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
쿡- 쿡- 가슴이 쑤셨다.
폐가 아프다는 게 더 정확한 표현이겠지.
그래, 얼음의 결정이 박힌 듯 내 폐는 얼어가고 있었다.
마치 애써 숨 쉬지 말라는 듯이.
너는 눈의 왕인 걸까?
*
비가 아프게도 유리창에 부딪혔다.
카페 안에 은은한 커피향은 익숙하지 않은 습기와 섞여
오묘하고 미적지근한 향기를 연신 풍겨대고 있었다.
나는 나의 맞은편에 앉은 이홍빈을 가만히 바라봤다.
그는 커피를 한 모금 마시더니 의외로 맛이 괜찮다는 얼굴을 하고는 입술을 삐죽거렸다.
소년인지 남자인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여우인지 토끼인지 모르겠다는 생각과 꽤나 비슷한 느낌이었다.
그는 양면의 가면처럼 기묘한 분위기를 풍기곤 했다.
아까, 그러니까 카페에 들어오기 전 그에게 괜한 소리를 한 게 아닌가 싶어 나는 문득 후회가 됐다.
하지만 뭐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입맛에 안 맞아?" 문득 그가 그렇게 물었기에
나는 물에서 건져올려지듯 내 생각 속에서 억지로 끄집어내졌다.
"아뇨" 간단하게 대답했다. "맛있네요"
이홍빈은 내 대답에 천천히 고개를 숙이며 웃었다.
웃음소리인지 숨소리인지 감히 구분 지을 수 없는
그런 따뜻한 날숨을 내뱉으며 그는 입꼬리를 올렸다.
아까 속삭이던 그의 목소리가
빗소리와 함께 내 귓가에 울려 퍼졌다.
"왜 웃어요" 별다른 감정 없이 그에게 물었다.
"그냥" 그가 고개를 들어 나를 마주 봤다. "매번 그렇게 덤덤한가 해서"
"...." 나는 입을 꾹- 다물었다.
클래식 음악이 카페 안을 채우고 있었다.
비슷한 음악을 최근에도 들어본 것 같다 했더니
아니나 다를까 이홍빈을 처음 만났던 그 진료실이 생각났다.
이홍빈은 어느새 테이블을 손가락으로 부드럽게 두드리고 있었다.
천천히 천천히 천천히 그리고 아주 부드럽게.
왜 나는 그의 그 움직임을 넋나간 사람처럼 바라보고 있는 걸까?
마치 홀리다 못해 사랑에 빠진 것처럼.
"덤덤한 거 아니에요" 내 입술이 의지와는 상관없는 말을 뱉어냈다.
이홍빈은 가만히 나의 눈을 마주 봤다.
천천히 깜빡이는 그의 눈동자에, 그 동공에 내 모습이 거울처럼 반사됐다.
처음.... 처음이 아닌 것만 같았다.
처음이 아니라는 듯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나의 잔상이 그의 눈에 맺혔다.
예민한 걸까?
"그럼...?" 그의 입술이 움직였다.
"그냥.... 뭐라 말해야 할지 모르겠어서..." 내가 말했다.
이홍빈은 가만히 눈을 내리깔더니
무언가 생각하는 듯 천천히 눈을 굴렸다.
나는 숨을 삼키고는 이내 다시 커피 한 모금을 삼켰다.
조금 식어 그런지 씁쓸함이 더 진해진 듯했다.
문득 그가 허리를 곧게 펴고는 이내 의자에 등을 기댔다.
나는 비가 잦아들었나 고개를 돌려 창문을 바라봤고 이홍빈은 제 머리칼을 아주 부드럽게 쓸어넘겼다.
"그래도 허튼 소리는 안 하잖아"하고 그가 말했다.
빗방울이 잦아들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나는 시작할 때부터 무언가 잘못된 것 같은 우리의 동행이 불편해지기 시작했고
그건 아주 태초부터 잘못 지어진 이름처럼 그를 만난 순간부터 나를 따라다니던 저주와 같이 느껴졌다.
오묘하고 기이하고 이상하면서도 불쾌하고 찝찝한 그러면서도 희한하게도 도망칠 수 없는.
아마 그의 미소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의 그 미소 때문에.
