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
"이 선생님!! 이 선생님-!"
나를 부르는 다급한 목소리.
비릿하게 차오르는 피 냄새.
이동식 침대의 가쁜 바퀴 소리와
분주하게 움직이는 생명의 실타래.
응급실.
"이 선생님! 이 환자 좀 봐주세요!"
두 손을 피로 흠뻑 적신 채로 윤 간호사가 내게 말했다.
"출혈이 너무 심해요, 바이탈도 --"
"이 선생님! ---- 듣고 계세요? -- 선생님!"
피가 넘쳐 흐르고 있었다.
아마 죽은 이들이 건너는 강처럼,
징그럽게도 차오르는 그 알 수 없는 두려움.
왜... 왜 나는....?
"이 선생님! 정신 차리세요!"
*
"야---!!"
"으....."
"야! 이홍빈!"
".....으으"
"이홍빈!! 일어나!!"
"으읏...헉! 헉- 헉-"
"미친 놈... 또냐?"
한껏 잠든 홍빈의 몸을 흔들어대던 공찬은
이내 식은땀을 흘리며 벌떡 일어나는 홍빈을 바라보다가
지친다는 듯 가운을 벗어던지며 제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드르륵- 굴러가는 의자 바퀴 소리에 홍빈은 고개를 돌려 바닥을 바라봤다.
드르륵- 드르륵- 소름 끼치는 그 소리.
덜덜 떨리는 두 손을 제 눈으로 확인한 홍빈은
이내 눈을 꾹- 감으며 마른 세수를 했다.
좀처럼 진정이 되지 않았다.
"기껏 쉬러 휴게실 들어왔건만" 공찬이 이내 혀를 차며 말했다.
"...고맙다" 잔뜩 쉰 목소리로 홍빈이 중얼거렸다.
이내 창백한 얼굴로 침대에서 일어난 홍빈은 공찬을 쳐다보지도 않고
옷걸이 쪽으로 걸어가 제 의사 가운을 걸쳤다.
심장을 귀에다 심으면 이런 소리가 나는 걸까 하고 그는 생각했다.
이렇게 터질 듯 끔찍한 파열음이 귓속에서 맴도는 걸까 하고.
"또 꿈꿨냐?" 지겹다는 얼굴과는 상반되게도 다정한 목소리로 공찬은 물었다.
홍빈은 입꼬리를 씩- 올리며 웃었다.
보기 좋은 보조개가 움푹 패어 들어갔다.
공찬은 그런 그를 보고 미간을 찌푸렸다.
"뭐가 좋다고 웃어"
"그럼 울까?" 홍빈이 장난스럽게 제 친구를 보며 말했다.
공찬은 미간을 찌푸리며 고개를 저었다. "그냥 좀 쉬어"
"싫어" 여전히도 빙긋거리며 홍빈은 제 머리를 쓸어넘겼다.
"제발 좀...!" 공찬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위에서도 말 많은 거 너도-"
"알아" 공찬의 말을 끊으며 홍빈은 제 명찰을 목에 걸고는 문으로 향했다. "나도 잘 안다 인마-"
"....."
문고리를 돌리며 씩- 웃는 홍빈에 공찬은 마음에 안 든다는 얼굴로 그를 쏘아봤다.
도대체 뭐가 문제인지 모르겠다는 얼굴로 홍빈은 공찬을 바라봤다.
입꼬리에 걸린 웃음이 사실 모든 것을 다 말해주고 있다는 것을
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으면서도...
가면 같은 웃음에서 문득 밤의 향기가 피어올랐다.
그래, 백야라 불렸다.
그 옥상에서 불던 바람이 그렇게 말해주고 있었다.
너는 아주 오랫동안 그렇게 밝은 밤을 뜬 눈으로 지새울 거라고.
그런 조용한 예언을 쉼 없이 전해주고 있었다.
"쉬어-"
가벼운 목소리로 말하는 홍빈을 가만 바라보던 공찬은 이내 손을 내저으며 입을 열었다.
