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의 꿈 꿈을 꿨다. 공간에서 그는 설탕으로 나를 빚고 있었다. 반짝이는 설탕조각은 아름다웠지만 어딘가 이질적인 느낌이 들었다. 나와 너무나 닮아서 소름이 돋았다. 그와 눈이 마주치자 그는 미간을 일그러뜨리며 빚고있던 설탕조각을 바닥으로 밀어 버렸다. 설탕조각이 넘어지면서 산산조각이 났다. 그것은 날카로운 유리파편이 되어 내 몸에 박혔다. 커다란 유리조각이 내 팔목에 박혀 피가 흐르기 시작했다. 내 팔목을 본 그는 아무 표정도 없이 날 스치고 지나갔다. 피가 점점 흘러 바닥에 떨어지고 곧 장미꽃잎으로 변했다 진한 장미내음과 피비린내로 어지러웠다. 나오지 않는 목소리를 쥐어짜 그를 불렀다. 그는 아무런 반응도 없이 내게서 멀어졌다. 그가 날 버렸다. 여기까지 생각하자 숨이 쉬어지지 않았다. 그렇게 내가 천천히 아래로 무너졌다. * 유난히 그 날은 하늘이 어두웠다. 추적추적 내리는 비 때문에 창밖은 아직 오전임에도 저녁처럼 어두컴컴해서 마음까지 우중충해지는 날이었다. 정국이가 아침 일찍 출근해버리는 바람에 난 집안에 덩그러니 혼자 남겨졌다. 거실의 조용함에 문득 우울해 졌다. 고요하게 축 가라앉은 집안의 적막함을 없에보고자 TV를 틀었다. 채널을 돌리며 브라운관속에서 움직이는 인영들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갑자기 울리는 진동에 핸드폰을 들었다. [이비서님] 할아버지의 직속비서였던 이비서님은 내가 어렸을때부터 할아버지를 모셔오신 분이었다. 부모님을 일찍 여읜 나를 마치 삼촌처럼 챙겨주셨던 이비서님의 전화가 반가워 급히 통화버튼을 눌렀다. “이비서님, 무슨일이세요? ” “얘야, 김회장님께서....... ” “네, 할아버지가... 이비서님? 무슨일 있으세요?” 답지 않게 말꼬리를 흐리는것이 이상하게 불안했다. 괜히 티비 리모콘을 만져 채널을 돌렸다. 이어지는 이비서님의 말씀에 무심코 멈춘 뉴스채널에서는. [K그룹 김민수회장 교통사고로 별세] “....탄소야, 내말 잘 듣거라. 회장님께서, 네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차마 믿을수 없는 말들이 들려왔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말을 듣고, 내가 어떻게 본가에 왔는지 기억도 잘 나지 않는다. 몇가지 기억나는 것은. 충격에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벌벌 떨며 울고만 있는 내게 정국이가 전화를 걸었다는 것. “......김탄소. 나 지금 바로 집에 갈테니까. 내가 갈테니까 탄소야. 아무것도 하지말고 나가지도 말고, 집에 있어. 내말 알겠지? 응?” 내가 바로 갈께. 조금만 기다려줘. 정국이도 할아버지의 부고를 전해듣고 다급한 마음에 내게 전화를 걸었는데, 말도못하고 서럽게 울고 있는 내가 걱정됬는지. 아무것도 하지말고 그냥 집에 그대로 있으라고. 지금 바로 가겠다고. 