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어렸을 때부터 솔직히 공부를 잘하는 편이었다. 머리도 좋았지만 공부량도 뒤지지 않았기 때문에 다른 애들이 어떻게 해서 시험을 이렇게 잘 봤어? 하고 물어보면 그냥 웃기만 했다. 당연히 너네가 놀 때 공부했으니까 그렇지. 중학교 입학식에서는 선서를 했다. 선생님들의 집중 관리 속에 교내 상 대부분을 휩쓸었고 중학교 내내 전교 1등을 찍었다. 그리고 고등학교에 입학하기 전 내 인생에는 두 가지 갈림길이 있었다. 특목고나 자사고에 가서 학교 이름을 달고 대학에 가는 것이나 인문고에서 전교 1등을 유지하는 것. 나는 그 때 전교 1등을 이미 수 없이 해 본 상태였고 망설임 없이 특목고로 진학했다. 그리고 망한거지. 누구도 내가 서울대에 들어가는 걸 의심하지 않았는데도.
머리가 좋았다고 생각했고 공부량이 뛰어나다고 생각했지만 그곳에서 나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나는 어느 방향으로도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고 누구에게도 관심받지 못했다. 무관심은 나를 더욱 더 공부와 멀어지게 만들었다. 그 때부터 열심히 했었으면 어디라도 갔겠지. 하지만 내 눈은 이미 높아질 대로 높아진 상태였고 왠만한 대학으로는 만족하지 못했다. 그래서 그 결과가 결국 이거란 거다. 재수. 재수생이라는 타이틀은 점점 나를 비참하게 했다. 가장 힘들었던 건 남들보다 뒤쳐지는 느낌이었다. 난 항상 앞서있어야만 했다. 누구나 인정할 만한 대학에 합격한 상태가 아니고서는 친구들도 만날 수 없었다.
외로움의 절정은 내 생일날이었다. 무작정 집을 나와서 괜히 거리를 기웃거리는데 문득 나도 성년인데 술 한 번 먹어보자. 라는 생각이 들었다. 성년이 되자마자 아빠한테 술을 배우고 나서는 마셔본 일이 없었지만 아무렴 어떠냐 싶었다. 편의점에서 팩소주를 사서 테이블에 걸터앉았다. 살짝 알딸딸한 느낌이 기분을 고조시켰고 그래서 또 마시고. 당연한 순환이었다.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 보며 이제는 만나지도 않는 고등학교 친구들 생각을 했다. 그 나쁜 년들. 내가 태어나서 공부로 무시당한 적이 없었는데. 나보다 예쁘지도 않은 데 보란듯이 남자 하나씩 끼고 다니는 꼴을 생각하니 속에서 열불이 났다.
"왜 이러고 있어요?"
잘생긴 남자였다. 자연스럽게 내 옆의 의자에 앉더니 말을 걸어왔다. 한창 기분 좋은 느낌에 취해있던 터라 생각이 뇌의 필터링을 거치지 않고 바로바로 흘러나왔다.
"내가 뭐하던지 무슨 상관이에요."
"그러게요. 신경쓸 일은 아닌데 그냥 궁금해서."
미친놈이네. 술김에도 그런 생각이 들었다. 왠지 얽히지 않는 게 좋겠다는 막연한 생각. 그러고 보니까 생긴것도 딱 기생오라비 상인게 사람 등쳐먹을 것만 같았다. 나는 지금 가뜩이나 힘들어 죽겠는데.
"재수생이니까 신경쓰지 말고 갈 길 가세요."
이제 대충 관심 끄겠지. 솔직히 내 열등감이었다. 재수생인 것을 숨기고 싶은 동시에 상대를 떨쳐버리고 싶을 때 불쑥불쑥 내뱉곤 했다. 내가 재수생이라는 데 뭐 어쩔거야. 남이 신경써줄 수 있는 문제도 아닌데다 재수생이라면 짜증을 내도 남들이 어느 정도 넘어가는 편이었다. 물론 속마음까지야 알 수가 없겠지만 한심하게 생각하던 불쌍하게 생각하던 겉으로 내뱉지만 않는다면 관대하게 넘어가 줄 용의가 있었다.
"그럼 제가 도와줄까요?"
"뭘요."
"뭐긴 뭐야. 공부지."
이제 길거리를 지나가던 사람도 나를 만만하게 생각하나 봐. 그냥 헛웃음이 나왔다. 지금이야 시궁창이라지만 나는 어느 누구와도 뒤지지 않는 과거와 그 덕분에 생긴 높은 기준을 가지고 있었다. 이제와서야 푼수소리 듣지만. 그래도 모르는 사람한테 과외받을 정도로 사정이 궁한 건 아니었다. 정 과외가 필요하면 주위에도 서울대, 해외대학 수십 명은 부를 자신이 있었는데. 과외? 웃기지도 않는 소리다.