"무리하지 마" 또, 다시 한 번, 표정과는 다르게 참 다정한 그 목소리.
"알았어, 너밖에 없다" 다시 한 번 피어오르는 보조개.
문이 닫히는 소리가 빈 복도에 울려 퍼졌다.
핏물 하나 배이지 않아 새하얀 자신의 손바닥.
덜렁이는 명찰에 진하게도 새겨진 이름 세 글자.
그리고... 그 목소리...
잊을 수 없는
그 목소리.
"진료...하러 가야지..."
*
'소녀가 그랬지
그녀가 그랬어
그녀가 늑대의 목에 쇠사슬을 걸었던 거야.
그 날카로운 이빨로도 끊을 수 없던 사슬을
그의 목에 걸었던 거야
잔인하게도'
계속해서 그 영화의 내용이 머릿속을 유영했다.
나는 창가에 앉아서 턱을 괴고는 유리창에 맺힌 서리를 바라봤다.
눈꽃이 피어올라 이내 흉처럼 번져버린 그 하얀 기억들은
문득 아름답다가도 이내 숨 막히게 징그럽기 마련이었다.
그 가느다란 이어짐들이 괜히 소름 끼치기 마련이었다.
머그잔에 담아놓은 코코아에서 달콤한 향기가 올라왔다.
모락모락 피어나는 김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이내 입술을 대고는 한 모금 마셨다.
너무 진하게 탔는지 입안이 아리다 못해 텁텁했다.
일어나 테이블 위에 머그잔을 내려놓자
눈앞에 빈 약봉지가 눈에 띄었다.
'내복약'이라고 쓰인 봉투는 이미 텅텅 비어있었다.
.... 쓰레기통을 비워야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두꺼운 외투를 걸치고 현관문을 여니 제법 쌀쌀한 바람이 밀려들어왔다.
나는 니트를 턱 끝까지 올리고는 재활용 쓰레기를 들고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
'10' 층에 멈춰있는 그 붉은 숫자에 또다시 가슴이 뛰었다.
10 층
10 층
왜 그러는 걸까...
왜 또 가슴이 시리다 못해 아픈 걸까.
신발 앞코를 땅에 찍어가며 기다리니 얼마 안 가 땡- 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스르륵 열렸다.
그 네모나고 밀폐된 공간 안에서 나를 기다리는 것은 거울이 만들어낸 수 억 개의 또 다른 나뿐이었다.
문이 닫히고 또 문이 열리고, 문이 열리고 또 문이 닫히는 그런 재미없는 공간 속에서,
어쩌면 거울은 그저 내가 이곳에 오기만을 기다렸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저 내가 이 곳에 들어와 영 마음에 들지 않는 잔상이라도 남겨주기를 바라는 걸지도 모른다고.
나는 이내 고개를 털어내며 눈을 꾹 감았다.
영화를 괜히 봤다는 생각이 들었다.
심장박동이 점점 느려지는 것만 같았다.
그래, 영화를 보는 것이 아니었는데,
분리수거장까지 땅만 바라보며 걸었다.
길 구석구석에 얼어붙어 단단해진 얼음덩어리가 즐비했다.
미끄러지지 않으려면 어쩔 수 없었다.
"안녕하세요"
기다란 그림자만큼이나 깊은 그 목소리.
왜 나는 항상 이렇게 너를 마주하게 되었던 걸까?
마치 운명처럼... 마치 운명인 것처럼 나를 착각하게 만들었던 걸까?
너는 도대체 왜.
그 목소리에 문득 고개를 드니 꽤나 멀끔하게 차려입은 이홍빈이 내 앞에 서 있었다.
깔끔한 복장과는 어울리지 않게 손에 든 쓰레기봉투가 눈에 띄었다.
이홍빈은 보기 좋은 미소를 지으며 나를 바라봤고
나는 조금 놀란 속마음을 애써 감추며 입술을 움직였다.
"안녕하세요"
별로 내키지 않는 인사였다.
그가 천천히 제 머리칼을 쓸어넘겼다.