정국이의 전화를 받고 그나마 약간 진정이 됐던것 같다. 아직 온전한 내편이 남아있구나. 나를 걱정해주는. 그때 정국이 마저 없었으면 난 지금 이렇게 살아있을 수 있었을까? 정국이에게 기대어 거의 반 실신 상태로 도착한 본가에는 얼굴도 낯선 친척이란 사람들이 여럿 모여 실랑이를 벌이고 있었다. “아니. 내가 동생인데. 그러면 오빠 재산은 나한테 와야 하는 거 아니에요? 막말로 여기서 오빠랑 제일 가까운 사람이 나 말고 누가 또있어! ” “이 여자가! 반평생 얼굴도 한번 안본 사람이 무슨 낮짝이 있다고 돈 타령이야!” “뭐라구요? 당신 누구야! 누군데 나서서 이 난린데? ” 그 친척이란 사람들은 할아버지의 죽음 앞에서도 슬퍼하는 내색 하나 없이 오직 할아버지의 재산을 두고 싸우고 있었다. 가족의 죽음앞에서도 고작 돈을 가지고 싸우는 모습을 보면서 몸이 떨릴정도로 화가 나 가슴이 찢어졌다. 도저히 참을 수 없어서 거의 발악을 하듯 울며 그들에게 소리를 질렀다. “지금 여기까지 와서 그런 소리를 하고 싶어요? 제 할아버지가 돌아가셨어요! 우리 가족이 죽었다구요. 저 한테 하나밖에 안남은 가족이 죽었어요. 이렇게 갑자기! 그런데, 당신들은 슬퍼하지는 못할 망정......그깟 돈 때문에... ” 당신들이 그렇게 좋아하는 돈 다 줄테니까. 나가요. 이집에서. 할아버지를 편하게 보내드리고 싶었다. 당신의 형제, 자식들이 당신의 죽음 앞에서도 재산을 탐내며 싸우는 모습을 보여드리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아무것도 갖지 않았다. 그들과 똑같이 되기 싫어서. 할아버지를 온전히 사랑했으니까. 그까짓 돈, 백번이고 내어줄 수 있었으니까.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내게 남은것은 정국이 뿐이었다. 그 애가 내 남은 삶의 전부였다. 그런데, 그가 변했다. 나를 아끼던, 혹시나 내가 잘못될까봐 아무것도 하지말고 자신을 기다리라던 정국이가 변해버렸다. 그는 이제 내 손을 잡아주지도, 따뜻한 시선으로 눈을 맞춰 주지도 않는다. 차가운 눈빛으로 나를 한번 쳐다보고는 밖으로 나가버린다. 내가 뭘 잘못한거야? 네가 왜이렇게 변해버렸는지 모르겠어. 서러움에 눈물이 흘렀다. 바보같이. ....그가 그저 나를 사랑하는 척 가면을 썻던 것인 줄도 모르고. 그때 친척들과 똑같은 사람인줄도 모르고. 그가 변한게 아니라, 가면이 벚겨졌던 것임을 왜 나는 지금에서야 알게 된걸까. *
“오늘 늦어, 기다리지 마” 그가 셔츠 깃을 정리하며 말했다. “왜 늦는데?” 그가 나를 바라본다. 그 무심한, 텅 빈 눈으로. 그리고 나를 지나쳐 드레스룸을 나간다. 끝내 그의 대답을 듣지 못한게 차라리 잘 된거라는 생각을 하는 내가 바보같아서 눈물이 났다. 다정하던 정국이는 없다. 어렸을 적 무릎을 꿇고 내 신을 신겨주던 전정국은 사라졌다. 함께 꽃반지를 만들며 놀았던 어린아이는 어른이 되었다. 시간이 흘러 정국이는 들꽃 따위가 아닌 진짜 결혼 반지를 낀 내 남편이 되어있었다. 