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
'도망칠까?'
머릿속에 맴도는 그 생각이 말이 안 되는 건 줄 알면서도 그녀는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었어.
영화 속의 한 장면처럼 이 하얀 웨딩드레스 자락을 휘날리며 혼자서 멀리멀리 도망가 버리면
어찌 되었건 간에 이 원치 않는 결혼에서 벗어날 수 있지 않을까? 하고.
한참 동안 그 어처구니없는 생각을 하다가 자신도 현실성이 떨어진다는 것을 느꼈는지
눈을 꾹- 감았다 뜨더니 이내 신부 대기실로 들어오는 친구들을 애써 웃는 얼굴로 맞이해.
그래, 그녀는 생각보다 지극히 현실적인 여자였고 또 생각보다 그 현실에 순응을 잘 하기도 했어.
하지만 말이 순응이지 자세히 보면 결국은 다 쇼라는 것을 그녀는 알고 있었어.
인생을 건 쇼라는 걸 말이야.
순응보다는 적응이 어울리겠다고 그녀는 말했어.
마음에 들지 않는 현실에 적응을 하는 거라고.
"어머 얘 너무 부럽다. 진짜 너무너무 축하해"
진심을 가득 담아 말하는 친구들의 한 마디 한 마디에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즐거운 듯 입꼬리를 올렸고
얼마나 습관적으로 웃었는지 이제는 굳어서 뻣뻣해진 볼을 억지로 펴가며 다시 한 번 카메라를 향해 미소를 지어.
"연애한다는 얘기도 안 하고 갑자기 결혼이라 그래서 얼마나 놀랐는 줄 알아?"
핀잔을 주는 친구들의 한 마디에 그녀는 '연애를 했어야지 말을 해주지-'하고 이야기하고 싶은 것을 꾹- 참고는
"미안, 미안해-"하고 멋쩍게 말하며 이내 행복하다는 듯 웃어 보여.
참 바보 같은 일이라고 그녀는 생각했어.
이 결혼도, 도망치기는커녕 여기서 웃고 있는 자신도,
그리고 무엇보다 도무지 속을 알 수 없는 그 남자도 다 바보 같다고.
하지만 아무리 이렇게 속으로 욕해봐야 뭐 해,
결혼식은 이미 시작되었고 남은 거라곤 혹여나 딴 맘 먹을까 미리 도장 찍은 혼인 신고서랑 동거보다 못한 결혼 생활뿐인걸.
문득 그런 생각이 들자 그녀는 이내 머리를 내저으며 애써 나쁜 마음들을 털어버려.
'그래, 이왕 이렇게 돼버린거 잘 지내려 노력하면 괜찮을 수도 있을 거야'하는 안일한 마음으로 자신을 위로하는 수밖에 없지.
긍정으로 극복하자는 신조에 걸맞게 그녀는 기를 쓰고 좋은 생각들을 하려 했지만 사실 그것도 쉬운 일은 아니었어.
다만 계속 웃을 뿐이야. 마치 자신이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신부인 것 마냥 그저 웃을 뿐이야.
"근데 나 같도 꽁꽁 숨겨뒀을 것 같은데?"
문득 그녀의 친구가 그렇게 말을 해.
"뭘?"
그녀가 궁금하다는 듯 묻자 친구는 이내 짓궂게 미소 지으며 입술을 움직여.
"네 남편말이야- 아까 들어오다 봤는데 완전 대박이야"
"아-"
헛기침이 나오려는 것을 애써 내리누르며 그녀가 멋쩍게 웃어.
"키도 크고, 얼굴도 잘 생기고, 거기다가 J그룹 사장! 나 같아도 숨기고 싶었겠다!"
'뭐... 누가 봐도 그렇겠지'하고 그녀는 생각해.
어디로 보나 누가 보나 그 남자가 잘났다는 건 사실이니까.
하지만 그게 중요한가?
앞으로 일어날 모든 일들을 다 참고 넘어갈 만큼 그가 잘났다는 게 중요한 걸까?
그게 그녀가 노력하고 인내하고 희생해야 할 이유가 될 수 있을까?
맞장구치는 친구들 사이로 그녀만 홀로 조용히 앉아있어.
한바탕 소동이 휩쓸고 지나가듯 대기실을 나가는 친구들을 그녀는 손 흔들어 배웅하고는
괜히 쓸쓸하게 느껴지는 클래식 음악을 들으며 이것도 저것도 아닌 생각으로 머릿속을 채워갔어.
행복하자 행복하자 하는 그 노래 있잖아.
그 노래로 그녀는 머릿속을 채워갔어.
문득 문이 열리는 소리에 그녀는 고개를 들어.
아- 그가 저기 서 있다.
오늘부터 억지로라도 친근한 이름으로 불러야 하는 그가 문에 비스듬히 기대어 서 있어.
턱시도를 입은 그는 누가 봐도 참 잘났어서 그녀는 입술을 꾹- 깨물고는 가만히 그를 바라보기만 해.
그의 눈이 정확히 그녀의 눈동자를 마주 보고 있었어.
속을 알 수 없는 무표정한 얼굴과 하얗다 못해 창백한 피부.
새카만 그 머리카락.
홀릴 것만 같은 그 눈매.
그리고 그 목소리.
"준비 됐으면 그만 나가지"
그 남자의 목소리.
그 남자의 이름.
정택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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