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
동구 밖 과수원 길
아카시아꽃이 활짝 폈네
댕- 댕-
청아하게 울리는 종소리는
숲 속 깊은 곳에 위치한 작은 성당에서부터 울려 퍼졌다.
소년은 그 소리를 들을 때마다 밀려오는
차마 정의하기 어려운 감정에
가끔 눈을 끔뻑이며 하늘을 올려다봤다.
그 소리가 익숙해서 문득 눈물이 날 것만 같은 날도 있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현세에 두고 왔어야 할 기억들이 소년의 밤을 괴롭히는 일은
정말이지 이상한 일이었다.
소년은 물가에 앉아서 작은 조약돌의 주웠고
이내 그중 가장 예쁜 것을 주머니 속에 집어넣었다.
물풀들이 그의 발을 간지럽히며 궁금증을 뿜어댔지만
소년는 대답 대신 가벼운 웃음을 지으며 이내 뭍으로 걸어 올라갔다.
저 멀리서 소녀의 발소리가 들렸다.
가벼운 듯 따뜻한 그 발소리가
이 저녁의 호수를 가득 메우고 있었다.
소년은 괜히 제 옷매무새를 내려다보았고
문득 차오르는 비릿함에 마음에 안 든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그가 이내 어깨에 걸려있던 물풀들을 하나하나 떼어내기 시작했다.
축축하게 늘어진 것들은 아주 오랫동안 함께 있을 줄 알았다는 듯
꽤나 마음 상한 표정을 하며 떨어져 나갔고
소년은 미안하다는 듯 그것들은 물가에 놓아주었다.
물밑의 생명들은 소년이 변했다고 생각했다.
그건 아주 기쁜 일이었다.
"상혁아-"
소년을 부르는 소녀의 목소리가 들렸다.
오늘은 반달이 뜬 날이었다.
소년은 소녀의 목소리가 좋았다.
분명 들었음에도 소년은 괜히 저 멀리서 손을 흔드는 소녀를 시큰둥한 표정으로 바라봤다.
떨어지기 싫어 소년의 교복 주머니 안에 숨어있던
작은 물고기는 그 모습을 보고는 뻐끔- 뻐끔- 기포를 쏘아대며
소년을 괴롭히다가 이내 혼자서 잘 해보라는 듯 주머니 밖으로 빠져나와
물속 아주 깊은 곳으로 들어가 버렸다.
소년은 여전히도 맨발이었고
여전히 비릿한 비린내를 풍기고 있었고
또 여전히 한 쪽 팔에서 뚝- 뚝- 물을 떨구고 있었지만
그 젖은 검은 머리카락은 여전했지만
그래도 깨끗한 차림으로
물풀 하나 없이, 비늘 하나 없이 멀끔한 차림으로 소녀가 가까이 다가오기를 기다렸다.
소녀는 참 사랑스러운 아이였다.
가끔 얼룩덜룩 푸른 꽃을 피워오는 그 아이는
그 상처마저도 참으로 사랑스러운 아이였다.
소년은 그런 소녀를 가만히 바라보고
소녀의 말을 하나하나 새겨듣고
그리고 그 웃음을 마음 깊은 곳에 간직했다.
데려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 사람은
소녀가 처음일 거라고 소년은 말했다.
함께 있고 싶은 사람도 그녀가 처음이었다고
소년은 비밀 이야기처럼 늙은 잉어의 귓가에 속삭였다.
그런 이야기를 하는 소년의 얼굴이 슬퍼 보여 잉어는 수면 위로 뛰었다.
물보라 치는 그 파동의 장식이 유난히도 아름답도록
잉어는 소녀가 다녀간 밤이면 소년을 아주 꼭 안아줬다.
낮이 되면 소년은 낡은 다리 아래
그 그늘에 앉아 소녀를 생각했다.
소녀가 만진 곳마다 말라서 발갛게 달아올랐다.
이미 몸 전체로 퍼져나가고 있는 그 자국들을
소년은 더 이상 화상 자국이라고 부를 수도 없었다.
말라버린 그 피부를 바라보고 있으면 소년은 꽃에 대해
생각하는 것을 멈출 수가 없었다.
그래, 꽃을 주러 가는 길이었다.
늦은 밤...
귀뚜라미 울음소리...
꽃을 주러.
소년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늦은 밤, 귀뚜라미가 울어대던 그 여름의 늦은 밤.
