들어간다는 것을 알았다. 백야가 사치를 부려봤자 그 돈을 죄다 쓰진 못할 것이다. 그렇다면 그 많은 돈은 태부의 정치자금으로 들어가는 것이 분명했다. 태형은 전에 액정궁에서 이 이야기를 꺼냈을 때 흔들리던 백야의 눈동자를 기억에서 꺼내 보았다. 그녀는 멍청하게도 태부와 내사령이 뒤에서 꾸미는 일들을 모르고 있는 게 분명했다. 태형의 가장 처음 계획은, 내사령을 이용해 태부를 옥죄고 경고를 날리는 것이었다.
“별감 네 이놈! 네 놈이 감히… 내가 모시는 분이 폐하의 총애를 받는 재인마마라는 걸 모르는 게냐? 폐하께서 이 사실을 안다면 네 놈이 무사할 성 싶으냐!!”
의자에 팔을 포박당해 있던 내사령이 태형을 발견하곤 소리쳤다. 평소 얄밉게 속을 긁어 대던 내사령이 이토록 당황할 꼴이라니. 태형의 입가에 흥미로운 듯한 미소가 걸렸다. 허나 모순되게 차갑게 가라앉은 눈동자는 연민이나 동정을 찾아볼 수 없을 만큼 단호했다.
“폐하께서 내사령이 황궁에 납품되는 물자의 가격을 두배나 불려, 그 자금을 소호궁에 꽂아넣고 있었다는 사실을 아신다면 무사하지 못할 사람은 내사령일 듯 싶습니다.”
태형의 차분한 말에 길길이 날뛰던 내사령의 행동이 일순간 멎었다. 그는 크게 팽창된 눈으로 상황을 파악하려 애썼다. 자신이 황궁에 물자를 납품하는 일을 맡은 지 벌써 여덟 해가 흘렀다. 자금을 불리기 시작한 것은 네 해. 그동안 알아챈 이가 아무도 없었다. 당연히 상단과 내사령만 아는 일이었고, 그 와중에 증빙되는 비밀자금 장부 역시 구어로 대체해 남는 증거 또한 없었다. 헌데 연호부가 어찌….
“네 놈이 지금 나를… 겁박하는 것이냐?!”
내사령은 더더욱 펄쩍 뛰며 반응했다. 아마 이 사실이 황제의 귀에 들어간다면 자신은 물론 태부와 백야 또한 무사하진 못할 것이라는 걸 직감한 탓이었다. 그건 단순한 불안만이 아니었다. 연호부는 정말 그렇게 할 수 있는 곳이었으니까.
“태부께서 이 사실을 알면, 네 놈의 목이 먼저 달아날 것이다! 일개 망국의 유민 주제에 진정으로 연호부령 행세를 하고 싶은 게냐! 네놈이 폐하께 고하기도 전에 쥐도 새도 모르게 없애버릴 것이다!”
“태부는 당신을 버리면 그만입니다.”
궁지에 몰린 내사령의 겁박에 태형은 태연하게도 대꾸했다. 정치에 뼈가 굵은 태부라면 어떤 방법이든 동원해 태형을 모함하는 데, 혹은 제거하는 데 성공할지도 모른다. 허나 그것보다 더 쉬운 방법은 태부가 내사령을 내치는 것이었다.
“태부는 그저 수족이었던 내사령을 잘라내고 자신은 몰랐던 일이라 손을 닦으면 그만입니다. 모든 건 내사령이 뒤집어쓰게 되겠지요. 내사령이 홀로 물납자금을 빼돌리고 제 사치에 탕진했다 하면 되니까요. 연호부 또한 당신이 자금을 빼돌렸다는 상단의 증언만 받아놓았을 뿐, 그 돈이 소호궁에 들어갔다는 증거는 없다 고할 것입니다.”
그러니까 태형의 말은… 내사령 자신에게 독박을 씌우면 된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태부와 백야는 빠져나갈 수 있도록 연호부가 도울 것이라는 대의의 어긋나는 소리도 서슴치 않았다. 내사령은 그제야 실감이 났다. 자기 혼자 죽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자, 내사령의 얼굴이 더욱 새하얗게 질렸다. 태부라면 정말 제게 모든 것을 뒤집어씌우고 관련 없는 척, 손을 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사령은 빠르게 머리회전을 했다. 살아야 했다. 지금 처한 상황이 단순히 연호부령의 객기가 아니었다.
“대,대체 내게 왜 이러는 것이오…. 차라리 원하는 것을 말해보게 응?”
내사령의 눈동자가 불안하게 흔들렸다. 방금 전까지 호기롭게 소리치던 모습은 어디도 없이 그저 두려움에 집어 삼켜진 듯 몸을 떨었다. 태형은 망설임 없이 웃음 지었다.
“제가 원하는 것은 내사령 당신이 줄 수 없습니다.”
“제발 이러지 말게…,응?”
“송구하게 되었습니다. 제 염원을 위해 죽어주십시오.”