어린시절 나의 꿈은 정국이가 끼워준 진짜 반지를 끼는 것이었는데, 만약 누군가 내게 지금 네 꿈이 무엇이냐고 물어본다면 난 주저없이 대답할 것이다. 다시 어린시절로 돌아가 어렸던 그이가 만든 꽃반지를 끼는것이라고. /그녀의 편지 정국아. 기억나? 한달 전이었나. 그날 신기하게도 알람시계가 울리기 전에 눈이 떠졌어. 고개를 돌려 너를 마주봤는데 아직 넌 예쁘게 자고있더라. 널 깨우기 싫어서 조용히 침대를 빠져나왔어. 6시 30분. 네가 좋아하는 된장찌개를 끓이고 애호박전도 예쁘게 부쳤다. 아침을 차리면서 옛 추억이 떠올라 너무 행복했어. 입가에 미소가 걸리더라.예전의 네 생각으로.
”탄소야! 나는 너가 해주는 애호박전이 제일 좋아. ” “응? 이게 왜 좋은데?” “동글동글 귀여운데 달달하고 보드랍잖아. 꼭 너같아. ” “아 뭐야 전정국ㅋㅋㅋㅋㅋ” “뭐 ㅋㅋㅋㅋㅋㅋ난 좋다. 진짜 좋아. ” 그때처럼 예쁠 너를 생각하면서 식탁을 차렸어. 이제 끓고있는 찌개만 놓으면 됬었는데... 내가 너무 옛날 생각만 했었나? 시계를 보니 이제 너를 깨워야 할 시간이더라. 널 깨우려 침실 앞에 섰는데, 방문이 열렸어. 넌 이미 나갈 준비를 다 했더라. 내가 좋아하는 옷, 시계, 머리까지. “벌서 출근 준비 다 했네? 내가 깨우려고 했는데. ” “오늘 일찍 나가. ” “....아침밥 안먹어? 네가 좋아하는거 했어. ” “.....갈께. ” 내게 눈길도 주지 않고 넌 현관 밖으로 나가버렸어. 머리가 백지가 된 것 처럼 아무생각도 못하고 네가 떠난 자리만 바라보고 있는데, 찌개가 보글보글 끓는 소리가 들려서 서둘러 식탁에 올렸어. 내가 이걸 더 빨리 만들었으면, 식탁을 더 빨리 차렸으면 너와 함께 아침밥을 먹을 수 있었을까? 차려진 식탁앞에 앉아 그런 생각들을 했어. 우리 왜 이렇게 됐을까. 너와 마주앉았던 식탁에 홀로 앉아서. 식탁 위에 밥그릇은 두갠데 말이야. 그렇게 여러 생각들을 하느라 내 몫의 밥에도 손 하나 댈 수 없었어. 내가 식탁에서 일어났을 때는 이미 아침시간은 지난 뒤였지만 변한건 없었어. 찌개랑 밥이 다 식어버린거 빼고. 그런데 넌 잊어 버렸었나 봐. 그날, 내 생일이었는데. 정국아 * 요새들어 퇴근 후엔 서재로 들어가 몇시간동안이나 나오지 않던 그가 걱정돼서, 몇 번의 고민 끝에 그의 서재로 들어섰다. 서재 안의 그는 회사 업무를 처리하는 듯 노트북 화면과 몇장의 종이 자료들을 보고있었다. 괜히 그를 방해했나 싶어 다시 나오려다 이번에는 꼭 물어봐야 할 것 같아 용기를 내 말을 걸었다. “....정국아” “왜. ” 서재로 들어온 내 기척에도 한참동안이나 노트북을 바라보고 있던 그의 시선이 내 부름 끝에야 잠시나마 나를 향했다. 그는 약간 피곤한 듯한 얼굴로 나를 보며 왜, 하고 짧은 응답을 내어 놓았다. 그의 낯선 모습에 잠시 하고 싶었던 말을 잊어버릴것 같았다. 그가 날 바라볼 땐, 항상 난 행복했던 것 같다. 그의 따뜻한 눈빛이 내 마음에 닿아 살금살금 달래주는 것 같았는데. 그래서 그 애가 참 좋았다. 하지만 지금 내 앞의 그는, 낯설었다. 그가 날 보는 표정엔 더 이상의 따뜻함이 없었기에. “요즘 무슨 일...있어? 