낡아버린 울타리와 성당의 종소리.
소년은 그 무덤에 꽃을 주러 가는 길이었다.
이름 없는 무덤에 꽃을 주러 가는 길이었다.
소년은 이내 머리를 감싸 쥐고는
얕은 신음을 뱉어냈다.
이내 벌러덩 뒤로 누워서는 낡아서 구멍이 숭숭 뚫린
나무다리의 합판을 바라보다 눈을 꾹- 감았다.
꽃을 주러 갔던 그날 만난 너는 참 예뻤는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주어 없는 그 생각에 소년은 눈을 번쩍 뜨고는
이내 그 동그란 구멍 사이를 비집고 들어오는 밝은 햇살을 바라봤다.
햇빛이 동공에 맺혀 이내 밝은 갈색으로 빛났다.
"기억이 안 나...."
문득 소년이 중얼거렸다.
눈물이 나는 것 같았다.
눈물을 흘릴 수 있었나...?
*
"상혁아-"
하고 부르는 목소리에 소년은 잠에서 깼다.
"상혁아-"
하고 소녀는 소년을 부르고 있었다.
소년은 찌뿌둥한 몸을 일으키고는 어느새 어두워진 주변을 두리번 거렸다.
동그란 구멍 사이로 햇살 대신 별들이 촘촘히 걸려 있었기에
소년은 조금 부어버린 눈을 비비며 기지개를 켰다.
그러고는 어느새 다시 자라난 물풀을 가볍게 떼어냈다.
"상혁아 어딨어?"
소녀의 물음이 호숫가 메아리처럼 천천히 울려 퍼졌다.
소년은 그 반복되는 소리를 되새기다 이내 눈을 감고는 깊은 숨을 삼켰다.
"여기"
그가 말했다.
"다리 밑에 있어"
한참 조용한 정적이 이어졌다.
소년은 밀려오는 불안함에 아니,
소녀가 가버렸을 것만 같은 실망감에 머리를 털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너무 어둡고 무서워 그녀가 차마 들어오지 못 했을 거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 순간 그녀의 목소리가 들렸다.
"내가 거기로 갈게"
하고 소녀가 이야기했다.
"조금만 기다려"
소년은 가만히 소녀의 목소리를 되새겼다.
그 의미 없이 의미 가득한 그 말을
소년은 소녀가 가고 난 뒤에도
수 백 번 수 천 번 더 되새겼다.
"응"
하고 소년이 대답했다.
"기다릴게"
소녀가 놓고 간 꼭 맞는 신발을 손에 쥐고는
소년은 다시 자리에 누웠다.
별들이 빛나고 있었다.
그 작은 구멍 사이사이로
어느 때보다 밝은 별들이
예쁘게도 반짝이고 있었다.
그날 밤 소년은 꿈속에서 소녀를 만났다.
그래, 이름 없는 무덤에 꽃을 주러 갔을 때,
그날 만난 네 미소는 너무나도 예뻤는데.
아- 종소리가 들린다.
*
하얀 꽃 잎파리 눈송이처럼 날리네
....
둘이서 말이 없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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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
바람이 머물다간 들판에
오늘은 강가에 바람이 불고 있었다.
소녀가 오지 않은 지 어느덧 15일이 지나갔고
보름달이 뜨기 직전의 밤, 그래, 그 직전의 밤을
소년은 홀로 보내고 있었다.
소년은 소녀를 만난 후부터
이상한 꿈을 꾸기 시작했고,
그게 견디기 힘들어 정작 자야 할 시간에는
뜬 눈으로 다리 밑에 누워 햇살을 견디며 뒤척였다.
물속 그 깊은 곳의 생명체들처럼
아무도 모르던 밤을 노래로 지새우며
강가를 에둘러 걸어대던 소년은
이제는 낮에 눈을 뜨고는 햇살이 투과하는 자신의 몸을 바라보며
씁쓸하고 비릿한 마음에 몸에 피어난 애먼 물풀들을 하나하나 뜯어냈다.
소녀가 만졌던 볼이 아직도 화끈거렸다.
소녀를 만졌던 손이 아직도 화끈거렸다.
온몸이 화끈거리기 시작했다.
마치 뛰고 있는 심장처럼.
시간이 지날수록 선명해지는 그 꿈의 잔상에
소년은 눈을 감고 생각에 젖어들었다.
물풀이 간지럽히던 발바닥에는
어느새 소녀가 선물한 신발이 신겨져 있었다.
