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연애 중인 엑소 디오와 탑시드 홈마 너징 썰 15
BGM : 스웨덴세탁소 - 우리가 있던 시간
암호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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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 감사드려요.♥ 오늘은 사담 없이 시작합니다. |
#39. (찬열&수정 Ver.)
징어는 아까 부들부들 떨면서 감정을 털어내고 나서, 지쳐서 푹 쓰려져 버렸다.
수정이는 그런 징어를 조심스럽게 자신의 침대에 눕혀 놓고, 문득 배고프셔서 깨실 징어의 부모님이 생각나 늦은 저녁식사를 준비했다.
다만 정작 본인은 그다지 입맛이 돌지 않았다. 머리가 깨질 것 같았고 뭐라도 먹으면 다 게워낼 것 같았다.
그래도 꿋꿋하게 밥도 하고 국도 끓인 뒤에 뚜껑을 덮어놓고, 포스트잇을 떼어 와 배고프시면 드시라는 말을 써 놓았다.
포스트잇을 냄비 위에 가볍게 붙인 수정이는 터덜터덜 거실로 나가서 축 소파에 늘어진다.
힘을 쭉 빼고 앉아서 핸드폰이나 의미 없이 만지작거렸다. 어둑어둑해진 하늘.
머리가 복잡하니까 뭐라도 깔끔하게 비우고 싶었다. 그래서 핸드폰을 내려놓고 쿠션들을 단정하게 정리했다. 등받이도 일정하게 맞추고.
테이블 위도 치우고 리모컨도 똑바로 놓은 다음에 핸드폰을 들어 카톡 프로필 사진과 상태 메시지를 공란으로 비워놓고 모든 런쳐를 흰 색으로 맞춰버렸다.
수정이는 핸드폰 배경화면을 뚫어져라 쳐다보다가 이내 어지럼증을 느끼고 핸드폰을 옆에 툭 던진다. 점점 손에 힘이 빠진다.
눈을 꾹 감고 모든 생각을 하고 싶지 않다는 듯 고개를 흔들었다.
둘의 관계는 어떻게 되는 것일까. 둘의 시간이 이대로 날아가기엔 너무 아까운데.
이대로 계속 꼬여간다면 정말 모든 추억들이 사라질 것만 같아서, 그 시간과 추억의 끝자락을 애써 붙잡고 가지 말라며 애원하고 싶었다.
눈을 뜨고 핸드폰을 켜 아까 보지 못했던 카톡을 확인했다. 찬열이에게서 온 만나자는 이야기.
그래, 어쩌면 경수의 이야기도 들어보는 게 나을 것 같다.
수정이는 약속 시간과 장소를 일방적으로 정한 찬열이의 카톡을 천천히 읽다가 몸을 힘겹게 일으킨다.
약속 시간에 늦지 않으려면 이제쯤 준비를 시작해야 할테니까.
-
찬열이는 1이 없어지고 나서도 답장이 오지 않는 수정이 탓에 카페 구석 자리에 앉아서 안절부절 못하고 있다.
이러다가 누가 알아보면 어쩌지, 싶고. 고개를 푹 숙이고 카라멜 마끼아또를 쪽쪽 빨며 핸드폰만 보고 있는데, 누군가 앉는 소리가 들린다.
찬열이는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화장기 하나 없이 갈색 생머리로 나온 수정이. 굉장히 지치고 아파보였다.
상당히 오랜만에 본 서로였으나, 한 마디 말도 쉽게 오가지 못했다. 평소 그런 성격이 전혀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들고 온 수정이가 빨대를 한 번 쭉 빨아들이더니, 한숨을 쉬고 입술을 열었다.
"그래. 그 쪽은 좀 어때."
"…미친 놈 같아. 울다가, 웃었다가. 조울증 걸린 것 같아."
"걔가? 걔가 왜?"
수정이는 아무 것도 몰랐다는 표정으로 경수가 힘들어 한다는 찬열이의 말에 상당한 반응을 보였다.
