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하고 불러보렴
W. Honeybee
세훈은 멍하니 제 손에 들려져있는 임신테스트기를 만지작댔다. 어떻게 말하지, 오늘 아침에도 싸우고 나갔는데…아침엔 그야말로 난장판이었다. 오랜만에 섹스했음에도 찬열은 그 여운을 즐기기도 전에 담배연기를 뻑뻑 뿜어대고 있었다. 침대 바로 옆에서, 그것도 아파서 낑낑대고 있는 세훈은 보이지도 않는지. 이기적인 모습에 세훈이 빽하고 소리를 질렀다. 찬열도 적반하장으로 소리를 질렀고, 일요일인 오늘 하루종일 집에서 붙어먹겠다는 결심과 달리 찬열은 지갑을 챙기고 휑하니 나가버렸다. 점심, 저녁 다 먹고 들어올거야 알아서 혼자 챙겨먹어. 어제부터 배가 당기고 아파서 대답은 안했지만 세훈은 소파에 누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보니 요즘 생리 안했는데, 혹시나 하는 생각에 휴머노이드를 시켜 약국에서 임신테스트기를 사오게 했고 테스트를 해보자 나온건,
"두 줄…"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느낌이 별로야, 답답해, 안에다 하고 싶어. 별의 별 소리를 다 늘어놓으며 찬열은 콘돔쓰기를 거부했다. 배란일만 잘 피해서 하면 될거라고 그렇게 세훈을 구슬려놓고는. 박찬열 미워, 세훈은 혼자 중얼거리며 핸드폰을 열고 찬열에게 전화를 걸었다. 신호가 몇 번 가지 않아 찬열이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형, 아까는…"
'세훈아 형이 지금 잠시 사람 만나고 있거든.'
"잠깐만 이 말만 좀 들어."
'형이 조금만 있다가 전화할게. 미안해.'
이 사람이 지금 나한테 뭐한거야? 마음대로 끊긴 전화를 보며 세훈이 애꿎은 휴머노이드에 핸드폰을 던졌다. 아픕니다, 외부의 충격에 약합니다. 파지직 거리며 휴머노이드가 말했다. 세훈은 원망 어린 눈동자로 휴머노이드를 바라보다가 이내 품에 안았다. 아프게 해서 미안해, 잠시 화가 났나봐. 휴머노이드는 핸드폰때문에 움푹 들어간 제 배를 원상복귀시키곤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습니다, 참을만합니다. 기특한 휴머노이드를 쓰다듬어주며 세훈은 맥북을 켰다. 임신초기증상등을 검색해보며 한숨을 쉬었다. 제가 해당되는건 생리가 없었고, 간간히 배가 당기는것, 그리고 한 없이 기분이 우울해진다는 사실이었다.
'남편분의 정성스러운 보살핌이 필요합니다.'
맨 마지막 줄을 읽으며 세훈은 사진액자속에 웃고 있는 찬열을 보고 액자를 뒤집어 엎었다. 내가 지금 이러고 있는데 너는 어디있는거야…평소에도 간간히 다투긴 했지만, 다툰지 몇 시간도 채 지나지 않았지만 갑자기 서러움이 밀려들어왔다. 카이야, 저를 부르자 거실에서 유아용 애니매이션을 보고있던 휴머노이드가 고개를 돌려 몸을 일으켰다. 세훈의 곁으로 점점 다가오는 휴머노이드는 찬열이 준 생일선물이었다. 세계최대의 휴머노이드사에서 만든 Humanoid KAI는 주인의 말을 참 잘 들었다. 병원진료 예약하자, 부드럽게 카이에게 말하자 카이는 태블릿 PC를 뒤적이며 중얼거렸다.
"내과, 외과, 정신과, 소아과, 치과, 영상의학과, 피부과, 산부인과등이 있습니다."
"…산부인과 예약하자."
세훈의 말에 카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버튼을 몇 번 누르고는 카이가 예약이 완료되었습니다 하고 말하는 태블릿 PC의 소리를 들려주었다. 2시 진료입니다, 카이는 주섬주섬 외출복으로 갈아입으며 지갑과 핸드폰, 그리고 자동차키를 챙겼다. 속이 뻐근하고 소화가 안되는듯해 세훈이 카이의 손을 잡고 현관문으로 걸어나갔다. 차에 타고 카이가 운전을 하는 동안 세훈은 조수석에 누워 눈을 붙였다. 임신이라는 사실을 알기 전까지만해도 아무렇지도 않던게 임신이라는걸 대충 깨닫게 되자 자연스럽게 임산부처럼 행동하게 되는것 같아 세훈이 조금 웃었다. 병원은 그리 멀지 않았다. 가을이라 그런지 낙엽이 마구 뒹구는 도로를 지나 병원에 도착했다. 병원 안에 들어서자 하얀 피부의 잘생긴 휴머노이드가 카이와 세훈의 앞을 막아섰다.