나는 그런 그를 지나쳐 분리수거 함으로 다가갔다.
빈 알루미늄 캔의 소리가 신경 쓰였다.
그의 발소리가 들렸다.
"낮인데 집에 있네요?" 어느새 옆으로 다가온 그가 내게 물었다.
"네.. 뭐" 이런저런 말을 하고 싶지 않아 대충 그렇게 얘기했다.
"심드렁하네-" 한참 아무 말없이 내 옆에서 분리수거를 하던 이홍빈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나는 고개를 돌려 그런 그를 바라봤다.
신문지를 꺼내던 손을 멈추고 이홍빈은 내 눈을 응시했다.
다시 한 번, 그가 예의 그 미소를 지었다.
누구라도 홀리기에 충분한 그 미소를.
"...." 나는 입을 꾹- 다물었다.
"나 별로 안 반가워요?" 문득 이홍빈이 물었다.
"....글쎄요" 내가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너무하네-" 그가 짐짓 상처받은 표정을 지었다. "나는 우리가 좀 친해졌다 생각했는데"
"그래요?" 별로 의미 없는 말을 건네며 맥주 캔을 쏟아부었다.
"영화, 같이 볼 정도면 꽤나 친해진 것 아닌가?"
"편할 대로 생각하세요" 이내 돌아서며 내가 말했다.
"내가 편한 데로 생각하면..."
등 뒤에서 한껏 낮은 그의 목소리가 무겁게도 침투했다.
아까와는 조금 다른 그의 목소리가.
"조금 위험한데...?"
"무슨 말이에요" 내가 그를 돌아보며 말했다.
그가 빙긋- 웃어 보였다.
"은우씨랑 친하게 지내고 싶다는 말"
".....난.." 머리가 지끈거렸다.
갑자기 가슴이 욱신거려 나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리며 손을 올렸다.
이 사람만 보면 그랬다. 이 사람만 보면 잊고 살던 그곳이 차갑게도 깨질 것만 같았다.
산산이 부서져서 가루처럼 사라져버릴 것만 같았다.
이상하게 너만 보면.
"아파요?" 어느새 앞으로 다가온 이홍빈이 내게 물었다.
"아녜요, 괜찮아요" 얕은 숨을 몰아쉬며 내가 말했다.
"의사 앞에서 거짓말 할 생각 말고" 한 발자국 더 가까이 다가오며 그가 이야기했다.
"진짜 괜찮아요"
그의 그림자에 나도 모르게 물러나며 나는 눈을 꾹- 감았다.
그런 내 손목을 그가 꾹- 잡았다.
이상하게도 익숙한 온도가 내 손목에서부터 퍼져나갔다.
나는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보고 있는 그를 쳐다봤고
이홍빈은 가만히 내 눈을 들여다보다 이내 천천히 눈을 감았다.
잠깐 흔들렸던 것 같았다.
그의 그 검은 눈동자가.
"어깨 펴고" 문득 그가 말했다.
"손 좀..." 내가 중얼거렸다.
"따라 하면 놔줄게"
"...." 그의 얼굴을 나는 가만히 바라봤다. 아주 가만히.
"자 숨 들이마시고" 천천히 그가 눈을 뜨며 나에게 말했다. "어서"
어떡해야 하는 걸까.
도무지 알 수 없는 이 묘한 기시감을 나는 어떻게 극복해야 하는 걸까.
저기 저 끝에서 몰려오는 먹구름처럼 점점 차오르는 이 기시감을
이 묘한 파쇄된 조각들은 나는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 거지?
내가 숨을 들이마시자 이홍빈은 느슨하게 손을 풀었다.
나는 얼른 손을 빼고는 눈을 꾹 감았다.
낮게 웃는 그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이제 내쉬어봐요" 이홍빈이 말했다.
차갑게 폐를 얼려대던 공기들이
무리 없게 데워져서는 하얀 김을 만들어 내며 입술 사이로 새어 나왔다.
영혼이 빠져나오는 것만 같다고 생각했다.
한참을 그러고 있었다.