당연히, 수정이는 아무것도 모르니까. 저 쪽에서 징어가 어떤 이야기가 떠다니는지.
찬열이는 수정이가 모르나 싶어, 엑소 멤버들 사이의 상황을 설명해주기로 한다.
"지금 숙소 완전 살얼음판이야. 도경수는 미친 새끼 같고, 오세훈이랑 한 마디도 안하고….
그런데 내가 조금 이상하게 생각하는 건, 오세훈이 좀 미친 놈 같아. 안그러던 애가 갑자기 독기를 품어서."
"왜. 세훈이가 뭐라고 했는데?"
"…징어가 경수한테 질려서 자기랑 사귄다고."
수정이는 순간 와작 깨물어 먹던 얼음의 짜릿한 차가움이 머리 끝까지 전달되는 것을 느낀다. 뭐라고?
"오세훈이?"
"응. 그래서 도경수가 오징어 좋게 해주려면 내가 떨어져나가면 되는 거냐고. 그래놓고 울고불고 난리치고 있어."
찬열이는 수정이의 반응이 왜 그런지 그 이유를 알 길이 없다.
사실 마음 속 깊숙이에는 자신의 여자를 지킬 수 있을 거란 자신감이 현저히 떨어져 있던 찬열이와 경수였다.
그들에게 사실 그렇게 자극적인 내용은 엄청난 충격으로 다가왔을 것이고, 믿고 싶지 않겠지만 자연히 믿게 되었을 것이므로.
당연하게 생각했던 징어의 변심을 가장 징어와 가까이 지내는 수정이가 모른다는 것은 찬열이는 생각할 수도 없었기 때문에.
"미친… 그래서 그걸 믿었어?"
"왜? 아니야? 아니, 걔가 뭐라고 그랬냐면. 오징어가 요즘 꾸미고 다니는 거랑, 다시 피아노 시작하는 거랑, 자기랑 사진찍은 거랑 들먹이는데.
솔직히 그정도면 기정사실이지. 딱 봐도 그렇잖아. 그렇게 안꾸미던 애가 갑자기 꾸미고, 경수를 위해서 꿈까지 접었던 애가 갑자기 피아노를 시작하고.
거기다가 오세훈이랑 사진을 왜 찍어? 대체 언제 볼 일이 있어서?"
수정이는 속이 터질 지경이었다. 징어가 말했던 그 걱정이 이런 거였구나. 이런 쓰잘데기 없는 말을 했구나.
아메리카노 컵을 탁 내려놓으면서 입을 여는 수정이. 이크, 하고 찬열이가 움츠러든다.
"병신이야? 오징어 못 믿어? 걔 5년 동안 봐 오면서 대체 뭘 알고 지냈던 거야? 걔가 그런 애야?
오징어만 불쌍하게 돌아가잖아 지금. 걔가 다 자기 모든 걸 다 버리고 도경수 상처 안 받게 하려고 오만 노력을 다 했는데."
"우리는 모르지이……"
찬열이는 왠지 기가 빨리는 기분이 들었다. 저렇게 흥분한 수정이는 오랜만에 본다. 왠지 내가 굉장한 잘못을 저지른 것 같았다.
저절로 말을 흐리게 되고 고개를 숙이게 된다. 그런데 찬열이는 그 와중에서도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지 알 수가 없다.
"오징어가 도경수 절대 모르게 하려고 수술까지 받고. 꿈까지 또 잃어버리고. 평생 병신으로 살게 생겼는데 지금."
"어? 뭔 소리야?"
"니넨 아마 나중에 오징어 보면 미안하다고 절이라도 해야 될 거다.
어떡하면 좋아, 우리 징어. 세훈이가 얼마나 맘이 아팠으면 자기를 팔아가면서 그런 거짓말을 하냐."
