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
'지금은 전화를 받을 수 없어 소리샘으로 연결되오--'
친절한 기계음이 더 이상 말을 이어가기 전에 은성이는 전화를 끊어버려.
참 환히도 웃는 그의 얼굴이 또 자꾸만 눈앞에 아른거려서 이제는 눈가가 시릴 지경이야.
은성이는 고개를 숙이고 잠시 동안 제 발끝을 바라보다 이내 아무렇지 않다는 얼굴로 고개를 들어.
빨간 카펫이 깔린 조용한 복도에 그의 발자국이 늘어져있는 것만 같아.
제대로 시작하기 전부터 너무 큰 타격을 받은 듯 그녀는 정신이 멍- 했지만,
속으로 마음을 다지며 천천히 발걸음을 내디뎌.
참 예쁜 웃음이었다- 하고 그녀는 생각해.
참 어려운 사람이구나- 하고 생각하기도 하면서.
다정한 그 사람을 마주하면 어떤 기분일까?
따뜻한 그 손길은 어떤 감촉일까?
살가운 대화는 좀 다르지 않을까?
이런 생각들이, 상상들이 결국 괜한 기대라는 것을 그녀는 알고 있어.
그리고 지금 문득 느껴지는 질투 비슷한 감정에 스스로가 부끄러워져.
뭐가 예쁘다고 나쁜 그를 사랑하게 되어버렸는지 그녀는 차마 정의 내릴 수 없어.
다만 그저 생각할 뿐이야.
습관처럼 사랑하게 되어버렸구나.
버릇처럼 원하게 되어버렸구나.
인생을 건 쇼라고 했지?
그녀의 쇼는 끝났어.
커튼콜이 올라간다.
이제부터 진짜 시작이야.
아- 그때 정말 도망쳤어야 했는데.
*
은성이는 천천히 그 복도를 걸어.
로비로 걸어 나오니 다시금 환한 샹들리에 불빛에 머리가 어지러워.
커다란 강당에선 잔잔한 클래식 음악이 흘러나오고 사교모임 다운 가벼운 대화들이 오고 가.
그녀는 문가에 가만히 서서 사람들을 둘러봐.
저기 그가 보인다.
결혼식 때만큼이나 까만 슈트를 입은 그가, 그때만큼이나 근사한 모습으로 사람들 사이에 서 있어.
그의 입술이 움직이고, 그가 눈을 깜빡이고, 천천히 천천히 가벼운 대화를 나눠.
그녀는 그런 그를 바라보다가 이내 그의 비서에게로 눈을 돌려.
빨간 드레스가 잘 어울리는 여자라고 은성은 생각해.
몸의 곡선을 드러내는 그 드레스가 참 잘 어울리는 여자라고.
진한 화장은 섹시하고, 붉은 입술은 탐스럽고, 그에게 건네는 말들도 그런 그녀만큼이나 매혹적일 것만 같아.
향에 취하고, 분위기에 취하다 어느새 그 존재 자체에 취해버리는 한 잔의 포도주처럼 말이야.
홍빈은 어느새 다가왔는지 멀리서 택운과 그의 비서를 응시하는 은성을 바라봐.
그가 문득 아무도 모르게 입술을 잘근거리며 그녀의 시선을 따라 그 둘을 흘기고,
이내 부드러운 손길로, 다정한 목소리로 은성이의 이름을 부르며 어깨를 두드려.
"전화 다 했어?"
은성이 가볍게 웃으며 홍빈을 돌아봐.
홍빈은 그런 그녀를 보며 흔치 않게 예쁜 미소를 지어.
"다시 보니까 더 예쁘네"
"적당히 좀- 누가 들으면 오해한다니까"
"뭐- 오해하면 더 좋고"
그녀의 핀잔에 홍빈은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해.
은성이는 그런 그의 모습에 고개를 저으며 못 말린다는 표정을 지어 보여.
그 모습이 꽤나 그리웠는지 홍빈은 낮은 웃음을 흘려.
"뭘 그렇게 보고 있어"
문득 홍빈이 묻자 은성이는 다시 고개를 들어 택운을 바라봐.