회사라던가, 아님 너한테라도. ” 마음을 다잡고 조심스럽게 그에게 물어보았다. 너 무슨 일 있냐고, 그래서 그렇게 바쁜거냐고. 저녁먹을 시간도 없이, 얼굴 보여줄 틈도 없이 그렇게 바쁘냐고. 네가 변할만큼, 무슨 큰 일이라도 생겼냐고. 그는 내 말에, 잠시 나를 응시하더니 곧 고개를 돌려 다시 서류들을 보기 시작했다. 그리곤 없어. 라며 아까처럼 짧은 대답을 내 놓았다. 그의 단조로운 대답에 서운해졌다. 더이상의 대화가 오가지 않아 그의 눈치를 보며 머뭇거리자 그가 다시 날 보며 말했다. “나 일하잖아. ” “아, 응...” 차가운 그의 말에 더이상 그를 방해하면 안될것 같아 서재를 나가려 고개를 돌렸다. 책장을 지나 그의 공간에서 나가려 했을 때, 그가 벽에 걸어 놓은 양복자켓이 눈에 띄어 챙겨들었다. 세탁을 맡기려 집어든 자켓에선 낯선 향이 베어나왔다. 두려운 생각에 심장이 두근댔다. 설마, 그럴리가 없어. 아닐꺼야. 그리곤 무너질것같은 정신을 쥐어짜 다시한번 그에게 말을 꺼냈다. “정국아. 넌, 나 사랑하지. ” 변한거 아니지, 내가.... 내가 섣부른 오해를 하는거지. 쿵쿵 하고 뛰는 심장으로 그의 대답을 기다렸다. 내 말에 그는 한숨을 쉬며. 손에 쥔 서류를 내려놓았다. 종이와 나무가 부딪치는 소리만 공간에 울렸다. 그의 얼굴이 책장에 가려 보이지 않았지만 느낄 수 있었다. 그가 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내 곁으로 다가온 그가 내 어깨를 양손으로 잡고는 얼굴을 마주하고 말했다.
“나 바빠, 김탄소. 신경쓰이게 하지말고. 나가” 시린 눈빛으로 그렇게 이야기 하는데. 저 끝에서 울컥 하고 눈물이 튀어나올것 같아. 도망치듯 서재를 나왔다. 끝까지. 내 말에는 대답을 안해주었다. 그는. 서재를 나온 내 손에는 그의 자켓이 들려있었다. 덜덜 떨리는 손으로 다시 그 옷의 향을 맡았다. 답답한 머스크, 그리고 그뒤에 장미, 부케. ....여자향수. 그와 난 머스크향을 좋아하지 않는다. 답답한 향이 코를 마비시키는 것 같아서. 파우더를 먹은듯한 향이 싫다고 그렇게 말하곤 했었는데. .....그럼, 네 옷에 이렇게 짙게 밴 향은 대체 누구껀데. 정국아. 그 날 정국이는 날이 새도록 서재에서 나오지 않았다. 어지럽혀진 머리로 몇번이고 고민하느라 나도 밤을 꼴닥 새웠다.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날이 밝은 뒤였고, 뒤늦게 떠오른 그의 아침 생각에 방을 나왔다. 서둘러 방을 나와 그를 찾아보았지만 보이지 않았다. 서재에도, 드레스룸에서도 그를 찾을 수 없었다. 벌서 나갔나. 머릿속도, 마음도 참 복잡했다. 요근래, 그가 참 낯설다. * 그렇게 바쁜건지, 이젠 집에서도 그의 모습을 찾을 수 없었다. 바쁘다고, 할일이 정말 많아서 집에도 못 들어오는 것이라고 그렇게 믿고싶다. 그렇게. 애써. 그 애를 기다리며 고장난 인형처럼 집안에만 틀어박혀 있기를 며칠째, 조용했던 집안의 고요가 휴대폰의 작은 소음으로 흐트러졌다. 