수정이는 천천히 설명을 시작했다. 처음 사생팬들이 여친의 유무를 알아내서 바짝 긴장했을 때부터, 징어가 왼쪽 눈을 잃고 그를 버텨내려고 한 모든 행동들을.
찬열이는 갈색 빨대를 자꾸 아작아작 씹어가며 안절부절 못하고 있었다. 눈만 떙그라니 키워서 수정이의 얼굴을 주시하면서.
한 10분 동안 그 동안 있었던 일들을 간략하게 정리해서 말했다. 속사포 같이, 빠른 속도로. 찬열이는 얘기가 끝나자 흥분해서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니까… 오징어가 도경수 지키려고 한쪽 눈에 칼빵을 맞았고, 그거 가리려고 숯깜댕이 칠하고 다닌 거고, 또 뭐냐.
사진 못 찍으니까 피아노 선생 하려고 피아노 학원 들락거린거고, 그렇다고?"
"그래 이 화상아. 칼빵이 뭐야, 칼빵이. 숯깜댕이는 또 뭐고. 말 참 곱고 예쁘게 하네."
"아, 그래. 눈에 칼 맞고, 눈에 까만 거 칠하고 다니고. 됐지?"
"됐다. 말을 말자."
"그럼. 걔는. 오세훈."
수정이는 세훈이 이야기가 나오자 급하게 몸이 굳었다. 비밀일텐데, 이걸 말하지 않으면 이야기가 풀리지가 않는다.
한참을 고민하던 수정이는 결국 입을 뗀다. 어차피 경수를 위해서 비밀로 한 거니까. 이걸 말해야 경수랑 풀리니까.
"그게… 세훈이가 징어 친동생."
"뭐어어어?!"
"오징어 오세훈. 징어가 한국 온 게 동생이 아파서 혼자 온 거잖아. 그게 세훈이. 미국에서 병 치료하고 있었대.
세훈이 영어 잘하지 않아?"
"응. 어 그러게? 성도 똑같네?"
"징어가 열여덟 살 때 동생 다 나았다고 미국 갔었지. 그게 세훈이."
"증거는?"
"지금 징어 집에 징어 부모님 와 계시거든. 니가 가서 물어볼래?"
"아니. 됐어. 믿을게."
몇 마디의 대화가 더해지고, 모든 수수께끼가 풀렸다. 찬열이와 수정이는 한결 속이 편해진 느낌이었다.
찬열이는 징어가 불쌍해서 눈물이 다 날 지경이었다. 눈가가 빨개진 찬열이를 보고 수정이는 저 성격이 어디가나 하며 쯧쯧 혀를 찼다.
찬열이가 그러든 말든, 수정이는 새로운 고민을 시작했다.
이걸 어떻게 당사자들한테 말해야 하지. 사실은 이 문제에서 가장 어려운 난관에 봉착했다.
지금 서로 너무 예민하고 힘들어하는데. 우리야 편하게 듣고 편하게 받아들인다지만, 당사자들은 전혀 아닐텐데.
표피가 벗겨진 피부에 칼을 들이대는 것처럼 잔인하고 날카로운 송곳으로 맘을 후벼파야 하는데.
어떡하지. 어떡하지…
#40. (찬열 Ver.)
일단 찬열이와 수정이는 조금 더 생각할 시간을 갖기로 했다.
지금 당장 징어와 경수에게 달려가서 필터링 없이 말한다면 오히려 상처받고 아파할까봐.
찬열이는 당장이라도 달려가서 말하고 싶어했지만, 수정이가 애써 말렸다. 지금 말했다가는 더 상처받을 거라고.
그 대신, 수정이는 찬열이에게 한 가지 부탁을 했다. 이 모든 사건의 열쇠가 되어줄 단서인 세훈이와 대화를 좀 해보라고.
"어, 찬열아 왔어?"
사생 무리를 뚫고 숙소로 돌아오니 루한이 형이 티비를 보다가 뛰쳐나와서 인사를 한다. 나는 손을 살랑살랑 흔들어주고 방으로 들어왔다.
