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
"데이트..." 입술 사이로 음성이 새어 나왔다. "데이트...?"
집에 돌아와 외투를 의자에 대충 걸어놓고는
소파에 앉자마자 나온 한 마디가 그거였기에
나는 나도 모르게 놀라서 고개를 내저으며 미간을 찌푸렸다.
내가 별로 신경 쓸 일이 아니라는 것쯤은 아주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신경 쓰이게 만드는 이홍빈이라는 남자는
계속 여지를 남기듯 내 머릿속을 유영하고 있었다.
그래, 누가 봐도 여지를 남겨두는 그의 행동이 나는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대놓고 그를 경계하고 있었음에도 그에 대하여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이건 다 그의 그 미소 때문이었다.
덫에 걸렸다고 말해도 따로 반박할 수 없었다.
그는 캔버스 위에 스며드는 블루 같았다.
아니면 홀리려고 작정한 붉은 여우거나.
이내 그런 생각들을 떨쳐버리려고 기지개를 켜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식탁에 올려두었던 머그컵에는 어느새 짙게 가라앉은 코코아 가루들이 서서히 굳어가고 있었다.
나는 그 은밀한 결합을 가만히 바라보다 이내 싱크대 물을 틀고는 그 자국들을 깨끗이 닦아냈다.
물을 끄자 혼자라는 사실이 뼈져리게 느껴질 만한 정적이 흘렀다.
그게 견디기 힘들어서 음악을 틀었다.
날씨와 어울리게도 퍽 우울한 음악이 흘러나왔다.
흐린 구름이 어느새 창문을 두드리고 있었다.
조금만 더 있으면 비가 내릴 것만 같았다.
그래, 눈이 아닌 비가 내릴 것만 같은 하늘이었다.
불현듯 철부지처럼 울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그러니까, 가슴이 아픈 이유를 전혀 모르겠어서 나는 겁이 났다.
이런 적 없었는데, 왜 팽창하는 우주처럼 나는 정처 없는 두려움의 크기를 바라보고 있는 건지,
그 오랜 꿈속에서 겨우 깨어났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왜 이렇게 조바심 내며 살아야 하는 건지,
그 흉터가 왜 다시 나를 아프게 하는 건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그리고 왜... 그의 앞에서?
우연일까? 내가 비약하고 있는 걸까?
그의 앞에 서면 가슴이, 그 상처가 아프다는 비약을 하고 있는 걸까?
영화에 대한 생각은 더 이상 하고 싶지 않았고,
이내 그걸 터부처럼 여기며 가슴속에서 쫓아내 버렸다.
앙상한 나뭇가지가 소녀의 손목과 닮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늑대의 검은 눈동자가, 그 검은 눈동자가 문득 이홍빈의 눈을 연상시켰다.
바보 같은 일이라는 생각을 하며 이내 고개를 내저었다.
그의 흔들리던 눈동자가 차라리 토끼의 그것과 같다 말하는 게 더 말이 되는 것 같았다.
그 동그랗고 부러울 정도로 수려한 그의 눈동자는.
사실 이홍빈의 눈동자가 흔들리고 있었다고 말하는 것도 어찌 보면 굉장한 모순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니까, 그저 내 생각일 뿐이었다. 그냥 그래 보였으니까 그렇다고 이야기 한 것뿐이었다.
정말 그의 눈동자가 흔들렸는지 그러지 않았는지는 오직 이홍빈만 알고 있겠지.
투둑- 투둑- 창가를 두드리는 그 소리.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투명한 비가.
"조금만 더..." 하고 혼잣말을 했다. "계속 그러면 그때 병원에 가자"
*
소파에 누워있다 문득 울려대는 핸드폰 벨소리에 잠에서 깼다.
언제 잠에 들었는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다만 거세진 빗소리에 이내 음악도 잦아들어 있었다는 것뿐이었다.
비몽사몽 한 채로 손을 뻗어 핸드폰을 집었고, 시끄럽게 울어대는 그 소리가 마음에 맺혀
차마 그 이름을 확인할 생각도 하지 않고 통화 버튼을 눌렸다.
이제 와 생각해보니 이름이 없는 번호였다.
