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
여기는 신혼집인 걸까 아니면 고요한 전쟁터인 걸까.
한 달 내내 은성이는 아침 상을 차려놓고 택운을 기다리고
택운은 마치 그녀가 일어날 시간을 미리 알기라도 한다는 듯이
어느 날은 너무 일찍 또 다른 날은 너무 늦게 방 밖으로 나와.
은성이는 그런 식으로 행동하는 택운에 지쳐서는 결국엔 오늘 그녀가 일어나기도 전에
보란 듯이 나가버린 택운의 방문을 바라보며 피곤에 지친 얼굴로 입술을 잘근거려.
가끔 같은 공간에 있는 순간이 오면 택운은 그녀가 없는 사람처럼 행동하며 말 한 마디 붙이지 않고,
옆에서 살갑게 대해보려 말을 거는 은성이는 대답 없는 그의 철저한 무시에 이내 입을 꾹- 다물고는
자기 손톱만 괜히 만지작거렸어. 주눅 들고 싶지 않아도 주눅 들게 만드는 그의 눈빛과 그 한숨,
그녀는 그게 너무 견디기가 어려웠어. 차라리 싫다고 말이라도 하면 더 나을까.
친정에서 걸려온 전화에는 아주 행복하다는 듯이 대답했고,
가끔 만나자는 친구들 연락에는 아직은 조금 바쁘다고 둘러댔는데...
그 사실이 문득 서러워서, 거짓말하는 자신이 한심해서 이제는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아.
퇴근하고 들어오는 그가 그녀를 쳐다보려 하지도 않는다는 것을 그녀는 잘 알고 있어.
하기 싫은 결혼 억지로 해서 마음에 안 든다는 것도 다 이해할 수 있어.
하지만 그건 자신도 마찬가지였다는 생각에 은성이는 억울해서
그러면서도 참아가며 노력하고 있는 자신을 사람 취급도 안 하는 택운의 태도에 마음이 아파서
밤이 와도 자기는커녕 몇 시간을 뒤척이며 베개를 껴안을 뿐이야.
그때마다 왜 자꾸 그의 웃는 얼굴이 생각나는지 은성이는 이해할 수 없었어.
그 잘난 얼굴이 왜 자꾸만 아른거리는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어.
아니, 이것도 거짓말이다.
이해가 됐기에 더 속이 끓는 건지도 몰라.
이렇게 노력하다가 결국 자기 세뇌처럼 정말 사랑에 빠지게 되면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
은성이는 저녁 상을 차려 놓고는 식탁에 앉아서 책을 읽었어.
11시가 넘어도 들어오지 않는 택운에 이내 거실 형광등을 끄고는 스탠드를 켰어.
은은한 불빛이 부엌을 꽉 채우고 이내 벽에 맞닿아 그의 방문 앞에 기다란 그림자를 그렸고,
은성이는 그가 저녁을 먹지 않을 거라는 것을 알고 하나하나 그릇들을 치우고는 이내 다시 돌아와 자리에 앉아.
팔랑- 팔랑- 종이가 넘어가는 소리가 들린다.
헐겁게 잠긴 수도꼭지에서 떨어지는 물소리도.
자정이 다 되어서야 들려오는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에 은성이는 무의식적으로 자리에서 일어날까 하다가
이내 눈을 천천히 감았다 뜨더니 그저 자리에 앉아 계속 책을 읽어내려갔어.
택운이 구두를 벗는 소리가 들려 은성은 계속 책을 읽고
이내 현관에서 걸어들어오는 그의 낮은 발소리가 그녀 뒤에 울려.
그가 잠깐 발걸음을 멈춘 듯 그 소리가 잦아들었어.
택운은 말 한 마디 없이 책을 읽고 있는 그녀의 등을 바라보다
이내 똑- 똑- 주기적으로 떨어지는 물소리에 싱크대로 향해.
그녀의 뒤로 그가 지나가.
택운은 조용히 싱크대 수도꼭지를 꼭- 잠그고 은성이는 그를 돌아보지도 않고 책만 읽고 있어.
적막하고 적막하다.
물소리도 사라진 이 집 안은 참 고요하다.
그가 아무렇지도 않게 그리고 여전히 말 한 마디 없이 마의를 벗으며 방으로 향해.
