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
잠에 들었던 걸까.
어느새 눈을 뜨니 블라인드 사이로 이른 아침의 햇살이 들어오고 있어.
은성이는 천장에 차오르는 햇빛에 놀라 몸을 일으키고는 어제 치우다 만 방을 둘러봐.
그래, 피곤할 만도 했지. 정신없는 결혼식에 이내 밀려드는 고민들에 수도 없이 치였으니.
그녀가 이내 침대에서 일어나선 얼른 옷을 갈아입고 머리를 하나로 묶어.
그러고는 문 앞에서 문고리를 잡고는 한참을 고민해.
문을 열고 나갈까 말까?
이게 그다지 쓸데없는 고민이라는 것을 알아차리기까지 그렇게 오랜 시간이 걸리지는 않아.
그녀는 이내 문고리를 돌려 문을 열고 조용하다 못해 적막하기까지 한 거실을 바라봐.
은성이는 이내 눈을 비비적거리다 발소리를 죽이며 부엌으로 걸어가고,
커피 머신에서 나온 진한 향기는 밤새 무뎌진 그녀의 코를 자극해.
그녀는 별로 내키지 않지만 어머니 대신 갈고닦은 요리 실력을 발휘해야 하는 건가 불만을 가지면서도
어쩌겠나- 싶은 마음에 냉장고를 열고 간단한 재료들을 꺼내.
뭘 좋아하는지 전혀 모르니까 우선은 간단하게 차려봐야겠다 하는 생각에
뚝딱뚝딱 계란찜 하나를 만들고 그래도 나름 배려한답시고 밥도 앉히고 국도 끓여놔.
그러다 문득 시끄럽게 하지 말라던 그의 말이 생각나서 은성이는 소리가 날까 이내 밥통 알림음도 꺼버리고는
식탁에 혼자 덩그러니 앉아 벽에 걸린 시계를 바라봐.
출근시간이 아무리 늦다고 해도 지금쯤이면 벌써 나왔어야 하는데 택운의 방문은 열릴 기미조차 보이지가 않아.
은성이는 그저 눈을 굴리며 낯선 신혼집을 뜯어보며 근사한 식탁에 턱을 괴고 앉아 모락모락 피어나는 하얀 김을 보고 있어.
"참 근사한 집이네"
그녀가 혼잣말로 중얼거려.
그러고는 이내 얼굴을 굳히며 작은 숨을 내뱉어.
숨 막히게 근사하고 답답한 공간이라는 생각이 쉽게 가시지를 않아.
저기 굳게 닫힌 문만큼이나 갑갑하고 알 수 없는 공간이라는 기시감 말이야.
언제쯤이면 익숙해질 수 있을까- 하는 막연한 걱정에 그녀는 입술을 꾹- 깨물고는 이내 식탁에 엎드려.
째깍째깍- 시계 침 소리가 유난히도 크게 들린다고 은성이는 생각했어.
밥도 다 됐고, 국이며 반찬이며 다 따로 담아놨는데 택운은 방에서 나올 생각도 하지 않고
이제 와 출근해봐야 무조건 지각이다 싶은 시간이 다가오자 은성이는 자리에서 일어나.
애초에 애정이 없으면 그냥 남남처럼 신경 쓰지 않고 살면 된다는 걸 그녀도 잘 알고 있어.
하지만 어쩌겠어, 노력한다고 마음먹은 거 시도라도 해봐야 하지 않겠어?
은성이는 깊은 숨을 들이 마시며 몇 번 심호흡을 하더니 이내 그의 방문 앞으로 다가가서는 조심스레 문을 두드려.
똑- 똑- 똑-
똑- 똑- 똑-
아무리 기다려도 대답이 없기에 은성은 하는 수 없다는 듯 이내 그의 이름을 불러.
"택운씨 일어났어요?"
"........"
"이제 출근해야 할 것 같은데.."
그렇게 말하고 한참을 기다렸는데도 대답이 없자 은성이는 이상한 기분에 큰맘 먹고 그의 방 문고리에 손을 올려.
조심스레 문고리를 돌리며 문을 열자 그 틈으로 새어 나오는 것은 더한 고요와 캄캄한 침실뿐이야.
은성이는 문을 활짝 열고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텅 빈 그의 방을 쳐다봐.
짜증 나고 허탈한 마음에 그녀는 문을 소리 나게 닫아버리고는 식탁으로 돌아와 자신이 차려놓은 밥상을 응시해.
괜히 아침부터 눈치 보며 기운 뺐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고 왠지 첫날부터 외면받은 것 같은 기분에
마음이 상하는 걸 어찌할 수 없어서 은성이는 이내 털썩- 소리 나게 자리에 주저앉아.
"짜증 나-"
그녀가 미간을 찌푸리며 중얼거려.
