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
탁상 위에서 울리는 알람 소리에 그녀는 가까스로 일어나서는 시간을 확인하고 머리를 하나로 쓸어 묶었어.
어스름한 창밖의 하늘이 아직 새벽이 다 가시지 않았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었고,
새어 나오는 푸른빛에 은성이는 천천히 창가로 다가가 블라인드를 열어젖히고 창밖을 바라봤어.
그러고는 심호흡을 내쉬더니 마음먹었다는 듯 콧등을 찡그리며 부엌으로 발걸음을 옮겨.
고소한 쌀밥의 냄새가 부엌을 메워가고 있어.
마음에도 들지 않는 밥상을 차려 놓고는 은성이는 가만히 그걸 피곤한 얼굴로 내려다보다 눈을 꾹- 감았고,
먹으려면 먹고 말거면 말라는 심정으로 식탁을 바라보다 문득 여기에 더 머무를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는지
두 눈을 비비며 다시 제 방으로 발걸음을 돌려. 자신이 부엌에서 그를 기다려봐야 별 도움이 안 될 거라는 것을 그녀는 알아.
침대에 풀썩- 쓰러지며 '마음대로 하라 그래' 하고 그녀는 생각해.
은성이는 눈을 감고 베개를 끌어안고 엎드린 채로 가는 숨을 내쉬어.
아- 피곤하다. 너무 피곤하다.
아무리 노력해도 닿지 않는 신기루 같아.
이 결혼을 시작하기 전의 내가 어땠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는 것 같기도 해.
나는 원래 이렇게 답답하고 쉽게 상처받는 사람이었던 걸까?
하고 싶은 것도, 하고 싶은 말도 많던 그런 나는 어디로 가버린 거지?
독약 같다 그리고 참 바보 같다.
처음에는 도망치지 않은 것을 후회하던 나도,
그리고 지금 그와 조금 더 일찍 조금 더 좋게 만났더라면 어땠을까? 하고 생각하는 나도.
*
도대체 언제 일어난 건지 알 수 없는 택운은 넥타이와 외투를 손에 들고 부엌으로 나른하게 걸어와.
텅 빈 부엌과 거실에는 따뜻한 온기가 맴돌고 있어.
택운은 식탁 위에 잘 차려진 아침상을 보고 외투를 의자에 걸쳐두곤 이내 커피 머신을 작동시켜.
얼마 지나지 않아 뜨거운 김을 뿜어대며 한 방울 한 방울씩 그 쌉싸름한 액체들이 떨어져내려.
지난밤 은성이의 말들을 되뇌다가 그는 미간을 찌푸리며 하는 수 없다는 듯이 식탁에 앉고,
이내 그저 무표정한 얼굴로 평소 같았으면 커피 한 잔으로 때웠을 아침 식사를 시작해.
맛이 어떤지 간이 맞는지 같은것들은 별로 중요하지 않아.
택운이 천천히 젓가락을 내려놔.
유연하게 긴 팔을 뻗어 외투를 잡고 일어나서는 넥타이를 만지작거리며 커피를 따라.
현관으로 향하는 길에 그가 문득 멈춰 서서 꼭 닫힌 은성이의 방문을 바라봐.
아침 정도는 먹어줘도 되겠다고 택운은 생각해.
딱 거기까지만 내어줄 테니 다른 건 간섭하지 말라고.
*
막 눈을 뜨니 어느새 해가 중천이야.
은성이는 눈을 끔뻑이다가 힘겹게 몸을 일으키곤 개운하게 기지개를 켜.
언제 다시 잠들었는지 잘 생각이 나지도 않아.
샤워를 하고 머리를 말리고 옷을 갈아입고 나오니 벌써 출근했는지 인기척 하나 없는 집 안은 다시금 고요하기만 해.
그저 희미하게 배어있는 커피 향만이 공기 중에 맴돌고 있을 뿐이야.
은성이는 천천히 부엌으로 걸어가고,
처음과는 다르게 조금 떨리는 마음으로 식탁을 확인해.
그러다 밥공기가 비워져 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이내 눈을 몇 번 깜빡이더니
역시 이런 거에는 협박을 해야 통한다며 눈을 굴리다 이내 씩- 입꼬리를 올려.
도대체 며칠 만에 이렇게 웃어보는 건지 모르겠어.
별거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었으면서도, 될 대로 되라고 기대하지 않고 있었으면서도,
정말 식사를 하고 출근 한 택운에 그녀는 괜히 차오르는 뿌듯함에 기분 좋게 설거지를 시작해.
거래는 거래라고 오랜만에 외출을 하게 생겼어.
그가 그녀의 부탁을 들어줬으니 이제 그녀가 그가 원하는 대로 해줄 차례야.
택운은 일이 있어 먼저 가 있겠다는 문자를 남겼고, 아버지 쪽에서 사람을 보냈다는 연락도 받았어.
은성이는 택운이 보낸 짤막하고 사무적인 문자를 미간을 찌푸린 채 읽어내려갔어.
분명 재미없을 거라는 걸 그녀는 알고 있어.
예전부터 고상한 척하며 서로 간 보기 바쁜 그런 자리에는 영 취미가 없었거든.
화합과 친목도 중요하지만 꼭 약점 하나 캐내려고 애를 쓰는 하이에나들이 하나씩은 있기 마련이잖아.
뭐, 그래도 비즈니스는 비즈니스고 그런 거쯤 티 안 내고 잘 할 수 있으니까 걱정은 없어.
있잖아, 사실 그녀는 그런 사람이라는 거 알고 있니?