그저 숫자로만 나열된 그런 번호였다.
"...여보세요" 꽉 잠긴 목소리가 입술 사이로 새어 나갔다.
"자다 일어났어요?" 그가 내게 물었다.
"...누구세요?" 힘겹게 몸을 일으키며 내가 중얼거렸다.
스탠드를 켜니 그제야 정신이 조금 드는 것 같았다.
어둑어둑해진 하늘을 보다 조금 놀라 시간을 확인했다.
여전히 비는 창을 두드리고 있었다. 조금 더 세게, 조금 더 많이.
이제 일어났냐는 듯 재잘대는 초침이 벌써 8시가 다 되어 간다며 나를 재촉하고 있었다.
미친 듯 쏟아부어대는 그 빗방울들.
"아.. 내 번호를 안 가르쳐 줬구나-" 그가 중얼거렸다.
"...." 나는 머리카락을 쓸어넘겼다.
"이홍빈입니다" 하고 이내 그가 대답했다.
그 한 마디에 나는 미간을 찌푸렸다.
한숨이 나올 것만 같았다.
"지금 커피 마실 생각 없는데" 내가 생각해도 너무하다 싶을 만한 목소리가 나왔다.
"나도 그럴 생각 없는데?" 이홍빈은 전혀 개의치 않는다는 듯한 웃음을 흘리며 얘기했다.
"그럼 왜 전화하셨어요" 내가 물었다. "진료비는 커피로 퉁 치는 거 아니었나요?"
"나도 커피로 퉁 치고 싶었는데" 그의 낮은 목소리에서 빗물이 묻어 나왔다. "비가 너무 많이 와서"
".....?"
"내가 차를 안 가지고 나왔거든요" 수화기 너머로 창문 밖에서 들려오는 것과 같은 빗소리가 끊임없이 들려왔다.
"그런데요?" 내가 물었다.
"버스 정류장인데 좀 데리러 와줘요"
"네?" 어이가 없었다.
"어? 잠깐만, 은우씨 내가 지금 배터리도 없거든요-!" 그의 목소리가 꽤나 다급하게만 들렸다.
"아니- 나는 별로-" 내가 미간을 찌푸리며 얘기했다.
"아 꺼지겠다-" 듣는 둥 마는 둥 그가 중얼거렸다. "좀 부탁할게요, 아파트 앞 버스정류장에서 기다리고 있을게요"
"저기요 이홍빈씨-"
"은우씨 올 때까지 기다릴ㄱ-"
그가 차마 말을 다 끝내기도 전에 통화가 끊어졌다.
미묘하고 이상한 감정들이 마음속을 유영했다.
괜히 고개를 젖히고 숨을 내뱉었다.
도무지 알 수 없는 남자였다.
의도도 이유도 모든 행동 하나하나가, 다.
다 미묘하게 비틀려있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마치 초식동물의 예민한 오감처럼 감히 짐작할 수 없는 그런 촉이
계속해서 나에게 무언가를 일깨우려 안달하는 듯했다.
내가 언제 처음 그를 만났더라?
아, 맞다.
병원, 병원에서 만났지.
그럼 내가 왜 그랑 같이 영화를 봤지?
그날 딱히 이유가 있었나?
그냥 우연히 만나서 같이 본 거였나?
나는 왜 그에게 폐를 찌르는 내 고통에 대하여 이야기했고,
그는 어떻게 나의 사고에 관하여 알고 있었던 걸까?
진료차트라고 했었나?
그랬던 것 같은데...
그럼 오늘은?
오늘은 어떻게 해야 하지?
*
홍빈은 버스 정류장에 서서는 가만히 제 핸드폰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미 꺼져버린 화면에 흐릿하게 자신의 얼굴이 맺혔다.
그것도 잠시, 어디선가 날라온 빗방울이 검은 화면에 물감처럼 떨어졌다.
그는 그걸 잠시 응시하다가 이내 느껴지는 인기척에 고개를 들었다.
저쪽에서 그녀가 걸어오고 있었다.
이은우.
그가 이내 주머니에 핸드폰을 집어넣으며 슬쩍 고개를 기울였다.