"남편"
그녀가 나지막이 대답해.
홍빈은 그런 그녀의 눈동자를 바라보다가 이내 은성이의 손목을 잡아.
"가보자, 기다리겠다"
은성이는 홍빈을 바라봐.
그러고는 부드럽게 고개를 끄덕여.
발걸음을 내딛는 그녀의 얼굴에 옅은 미소가 그려져.
홍빈은 그걸 슬쩍 훔쳐보다가 아무렇지도 않다는 얼굴로 시야에 들어온 택운에게 인사를 하고, 택운의 비서도 슬며시 고개를 숙여.
은성이는 자연스럽게 택운에게 다가가고, 택운은 입가에 옅은 미소를 띠며 그녀를 바라봐.
"왔어?"
부드러운 목소리로 택운이 물어.
처음 들어보는 목소리로.
"응, 기다렸어요?"
그런 그를 올려다보며 은성이 미소를 지어.
"조금"
"더 늦게 올 걸 그랬나 봐, 그러면 당신이 더 많이 보고 싶어 했을 텐데"
은성이의 농담에 가벼운 웃음들이 오고 가.
살가운 신혼부부의 모습이 보기 좋다며 주변 사람들이 한 마디씩 건네.
그녀는 그들과 부드럽게 대화를 나누고, 택운은 그런 그녀의 허리에 가볍게 손을 올려.
참 누가 봐도 사이좋은 한 쌍이 아닐 수가 없어.
"차은성이예요"
은성이 택운의 비서를 보며 이야기해.
"문현아입니다"
"만나서 반가워요, 택운씨한테 여러모로 많이 도움이 돼준다고 들었어요"
택운이 하지도 않은 말들을 은성이는 너무나도 부드럽게 내뱉어.
"아니에요, 많이 부족해요"
현아가 웃으며 대답해.
은성이는 그런 그녀를 똑바로 바라보며 입꼬리를 올려.
"부족하긴요, 차고 넘칠 텐데?"
"네...?"
"반지 예쁘네요. 아주 근사한 사람이 선물해줬나 봐요"
"감사합니다"
"택운씨 잘 부탁해요. 누구보다 가까이서 지켜봤을 테니 누구보다 잘 알겠죠"
"....네"
"어쩌면 나보다 훨씬 더 잘 알지도 모르겠네"
옅은 미소를 띠며 나긋나긋하게 말하는 은성을 택운은 가만히 바라봤고,
홍빈은 조금 걱정되는 마음에 눈을 굴리다가 이내 입을 꾹 다물어.
꽤나 강인한 그녀의 성격이 물에 젖은 실루엣처럼 비쳐 나온다고 홍빈은 생각하면서도 걱정으로 얼굴을 물들여.
은성이 살짝 눈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돌리자 현아는 택운을 바라보며 미간을 찌푸려.
택운은...
택운은...?
*
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두 사람은 아무 말도 없어.
은성이는 오른쪽 창문을 바라보고, 택운은 눈을 감고 고개를 젖히고 있어.
가로등 불빛이 눈 안에 스며들었다 빠져나가기를 반복해.
분주하지 않은 도로의 바퀴 소리가 유난히도 신경 쓰여서 은성이는 눈을 꼭- 감아.
택운은 현관 문을 열고, 은성이는 몇 발자국 뒤에서 그런 그를 바라봐.
그러다 문득 평소와는 다르게 문고리를 잡고 들어갈 생각을 안 하는 택운에 기분이 이상해져.
택운은 문을 열고는 가만히 서서 은성을 응시해.
"안 들어갈 거야?"
문득 택운이 물어.
은성이는 대답 없이 잠시 동안 그를 쳐다보다가 발걸음을 움직여.
구두를 벗으니 발갛게 달아오른 새끼발가락이 눈에 띄어.
제 마음처럼 아프게도 짓물렀다고 그녀는 생각해.
"연기 꽤나 잘 하던데"
제 뒤에서 들려오는 그의 목소리에 은성이는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봐.
