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
카페 문을 열고 들어온 택운은 나른하게 내부를 훑다 현아를 발견하고는 그쪽으로 걸어가.
핸드폰을 만지고 있던 현아는 택운이 앞에 앉자 그제야 고개를 들며 그를 바라봐.
그녀가 천천히 턱을 괴며 눈을 깜빡이며 빨대를 만지작거려.
"자기는 뭐 안 마셔?"
"...이따가, 무슨 일이야 네가 낮에 다 만나자고 하고"
"내가 낮에 만나자고 하면 이상한 건가?"
현아가 입꼬리를 올리며 택운을 바라봐.
그녀가 매력적인 자태로 머리카락을 쓸어넘겨.
택운은 긴 다리를 꼬며 낮은 웃음을 흘려.
"자기 부인 말이야, 아니, 사모님이라 불러야 하나?"
현아의 발이 택운의 다리에 닿아.
의도한 듯 아닌 듯 부드럽게 쓸어올라가는 그 몸짓에 택운은 지긋이 그녀를 바라보고,
그녀는 붉은 입술을 움직이며 웃음 섞인 목소리로 그를 유혹해.
"사모님?"
툭 내던진 택운의 한 마디에 현아는 웃음을 터뜨리며 일어나더니 이내 자연스럽게 그의 곁에 가서 앉아.
부드럽게 자신을 간지럽히는 그녀의 머리카락에 택운은 기다란 손가락으로 제게 기댄 그녀의 머리칼을 쓸어넘겨.
진하고 고혹적인 향수 냄새가 그의 셔츠에 천천히 스며들어.
택운에 품에 안긴 채로 그녀가 말을 이어가.
"아주 아무것도 모르는 꼬맹이라고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말에 뼈가 있는 것 같던데?"
"그래 보이나..."
시큰둥하게 그가 대답해.
그러다 문득 은성이 생각나서 그는 미간을 찌푸려.
"별말없이 결혼한다 하길래 드라마에서나 나오는 청순가련한 여잔 줄 알았지"
"뭐, 잘 모르겠네"
"자기야"
애교가 가득 담긴 목소리로 현아가 택운을 불러.
"응"
"언제까지 그 여자랑 같이 살 거야?"
".....글쎄"
"잘 생각해 봐아-"
현아가 택운을 보며 큰 눈을 깜빡여.
그녀가 부드럽게 그의 허벅지를 어루만지고 택운은 그녀의 어깨에 손을 두르며 감싸 안아.
"누나 오래 못 기다려-"
문득 택운이 피식- 웃음을 터뜨려.
"누나는 무슨"
"응? 얼마나 기다려야 하냐니까?"
택운이 그녀의 어깨를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무표정하게 눈을 깜빡여.
"일 년"
"일 년이나?"
"그래, 일 년"
그렇게 말하며 택운은 천천히 고개를 돌리며 카페 안을 둘러봐.
천천히 아주 천천히 그의 시선이 여러 곳에 머물렀다 떠나기를 반복해.
그러다 문득 그의 눈동자가 멈춰 서고
택운은 살짝 미간을 찌푸리며 등을 떼며 그곳을 응시해.
현아는 그의 움직임에 애교 섞인 칭얼거림을 내뱉고
택운은 그 소리를 들었으면서도 아무 말 않고 한 곳을 가만히 응시하는 거야.
익숙해지고 싶지 않아도 익숙해질 수 밖에 없는 그 얼굴을 말이야.
'네가 왜 여기 있어?'
*
"난 장난 아니야"
그가 다시 한 번 그녀에게 말을 해.
"난 너한테 단 한 번도 장난인 적 없었어"
"아주 오래전부터"
-
"은성아, 나가자"
"어?"
심장 떨리게 핵폭탄 같은 말을 내뱉어 놓고는 갑자기 얼굴을 굳히고 나가자 그러는 홍빈에
은성이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그에게 되물어.
홍빈은 이제 얼굴을 굳히다 못해 무섭게 인상을 쓰고는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고 있어.
은성이는 그런 그를 올려다보다가 이내 가만히 그의 이름을 불러.
"홍빈아, 왜 그래?"
"나가자, 여기 너무 오래 있었다."
외투를 걸치며 말하는 홍빈에 그녀는 기분이 이상해서 고개를 돌려 가게를 둘러보려 해.
어느새 성큼 다가온 홍빈은 그녀가 움직이기도 전에 그녀의 양 볼을 잡고는 씩- 웃어 보여.
"그냥 나가자 은성아"
은성이는 그런 그의 눈을 가만히 바라보다 이내 천천히 고개를 끄덕여.
"응"
*
간신히 은성을 데리고 카페를 빠져나온 홍빈은 잠시 자리를 비운 은성을 기다리며 담배 하나 피우고 싶은 마음을 꾹- 눌러내려.
들려오는 문소리에 슬쩍 쳐다봤을 때 긴가민가했는데, 떡하니 자리에 앉는 잘난 얼굴을 보니 아무리 봐도 정택운인거야.
거기다가 마주 앉은 여자는 또 어떻고. 누가 봐도 연인 같아 보이는 진득한 스킨십을 해대는 두 뒤통수에 홍빈은 열이 받음과 동시에
은성이 걱정되는 마음에 여태껏 꾹- 꾹- 눌러두었던 하고 싶었던 말도 하지 못한 채 급하게 그녀를 데리고 나왔어.
모임에서 봤을 때부터 무언가 이상하다고 생각하고 있긴 했지만,
이렇게 대낮부터 보는 눈도 많은 카페에서 저러고 있을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거든.