텅 빈 주차장에서 그렇게 숨을 나눠쉬고 있어다.
폐는 얼고 녹기를 반복했고, 쿡- 쿡- 쑤셔대던 가슴의 흉터는 이내
차가움에 질렸다는 듯이 고개를 돌려버렸다.
낮은 그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그제야 정신이 들었다.
얼굴이 붉어지는 것 같았다.
"말 잘 듣네" 그가 나를 보며 웃었다.
"놀리는 거예요?" 불퉁하게 내가 물었다.
"아뇨, 착한 환자라고 칭찬하는 거예요" 보조개를 뽐내며 그가 말했다.
"달갑지는 않네요-"
몇 번 짧게 끊어 웃는 소리를 타고 이내 낮은 기침소리도 함께 들렸다.
그가 점잖게 손으로 입을 가리고는 고개를 돌려 콜록거렸다.
"감기 아직도 안 났나 봐요"
"걱정해주는 거예요?" 홍빈이 빙긋- 웃으며 물었다.
"그냥 넘어가는 법이 없네요 그쪽은" 내가 눈을 굴렸다.
"그쪽이 아니라 이홍빈이죠"
"..."
"이은우씨-"
"...."
"대답 좀?"
"...."
"이-은-ㅇ..ㅜ"
"네- 네- 네-- 이홍빈씨" 내가 손사채치며 말했다. "이홍빈씨는 정말 그냥 넘어가는 법이 없네요!"
"그래도 덕분에 이제 안 아프잖아요" 홍빈이 슬쩍 몸을 숙이며 말했다.
"......그.." 가까이 다가온 그의 얼굴에 문득 입술을 꾹- 깨물었다.
"이은우 환자" 그가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내 이름을 불렀다. "아직도 아파요?"
"...이제 괜찮아요" 내가 하는 수 없다는 듯이 말했다.
"그렇지-" 이내 그가 몸을 일으키며 웃었다. "...그래야지"
그가 이내 제 손목을 들어 시계를 바라보더니 무언가 마음에 안 든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나는 그의 남색 코트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 어깨에 올려진 붉은 털이 눈에 띄어서 기분이 이상했다.
푸르다 못해 차갑기까지 한 그 코트 위에 비처럼 떨어진 붉은 털들은 마치...
마치 여우의 털과 같았다.
비릿한 향이 코 끝에 닿았다.
어디서 온 건지 모를 그 향기가 묽게 차올랐다.
왜 이럴 때 이홍빈과 함께 보았던 영화가 생각나는지 모르겠다.
늑대의 달처럼 빛나던 노란 눈동자와 즐비하게 늘려있던 여우 가죽,
그리고 소녀. 소녀와 사슬. 목덜미를 핥던 그 혓바닥.
"--씨"
"......."
"이은우씨"
"......."
"은우야"
"네...네?!"
"풋-!"
문득 친근하게 부르는 그의 목소리에 내가 나쁜 꿈에서 깨듯 소스라쳤다.
이홍빈은 그런 나를 바라보며 피식- 웃더니 기분 좋게 눈을 지긋이 감았다 떴다.
내가 그런 그를 눈으로 흘기자 토끼 같은 얼굴로 나를 바라봤다.
눈이 올 것 같았다.
그리고 뒤에 몰려오는 눈구름과는 어울리지 않는 그 얼굴.
그 하얗고 또 하얗고 또 하얀 그의 얼굴.
"뭐예요?" 내가 콧등을 찡그리며 묻자 홍빈은 웃으며 제 눈가를 긁적거렸다.
"아니-" 홍빈이 기분 좋게 말끝을 늘렸다. "대가라도 하나 받아볼까 했는데"
"대가요?"
"그럼 날로 먹으려 했어요?" 홍빈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말했다.
"..뭘...요?"
"치료비 정도는 내야죠?"
"설마...."
"설마가 그 설마 맞는데?"
"나 지갑 안 들고 나왔어요" 내가 짐짓 당황한 듯 중얼거렸다.