분명 그녀였다. 어두운 비를 뚫고 걸어오는 저 여자는.
분명 이은우였다.
겨울에 쓰르라미는 울지 않았다.
그저 빗소리뿐이었다.
더 처절한 그 빗소리뿐이었다.
홍빈은 검은 그 눈동자로 아직 자신이 여기에 서 있다는 것조차
인지하지 못한 그녀를 천천히 뜯어봤다.
제 발끝을 응시하는 눈동자
동그란 코와 도톰한 입술
그리고 습기를 먹어 조금은 무거워 보이는 갈색 머리카락까지.
그러다 문득 그녀의 손에 들려있는 우산을 바라봤고,
이내 그녀가 여분의 우산이 없다는 사실을 눈치채고는 눈썹을 쓱- 올렸다.
순간 그녀가 고개를 들었다.
눈이 마주쳤다.
반사적인 미소도 함께.
*
땅만 보며 발을 내디뎠다.
쓸데없는 도박은 싫었지만 이건 도박이라 부르기에도 뭐 했다.
해답이 없을 것 같다는 생각만 머릿속에 가득했다.
이상하게 비틀린 연결고리처럼 그저 엇물린 개연성만 존재할 뿐이었다.
이홍빈이라는 이름 아래 늘어진 사슬을 그렇게 얼기설기 엮여져 있었다.
나는 그게 기괴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결국 나는 이곳에 있었고 그 또한 마찬가지였다.
물웅덩이를 애써 피해 걷다 이내 정류장에 다다라서 고개를 드니 이홍빈은 이미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가 예의 그 미소를 지어 보이며 반사적으로 내게 손을 흔들었다.
그 모습이 이상하리만큼 얄미워서 나는 눈을 흘겼다.
버스정류장 아래로 걸어가 우산을 접으니 이홍빈이 웃으며 내게 다가왔다.
조금 젖어 촉촉해진 제 앞머리를 가볍게 만지더니 이내 보조개가 피어날 만큼 환한 미소를 지었다.
나는 또 홀리고 있었다. 파블로프의 개처럼 학습 된 것 마냥.
무의식이 가장 무서운 거라는 걸 그는 알고 있는 듯했다.
"고마워요 나와줘서" 이홍빈이 말했다. "안 올 줄 알았는데"
"선생님이 그렇게 말씀하시니 괜히 나왔다는 생각도 드네요-" 내가 말꼬리를 늘렸다.
"왜 갑자기 또 선생님이에요? 이름 잘만 부르더니" 이홍빈이 눈을 깜빡이며 물었다.
"거리감 좀 가지려고요" 우산 끝에서 물기가 뚝- 뚝- 떨어졌다. "그래야 쉽게 전화를 안 하죠"
"너무하네-" 그가 눈을 흘겼다. "나 쉽게 전화한 거 아닌데"
"...."
"뭐, 고마운 건 고마운 거니까" 그가 씩- 웃으며 말했다. "그럼 갈까요?"
그렇게 말하며 그가 손을 내밀었다.
나는 조금 민망해져서는 그 손을 바라보다가 이내 입술을 꾹- 깨물었다.
그가 고개를 기울이더니 이내 입술을 움직였다.
꽤나 즐겁다는 목소리가 그의 입술 사이로 새어 나왔다.
"설마 우산 하나 들고 나왔어요?"
"네" 빙글거리는 그의 표정이 마음에 들지 않아 나는 애써 그의 눈을 피했다.
"우산 하나 같이 쓰고 싶어서 그런 건 아닐 테고..."
"집에 우산이 하나밖에 없어서 그런 거예요!"
"누가 뭐라 그랬어요?" 그가 키득거리며 대답했다.
"..."
"그럼 비도 너무 많이 오고 하니까 저기 저 카페까지만 같이 쓰고 가는 건 어때요?"
"....?" 내가 이내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봤다. 그가 빙긋- 미소를 지었다.
"비 조금 잠잠해지면 그때 같이 나와요" 이홍빈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오래 안 걸릴 것 같은데"
"그냥 지금 집에 가면 안 돼요?" 내가 그에게 물었다.