"저는 Humanoid SUHO, 환자분들을 수호하는 수호입니다. 짐과 가방을 저에게 주시고 데리고오신 휴머노이드의 전원을 꺼주십시오."
세훈은 고분고분 카이의 우측전원을 껐고, 카이는 들것에 실려 휴머노이드보관실로 이동했다. 수호가 들고 있던 가방에서 핸드폰 진동이 울리기 시작했다.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전화를 받지 않으려 했지만 주변 사람들의 눈길이 신경쓰여 이름을 흘낏 봤더니 역시나 찬열이었다. 전화를 받고 싶지 않았다. 아까 그렇게 전화를 마음대로 끊어놓고는, 이제와서 전화야. 핸드폰 뒷전원을 분리해버리고 가방 속에 핸드폰을 쳐넣음과 동시에 세훈의 차례가 되었다. 오세훈씨 들어오세요, 부드러운 음성에 세훈이 긴장을 풀고 진료실로 들어갔다. 진료실 안은 가습기를 틀어놓아서 그런지 코가 맵지 않았고 환자들의 기분을 풀어주기 위해 파스텔톤으로 꾸며져 있었다. 의사의 명찰에는 '김준면' 이라는 이름이 단정하게 적혀있었다. 아, 수호랑 똑같이 생겼다. 의사는 그런 세훈의 표정을 읽었는지 허허 웃으며 자리에 앉으라고 손짓했다.
"음, 임신테스트기 쓰셨네요."
"네…"
"두 줄 나오셨고, 몸 안 좋은덴 없으시구요?"
"좀 피로하고, 잠도 많이 오는것 같아요."
"일단 진료해봐야 알 것 같은데, 침대에 누우시겠어요?"
푹신한 침대에 눕자 다시 졸음이 몰려왔다. 하지만 의사는 세훈이 잠을 자지 못하게 이것저것 말을 걸었다. 남편분한테는 아직 말씀 안하셨구요? 남편분 성함이…박찬열씨네요, 이름 예쁘시다. 시덥잖은 이야기를 하며 의사가 세훈의 배 위에 끈적끈적한 크림을 발랐다. 그리고 소형 카메라를 배에 문지르자 세훈의 배 안이 훤히 들여다보였다. 세훈은 깜깜한 제 뱃속을 보며 우와, 신기함을 감추지 않았다. 그제서야 의사가 웃으며 어두컴컴한 와중에 조그마한 점 하나를 가리켰다.
"요거, 이 조그마한 점이 태아예요."
"아…신기하다…"
"크기로 보나, 배란일로 보나 아직 6주 조금 지난것 같은데 무리하지 마시구요."
"아, 저기…"
"네 말씀하세요."
"어제도, 했는데…애기한테 무리는 없을까요?"
얼굴이 빨개져서 더듬거리며 물어오는 세훈은 솔직히 귀여웠다. 의사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임신중 갖는 관계는 태아에게 아주 좋은 영향을 주거든요, 질내사정만 안하신다면 괜찮아요. 그리고 너무 격하게 하지는 마시구요, 적당히 삽입정도는 하셔도 됩니다. 침대에서 일어나며 세훈이 고개를 끄덕였다. 의사는 차트에 무언가를 기록하는듯 하더니 리모컨을 눌러 수호를 안으로 불러들였다. 밖으로 모셔다 드리고, 데스크에서 주의사항 받아가세요. 감사합니다, 세훈은 인사를 하며 밖으로 나왔다. 밖에는 언제 전원을 켰는지 카이가 의자에 앉아 세훈을 기다리고 있었다. 세훈을 본 카이는 자리에서 일어나 데스크에서 받아온 주의사항을 건넸다. 진료비 지불 완료했습니다. 카이야 나 임신이래, 세훈이 중얼거리자 카이는 눈을 깜빡이더니 덤덤한 목소리로 말햇다. 축하드립니다. 그 말을 마치고 카이는 분리시켜놓았던 핸드폰배터리를 다시 끼웠다. 부재중전화가 10통이 넘었다. 문자도 와 있었다.