발에 딱 맞아 벗고 싶지 않은 신발을
소년은 달을까 아쉬워하면서도
너무 소중해서 잃어버릴까
쉬이 벗어버릴 수도 없었다.
꿈속의 그 얼굴이
웃고 있는 그녀의 얼굴이 점점 더 선명해졌다.
그래 꽃을 주러 가는 길이었다.
꽃을 주고 오던 길이었다.
익숙한 듯 처음 보는 그녀의 얼굴이 점점 더 선명해졌다.
열두시 정각이 되면 들려오는 숲 속의 종소리는
귀속되어버린 소년의 발을 풀어주려 애를 쓰는 듯
매번 들려올 때마다 소년을 숲 속으로 유혹하기 마련이었지만
강가에서 멀어질수록 숨이 막히던 소년은
이내 시도조차 하지 못하고 작은 물방울들을 뚝- 뚝- 흘리며
혼란스러운 눈동자로, 그 젖은 눈동자로
저 멀리 새들이 날아다니는 그 성당의 십자가를
가만히 바라보다 이내 다시 물속으로 돌아갔다.
15일이 지났다.
보름달이 뜨는 밤이었다.
소년은 다 허물어가는 다리 난간에 걸터앉아 그 달을 바라보고 있었다.
괜히 속이 답답해서, 꿈에 나온 꽃과 소녀와 그 미소가 아른거려
소년은 문득 미간을 찌푸렸다.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그러다 문득 다시 바람이 불었고
젖은 그 머리를 말리려는 듯 부드럽게 쓸어 넘기는 바람의 손길에
소년은 눈을 슬며시 감고는 노래를 불렀다.
머리가 말라가는 것만 같았다.
소녀가 돌아오길 기다리는 동안에
그의 머리는 천천히 말라갔다.
오지 않을까?
하고 소년은 생각했다.
소녀가 왜 오지 않을까- 하고
그 생각을 하니 아까 꿈에 관하여 생각했을 때 보다
더 슬퍼져서 소년은 입술을 꾹 깨물었다.
확- 다이빙하듯 이 다리에서 떨어져 버리면
늙은 잉어가 잠에서 깨어나 자신을 꾸짖을까 소년은 고민했다.
여기서 확- 떨어져 버리면 잠을 자던 물풀들이 일어나
놀랐다며 자신을 꼭- 껴안을까 소년은 궁금했다.
휘청휘청 흔들리는 마음이었다.
알 수 없는 것이 너무 많아서
기억나지 않는 것들이,
잊어선 안될 것들이 너무 많아서
소년은 난간 위에 위태로이 올라서서는
휘청휘청 흔들리고 있었다.
"뭐 하는 거야!?"
문득 들려오는 그 목소리에,
밤의 고요를 파고드는 소녀의 목소리에
소년은 놀라 눈을 뜨고는 이내
다리 안쪽으로 엉덩방아를 찌었다.
아픔도 잠시 소년이 고개를 들자
소녀는 가는 숨을 색- 색- 몰아쉬며
창백한 얼굴로 눈물을 뚝- 뚝- 흘리며 소년을 바라보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주저앉아 펑펑 울어버릴 것만 같은 소녀의 얼굴을 소년는 바라봤다.
얼룩덜룩 멍투성이인 그 얼굴에 눈물이 흘러넘쳐
안쓰러운 마음에 그럼에도 너무 그리웠던 그 이상한 마음에
소년은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서는 소녀에게 다가갔다.
"무슨 짓이야아-"
숨을 눌러내리며 소녀는 제 눈가를 비볐다.
소년은 다가가던 발걸음을 멈추고는
소녀의 오른손에 들려있는 작은 꽃다발을 쳐다보다
이내 다시 그녀의 얼굴로 시선을 옮겼다.
놀란 듯 창백한 그 얼굴이,
푸른 꽃이 아프게 피어 안쓰러운 그 얼굴이
이내 소년의 두근거리는 심장만큼이나
붉게 붉게 피어나고 있었다.
"울지 마"
하고 소년은 말했다.
서투르고 또 서투르게 소년이 말했다.
"놀랐잖아"
소녀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네가 떨어지는 줄 알고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
그래, 보름달이 뜬 날이었다.
바람이 불고 마음이 흔들리는 그런 밤이었다.