"나 젖는 거 싫은데" 그가 말했다.
"나도 젖는 거 싫어요"
"나랑 둘이 커피 마시면서 얘기하는 게 싫은 거 아니고?" 문득 그가 내게 한 발자국 다가오며 말했다.
"...." 나는 대답 없이 나를 내려다보는 그의 눈을 응시했다.
"대답이 없네-" 그가 슬쩍 고개를 기울였다. "상처받게"
짧은 정적이 이어졌다.
빗소리가 고막을 때렸다.
심박수를 재던 그 기계의 울음소리가 귓가에 이명처럼 머무는 것 같았다.
두근두근- 그 소리도 함께 내 속을 헤집어놓고 있었다.
백색의 가운.
생명에 관한 맹세와 서약.
차가운 금속의 감촉과
아마 살고 싶어 꾸었던 그 기나긴 꿈.
그리고 지금.
"그런 거 아녜요" 마침내 내가 입을 열었다.
그래, 이건 미묘하고 은밀하고 또 아주 기묘한 일이었다.
아니, 어쩌면 처음부터 잘 짜여진 각본일 수도 있었다.
여우가 죽은 척 재주를 넘듯,
토끼가 그 붉은 눈으로 최면을 걸듯,
아니면 늑대가 풀린 쇠사슬을 숨기고 소녀에게 다가가듯.
오감이 요동치는 이 폭풍우 치는 밤에
나는 그를 마주하고 있었다.
텁텁하게 돋아난 입안의 혓바늘처럼
거슬리다 못해 위험하다 생각되는 그의 은밀함에
나는 빗물에 쓸려가는 낙엽처럼 휩쓸리고 있었다.
이상한 걸 알고 있었음에도.
아무리 싫다 생각했었음에도.
그 기시감은...
"걱정돼서 그래요" 나의 목소리가 습기 찬 공기를 타고 우리 둘 사이를 유영했다.
"....뭐가" 그가 내가 물었다. 아주 낮고 또 속삭이는 듯한 목소리로.
"당신을 보면 내가 무언가 잊고 있는 것만 같아서"
"....."
"그게 무서워서 그래요"
"......."
그는 아무 말이 없었다.
그저 나의 눈을 지긋이 마주 보고 있을 뿐이었다.
아주 오랫동안.
"은우씨가 그렇게 얘기하니까 괜히 나도 무섭네요"
한참이 지나서야 그가 입을 열었다.
생각보다 아주 가벼운 목소리였다.
억울할 만큼 가볍고 또 억울할 만큼 예쁜 미소도 함께였다.
나는 그런 그를 아주 가만히 응시했다.
그의 그 검은 눈동자를.
이내 이홍빈이 내게 가까이 다가왔다.
내 손안의 그 우산을 부드럽게도 가져가며 그는 미소를 지었다.
"갈까요...?"하고 그가 내게 물었다.
나만 들을 수 있는 그 목소리로.
*
너를 생각하는 일은 나에게는 악몽이었지,
가만 불어오는 바람에도 나는 몸을 떨었다.
죽었다 말해야 하는 건지 아니면 살아있다 말해야 하는 건지
도무지 모르겠는 너의 깊은 꿈속에서
지금쯤 너는 나를 원망하고 있을까?
...가만가만 네 손가락을 만져본다.
아직 따뜻한 그 손가락을 만져본다.
가는 숨을 내쉬고 있는 너의 입술과,
꼭 감긴 두 눈을 가만히 바라본다.
아- 정말 견딜 수 없는 일이었다.
차라리 원망한다고 말해줘
내가 너무 미워 쉽게 삶을 놓을 수도 없는 거라 말해줘.
아니면 내가 이야기할까?
내가 너에게 이야기하면 너는 이 깊은 잠에서 깨어나
나에게 하나의 해답을 제시해줄래?
그렇다면 나는 이야기할 수 있어.
이미 쓸모 없어진 이 두 손을 모으고 나는 얘기할 수 있어.
너를 증오해
너를 증오해
이런 나를 빗은 너를 증오해.
감히 다른 이름으로 부를 수 없는 너를...
도무지 무어라 불러야 할지 모를 이 감정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