'세훈아 형이 잘못했어 병원엔 왜 간거니'
'세훈아 전화좀받아ㅠㅠㅠㅠ세훈아 잘못했어ㅠㅠ'
'세훈아 담배다부러뜨렸어ㅠㅠ다버렸어ㅠㅠ세훈아 전화좀받아ㅠㅠㅠ'
'지금 형이 병원앞에 갈까? 간다?'
'병원 앞이야 우리 차 옆에서 기다리고 있을게 세훈아ㅠㅠ'
세훈, 걸어야돼요. 카이가 옆에서 세훈을 부축했다. 최대한 아픈척을 해볼까 싶어 세훈은 비틀거리며 카이의 부축을 받았다. 주차장으로 내려오자 세훈의 차 옆에 찬열의 차가 주차되어 있었고 찬열은 세훈의 차 옆에서 안절부절 못하고 서있기만했다. 세훈은 빤히 찬열을 바라보며 걸음을 옮겼다. 카이의 부축을 받으며 세훈이 내려오자 찬열이 헐레벌떡 뛰어와 카이에게서 세훈을 받아 부축했다. 세훈아, 형이 잘못했어 어디가 그렇게 아파? 응? 병원진료예약문자와서 얼마나 놀란지 알아? 파리한 안색의 세훈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고개를 푹 숙이자 찬열이 더 애가 타서 죽겠다는 시늉을 했다.
"카이야, 세훈이 차는 네가 운전해서 와 알겠지?"
"네."
"부탁한다."
"네."
찬열은 세훈을 제 차 조수석에 태우고 카이에게 세훈의 차를 맡겼다. 세훈은 아무 말이 없었다. 그저 못마땅한 표정으로 찬열을 올려다볼 뿐, 찬열은 그게 더 애가 닳아 죽을것 같았다. 차라리 말이라도하면 잘못이라도 빌텐데, 아무 말도 안하고 빤히 쳐다만 보고 있으니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세훈아…찬열이 세훈의 뺨을 쓰다듬으며 조심스레 말을 걸었다. 세훈은 언제 싸웠냐는듯 다정하게 말을 걸어오는 찬열에 설움이 터져 입술을 꾹 깨물었다.
"형,"
"그래 세훈아 형 다 듣고 있어. 말해봐 제발…"
"형, 내 뱃속에 애기가 자라고 있대."
"…"
"6주나 됐는데 나는 그것도 모르고…"
세훈이 담담하게 말을 이어가자 찬열의 얼굴이 조금 찌푸려졌다. 알아듣게 설명을 하라는 표정이라 세훈이 한숨을 쉬었다. 나 임신했다고 형아…세훈의 말에 찬열의 눈이 천천히 커졌다. 원래도 튀어나올것같이 눈이 큰데, 정말 핏줄이 다 보이게 커진터라 솔직히 조금 징그럽기까지 했다. 뱃속 태아한테 안 좋아, 표정관리 좀 해. 세훈이 타박하자 찬열이 고개를 좌우로 흔들며 얼굴표정을 굳히기 위해 노력했다. 그리고는 세훈의 납작한 배에 손을 가져다대고는 더듬거리며 쓰다듬었다. 변태도 아니고, 불만스러운 세훈의 목소리가 들렸지만 찬열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임신이라고? 세훈이가?"
"…"
"네가?"
"…뭐야, 안 믿고 싶으면…"
"미치겠네 진짜, 세훈아 이렇게 좋은 소식을 왜 그렇게 우울하게 말해, 형 놀랐잖아."
찬열은 고른 치열이 다 보이도록 찢어지게 웃으며 차 시동을 걸었다. 일단 집에 가서, 말하자. 찬열이 운전을 하며 싱글벙글 웃었다. 세훈은 언제 화를 냈었냐는듯 실실 웃어대는 찬열을 보고 알아차리지 못하게 웃었다. 그렇게 좋나, 아직 6주밖에 안됐는데. 혼자 생각하며 조금 눈을 붙였을 땐, 이미 집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있었다. 세훈이 차 문을 열고 나가려고 하자 찬열이 전위예술을 하는듯한 몸짓으로 그것을 저지했다. 어딜, 홀몸도 아닌데. 오랜만에 느껴보는 찬열의 과보호에 세훈이 결국 웃어버렸다. 박찬열씨, 좋아요? 세훈의 물음에 찬열이 과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좋아서 미칠것같아 세훈아. 찬열에게 안기듯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며 생각했다. 당분간은 진짜 편하게 살 수 있겠노라고.
리퀘받아서 썼는데
너무 늦었나ㅋㅋㅋㅋ
너무 오랜만에 쓰는거라 서툴러요...ㅠㅠ
넓은 아량으로 이해를...ㅋ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