간절하게 자신을 바라보는 내사령의 시선을 묵묵히 주시하던 태형은 다시 미련 없이 돌아섰다. 혼탁한 마음과 정계는 사람을 아주 변하게 만들었다. 그것은 태형을 자꾸만, 자꾸만 마음 가는 대로 움직이게 만들었다. 그래서 반드시 손에 넣도록 그렇게. 태형이 나서는 연호부의 신문고는 그 뒤로 내사령의 비명이 잔악하게 물들었다.
〈!--[if !supportEmptyParas]-->/ 황 후 열 전
“모든 수발은 내가 다 할 테니까 너흰 편하게 전각 청소나 하고 있어.”
가혜가 선심이라도 쓰는 냥 말했다. 다음날 혼의방과 옆방인 칠오방 무수리들은 이조 사신들의 대부인들을 모실 전각에 결집했다. 그들에게 주어진 임무는 대부인들이 앞으로 보름 동안 묵으실 전각을 청소하는 것과, 필요한 음식과 물자들을 대부인들에게 가져다주고 수발을 드는 것이었다. 바로 앞에 나선 가혜는 자신이 수발을 다 들테니 너흰 청소만 하라고 말했다. 대단한 인심인냥 말했지만, 사실은 그녀가 대부인의 눈에 들어 속량되고 싶어함을 모르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속량은 모두에게 염원이었으나 나서서 가혜에게 불공평을 따질 수 있는 이는 없었다. 가혜는 이 액정궁에 가장 오래 있었던 잔뼈 굵은 무수리였다. 괜히 밉보였다간 저 폐후처럼 괴롭힘을 당할 지도 모르지. 그래서 무수리들은 어쩔 수 없이 대충 고개를 주억거렸다.
“대부인 마님들이 여독을 푸실 수 있게 차와 다과를 가져다 드리라고 태감어른께서 말씀하셨어. 난 그걸 가지러 가볼 테니 두시진 안에 여길 다 치워놔.”
마치 상궁이라도 되는 듯이 명하는 가혜에 매번 그녀와 뜻을 같이 하던 용아도 이번에는 입술을 삐죽였다. 그러나 감히 대놓고 비아냥대는 짓은 하지 못했다. 온순한 무수리들의 반응에 만족스럽다는 듯이 어깨를 으쓱인 가혜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전각을 나섰다. 빗자루를 쥐고 있던 소소가 그런 가혜의 뒷모습을 잠시 바라보았다.
“나 방에 두고 온 것이 있어서, 잠시만 다녀올게.”
“청소하기 싫어 잔꾀라도 부리는 거야? 얼른 다녀와!”
그리곤 급하게 이어지는 소소의 말에 괜한 화풀이를 하듯 용아가 새침하게 쏘아붙였다. 소소는 대충 빗자루를 그런 용아에게 쥐어주고 서둘러 가혜를 따라 전각을 나섰다. 저기 멀어지는 가혜의 뒷모습이 보였다. 대부인들에게 잘 보이기 위한 단장이라도 하려는 것인지, 가혜는 다과상이 차려질 생과방으로 바로 가지 않고 혼의방으로 향했다. 소소는 발길을 틀었다. 그녀가 먼저 생과방으로 향했다. 이대로라면 가혜가 도착하기 전에 손을 쓸 수 있을 것 같았다. 어젯밤부터 생각한 방도였다.
빠르게 걸음을 옮겨 도착한 생과방에는 사신맞이에 분주한 나인들이 상을 차리고 있었다. 개중 궁녀 하나가 소소를 발견하고 말을 걸었다.
“액정궁에서 온 무수리인가?”
“그렇습니다. 대부인마님께 올릴 다과상은 어디 있습니까?”
“주홍색 탁보 아래 있는 것이 대부인들게 올라갈 상이다. 특별히 기호를 이야기 해주신 대부인 것은 파란색으로 따로 구분해 두었으니 어서 정리하거라. 상궁 마마님들께서 오시면 함께 올리러 갈 것이다.”
“예, 감사합니다.”
너무 분주하고 바빠 거기엔 신경 쓸 여력이 없다는 듯 짧게 설명해준 궁녀가 어서 안으로 들어가라 손짓했다. 허리를 굽히고 인사한 소소가 재빠르게 다과상이 차려진 곳으로 들어갔다. 가혜가 곧 도착할 것이다. 시간이 없었다. 분명 파란색 탁보로 구분된 것이 있다 하였으니, 분명 저것일 터였다. 소소는 품속에 넣어두었던 종이를 꺼냈다. 그 안에 어제 미리 준비해둔 것들이 들어있었다. 소소가 고개를 들어 주변 눈치를 살폈다. 아무도 이곳을 보지 않는 것을 살피고는 파란 탁보를 들어 그 안에 담긴 다과상에 종이에 있던 것을 털어 넣었다. 급하게 한 탓에 손이 자꾸 엇나갔지만 최대한 마음을 다잡고 서둘러 이행했다.
“마마님!”