보기 좋게 피어나는 보조개와 수려하게 접히는 눈매 때문이라고.
모피에 눈이 멀어 총을 든 사냥꾼처럼 나는 숨을 죽이고 있었고,
그는 아직도 자신의 진짜 얼굴을 드러내지 않은 채 내 주변을 맴돌고 있었다.
누가 진짜 사냥꾼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아니, 처음부터 여우였긴 한 걸까?
내가 무언가 착각하고 있는 것 아닐까?
"이은우씨" 그가 내 이름을 불렀다. "통증은 좀 어때요"
꽤나 의사 다운 질문이라고 생각했다.
아니, 의사가 맞았지.
"더 심해지지는 않았어요" 그렇게 말하는 순간 다시 가슴이 답답했다. "똑같아요"
"주기는?" 이홍빈이 다시 한 번 물었다.
'그쪽을 만날 때마다 답답해-'하고 말하고 싶던 것을 꾹- 눌러 삼키고는 나는 입술을 벌렸다.
"가끔" 내가 말했다.
"가끔..." 그가 조용히 중얼거렸다. 그러고는 씨익- 웃어 보였다. "다행이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더 아프면 나한테 말하고"
"꼭 선생님한테 말해야 하나요?"
"아- 또 선생님이래-" 이홍빈이 미간을 찡그리며 말했다. "그냥 이름 불러요, 이름"
"방금은 진심으로 말한 거예요, 선생님 같이 얘기하니까-"
"흠--" 그가 눈썹을 쓱- 올리며 나를 바라봤다.
"진짜예요" 괜히 찔리는 마음에 한 번 더 이야기했다.
그가 기분 좋은 웃음소리를 내며 몸을 기울였다.
그러고는 테이블에 팔을 올리고는 천천히 턱을 괴었다.
별것 아닌 움직임이 별게 되어버리는 순간을 단 한 번이라도 경험해야 한다면
아마 지금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홀리듯이 웃는다고 했다.
홀리듯이 움직이고,
홀리듯이 말한다고,
그러다 어느새 눈을 뜨면 이미 그 혓바닥 위에 앉아있게 될 거라고.
왜 이렇게 간과하게 되는 걸까.
그를 생각할 때면 밀려드는 기시감을
나는 왜 자꾸 이렇게 간과하게 되는 걸까.
마치 처음부터 빠질 것을 알고 있다는 듯이.
"믿을게" 하고 그가 말했다.
그 목소리에 나는 숨을 들이 마셨다.
페가 부풀어 올라 가슴이 꽉 들이차는 것만 같았다.
나는 괜히 고개를 돌리고는 의미 없이 벽에 걸린 그림을 바라봤다.
무의식적으로 얼굴이 달아올랐다.
정적이 빈 병의 물처럼 차올랐다.
무언가 말해야 한다는 강박이 든 것은 아니었지만
왠지 그가 내가 말하기를 기다리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애써 고개를 돌리고 알지도 못하는 그림을 쳐다보는 나와
끈적하다 못해 끈질기게 느껴지는 그의 계획적인 시선이 자꾸 나를 붙잡고 있었다.
그를 생각하는 것이 위험한 일이라는 생각은 진심이었다.
그의 모든 순간이 나에게는 위험으로 다가왔다.
나 혼자만 그렇게 느끼는 걸까...
그래, 그는 내가 무슨 말이라도 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가장 손쉬운 순간을 위해 숨을 죽이고 먹잇감을 바라보는 맹수처럼
이홍빈은 꽤나 순수한 얼굴로 그리고 꽤나 짙은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며
내가 무엇이라도 던지기를 인내심 있게 기다리고 있었다.
던지면 잡아먹힐 것을 알면서도 나는 입술을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먹이사슬에 갇혀버린 초식동물처럼 조그마한 움직임에도 긴장하고 경계하고 있었으면서도
결국 살기 위한 질주에서는 보람 없이 지고야 마는, 그런 굴레였다, 이건. 그와 나의 사이는.
"데이트는 어떠셨어요..?" 내가 천천히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며 물었다. 별로 묻고 싶은 질문은 아니었다.
"궁금해요?" 그가 문득 즐겁다는 얼굴로 내게 물었다.