도경수는 이제 눈물이 다 말라버린 것인지 싹 굳은 표정으로 노트북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보니까, 징어 사진들이 가득한 폴더. 지금 드래그는 해 놨는데 이걸 지울 수가 없어서 고민 중인가 보다.
나는 지우지 말라고 말하려다가, 더 좋은 방법을 모색할 시간을 갖자는 수정이의 말을 떠올려서 관뒀다.
나는 괜히 경수를 건드리는 편보다, 세훈이를 찾는 편을 택했다.
후드 집업을 대충 벗어서 옷걸이에 걸어놓고 뿔테 안경을 벗어서 화장대 위에 올려놓고 방을 나왔다.
세훈이와 종인이가 함께 쓰는 방에 들어가니, 혼자 침대에 누워서 핸드폰을 들여다보고 있는 세훈이가 보였다.
뭔가 보면서 웃고 있다가, 날 보자 마자 바로 표정을 싹 굳히는 세훈이. 제일 안쓰럽고 불쌍했다.
"얘기 좀 할래?"
-
세훈이는 내 말에 바로 몸을 일으켜 침대 헤드에 기대 앉았다. 나는 바닥에 대충 퍼질러 앉았고.
그냥,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든다. 얘는 대체 그렇게 자신을 나쁜 놈으로 만들어가면서 지키고 싶어했던 누나를 얼마나 사랑했던 걸까.
나는 우리 누나한테 뺨이나 맞고 크고 형제처럼 치고박고 싸웠는데. 누나를 위해서 애써 독기를 품고 으르렁대는 모습이 멋있으면서도 불쌍했다.
잠시 말을 골랐다가, 입을 열고 말을 살짝 내뱉었다.
"…왜 그랬어?"
"뭐가요."
"왜 거짓말했어."
"……그걸 형이 어떻게 알아요?"
"방금 징어 친구 있지. 정수정. 징어랑 같이 사는 애. 걔 만나고 왔어."
"……."
"오징어 지금 꼴이 말이 아니라더라. 지금도 울지도 못하고 부르르 떨다가 지쳐서 쓰러졌대.
너, 걔한테 전부가 도경수인 건 알고 있었냐. 걔가 도경수 지키려고 얼마나 힘들게 자기를 버렸는데."
"…그러니까. 경수 형만 없으면 우리 누나는 힘들지 않아도 되잖아요."
이런 생각으로 그런 거였구나. 정말 백퍼센트 누나를 위해서. 다만 그 방법이 조금 잘못된 것 같아 마음이 아팠다.
그래서 그 삐뚤어진 마음을 다시 세워주고자 해서 가장 한 번에 이해되고 공감될 만한 예시를 들어주기로 했다.
"아니지. 생각해 봐. 니가 만약에 정말 좋아하던 브랜드에서 정말 예쁜 블레이져가 나왔어.
그래서 넌 그걸 사려고 니가 사려던 신상 반지를 포기하고 블레이져를 샀어. 몇백 만원 짜리를. 너는 그걸 조심해서 잘 입고 다녔어.
때 안타게 하려고 조심조심 행동하고, 혹시나 단 뜯길까 살살 입고. 그런데 그 블레이져에 꽂혔던 옷핀 때문에 니 팔이 긁혀서 찢어졌어.
그래서 너는 그 날 무대를 못 섰어. 치료를 하느라. 그런데 숙소에 와 보니까 매니저 형이 그 블레이져를 버렸어. 그것 때문에 니 팔이 찢어진 거라고."
"……."
"너는 화가 나겠지. 그리고 억울하겠지. 혹시나 때 탈까봐 함부로 입지도 못했던 몇백 만원 짜리 블레이져를 한 순간에 잃었으니까.
굳이 따지자면 옷핀 잘못이지 그건 옷 잘못이 아니라고 항의를 하겠지."