소년은 소녀를, 울고 있는 소녀를 가만히 쳐다보다
이내 이상하게 마음이 벅차서 차마 그냥 둘 수 없을 것만 같아서
이내 그녀에게 다가가서는 그 작은 어깨를 품 안에 꼭 껴안았다.
아- 뜨거워도 괜찮았다.
이렇게 온몸이 화상을 입어
화끈거리는 마음에 결국 말라죽어버린다고 해도
그래도 괜찮을 것 같았다.
이걸....
사랑이라 부른다고 했다.
늙은 호수의 잉어가 그렇게 속삭였다는 것을 소년은 알고 있었다.
사랑이라고 했다.
소년은 사랑을 하고 있었다.
*
붉게 물들어 타는 저녁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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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
꿈속에서 소년은 낙하하고 있었다.
떨어지는 꽃처럼 낙화하고 있었다.
아- 다만 지켜주고 싶을 뿐이었다.
그 예쁜 꽃을, 그 미소를 지켜주고 싶었을 뿐이었는데...
너는 행복하게 살고 있니?
*
한참을 울던 소녀와
뜨거움을 꾹 참고 그녀를 안고 있던 소년은
어느새 나란히 시간에 낡아버린 다리 위에 앉아
천천히 발끝을 적시는 달빛의 고요한 노래를 듣고 있었다.
소년은 소녀에게 말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꿈속의 기억들을 소녀에게 말해야 한다고.
자신은 인어가 아니라고,
그렇게 예쁜 존재가 아니라고
고백해야 한다고 소년은 생각했다.
그게 싫어 마음이 아팠다.
소녀가 영영 떠날 것만 같았다.
발갛게 달아오른 눈가로 입술을 삐죽거리던 소녀는
이제야 생각났다는 듯 손에 꼭 쥐고 있던
보라색 꽃다발을 소년에게 건넸다.
소년은 그걸 받아들고는 가만히 소녀의 얼굴을 바라봤다.
파랗게 든 멍이 보기 싫어서 소년은 미간을 찌푸렸다.
오늘따라 유난히도 짙은 그 상처들에
소년의 약을 발라주기는커녕 위로조차 쉽게 건넬 수 없었다.
모든 게 사랑스러웠지만 사랑스럽기에 아프지 않았으면 했다.
다만 그뿐이었다.
정작 진짜로 할 수 있는 게 없어 소년은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얼굴은 또 왜 그래?"
조금 퉁명스레 소년이 물었다.
마음과는 달리 나간 자신의 목소리가 소년은 신경 쓰였다.
그리고 그런 그의 걱정들을 단순히 무너뜨리는 소녀의 목소리는
언제나 그랬듯 참 사랑스럽고 예쁘기 마련이었다.
흔들리며 피는 꽃이라고 했다.
흔들려서 더 예쁘게 피는 꽃이었다.
소녀는.
"싸웠어"
하고 말하며 소녀는 활짝 웃었다.
소년은 무어라 대답할까 고민하다가
이내 눈을 감고는 소녀가 건넨 꽃의 향기를 맡았다.
달큼한 향기가 코끝에 차올랐다.
참 오랜만이었다.
물가의 비린내를 걷어버리기가 참으로 오랜만이었다.
"...이겼어?"
하고 소년이 물었다.
소녀는 그 질문에 활짝 웃으며 소년을 바라봤다.
즐거운 듯한 그 얼굴에 소년은 조금 마음이 놓이는 것만 같았다.
그래, 소녀는 웃고 있었다.
"당연하지!" 소녀가 대답했다. "훈장이야, 훈장"
제법 활기차게 대답하는 소녀의 눈을 소년은 뚫어져라 바라봤다.
그 눈빛의 담기 단어들이 소녀의 마음에도 닿았는지
소녀는 장난스런 그 웃음을 걷어버리고는
이내 따뜻한 손을 뻗어 소년의 머리카락을 쓸어넘겼다.
바람 같다고 소년은 생각했다.
"다 말랐네-"
하고 소녀가 중얼거렸다.
그래, 어느새 다 말라 보송보송 해진
그 머릿결 사이사이로 소녀의 가는 손가락이
부드럽고 애틋하게 파고들었다.
소년은 조용히 조용히 숨을 내쉬며 소녀의 눈을 마주 봤다.
"있잖아, 나 공부도 잘 하고 밥도 잘 먹어"
소녀가 천천히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제 우리 처음 만난 그날처럼 울지도 않고 친구도 생겼어"
소년은 가만히 소녀의 목소리를 들었다.