"저 눈 높은데. 저보다 공부 잘하세요?"
"서울대 갔으면 보통 잘한다고 하지 않나?"
"별로. 지금까지 그런 사람들만 한 트럭은 봤어요."
"그래도 과외할 정도는 되겠죠."
과외하고 싶다는 말 한마디 꺼낸 적도 없는데 무슨 자신감인지 과외한다고 단정짓는 것 같았다. 혹시 내 동기들도 어디가서 저러고 다니는 거 아냐. 좋은 대학이면 뭐든 다 된다고 생각하는 부류의 사람들. 딱 질색이었다. 사실 내가 가지지 못한 미래여서 더 그렇게 느끼는 걸수도.
"필요없으니까 저리 가세요."
"왜요. 돈 안받을게요. 그래도 싫어요?"
"아 싫어요. 좀 가요."
"그럼 한 달만 해요. 그래도 싫으면 안하면 되지."
"싫다구요. 사람 말을 왜 안들으세요?"
"한 달 하고 싫으면 안 한다니까요?"
"...그래요. 한 달 뒤에는 그만 두는 거에요."
"그거야 해봐야 하는 일이고."
내버려두면 집까지 따라와서 괴롭힐 것 같길래 대충 번호를 불러주고 집으로 돌아왔다. 무상과외야 얼마 하다보면 본인이 제 풀에 지치겠지. 아니면 한 달 뒤에 안하면 되는 거고. 그래도 명색이 서울대생인데 시간낭비까지는 아닐 거 같고. 막연히 좋게좋게 생각했다.
정진영은 하루가 멀다하고 우리 집을 찾아왔다. 뭐라고 하기도 뭐한 게 명문대생이 과외해준다는데 어느 집 엄마가 거절하겠어. 정진영은 내가 안 바쁘냐고 물어볼 때마다 씩 웃기만 했다. 아무래도 사람 말 뜻을 못 알아듣는 거 아닐까. 그게 아니면 머리 상태를 의심해봐야 할 게 틀림없었다.
"우리 오늘은 공부 좀 하죠?"
"...우리가 지금까지 한 게 공분데?"
그러니까 매일같이 오는 건 좋다고 쳐도. 우리는 공부방식이 너무 달랐다. 게다가 이미 각자의 공부법이 확립되어 있어서 나로서는 정진영이 알려준답시고 문제를 풀어주고 말해주는 게 시간낭비로 느껴질 뿐이었다. 홱 고개를 돌려버리자 정진영이 자연스럽게 머리를 툭 쳤다. 김바나 정신차려. 누군 손이 없어서 안 때리는 줄 아나. 자연스럽게 눈을 한 번 흘겼는데 그게 또 눈이 마주쳤다. 정진영은 그냥 빤히 쳐다보고 있고.
".........."
괜히 부담스러워져서 문제집만 내려다보고 있으려니, 곧 낮은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아 진짜, 바나야. 너 솔직히 방금 설렜지. 설레서 고개 돌린거지? 하길래 내가 설레면 그 날로 과외 접는다고 하며 다음 문제를 풀었다. 근데, 얼굴은 진짜 잘생겼지. 그건 인정해.
결국 오늘도 흐지부지 과외가 끝났다. 내가 지금 뭐하는 걸까 별 생각이 다 들다가도 요즘은 문제 풀다 모르는 게 나오면 자연스럽게 물어볼 생각이 든다. 평생 물어보면서 공부한 적이 없었는데. 나는 언제나 해설지를 붙잡고 끙끙대는 타입이었다. 해설지를 이해 못할 수준의 머리도 아니었기에 그게 편하기도 했고. 근데 정진영은 물어본 문제를 내 수준에 맞춰 간단한 부분은 넘어가고 간결하게 설명했기 때문에 바뀐 공부법이 오히려 더 낫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이건 아니죠."
"응? 뭐가?"
"수업 끝났는데요. 댁에 돌아가셔야죠."
"지금은 과외말고 사적으로 만나는 거지."
사적인 만남 좋아하시네. 만나는 건 쌍방합의가 이루어져야 가능한 거 아닌가요? 대체 어느나라 말 헛소리야 저게. 분명히 진상이라서 이름이 진영일거다.
"에이, 또 괜히 그런다."
"진짜 아니니까 눈 앞에서 사라져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실망이야. 김바나 그렇게 안봤는데."
마지막에는 입을 가리고 흑흑 우는 소리까지 낸다. 점점 잘생긴 얼굴 덕분에 느꼈던 이미지가 사라지려고 한다. 아주 스스로 이미지를 말아먹네, 말아먹어. 아, 근데 그래서 오늘은 또 언제 집에 간다는 거야...
전형적인 과외선생님이 아닌 찡찡대는 진영이가 보고싶어서 쓴 글입니다ㅎㅎ 읽어주시는 모든 독자님들 감사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