"……그렇죠."
"똑같아. 뭐, 굳이 달라진 게 있다면 스케일이 좀 커지겠지. 인생의 전부랑 꿈이 걸린 거니까.
어쨌든, 징어의 인생은 거의 경수를 위해 살아온 거였어. 너도 알지 않아?"
"……."
"너가 뭘 잘못했는 지 이제 알겠어?"
"…죄송해요."
"아니, 나한테 죄송할 건 없고. 징어랑 경수한테 죄송해야지."
"형. 나 어떡해요? 우리 누나 어떻게 봐요?"
세훈이의 눈에는 어느 샌가 눈물이 고여있었다. 나름대로 순화시켜서 말한 건데, 그래도 상처였나 보다.
아직 이렇게 말 몇 마디로도 상처 받고 곧바로 제정신을 차리는 어린 아이인데, 자기도 얼마나 힘들었고 고되었을까.
나는 몸을 일으켜 세훈이를 꼭 끌어안아 주었다. 사실 남자들끼리 이러는 게 익숙하지는 않지만, 아이는 아이처럼 달래줘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서.
세훈이는 나한테 안겨서 눈물을 쏟아냈다. 그 동안 스스로를 가시로 후벼판 그 애의 아픔들까지 쏟아내 듯.
"형 나 어떡해요? 진짜? 누나한테 정말 도움이 되고 싶었는데 나는, 그런데 난 결국에 누나한테 짐만 되고 피해만 되는 존재인가 봐요.
누나가 나 미워하면 어떡해요? 안그래도 어렸을 때부터 누나 힘들게 했는데 이제 누나 애인까지 뺏어가는 애라고 미워하면 어떡해요?
경수 형은, 자기 여자한테 그렇게 못된 말이나 하고 있고 형을 바닥까지 끌어내렸는데. 맨날 얼굴 맞대기도 싫을텐데.
어떡해요? 어떻게 해야 잘못했다고 말할 수 있을지 난 모르겠어요. 우리 누나는 나한테 웃어주면서 널 원망하지 않는다고 말해준 사람인데.
나는 그런 누나한테 도움을 준다는 명분으로 누나를 다 뺏어가고 있었으니까. 아, 난 아무것도 모르겠어…"
사실 자기 누나한테 그런 저급한 말을 쓰고, 그렇게 미친 사람인 것처럼 나쁜 새끼 연기를 하면서 욕을 들어먹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니까.
나한테도 그런 욕을 들으면서 얘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얼마나 슬프고 힘들었을까.
나는 둥그런 머리통을 좀 더 세게 안았다. 니트 한 자락이 축축히 젖어왔다.
"징어는 분명히 너를 미워하지 않을 거야. 경수도. 얼른 사과하고 오해를 풀어야 될 것 같은데, 내 생각엔."
어쩌면 일이 꽤 쉽게 풀릴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생각 밖으로 너무 어리고 약한 소년인 세훈이는, 아직까지 세상을 메마르게 할 만큼 강하고 매정하지 못한 가 보다. 다행이었다.
아직 세상은 조금의 온기와 색채는 남아있는 곳이었다. 스윽 스윽, 세훈이의 머리카락을 빗어주면서 그렇게 생각했다.
#41. (경수 Ver.)
경수의 이야기.
징어는 어느 순간부터 변하기 시작했다.
언제부터였는지 모르겠지만, 어느 순간 갑자기 진한 화장과 함께 잘 찍지 않던 셀카가 올라왔다.
가끔씩은 흰색 블라우스, 가끔씩은 시스루까지. 전에 절대 입지 않던 과감한 패션으로.
처음에는 당황스러웠다. 원래 화려한 것을 좋아하지 않는 징어였는데. 그래도 꾸미고 싶은 마음이 갑자기 생긴건가?
그런데, 점점 내가 긍정적인 면에서 생각할 수 있는 범위를 벗어났다.