"별로 궁금한 건 아닌데" 나는 애써 그의 눈빛을 피했다.
"근데 왜 물어볼까-" 그가 말꼬리를 길게 늘렸다.
"그냥 딱히..." 나는 콧등을 찡그리고는 다시 그를 바라봤다.
쓸데없는 용기였다. 이제 와 생각해 봤을 때 부려서는 안됐을 그 용기.
"그래, 궁금해서 물어봤어요"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 이홍빈은 이내 턱을 괴고 있던 손을 내리고 가만히 나를 바라봤다.
"얘기 안 해도 돼요" 내가 눈을 굴렸다. "그렇게 알고 싶어 죽겠는 건 아니니까"
문득 그가 웃었다. "좋았죠, 데이튼데"
"이렇게 비가 많이 오는데 도대체 어디서 데이트를 하는 거예요?" 이번엔 정말 궁금해서 물었다.
"내가 말하지 않았나?" 그가 빙긋- 웃었다. "꼭 밖에서 데이트하란 법은 없지"
나는 미간을 찌푸리며 그를 바라봤다.
"아니, 무슨 불순한 생각을 하길래 그런 얼굴로 봐요?" 그가 낮게 웃으며 물었다.
"그다지 말하고 싶지 않네요" 커피를 한 모금 마시며 내가 중얼거렸다. "그리고 그런 생각 안 했어요"
"얼굴에 다 쓰여있는데 뭐" 그가 말했다.
"아니거든요-"
"나 아직 어떤 생각이라고 말 안 했는데" 이홍빈이 눈웃음을 치며 말했다.
나는 눈을 흘기며 그를 바라보다 이내 다시 한 번 커피를 들이켰다.
이홍빈은 기지개를 작게 켜더니 제 입술을 보기 좋게 살짝 깨물었다.
참 붉고도 예쁜 입술이었다.
"뭐 어때요 생물학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성인인데 그런 얘기할 수도 있지"
"...됐어요. 포장하지 마요 더 이상하니까"
내가 그렇게 이야기하자 이홍빈은 즐거운 듯 웃음을 터뜨렸다.
나는 그 기분 좋은 웃음소리에 슬쩍 그를 바라봤고,
그 피어오른 보조개에 다시 한 번 가슴이 시큰대는 것을 느끼고는 얼른 시선을 거뒀다.
아- 참 예쁜 꽃이었다.
"그 간호사님은 무슨 영화 보셨데요?" 내가 물었다.
"누구?" 그가 나를 바라보며 되물었다.
"여자친구요" 내가 살짝 미간을 찡그리며 그에게 말했다.
"여자친구?" 이홍빈은 눈을 가늘게 뜨며 나를 바라봤다. 도통 모르겠다는 얼굴이었다.
"오늘 애인이랑 데이트하신 거 아니에요?" 눈을 끔뻑이며 그에게 물었다. "왜 저번에 극장 앞에서 만난"
그제야 알아들었다는 듯 이홍빈은 살짝 입을 벌리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천천히 손을 들고는 제 앞머리를 툭- 툭- 무심하게도 정리하며 그는 이야기했다.
"애인 아닌데"
"아, 그럼-"
"애인 없는데" 그가 나의 눈을 바라보며 말했다.
"......" 나는 의아함에 눈을 끔뻑 감았다 뜨고는 그를 바라봤다. "데이트 한다고 했잖아요"
"내가 재밌는 거 하나 가르쳐 줄까요?" 문득 가벼운 미소를 지으며 이홍빈은 말했다. "나에 관하여"
왠지 밀려오는 찝찝한 기분에 나는 콧등을 찡그렸다.
바다의 짠 공기가 육지에서 풍겨 나오고 있었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덫을 앞에 둔 생쥐처럼 나는 고민을 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저기 저 치즈를 집어버릴까, 그래도 괜찮은 걸까?
결국 선택은 내 몫이었다.
"아뇨, 됐어요" 내가 말했다. "별로 듣고 싶지 않아요"
"나는" 내 대답을 철저히 무시하며 그가 입술을 움직였다. 선택의 나의 몫, 하지만 마지막은 언제나 당신의... "나는 여자가 좀 많은데"
"별로 듣고 싶지 않다고 했잖아요" 내가 그를 바라보며 이야기했다. 별로 좋은 말투는 아니었을 거라 생각했다.