"괴롭히는 애들 밀어낼 용기도 생겼어"
"잘 됐네-"
문득 아무렇지 않다는 투로 소년은 이야기했다.
하지만 이내 외로워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꼭 이별 이야기 같다는 생각을 소년은 할 수밖에 없었다.
그걸, 그 마음을 알았는지 소녀는 부드럽게 웃어 보이며
이내 달빛으로 물든 강가를 바라봤다.
화끈화끈 온몸이 화끈화끈.
그 수려한 물보라를 함께 내려다보며 소년은 고민했다.
이제 말해야 한다고 소년은 생각했다.
이제 말해야 한다고,
자신은 인어가 아니라고,
물귀신이라 불린다고.
"있잖아, 그 얘기 알아?"
소년이 차마 입을 열기 전에 소녀가 먼저 이야기를 꺼냈다.
소녀는 여전히도 물보라가 이는 달빛의 호수를 바라보고 있었고
소년은 아까 소녀를 안아 얻은 그 화상 자국에 온몸이 뜨거워
벌겋게 달아오른 자국들을 애써 견디고 있었다.
"무슨 얘기?"
소년이 물었다.
"5년 전에 여기서, 그러니까 이 다리에서 한 소년이 떨어졌데. 어떤 소녀를 구하려고"
소녀가 문득 슬픈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아니 처음 들어"
그래,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소년이 이곳에 오기 전에 일어난 이야기였다.
불현듯 저 멀리 호수 가운데에서 커다란 잉어가 수면 위로 뛰어올랐다.
소녀는 그걸 보고 눈을 크게 뜨며 작은 감탄을 흘렸고
소년은 불현듯 귀에 맺히는 이명에 미간을 찌푸리다가
이내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기울이며 그 커다란 물보라와
붉은 잉어의 비늘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늙은 잉어가 이 시간에 깨어있다는 게 소년은 여간 적응이 되지 않았다.
그는 왜 깨어있던 것일까...
"있잖아 말이야"
소녀가 다시 입을 열었다.
"나 궁금한 게 있어"
"뭔데?"
"그 소년은.... 죽었을까?"
소녀의 그 물음에 소년은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었다.
다만 자신의 착잡한 처지에 고개를 숙이고는
애먼 손톱을 뜯을 뿐이었다.
"너는 어떻게 생각하는데...?"
소년이 소녀에게 물었다.
여전히 보라색 꽃을 들고는.
"나는..."
소녀는 숨을 삼켰다.
"나는 살았을 것 같아"
"....왜?"
"왜냐하면..."
소녀가 천천히 입술을 움직이다
이내 고개를 돌려 소년을 바라봤다.
"이 호수는 고요하고"
"...."
"이곳엔 네가 있잖아"
"....."
소년은 입을 꾹- 다물었다.
아- 말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자신이 인어가 아니라고 말할 수 없을 것 같았다.
다시 흔들리기 시작했다.
휘청휘청 휘청휘청,
마음 따라 바람 따라 소년은 흔들리고 있었다.
나쁜 생각들이 머릿속을 물고기처럼 유영하는지도 몰랐다.
"참 신기하다"
소녀의 목소리에 소년은 물에서 건져올려지듯 정신이 들었다.
달빛이 어느덧 차올라 소년의 꽃을 적시고 있었다.
소년은 고개를 들고 소녀를 바라봤고,
소녀도 역시 소년을 보고 있었다.
"뭐가...?"
소년이 물었다.
"처음에 널 봤을 때 넌 참 차갑고 무서웠는데"
소녀가 무릎을 끌어안았다.
"반짝이는 비늘, 젖은 머리카락, 맨발에 창백한 피부"
소녀의 한 마디 한 마디에 소년은 가슴이 쪼그라드는 것만 같았다.
아니, 사실 잘 모르겠다.
소녀가 하고 싶은 말은 소년은 알 수 없었다.
그저 들을 뿐이었다.
그 어여뿐 목소리와 그 따뜻한 눈빛을.
아주 가만히 가만히 마주 보고 있을 뿐이었다.
눈물 나게도 사랑스러운 현실의 존재를
소년은 이계의 경계에 서서 닿지 못해 마음속으로 울먹이고 있었다.
"처음에는 그랬는데"
하고 소녀는 말했다.
"막 물에서 나온 것 같았는데"
"......"
"지금은 아니야"
"지금은..."