꿈도 포기하고, 학교도 휴학계를 내고, 거기다가 사진작가들의 로망이라는 스카웃 제의도 거절한 징어가 갑작스럽게 짧은 공지 두 줄과 함께 홈을 닫았다.
그래. 바쁠 수도 있고, 많이 힘들 수도 있는 거니까. 그런데 징어는 어느 순간부터 연락도 급하게 줄이기 시작했다. 왜인지 나는 잘 몰랐다.
그런데, 징어가 어느 날 연락을 받았을 때에 전화 너머로 피아노 소리가 들려왔다.
그래서 불안한 마음으로 징어에게 어디냐고 물으니 약간 망설이다가 피아노 학원이라고 대답했다.
망설였다,는 것은 조금. 음… 내 생각 범위를 넘어선 것이었다. 내게 뭔가 숨기는 게 있는 건가.
나의 자신감은 점점 바닥으로 추락했다. 내가 징어를 붙잡을 만큼 잘나지도 못했을 뿐더러, 징어같은 여자는 내게 과분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참 풋풋할 이십대 초반의 여자가 자신에게 눈길도 제대로 주지 못하는 남자를 계속해서 바라본 다는 게 사실은 불가능에 가깝지 않을까 싶었다.
거기다가, 나는 매 번 다른 여자 아이돌과 만날 기회가 있었고, 마치 그들과 내 관계가 특별한 듯하게 짜여져서 나오는 기사들.
그리고 자신이 아닌 팬들에게 매 번 사랑한다며 고백을 하는 것. 생각해보니 징어에게는 한 번도 표현을 해 보지 못했다.
징어가… 계속 나를 바라봐 줄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 시점에서, 적절하게 세훈이가 내게 그런 말을 한 것이다. 언급하고 싶지도 않은 '그런' 말.
나는 상당히 지쳐있었고 자신감이 추락해있었다. 그래서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은 것이었다.
나의 어리석은 행동은 징어를 아프게 했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자신 하나만으로 아프고 힘들 아이를 내가 감싸주지는 못할 망정 더 상처를 주고 있던 셈이었다.
나도 많이 힘들어했다. 더 이상 몸에 물이 남아있는 것 같지 않은 느낌이 들 때까지 울었고, 기계적으로 웃고 표정을 바꿨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은 나중에 알고 난 징어의 고통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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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참 동안을 징어 사진을 지울지 말지 쓸 데 없는 갈등을 하는 데에 소비했다.
정말 이것을 지워버리면 그 동안의 기억과 추억을 모두 지워 버리는 것 같아서 차마 지울 수가 없었다.
몇십 분이고 계속 망설이고 있었을까, 가벼운 노크와 함께 문이 열렸다.
뒤를 돌았을 때, 그 곳에는 세훈이가 있었다.
처음에는 경계했다. 왜 온 것인지, 나에게 또 어떤 말을 하려고 온 것인지. 내게 어떤 상처를 또 주려고 이러는 지.
그런데 언뜻 멀리서 봐도 운 것처럼 퉁퉁 빨갛게 부은 세훈이의 얼굴에, 그 경계심을 내려놓았다.
세훈이는 내 얼굴을 보자마자 애써 그친 것 같던 울음을 다시 터뜨렸다.
나는 상당히 당황했다. 내게 상처를 주러 온 것이 아니라, 마치 자신이 세상의 모든 아픔을 짊어지고 있는 것처럼 슬프게 우는 세훈이 때문에.
나는 일단 세훈이를 침대에 앉히고, 안정이 될 때까지 얌전히 기다렸다.
머릿속으로는 오만 생각이 다 들었다. 그 가운데에서도, 징어가 아프다거나, 많이 힘들어하는 거면 어쩌지. 하는 생각도 들었다.
세훈이는 겨우 진정이 된 건지, 한참 동안을 숨을 고르다가 말머리를 꺼냈다.
"형. 미안해요."