헌데 소소가 급히 숨을 들이마셨다. 밖에서 가혜의 음성이 들린 탓이었다. 혼의방이 생과방과는 그리 멀지 않아 가혜가 빨리도 도착했다. 소소는 빈 종이를 소매에 넣고 빠르게 탁보를 덮었다. 가혜의 발걸음이 가까워졌다. 빨리 나가야 하는데, 바로 앞에는 함께 상을 올리러 갈 상궁들의 모습이 보였다. 젠장. 소소가 입술을 잘근 씹었다. 어쩌지. 진퇴양난이었다. 그때였다.
급작스레 허리를 잡아채는 손길에 소소가 숨을 훅 들이켰다. 이내 어두운 암막이 시야를 덮었다. 익숙한 향기가 났다. 뜻밖이었으나 굳이 고개를 들지 않아도 손길과, 의복, 긴장해 움직이는 얼굴을 통해 소소는 태형을 알아차렸다. 태형이 상궁과 무수리들에게 보이지 않게 소소의 몸을 숨겨준 것이었다.
대체 연호부령이라던 그가 하등 관계 없는 이곳에 왜 있는 것일까. 의문을 가지기도 전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식기를 두는 작은 방 안, 좁은 공간에서 상체가 맞닿았다. 그가 소소의 등을 감싸듯이 안고 있었다. 상황을 인지한 소소가 표정을 굳히며 태형의 가슴팍을 밀어냈다. 그리고 무어라 말하기도 전에, 태형의 손이 소소의 입을 틀어막았다.
“…….”
“…….”
시선이 닿았다. 태형의 눈동자가 흔들리고 있었다. 제 커다란 손으로 소소의 얼굴을 그러쥐었다. 들키면 안되니까, 어찌할 수 없는 일이었지만 왜인지 그의 가슴팍은 난폭한 정사를 마친 사람의 것처럼 요동쳤다. 소소는 태형의 눈빛이 퍽이나 애끓는다고 생각했다.
“준비는 다 되었느냐?”
“예. 상궁마마님.”
밖에선 생과방 안에 들어온 상궁과 무수리가 준비된 음식을 단상에 올리고, 대부인에게 가져다 줄 준비를 하는 소리가 들렸다. 개중에선 가혜의 목소리도 들렸다. 모두 소소의 계획대로 되고 있었다. 여기서 제 모습을 들키지만 않는다면 말이다. 밖의 소리에 귀 기울이던 소소가 무의식적으로 태형에게 몸을 기대었다. 분주하게 움직이던 궁녀와 상궁들은 잠시 뒤 열을 맞춰 다기를 들고 발걸음을 옮겼다. 그들의 발소리가 서서히 멀어져갔다. 그제야 한시름 놓은 소소가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다시금 제 앞의 태형을 의식했다. 그는 이전부터 소소만 보고 있었다. 덕분에 다시 시선이 얽혔다. 좁은 공간에서 소소가 숨을 들이켰다. 이제 그만 물러서라던가, 네가 왜 이곳에 있느냐 처럼 건네야 할 말이 많았지만 쉽사리 입을 열 수가 없었다. 머뭇대던 그녀의 얼굴을 내려다 보다가, 이내 견디지 못하겠다는 얼굴을 한 태형이 소소에게 짧게 입 맞췄다.
짧은 소리와 함께 떨어져나간 태형을 멍하게 보던 소소가 천천히 얼굴을 구겼다. 허나 태형의 뺨을 치려 뻗은 손은 다시 그에게 붙잡히고 말았다. 대신에 그는 소소를 제 품에 안았다. 태형은 제 얼굴을 소소의 어깨에 묻고 놓치지 않겠다는 사람처럼 그녀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소소가 힘을 주어도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는 이때까지 하고팠던 말을 한숨처럼 내뱉었다.
“정적이자 연적인 황제를 치면 신의 연심을 믿으신다 하셨습니까?”
“…….”
태형이 음성이 낮고 거칠었다. 소소의 어깨에 얼굴을 파묻는 그의 몸짓은 영락없는 사내였다. 긴장한 소소가 숨을 들이켰다.
“증명해보이겠습니다.”
“…….”
“허니 품을 허락하세요. 신을 더 이상, 더 이상 버리지 마세요.”
태형이 울 것처럼 읊조렸다. 대체 왜 이렇게까지 하는 것일까. 소소 자신은 모든 것을 잃었으나, 태형은 모든 것을 얻었다. 진의 유민들이 포용되었고, 스스로는 그 높다던 연호부령에 올랐다. 헌데 대체 왜, 뭐가 아쉬워서 이렇게까지 자신을 놓지 못하냔 말이야. 소소는 자꾸만 태형이 이럴 때면 그가 하는 말을 믿고 싶어졌다. 그래서 그녀는 태형의 절박한 품에 안겨있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저 그렇게 있는 것 말고는.
여러분 오랜만이에요ㅜㅜㅜㅜㅜ보고싶었어요ㅜㅜㅜㅜㅜㅜㅜ
bgm 삽입과 문단수정은 천천히 하겠습니다ㅠ♡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