소년이 입술을 움직였다.
"지금은 어떤데"
그 질문에 소녀는 살포시 웃었다.
"예뻐"
하고 소녀가 말했다.
"참 예쁘다. 상혁아"
소년은 가만히 고개를 돌려 자신의 손을 내려다봤다.
달빛이 반사되는 그 손을 이리저리 뒤집어보다 이내 입술을 꼭 깨물었다.
주먹을 쥐었다 피니 붉은 자국들이 하얗게 질렸다 돌아왔다.
화상일까...? 그건 정말 화상이었을까....?
발에 꼭 맞는 신발도 이제는 부드럽게 마른 이 머리카락도
더 이상 자라지 않는 물풀도 그래 향긋하고 달콤한 이 향기도
사실은 다 어떤 것의 전조가 아니었을까?
그래, 소년은 말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 꿈에 관하여.
"꿈을 꿨어"
하고 소년은 말했다.
"너를 만난 후에 나는 항상 꿈을 꿨어"
소녀는 소년의 목소리를 가만히 들었다.
"꿈 속에서 나는 꽃을 주러 가는 길이었고
숲 속 성당의 종소리가 귓가에 맴돌았어.
소녀는 나를 보며 웃었고
나는 그 미소를 지켜주고 싶었어.
나는 꽃이었고 어느 날 떠밀려 물속으로 가라앉는
무섭게 낙화하는 꿈을 꿨어"
".....무서웠니?"
"무섭다 보다는"
소년은 미간을 찌푸리며 곰곰이 생각하는 얼굴로 보름달을 올려다봤다.
"걱정됐어"
"소녀가 걱정됐구나"
"응, 다만 행복하기를 바랐어"
한참을 한참을 아무도 말이 없었다.
시간이 흐르고 있었다.
보름달은 기울고 있었고
이미 꺼져버린 물보라는 곧 다른 형태가 되어
다시 한 번 피어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소년은 주머니에 넣어둔 조약돌을 만지작거렸다.
"행복해졌을 거야 그 소녀는"
소녀가 따뜻한 목소리로 말했다.
"느낄 수 있어"
소년은 고개를 돌려 가만히 소녀를 바라봤다.
소녀는 빙긋- 웃음을 짓더니 이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고는 소년에게 손을 내밀었다.
소년은 소녀의 손을 잡았고 이내 그 화끈거림을 견디며 소녀를 마주 봤다.
"이제 다 따뜻해졌네-"
하고 소녀가 말했다.
"뜨거워"
소년이 콧등을 찡그리며 말했다.
"괜찮을 거야"
소녀는 미소를 지었다.
"금세 괜찮아질 거야"
"......."
소년은 가만히 숨을 내쉬었다.
"이제 입술만 따뜻해지면 되겠다"
부끄러운 듯 아닌 듯 소녀는 웃으며 발끝을 들었고
소년은 조금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뜨면서도
다가온 소녀의 입술에, 그 따뜻한 온기에 이내 눈을 꼭 감고는
마주 잡은 두 손을 꼭- 잡았다.
소녀는 얼굴의 푸른 꽃들이 무색하게도 웃었고
소년은 발갛게 달아올라서는 두근거리는 가슴을 어쩔 줄 몰랐다.
"고마워"
하고 소녀가 말했다.
소년은 소녀에게 조약돌을 건넸고
소녀는 다시 한 번 "고마워"하고 말하며
한 발자국 뒤로 멀어졌다.
이상하게 눈물이 나지 않을 거라는걸 소년은 알 수 있었다.
이제는 눈물이 나지 않을 거라는걸.
다시 행복해 질거라는 걸.
어느새 점점 멀어지는 소녀의 뒷모습을 소년은 가만히 지켜보았다.
"상혁아-"
문득 빙글- 돌아선 소녀가 소년의 이름을 불렀다.
소년은 그게 좋았다.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소녀의 목소리가 좋았다.
소녀가 좋았다.
"우리 처음 만날 그날 나를 데려가지 않아줘서 고마워!"
소녀가 있는 힘껏 소년에게 소리쳤다.
소년은 조금 놀란 얼굴로 소녀를 쳐다보다가
이내 고개를 숙이고는 참지 못하겠다는 듯 눈가를 비비적거렸다.
"있잖아 상혁아-"
다시 한 번 소녀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아주 처음부터 널 만질 수 있었어"
소녀가 말했다.