뜬금 없는 사과에 어안이 벙벙했다. 어버버, 거리며 할 말을 찾는 사이 세훈이의 말이 이어졌다.
"형. 징어 누나요. 완전 불쌍한 거 알아요?"
"……."
"누나 동생 있는 거 알죠. 많이 아파서 누나 혼자서 한국으로 오게 했다는 그 동생."
"응. 알지."
"자세히 들어봤어요? 아니면 내가 말해줄게요. 누나 열세 살 때, 동생을 열한 살이었고. 그 때 동생이 되게 아팠거든요. 백혈병이었어요.
그런데 하필 그 시점이 가족들이 한국으로 돌아가려던 시점이었거든요. 그런데 나는 아프니까, 부모님은 날 돌보기 위해서 미국에 남았어요.
누나는, 부모님이 자기한테도 신경 쓸 여유가 없단 걸 아니까, 그냥 예정대로 한국에 가겠다고 한 거예요. 누나가 그렇게 자기 의견을 말한 건 그 때가 처음이었대요.
그래서 부모님은 생각하다가 누나 뜻대로 누나를 한국으로 보내 주기로 했어요. 그래서 수정이 누나 집에서 계속 자란 거고."
"……."
"미국에 남아있던 동생은, 치료가 너무 힘들고 아파서 많이 울었어요. 그런데 그럴 때마다 누나가 한국으로 가기 전에 차 준 팔찌를 보면서 맨날 참았어요.
은색 체인에 천사 모양 조각이 새겨진 건데, 그거 누나가 제일 아끼던 거였거든요. 그런데 내가 아파하고 누나 보고 싶어할까봐 주고 간 거예요.
나는, 아니 동생은 어렵게 몸에 맞는 골수를 찾아서 5년 만에 다 나을 수 있었어요. 조금 오래 걸린 편이에요. 그래서 동생은 누나한테 다 갚아주고 싶었어요.
누나가 자기를 위해 희생했던 거랑, 그런 거 다. 그런데, 막상 열여덟 살이나 되서 다 커버린 누나를 보니까 낯설기도 하고 그게 잘 안 되는 거예요."
흘끗 세훈이의 팔목을 보았다. 은색 체인에 천사 모양 조각이 새겨진 팔찌. 연습생 시절부터 한 번도 빼먹지 않고 차고 다녔던 팔찌이다.
"그런데, 용기를 내서 물었어요. 누나는 내가 밉지 않냐고. 그런데 누나는 웃으면서 그랬어요. 내가 결정한 건데 니가 왜 밉냐고.
그래서 동생은 누나한테 너무 미안해서, 누나를 위해서 큰 약속을 했어요. 내가 누나 동생인 거 숨기겠다고. 그게 누나도 편할 거니까.
그런데, 어느 날 누나가, 날개가 꺾였어요."
세훈이의 눈은 공허했다. 잔인하고 무서운 말. 날개가 꺾였다.
"사진을 찍던 누나가, 칼에 맞아서 한 쪽 눈이 영원히 안 보여요. 꿈을 접을 수 밖에 없었어요."
충격이었다. 징어가 눈이 안보인다니. 그것도 칼에 맞아서. 처음 듣는 엄청난 소리에 사고회로가 정지되었다.
"그게… 무슨 소리야?"
"말 그대로에요. 사생들한테 찔렸어요. 형 지킨다고."
날 위해서 또 희생한 징어. 그것도 모르고 마냥 상처만 주던 나.
"그런데 형을 원망하지도 않고, 바보같이 수술이나 하는 거예요. 각막이랑 세포랑 다 분리시키는 수술이요. 찢어진 각막 가리려고.
그리고 렌즈를 껴야 되니까, 화장도 하게 된거고. 화장을 하다 보니까 옷도 그렇게 입게 된거고.
사진을 못 찍으니까 홈을 닫은 거고, 그래서 뭐라도 하려고 피아노 가르치는 일을 시작한 거고요."