사실 더 당당하고 더 활기찬 사람이라는 거?
그런데 그런 그녀가 지금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거야.
카메라 앞에서 그가 어떻게 행동할지 대충 감도 오고,
가면을 쓰고 행동하는 그의 모습에 마음에 생채기가 날 수도 있다는 걱정을 지레 하고 있는 거야.
하지만, 그래도 말이야, 어쩌면 다시 볼 수 있지 않을까?
결혼식 때 보았던 그의 그 미소를?
*
"오랜만이네"
차 문에 기대어 담배를 피우던 그가 은성을 보더니 황급히 담배를 꺼버리며 말을 해.
은성이는 그런 그를 못마땅하다는 듯 쳐다보다가 이내 그에게 다가가.
"아- 오지 마 담배 냄새나"
"그걸 알면서 피우셨어요?"
그녀가 핀잔주듯 이야기하자 이내 그가 멋쩍게 웃어.
"긴장돼서"
"긴장은 무슨 긴장?"
"뭐....그냥"
그가 슬쩍 말끝을 흐려.
그러더니 이내 그녀를 쓱- 훑어보는 시늉을 하며 짓궂게 이야기해.
"오늘 좀 예쁘다?"
"유부녀한테 할 말은 아니거든요!"
"실감이 잘 안 난다니까-"
은성이는 그렇게 말하는 그를 흘기다가 차에 올라타고 그도 이내 운전석에 올라타서는 안전벨트를 매.
천천히 그리고 아주 부드럽게 그의 차가 주차장을 빠져나가.
오후의 노을이 어느새 보라색으로 물들어 가고 있어.
밤이 오는 걸까?
"오늘은 안 바빴어?"
은성이 그에게 물었어.
"어, 재판 없어서"
"원래 이런 자리 안 좋아하잖아 너도"
"네 일일 비서해주려고 가는 거야"
"고맙네-"
"알면 됐어"
그가 키득거리며 대답해.
그녀는 오랜만에 보는 그의 옆모습을 바라보다가 이내 정면을 응시해.
아버지 회사에서 가끔 법무 업무를 도와주는 홍빈은 그녀와는 소꿉친구 사이야.
남녀 사이에 친구도 있을 수 있다고 믿는 은성과는 다르게 홍빈은 그렇지 않아서
사춘기가 지나가고 한창 청춘이 피어나는 시기에는 조금 간질거리고 애매모호하게 은성을 대하곤 했어.
하지만 그것도 다 지난 옛날 얘긴 걸. 친구보단 가깝고 가족보단 먼 사이처럼,
가끔 닿는 연락에도 어제 만났다는 듯 이야기할 수 있는 사이라고 은성이는 홍빈과의 관계를 정의했어.
과연 그도 그렇게 생각할까?
"그래서, 신혼 생활은 어때, 남편은 잘 해줘?"
정략결혼의 내막까지 다 알고 있는 홍빈은 은성이에게 제법 가볍게 물어.
괜히 진지하게 걱정했다가 그녀가 부담스러워할 것 같아 나름 배려를 하고 있어.
"그럼, 잘 해주지"
은성이 창밖을 바라보며 대답해.
가볍게 웃는 그 목소리에 홍빈은 기분이 이상하고,
은성도 자신이 이렇게 거짓말이 익숙해졌다는 것에 관하여 꽤나 놀랐어.
"다행이네, 걱정했는데"
"걱정 안 해도 돼"
그녀가 이야기해.
"좋은 사람이야"
*
화려한 샹들리에 불빛 아래 은성이는 혼자 서 있어.
홍빈은 중요한 전화가 왔다며 자리를 비웠고 그녀는 택운을 찾으러 발걸음을 옮겼어.
커다란 회장을 아무리 둘러봐도 택운의 모습이 눈에 띄지 않아서 은성이는 조금 마음이 갑갑해져.
한참을 여기저기 둘러보다가 안되겠다 생각했는지 그녀가 천천히 발걸음을 옮겨.
어디 조용한 곳에 가서 그에게 전화를 걸어봐야겠다고 은성이는 생각했어.
기껏 찾은 조용한 공간은 엘리베이터 옆 기다란 복도였어.
은성이는 사람들이 아무도 없는 그곳을 걸어가다 이내 작은 엘리베이터를 지나쳐.
핸드폰을 꺼내서 어색한 그의 번호를 조금 떨리는 손으로 누르고 신호음이 이어지기를 기다려.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그의 목소리가 문득 궁금해진다는 것은,
어쩌면 이제 더 이상 부정할 수 없는 상태까지 와버렸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윙- 윙-
부드럽게 내려오는 엘리베이터 소리.
으리으리한 이 호텔에서 유난히도 조용한 복도.
붉은 카펫과 은은한 조명.
신호음은 여전히 울리고 있고 이내 땡- 하는 소리와 함께 엘리베이터가 도착해.
은성이는 그 소리에 핸드폰을 귀에 댄 채로 뒤를 돌아봐.
참 이상한 일이야.
아니,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몰라.
천천히 걸어 나오는 걸음걸이와 그 뒷모습만 보고도 당신을 알아볼 수 있다는 것은,
결혼한 첫날부터 그의 등만 내내 봐왔던 그녀에게는 너무나도 익숙한 일이었어.
아- 저기 그가 웃는다.
그때 보다 더 환한 웃음.
좋은 사람이야?
*
우리는 익사할 것이다
바닥에 즐비한 다른 연인들처럼
하지만 누가 뭐라 해도
내가 먼저 빠졌다.
[전윤호 / 물귀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