예상외로 이홍빈은 슬쩍 고개를 기울이며 예의 그 미소를 지었다. "왜 이렇게 화를 낼까?" 부드러운 목소리로 그가 물었다.
"누가 화를 냈다고 그래요" 내가 이야기했다.
"지금" 그가 나의 눈을 마주 보며 말했다. "네가"
"화 내는 거 아니에요" 미간을 찌푸리며 나는 대답했다. "깊게 알고 싶지 않았던 거뿐이예요. 당신 사생활 같은 건"
이홍빈은 지긋이 나를 바라봤다.
화가 난 건 아니었다고 나는 말하고 싶었다.
단지.... 모르겠다.
그래, 모르겠다.
"실망했어?" 나긋나긋한 목소리가 내 귓가를 파고들었다. 속삭임이라고 말하는 게 나을지도 몰랐다.
나는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봤다. "....." 할 말을 잃게 만드는 그의 그 눈동자를. 그 토끼의 최면 같고 여우의 유혹 같은 그 눈동자를.
"기억 나?" 그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상한 단어였다.
기억이라는 단어는 분명 이상한 단어였다.
버스정류장에 맺히던 빗방울을 애써 견디며 내 머릿속을 뒤흔들어놓던 그 단어가
이번에는 그의 입술 사이로 무람없이 흘러나왔다.
백색의 영혼처럼, 아니 순백의 장난처럼.
가벼운 듯 전혀 가볍지 않은 그 단어에 나는 숨이 막혔다.
무언가 잊고 있는 것 같다고 나의 심장이 내게 이야기하고 있었다.
날카롭게 차오르는 이 작은 단위의 고통들도,
폐를 갑갑하게 조여오는 어떤 이물감도,
그리고 그날 나의 가슴에 남겨진 얼룩덜룩한 흉터도.
기억이라는 고리에 감겨 끊어지지 않는 뫼비우스의 띠 처럼 내 주위를 맴돌고 있었다.
병원에 간 게 잘못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연인지 아닌지 모를 그 첫 만남이 잘못이라고.
아니, 애초에 아프지 말았어야 했는지도 몰랐다.
여우와 사냥꾼
토끼와 가면
그리고........
늑대와 소녀
문득 실내의 온도와는 상관없이 차게 식어가는 폐 속의 공기에 나는 미간을 찌푸렸다.
또 시작이다. 또 숨이 막혔다. 또 가슴이 아팠고, 또 그날의 기억이 머릿속에 유영했다.
그 차가운 쇠붙이의 감각과 찢어지게 울려대던 사이렌 소리.
드르륵- 드르륵- 소름 돋는 병원 침대의 바퀴 소리와 가쁜 숨소리들.
죽음인 걸까, 나는 죽는 걸까 한없이 고민하던 무의식.
그리고 그 모든 것에서 나를 건져올리는 그의 목소리.
여우 같은 그의 움직임.
여우... 맞지?
"나한테 궁금한 거 없냐 물었던 거 기억나요?" 이홍빈은 여전히도 낮은 그 목소리로 나에게 물었다.
"......" 나는 몽롱한 얼굴로 그를 바라봤다. 독한 약에 취한 것만 같았다.
"그때 네가 그랬는데, 없다고"
"......" 빗소리가 들려왔다. 조금 잦아들어 이제는 희미한 그 빗소리가. "지금도..."
"글쎄?" 그의 입꼬리가 올라가는 게 보였다. "이은우씨 질문들은 하나같이 내가 궁금한 것 같은데?"
나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외면하고 피하려 했던 것들을 들어내 보이는 그의 질문이
촌철살인처럼 흔들리는 마음을 파고들었다.
그래, 궁금했다.
궁금할 수밖에 없었다.
당신이 궁금하게 만들었잖아.
".............."
아무 말 없는 나를 이홍빈은 아주 짙은 눈으로 바라봤다.
이미 다 알고 있다는 듯한 그의 눈빛이 싫었음에도 솔직해질 수밖에 없었다.
나는 총을 들었고 그는 붉은 털을 한껏 빛내고 있었다.