"이제 괜찮을 거야, 이제 따뜻해졌으니까 괜찮을 거야"
"....."
"우리 또 만나자-"
소녀가 울먹이는 목소리로 소리쳤다.
"네가 꿈속에서 깨면 우리 꼭 다시 만나자-"
소년은 저 멀리 달음박 치는 소녀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그래, 이 다리 위에서 숨이 막히지 않는다는 것은
숲 속에서도 숨이 막히지 않는다는 것과 같을지도 몰랐다.
아- 그래, 꿈속에서 일어날 수 있을 것 같았다.
이 깊고 깊은 물속을 떠나서
외로워 노래 부르던 이 강가를 떠나
그 종소리를 들으러 소년은 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곳을 떠나야 한다고.
그래, 이제는 따뜻한 곳으로 가야 한다고.
다시 너를 만나러.
*
그 어떤 소녀가 소년에게.
너는 그때도 사랑을 한 거야.
그리고 또 다른 사랑을 시작한 거야.
어서 달려가.
어서 가서 소녀를 만나렴.
다시 사랑할 수 있도록.
너를 기다리는 소녀에게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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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
소년은 긴 잠을 자고 있었다.
마녀의 저주에 걸린 잠자는 숲 속의 왕자인지
긴 속눈썹을 가진 소년은 아무리 기도하고 또 기도해도
작은 침대에 누워 새근새근- 가는 숨을 내뱉고만 있었다.
그의 창가에는 항상 예쁜 꽃이 놓여 있었다.
성당의 종소리는 청아했고
작은 침대에서 소년은 깊고 깊은 꿈 속을 헤메고 있었다.
마치 물에 빠진 듯.
소년이 깊은 호수 아래 그 잉어를 만났던 그날 사람들은 사고라고 이야기했고
어떤 그 소녀는 울먹이며 아니라며 그렇지 않다고 소맷자락을 붙잡았다.
누구의 말이 진실이었는지는 아무도 알 수 없었다.
다만 소년만이, 꿈속에 갇힌 소년만이 알고 있을 뿐이었다.
어떤 단 꿈을 꾸는지 소년은 꿈속에서 나올 생각을 하지 않았고
매번 소년을 찾아오던 소녀도 이내 자라나 도시로 떠났다.
네가 행복하면 좋겠다고 말한 어린 소년의 말을 소녀는 기억하고 있었다.
잊음으로써 행복해질 수 있다면 그래야 한다고 소녀는 생각했다.
그래, 소년도 이해해줄 거라고 소녀는 믿었고 그래서 이곳을 떠났다.
이제 정말 혼자 남겨진 소년은 꿈속에서 파란 호수 위를 걷고 있었다.
외롭고 외롭고 외로운 꿈속을 소년은 하염없이 걷고 있었다.
호수의 물가를 에둘러 걷던 소년의 발은 창백하게 새어있었고
물에 젖은 머리가 마를 생각을 하지 않아 감기에 걸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소년은 노래를 불렀고
아마 자신의 이름을 잊었던 것 같다.
그래, 소년은 그렇제 자신의 이름을 잊었다.
침대는 소년의 성장에 맞춰 점점 커져갔고
소년을 기다리는 시간이 늘어나는 만큼
소년을 향한 희망은 점점 줄어들어 갔다.
365일 해가 뜨고 달이 지고
같은 굴레가 다섯 번씩 반복될 동안
소년은 꿈속에서 호수를 걸으며 노래를 불렀다.
어디로 갈까 고민하며 이계와 현세에 경계에 서서
외롭지 않으려 노래를 불렀다.
그리고 그날
보름달이 뜨던 그 밤.
문득 닿은 소녀의 온기.
천천히 데워지는 영혼.
그리고 소녀의 목소리.
이름을 부르는 소녀의 목소리에
잠들어있던 소년의 속눈썹이
아주 조금 흔들렸다는 것을 소년을 알까?
소년의 피부에 화상을 남기던 소녀의 손길이
차갑게 식은 영혼의 피부를 다시 뛰게 하고 있다는 것을
소년의 이름을 부르는 소녀의 목소리가
이름을 잊은 소년을 꿈밖으로 끌어당기고 있었다는 것을
우리는 알기나 했을까?
아- 소년은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종소리가 들리는 숲 속 성당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소년은 생각했다.
외로운 노래는 걷어버리고
다시 따뜻한 햇살에 눈가를 적시는 그곳으로
원래 태어났던 그곳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다시 눈을 떠야 한다고...