"참나-" 홍빈이 못 말린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아- 설마 내가 돈을 달라 그럴까 봐?"
"아니, 진료비-"
"돈 말고" 내 말을 끊으며 그가 말했다. "원래는 커피 마시자고 하려 했는데 내가 지금 어디 가야 해서-"
"아- 안됐네요 그럼-" 애써 그의 눈빛을 피하며 내가 얘기했다.
"아니, 그렇게 말하면 안 되지-" 그가 그런 내 시선을 좇으며 중얼거렸다.
"그럼 뭐 어떡해요"
"어쩌긴 뭐 어째요" 이홍빈이 주머니에 손을 넣으며 말했다. "번호 줘요"
"네?"
"전화 번호 달라고요"
"싫은데요?"
"싫다 그랬다고 내가 못 얻을 것 같아요?"
"무슨 말을-" 내가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홍빈은 가볍게 웃었다.
"진료차트에 다- 나와있는데-"
"그렇게 개인 정보 막 가져가면 안 되는 거 알죠?"
"알죠" 그가 어깨를 으쓱였다.
나는 어이가 없어 헛웃음을 뱉어냈다.
"그러니까 진료비 대신 줘요, 전화번호" 그가 주머니에서 제 휴대폰을 꺼내며 말했다.
"저기요-"
"이홍빈입니다-"
"네, 이홍빈씨-" 내가 콧등을 찡그리며 말했다. "연락처는 왜 달라 그러는 거예요?"
"글쎄요" 그가 내 눈을 지긋이 바라보며 말했다. "알고 싶으니까?"
"참나-"
나의 탄식에 그가 보기 좋은 미소를 지었다.
시원스레 올라가는 그의 입꼬리, 가지런한 이.
그리고 꽃처럼 피어오르는 그 보조개까지.
그래, 맞아, 얼빠진 채로 보게 되는 그의 그 외모에
홀리지 않는 사람이 없을 거라고 누가 말했던가.
다 알고 있으면서도 홀리게 될 거라고 말한 게 누구였던가.
"줄 거죠?" 빤히 자신을 바라보는 나를 보며 홍빈은 말했다.
"....."
"진료빈데 설마 안 주겠어?"
"이런 걸로 진료비 받으려 하는 의사는 당신 밖에 없을 거예요"
이내 능글스럽게 웃어 보이는 그의 모습에 나도 모르게 탄식이 새어나갔다.
어쩌면 조금 웃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조금 웃었는지도 모르겠다.
그 뻔뻔한 자신감에.
그리고 그럼에도 느껴지는 이 의미를 알 수 없는 기시감.
발뒤꿈치를 가늘게 찌르는 익숙한 듯 익숙하지 않은 그 감각들.
왜...
"줄게요" 하고 내가 말했다. "주면 되잖아요" 그러고는 이내 그의 핸드폰을 받아들었다.
홍빈은 빙긋- 웃으며 나를 바라보다가 이내 그 핸드폰을 받아들었다.
그러고는 다시 한 번 제 시계를 확인하더니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문자 할게요"하고 그가 말했다.
나는 대답 없이 그런 그를 바라봤다.
"그럼 잘 들어가요" 홍빈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내게 말했다. "아프면 말하고"
"...." 그렇게 말하고서는 돌아서지 않는 홍빈에 나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 "어디 가는데요"
그 질문에 홍빈의 눈이 은근히 흔들린 것 같았다.
아마 착각일 수도 있지만.
나는 그런 그의 눈동자를 가만히 응시했다.
이내 그가 언제 그랬냐는 듯 예의 그 홀리는 미소를 지었다.
"데이트요"하고 그가 말했다.
그가 나의 눈을 똑바로 바라봤다.
"데이트 하러 가요"
*
눈길을 밝히는 발자국 소리
땅에 남겨지는 자국들이 맹수라는 것을 알려주고 있어
그래 다가가고 있어
너의 그 뒤를 쫓고 있어
내 소리가 들리니?
널 잊지 못해 미워하던 내 울음소리가 들리니?
이 거친 하울링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