아니.... 그 반대일 수도....
보름달이 뜨는 그 언덕 위에 앉아있는 게 너일까 나일까.
너는 늑대인 걸까 아니면 그 발밑에 즐비하게 늘어져있던 여우인 걸까.
"솔직하게 말해봐요 이은우씨, 내가 궁금하지 않아?"
나는 눈을 꾹- 감았다 뜨고는 이내 나를 바라보는 그의 그 수려한 눈동자를 마주 봤다.
그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전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확실한 것은 하나뿐이었다.
예를 들어...
당신이 들쳐버린 나의 진심 같은 거.
내 속마음 같은 거.
"그래요, 궁금해요"하고 내가 말했다.
나의 그 짧은 대답에 이홍빈은 의외라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이내 싱긋 웃어 보였다.
"예상외로 빨리 인정하네-" 그가 천천히 말했다.
"이 대답 원해서 물은 거 아니었나요" 내가 견디기 힘든 그의 눈웃음을 피하며 이야기했다.
그가 웃는 소리가 들렸다.
"맞아"하고 그가 말했다. "그럼 이건 어때?"
"......?"
"내가 알려줄게, 내가 누군지" 비밀을 이야기하듯 그가 속삭였다.
"....어떻게요"
"간단하잖아요" 그가 웃으며 이내 의자에 등을 기댔다. "만나보면 되지"
"무슨..."
"데이트도 좀 하고"
"....."
"연애도 좀 하고"
"...."
"어때?"
아무렇지도 않게 뱉어내는 유혹.
입안에서 흘러나온 구슬처럼 떨어지는 달콤함.
의중을 알 수 없는 그의 모든 말들과 계속되는 통증.
나는 왜 이런 말에 홀린 듯 흔들리는 걸까...?
그는 나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아니, 사실 나의 대답이 과연 그에게 중요하긴 한 걸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도대체 그가 얻는 것이 무엇이고 내가 잃는 것이 무엇인지 감이 오지 않았다.
원치 않게 날세운 감각들이 원치 않게 무뎌지고 있었고,
나는 차라리 모르는 게 나았을 거라는 이 남자의 묘한 치명적임에 관하여 생각하지 않으려 애를 쓰고 있었다.
하지만 다 허사였다.
그를 생각하지 말자 생각하는 것도
결국에는 다 그에 관한 생각이었다.
매번 나는 그를 생각하고 있었다.
이 가슴속 통증을 그에게 연관시킬 정도로 나는 억지로라도 그를 생각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모든 아픔이, 그 사고에 관한 흐릿한 기억이 다 그의 탓인 것 마냥.
그래, 나의 대답은 그에게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Kill me or Heal me.
정답을 알아야만 했다.
이 폐를 찢는 통증의 정체도.
"좋아요"하고 내가 대답했다.
이홍빈은 나를 바라보며 이내 마음에 든다는 듯 입꼬리를 올렸다.
환하게 빛나는 그 웃음이 다시 한 번 홀리듯 나를 취하고 있었다.
징그러운 일이었다. 끔찍하고 숨 막히는 일이었다.
아편처럼 더러운 그런 일이었다.
그의 웃음은 그랬다.
아편 같았다.
백색의 아편.
*
그렇게 무던하게 이야기할 때면 나는 속에서 솟구치는 불안함을 감히 숨길 수가 없었다.
그래, 그렇게 덤덤하게 또 그렇게 솔직하게 이야기하는 너를 볼 때면
나는 도무지 너를 이해할 수 없다는 생각에 그날 그랬던 것처럼 숨이 막혔다.
무의식적인 너의 그 솔직함이 나는 칼보다 날카롭다고 생각했다.
단 한 번도 나에게 손을 대지 않고 내 기도를 조르는 너.
나는 이미 폐허였고 어쩌면 그래서 네가 더 필요했는지도 모른다.
그 폐허의 의미를 탓할 누군가가 필요했는지도 모른다.
그래, 너는 나의 절망의 시작이었다.
사지 멀쩡한 불구의 시초였다, 네가.
아- 나는 너를...
미워해.
진심으로.
*
당연히 나는 당신을 아프게 하겠지.
당연히 당신도 나를 아프게 할 테고.
[생텍쥐페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