헛수고했다 생각하면서도 그래도 차려 놓은 거 어쩌겠나 싶어
이내 다시 마음을 가다듬고는 "내가 다 먹으면 되지 뭐!" 하며 주먹을 불끈 쥐더니
숟가락 젓가락 각각 양손에 쥐고는 홀로 아침식사를 시작해.
마지막이 되지는 않을 것 같은 식사를 그녀를 꼭꼭 씹어 삼켜.
마지막이 되지 않은 것 같은 이 혼자 하는 식사를.
내 집이 내 집이 아닌 것 같다는 생각에 그녀는 하루 종일 방에 들어가서 청소를 했어.
전 날 다 치우지 못한 옷가지들을 정리하고 친정에서 챙겨온 것들을 하나하나 꺼내놓았어.
그러고는 결혼식 사진이 들어있는 액자를 손에 들고 빤히- 바라보다가 이내 화장대에 올려놔.
'참 더럽게도 잘 생겼네' 하는 생각이 들어 괜한 심술에 액자를 툭- 툭- 치다가
갑자기 눈앞에 선명해지는 그의 웃는 모습에 자신도 놀라 고개를 휙- 휙- 내저어.
하루 종일 그냥 그러고 있었어.
심심하게 그저 그가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어.
언제 퇴근하는지도 모르면서 말이야.
*
느지막한 저녁이 되어서야 현관문 자물쇠가 돌아가는 소리에
부엌 식탁에 앉아있던 은성이는 자리에서 일어나서 현관으로 걸어가.
퇴근을 하고 돌아온 택운은 문을 열고 들어오다가 현관 앞에 나와있는 은성을 보고는 알게 모르게 미간을 찌푸려.
"다녀왔어요?"
그녀의 질문에도 아랑곳 않고 택운은 구두를 벗고 넥타이를 풀더니 그녀를 지나쳐.
은성이는 그런 그를 빤히 바라보다가 이내 그의 등에다 대고 말해.
"언제 출근한다 언제 퇴근한다 그 정도는 알려줄 수 있는 거 아니에요?"
외투를 벗으며 방으로 향하던 택운은 식탁 위에 차려진 밥상을 흘긋- 보고는 이내 무표정한 얼굴로 은성을 바라봐.
은성이는 그런 그를 마주 보며 무엇보다 익숙해질 그의 정적에 관하여 고민해.
한참이 지난 후에야 그가 입술을 움직여.
"이런 거 준비하라 한 적 없는데?"
"준비하지 말라 한 적도 없잖아요"
지지 않고 대답하는 은성에 택운은 가만히 그녀를 바라보기만 해.
그 눈빛이 차가워서 은성이는 입술을 잘근 거리며 애써 그의 시선을 피해.
주눅 들게 하는 그의 끈질긴 눈동자가, 그 묘한 눈매가 얼마나 그녀를 힘들게 하는지 그는 모를 거야.
"가정부 고용한 거 아니야. 이딴 거 준비하지 마"
그의 무뚝뚝한 한 마디에 은성이는 입을 꾹 다물고는 이내 다시 방으로 들어가 버리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기만 해.
문이 소리 나게 닫히고 한참을 망부석처럼 현관 앞에 서 있던 은성이는 차려놓았던 저녁 밥상을 정리하고는
답답한 마음에 물 한 잔을 마시고 거실 소파에 앉아 읽다 말았던 책을 꺼내 다시 처음부터 읽어내려가.
얼마나 지났을까 문득 들리는 인기척에 고개를 드니 편한 차림의 택운이 걸어 나와.
은성이는 그런 그의 움직임을 가만히 보다 이내 얼른 일어나서는 애를 써서 그에게 말을 걸어.
"물이라도 줄까요?"
택운은 그런 그녀를 무시하며 컵에 물을 따라 들이마시고
은성이는 책을 덮으며 그런 그를 바라보다가 한숨이 나올 것만 같은 것을 꾹 참으며
다시 한 번 대답 없는 메아리처럼 혼자서만 울리는 말을 꺼냈어.
"아침 차려 놓을 게 뭐라도 먹고 가요"
그녀가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이야기해.
"빈 속에 커피 마시면 속 버려"
그런 은성이의 말이 들리지도 않는지 택운은 싱크대에 컵을 내려놓고는 이내 유유히 다시 자신의 방으로 걸어가.
탁- 하고 닫히는 문 소리에 은성이는 괜히 서러워져서는 소파 팔걸이에 걸터앉으며 참아왔던 한숨을 내뱉어.
정적이 너무 길어.
그는 대답이 없고.
그녀는 숨이 막혀.
행복하자- 행복하자- 그 노래 기억나?
아프지 말고 아프지 말고...
*
그러나 일방적인 이 마음은 상처였다
내가 지켜주고 싶은 그는 나를 지켜 줄 생각이 없었으므로.
[신경숙 / 사랑이 와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