사람들은 기적이라고 불렀다.
긴 잠에서 깨어난 소년을 보며
젖은 눈을 깜빡이며 이제 돌아왔다는 듯 웃어 보이는
그때보다 조금 더 자라나버린 소년을 보며
사람들은 기적이라고 말했다.
그래, 이건 기적이었다.
개구리를 왕자로 만든 소녀의 키스처럼
파란 소년을 다시 이곳으로 부른 소녀의 목소리는
그 손길과 사랑스러운 미소는
기적이라는 말 이외로는 차마 표현할 수 없는
그런.... 그런 기적이었다.
소년이 잠에서 깨어났다.
아주 깊은 그 호수의 꿈속에서.
*
3년 후 - 21살의 봄
소녀라고 부르기에는 너무 커버렸다고 소녀였던 여자는 생각했다.
그래, 소녀라고 불리기에는 너무 성숙해져 버렸다고.
강의가 시작하기 전 몇 사람 없는 강의실 의자에 앉아
그녀는 가만히 창가를 바라봤다.
따뜻한 햇살이 나뭇가지에 대롱대롱 매달려있었다.
새 학기의 시작과 봄날의 연관성이 무엇일까-하고 그녀는 생각했다.
그녀는 도톰한 제 입술을 슬며시 만지작거리다가
이내 팔을 책상에 올리고는 천천히 엎드렸다.
눈을 깜빡이며 그녀는 반쯤 돌아간 강의실을 느긋하게 뜯어보고 있었다.
커피향이 가득 차오르고 햇살이 머릿결을 부드럽게 쓰다듬었기에
그녀는 슬며시 눈을 감고는 자는 척 새근새근- 얕은 숨을 내뱉었다.
즐거운 듯 재잘거리는 목소리.
인사하는 사람들의 일상적인 지저귐.
어디선가 새어 나오는 음악소리와
바람이 창가를 부드럽게 흔드는 소리가 그녀의 귓가에 맺혔다.
다만 행복하기를 바란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한 여름밤의 꿈처럼, 어린 시절 만난 그 푸른 소년이
강가를 벗어나 깊은 꿈에서 깨어나기를 바란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그래, 꿈같은 일이었다.
가장 아픈 시절에 만난 소년은 너무나도 예뻤어서
어쩌면 그저 자신이 만들어낸 허상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소녀는 숙녀가 되었고
단정하던 머리도 어느새 길어 부드럽게 늘어졌지만
그 사랑스러운 미소와 다시 만나자던 그 약속을 잊은 적은 단 한순간도 없었다.
꿈이었어도 좋았을 거야- 하고 그녀는 생각했다.
눈을 감고 있으면 펼쳐지는 소년의 긴 속눈썹을 회상하며
그녀는 그래, 그게 꿈이었어도 나는 참 좋았을 거야-하며 숨을 들이마셨다.
강가의
그 강가의
물 냄새가
비릿한 듯 그리운 그 향기가
그리고 그 꽃의 달콤함이 코끝에 맺혔다.
그녀는 천천히 눈을 떴다.
자신을 마주 보고 누운 그의 잔상이
햇살에 반사되어 눈부시게도 그녀의 동공에 맺혔다.
참 사랑스러운 미소였다.
그의 미소는 참 사랑스러웠다.
그때나 지금이나.
"안녕"
그의 목소리가 들렸다.
조금은 낮아진 그의 그 목소리가.
"....안녕"
그녀가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그녀의 목소리에
사랑해마다 않는 그 목소리에 그는 예쁜 눈웃음을 지었다.
그래, 소년은 소녀의 목소리가 좋았다.
그는 그녀의 목소리가 좋았다.
"상혁아-"
이름을 불러주는 그녀의 목소리가 좋았다.
그녀가 좋았다.
자신을 부르는 그녀의 목소리를 들으며
그는 손을 뻗어 살며시 그녀의 손을 잡았다.
이제는 더 이상 화상을 입지 않는 피부로
따뜻한 온기가 느껴지는 그 손을
그는 그녀의 손을 잡았다.
그녀가 웃었다.
"여전히"
하고 소년이 속삭였다.
"여전히 웃는 게 예쁘네"
이제는 내가 네 이름을 부를 차례.
오래 기다린 네 이름을 부를 차례.
"별빛아"
오늘도 사랑하는 하루 보내길 바라며
by. 무지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