"다행이네요 마음에 들었다니"
택운과 그녀는 서로를 마주 보며 서 있어.
한참 동안 두 사람은 아무 말도 없어.
이내 은성이 그를 바라보며 입술을 움직여.
"당신도 연기 잘 하던데요?"
"........"
"너무 애처가 같아서 당신 사람 잃을까 걱정돼"
꽤나 의미심장한 한 마디를 그녀를 던지고,
그는 그런 그녀를 바라보며 입술을 비틀어.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마. 사생활 간섭도 할 생각 말고"
"부인이 남편 걱정하는 게 쓸데없는 거예요?"
그 한 마디에 택운이 미간을 찌푸리며 은성이에게 다가와.
은성이는 뒷걸음질 치기는커녕 점점 가까워지는 그의 얼굴을 바라보고,
그는 그녀의 바로 앞에 멈춰 서서는 차가운 목소리로 비아냥거리듯 이야기해.
"나랑 소꿉놀이하려 결혼한 것처럼 멍청해 보이진 않았는데?"
"당신이랑 결혼해서 이익을 남기겠다 생각할 만큼 계산적이지도 않아서요"
지지 않고 대답하는 은성이 마음에 안 들었는지 택운은 그녀의 어깨를 꽉- 붙잡아.
은성이는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그런 그를 마주 봐.
"원해서 결혼하기라도 했다는 거야 뭐야"
"원해서 안 했어도 노력하면 바뀔 거라 생각하고 있긴 해요"
"바뀌는 건 없어"
"그래도 나는 노력하려고"
그녀의 그 대답에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녀의 눈동자를 바라보고,
은성이는 처음 가까이서 마주하는 그의 모습에 문득 심장이 요동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아.
하지만 아주 잠시야. 그런 감정적인 것들은 이런 싸움에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그녀는 알고 있어.
그런 감성적인 것들은, 사랑이라던가 애정이라던가 그런 따뜻한 것들은 매번 그녀를 지게 만들 거라는 걸 그녀는 너무 잘 알고 있어.
겪어보지 않아도 느낄 수 있어. 이렇게 당당하게 그에게 이야기하고 있으면서도 실제로는 이미 지고 있다는걸.
그에게 지고 지고 또 져서 계속 그의 곁에 있고 싶게 될 거라는걸.
택운이 손을 올려 이번에는 그녀의 손목을 잡고 자기 쪽으로 끌어당겨.
당황스러움이 그녀의 얼굴에 퍼져나가고, 택운은 무표정한 얼굴로 그녀를 내려다봐.
집 안의 기류가 바뀌고 있어. 조금 더 묵직하고, 조금 더 뜨겁게.
문득 그는 입꼬리를 올리고, 은성이는 미간을 찌푸리며 그를 올려다봐.
"...다른 식으로 한 번 노력해보지그래?"
꽤나 끈적한 목소리로 그가 이야기해.
"진짜 부부가 되고 싶다면 말이야"
"당신 진짜..."
은성이는 그제야 붙잡힌 손목이 아픈지 몸을 비틀며 그에게 말해.
"그만둬요"
"왜? 이제 와서 무서워?"
느리게 또 느리게 죽음의 무도가 흘러나온다.
정막이 가득한 이 집 안에서 불현듯 원치 않는 왈츠가 시작돼.
그가 한 발자국 다가가면 그녀는 뒷걸음질 치고, 꽉 잡힌 손목은 이내 붉게 물들어.
마침내 그녀의 등이 벽에 닿고, 그녀는 아랫입술을 깨물며 그를 바라봐.
눈동자가 흔들리는 것을 그녀는 숨길 수 없어.
그의 숨결이 그녀의 속눈썹에 맺히고, 가까이 다가온 그 실루엣에 그녀는 눈을 꼭- 감아버려.
"노력...? 노력 좋지"
귓가에 맺히는 그의 가는 목소리.
"어디 한 번 계속 노력해 봐"
*
무얼 나눠 먹으면
우리는 서로를 바라보며 비참하지 않을까
[정영 / 피에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