지난 모임에서 지켜본 바로는 은성도 정택운과 문현아 두 사람이 함께 있는 것을 좋아하지 않아 보이긴 했지만
그녀와 자신처럼 둘의 부적절한 관계를 알고 있는지 모르는 홍빈은 그저 그녀를 데리고 자리를 피하는 것 밖에 할 수 없었어.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짜증이 나서 홍빈은 한참을 속을 삭히다가 이내 안되겠다는 듯이 조용히 뇌까려.
"미친 새끼"
"누가 미친 새끼야?"
문득 들려오는 은성이의 목소리에 홍빈은 놀라 고개를 들고 그녀를 바라봐.
은성이는 입술을 꾹- 꾹- 맞다물다 이내 부드럽게 웃으며 그에게 물어.
"카페에서 뭘 봤길래 그렇게 급하게 나가자 그래?"
"아니.. 그냥 갑갑해서"
홍빈은 당황해서 그녀의 눈을 피하며 대충 얼버무려.
"거짓말은"
그녀가 콧등을 찌푸리며 말해.
홍빈은 그런 그녀를 바라보며 고민하기 시작해.
그녀에게 말을 하지 않는 것이 과연 현명한 일인지.
아니면 숨김으로써 그녀를 더 힘들게 하지는 않을지.
은성이는 그런 그의 고민하는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이내 얕은 웃음을 흘려.
그런 그녀의 웃음소리에 그제야 정신이 들었는지 홍빈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은성을 바라봐.
"...왜...?"
"아니, 네가 고민하는 게 너무 눈에 보여서-"
"나 아무 생각도 안 했어"
"괜찮아"
"....어?"
"나도 알아. 아까 나오면서 봤어. 택운씨랑 그 비서랑 같이 있는 거"
청천벽력 같은 은성이의 한 마디에, 그 덤덤함에 홍빈은 얼이 빠져서는 멍하니 서 있어.
은성이는 어깨를 으쓱- 하더니 이내 천천히 발걸음을 옮겨.
홍빈은 얼굴을 찡그리고 입술을 잘근거리다가 얼른 다가가서 은성이의 팔을 잡아.
"너 언제 알았어? 방금 보고 안 거야? 아니면 처음 결혼할 때 부터...!"
"이홍빈, 진정 진정-"
"지금 진정하게 생겼어?!"
"나도 안 지 얼마 안 됐어"
"....."
"어제 둘이 같이 호텔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는 거 봤거든"
덤덤하게 말하는 은성을 보며 홍빈은 고개를 푹- 숙이며 낮게 욕을 뇌까려.
은성이는 아랫입술을 꾹 깨물며 그런 그를 바라보다가 이내 한 번 더 입술을 움직여.
"괜찮다니까-"
"너 어제는 분명히 남편이 잘해준다고 그랬잖아"
"그랬지"
"네 눈에는 저게 잘 하는 거냐?"
"......"
홍빈은 이내 고개를 들고는 은성이의 어깨를 꼭- 부여잡아.
열이 받아서 그런지 그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라있어.
"이혼해"
그가 단호하게 이야기해.
"차은성, 당장 이혼해"
그녀는 그런 그를 바라보다 이내 가볍게 웃어.
홍빈은 울상으로 그런 은성을 쳐다보고 한숨을 내뱉어.
"싫어"
"은성아"
"조금만 더 기다려보자"
"기다리긴 뭘 기다려!"
"내가 정 견디기 힘들면 그때 이혼할게"
"차은성!"
"정략결혼이잖아 정략결혼"
문득 견고한 어투로은성이 이야기해.
"나도 사랑해서 결혼 한 건 아니니까"
"......"
"일 년은 살아봐야지 않겠어?"
"너....."
"일 년 살다 안되면 깔끔하게 보내주지 뭐!"
씩씩하게 대답하는 은성을 보며 홍빈은 미간을 구기며 한숨을 내쉬어.
한참을 그렇게 그르렁대다가 이내 그녀를 한 번도 이겨본 적 없었다는 것이 생각나서 이내 머리를 벅벅- 긁으며 소리쳐.
"아- 진짜!"
"딱 일 년만 더 사는 거야"
"...."
"비밀이야 알지?"
"...."
"이홍빈-"
"알았어"
하는 수 없다는 듯 홍빈이 그녀에게 말해.
괜히 알고 싶지 않은 그녀의 은근한 진심까지 알게 된 것 같아 홍빈은 마음이 더 쓰라려.
"딱 일 년이다. 그리고 난 이제 저 새끼한테 절대로 깎듯이 못하니까 그런 걸로 잔소리할 생각 절대 말고"
"뭐-"
"너도 빨리 알았다고 대답해"
"...알았어"
"...."
"알았습니다-"
*
그래, 딱 일 년만 더 살아보는 거야.
당신을 진심으로 사랑하기 시작하는 내가 미친 건지,
아니면 나의 모든 바람들은 잘게 부수는 당신이 나쁜 건지, 끝까지 가보면 알겠지.
끝까지 키우다 보면 썩은 열매가 열릴지 아니면 단내를 풍기게 될지 우리는 알게 되겠지.
*
가지 마요
아직은 가지 마요
지금 가버리면 아쉽잖아요
밑바닥을 흐르는 슬픔이 오늘을 열었잖아요
이름만 불러도 눈물을 흐르게 했잖아요
[곽은영 / 불한당들의 모험 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