모든 걸 내던지고 싶었다. 극도의 분노 상태였다. 내 자신에 대한 혐오감이 파도처럼 밀려들어왔다.
나는 지금까지 내 생각만 하느라 징어의 입장에선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징어에게 용서받을 수도 없는 모든 사건들. 그 모든 것을 알아채지 못하고 막아주지 못한 나.
"…그래서 너무 화가 났어요. 왜 누나는 맨날 누나만 희생하는 지.
누나한테 경수 형이 없다면 나아질 까 싶어서 일부러 거짓말 했어요. 사실 징어 누나 제 친누나예요. 이거."
세훈이가 내민 사진을 떨리는 손으로 받아들었다. 조그만 사이즈의 가족 사진.
고등학생 때의 징어와, 앳된 세훈이. 그리고 세훈이를 똑닮은 아버지와 징어를 똑닮은 어머니.
"하나도 안닮았죠."
"……."
"나도 형처럼 생각했어요. 그런데 찬열이 형이 그러더라고요. 방금 수정이 누나를 만났는데, 누나가 형이 없어서 많이 힘들어한다고.
누나의 전부는 경수 형이었는데, 형이 없어지니까 너무 힘들어한다고 하더라고요."
사진에서 겨우 시선을 떼어 세훈이의 얼굴을 쳐다보자, 세훈이는 약간 허탈함과 슬픔이 섞인 듯한 눈으로 식은 웃음을 애써 지었다.
"얼른 가서 불쌍한 우리 누나 꼭 끌어 안아주세요. 다시는 상처 주지 말고."
나는 바로 몸을 일으켰다. 뿌얘지는 시야를 떨치고 급하게 코트를 집어들고 방을 나섰다.
빠른 걸음으로 신발을 구겨신고 현관을 뛰쳐나갔다. 준면이 형의 다급한, 어디 가! 하는 외침이 들렸지만 나는 이미 외부의 어떤 것과도 절단된 상태였다.
엘리베이터에 올라타 1층 버튼을 미친 듯이 누르면서도 아까 세훈이의 슬픈 눈이 잊히지 않았다.
띵동.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빠르게 달려나갔다.
사생들이 붙잡으려 했지만 그 손을 탁탁 쳐내고 길가로 전력질주했다.
지나가는 택시를 붙잡고 다급하게 말했다.
"○○동이요. 아저씨, 최대한 빨리 가주세요."
-
그 동안 아프게 해 줘서 미안해. 조금만 기다려.
* * * * * * * *
베브입니다.
후... 저는 정말로 세훈이가 저렇게 약한 모습을 볼 수가 없고 상상도 가지 않지만 어쩔 수 없이 손가락만 기계적으로 움직여서 썼네요.
글은 작가가 감정 이입을 하지 않으면 결코 완벽할 수가 없는데... 망했습니다. 괜히 세훈이를 넣었나봐요.
※ 암호닉 신청 받습니다.
다음 편 (16편)이 올라오는 날짜, 곧 다음 주 토요일 (11/2) 까지만 받습니다.
원래 더 받지 않으려고 했는데, 제 글을 늦게서야 접하신 몇몇 독자 분들을 위해서 받기로 결정했습니다.
암호닉 신청을 해 주실 때에는 신청하실 암호닉이 혹시 겹치지는 않는지 상단의 암호닉 리스트에서 확인 부탁드려요. 제발.
ex. [베브] 이런 식으로 꼭 [] 괄호 안에 신청하실 암호닉을 넣어주세요.
괄호 안에 넣어주시지 않으신다면 제가 잘 확인하지 못할 확률이 높아요. 보다 원활한 정리를 위해서 작은 협조 부탁드려요.
맞춤법 오류 / 문법 오류 지적 / 오타 지적은 감사히 받습니다.
늘 제 부족한 글을 봐주시고, 댓글 달아주시는 분들께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