그러다 문득 멈춰 서서는 막 책장을 넘기는 그녀를 바라보다 입술을 움직여.
"내일 저녁에 중요한 모임 있어. 너도 준비하고 나와"
은성이는 그의 목소리에 이내 천천히 책을 덮으며 택운을 바라봐.
자신을 내려다보는 그의 눈매를 가만히 뜯어보다 이내 조용히 입술을 움직여.
처음 봤을 때 보다 조금 야윈 것 같은 그녀의 손목이 가볍게 포개어져서는 책표지 위의 그림처럼 얹혔어.
"부탁하는 건가요?"
그녀의 그 질문에 택운은 미간을 찡그려.
"첫 부부동반 모임인데 내가 안 간다 그러면 어떻게 되나요?"
택운이 이내 돌아서서는 차가운 얼굴로 앉아있는 은성을 내려다봐.
처음으로 마주 보는 그의 모습이 생각보다 더 커서, 자신에게 드리워지는 그 그림자가 문득 거대해서
은성이는 다시 한 번 눈을 꾹- 감았다 뜨며 마음을 가다듬어.
나약함이 내 죄였더라면 조금 더 영악해지게 하소서-
"그래서 안 가겠다고?"
택운이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이며 물어.
"중요한 모임 망치고 싶은 마음은 없어요. 다만 내가 얻을 수 있는 게 무어냐 묻는 거예요"
"안 가면 너도 곤란해질 텐데"
"그리고 당신이 더 곤란해지겠죠. 매스컴에서 관심 있어 하는 건 내가 아니라 당신이잖아요"
"..........원하는 게 뭐야"
"부탁 하나만 들어달라는 거예요"
"부탁?"
"네"
".....말해봐"
예상외로 쉽게 그렇게 묻는 택운에 은성이는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었다가 이내 천천히 놓아줘.
붉은 그 입술 위의 핏기가 새하얗게 바랬다가 이내 다시 그 혈색을 되찾아.
택운은 눈 하나 깜빡 않고 그 입술을 바라보고 은성이는 천천히 숨을 들이마셨어.
"아침 먹고 나가요"
"........"
"같이 먹자는 소리도 안 해, 그냥 먹고나 가요"
그녀의 그 한 마디에 택운은 그녀를 향하던 시선을 거두고는 생각보다 더 매몰차게 돌아서.
다시 한 번 맞닥뜨린 그의 넓은 등에 은성이는 입술을 잘근거리고 택운은 이내 자신의 방으로 향했어.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리자 은성이는 다시 책을 열고 아까 멈췄던 부분부터 천천히 읽어내려가.
아- 고요하다. 적막하고. 그 와중에 스탠드 불빛은 이상하리만큼 따뜻한 노란 빛이라 마음이 헷갈려.
끔찍한 건 그거야.
이렇게 매번 외면당하고, 애초부터 사랑하지 않는 사람과 부대끼며 산다는 게 말이 안 된다고 생각했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결국 보란 듯이 적응해나가고 마는 게 사람이라는 거. 그게 끔찍한 거야.
봐봐- 벌써 알 수 있잖아.
벌써 그의 향수 냄새를 기억할 수 있잖아.
정말 이제 어떡해야 하는 걸까?
이렇게 노력하다가, 이렇게 생각하다가 정말 습관처럼 당신을 사랑하게 되어버리면 나는 어떡하지?
*
택운은 방으로 들어와 불을 켜지도 앉고 셔츠를 풀어내려.
그러고는 이내 저절로 비워지는 빨래 바구니에 옷가지를 넣고는 피곤한 듯 책상에 앉아 스탠드를 켜.
등을 한껏 의자에 묻고 고개를 젖힌 그가 천천히 눈을 감아.
참 답답하고 생각보다 쓸데없이 똑똑하기까지 한 여자라고 그는 생각해.
"귀찮다"
문득 그가 실낱같이 눈을 뜨며 중얼거려.
"귀찮게"
*
어떤 날은 미치도록 사랑에 빠져든다
세상에서 가장 사랑스러운 여자가 되어
그런데 이상하지 나는 병들어 가고
[강성은 / 외계로부터의 답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