그토록 기다리던 그의 전화인가 싶어 떨리는 손으로 휴대폰을 집어들었지만, 야속하게도 휴대폰 화면에 떠 반짝거리는 이름은 그 애의 것이 아니었다. 상실, 허무. 그 짧은 순간에도 기대감으로 뛰던 심장이 툭 하고 멈추는 기분에 그냥 이 불편한 소음을 꺼 버릴까 잠시 생각하다, 화면에 떠있는 익숙한 이름에 통화버튼을 눌렀다. “응, 아.... ” 나야, 뭐 잘 지내지. 나를 숨기는 거짓말을 하는건 쉽다. “아. 동창회.... ” [응 이번주 수요일. 너 또 이렇게 전화안하면 안 올것 같아서. 애들이 너 많이 보고싶어해. 아, 정국이도 같이오는거지? ] “정국이?.....” [응, 오랜만에 다같이 얼굴좀 보자 기지배야. 알겠지? 꼭 와야돼. 수요일이다!] 아.....응. 알았어. 그때 보자. 이번 동창회는 꼭 나오라는 친구의 당부에 애써 대답하고 통화를 마치자 집안은 다시 고요로 잠식되었다. 내 한숨소리만 허공으로 흩어졌다. 화면이 꺼진 휴대폰을 가만히 손에 쥐고 있다가 탁자로 고개를 돌려 캘린더를 보았다. 수요일. 탁자 위 캘린더는 어떤 표시도 없이 깨끗했다. 그가 없는 내 일상은 백지였다. “김탄소! 이 기지배. 얼굴보기가 왜이렇게 힘들어! ” “야. 얼마만이야 이게, 먼저 결혼했다고 이젠 우리도 안보냐? ” 오랫만에 얼굴을 비친 나를 타박하는 친구들이 반가웠다. 그러면서도 “근데,정국이는 왜 안왔어. 걔 많이 바쁘데?” “너네 커플 다같이 보는것도 어렵다. 오늘 못보던 얼굴 다 보는가 했는데, 서운하네. ” 툭 하고 나온 네 이름에 굳게 먹은 마음이 무너졌다. “나 잠깐 화장실 좀. ” 아슬아슬한 기분에 이대로는 안될것 같아 화장실을 간다고 하곤 그곳을 빠져나왔다. 건물 복도에 기대 아무래도 괜히 동창회에 나왔다고 생각하고 있었을까, ....차라리 안 봤으면 좋았을걸. 그럼 네가 다른여자와 함께있는 걸, 네 팔사이에 다른 여자의 팔이 끼워진 그 모습은. 그런모습을 보며 우는 내 비참함은 없었을텐데. 심장이 두근거리며 진정되지 않는데. 그와 눈이 마주쳤다. 제게 갔을 시선을 빼았긴 것에 샘이 났는지 고개를 돌려 나를 본 그 여자의 표정이 일그러지다 곧 그 입가에 비소가 띄었다. * “당신이 그에게 뭘 해줄 수 있죠? 난 다 해줄 수 있는데, 재산도 명예도. 아, 그에게 아버님의 신임도 드릴 수 있어요. ” 근데, 당신은 못하잖아. 그런거. 가진게 없잖아. 다 버려놓고, 아직도 자신에게 그의 옆자리가 어울린다고 생각해요? 욕심이고, 주제파악을 못하는 거죠. 내말 알아들었으면 이제 놔줘요. 떠난 사람 붙들고 있지 말고. 이제 당신은, 그에게 짐일 뿐이니까. 그 여자를 만나면 독한 표정으로 당당하게 따지려 했다. 필요하면 그 여자에게 물을 끼얹고 뺨을 때릴 것이라. 그렇게 생각했다. 그녀의 앞에서 그이는 나의 남편이고, 넌 지금 누가 봐도 불륜녀고 나쁜년이라고. 남의 가정 건드리는 악취미로 세상 사람에게 손가락질 받고 싶냐고 그렇게 말하려고 했다. 당연히 내가 그 여자 보다 우위에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 여자가 하고있는 짓은 불륜이었고, 나는 그이의 아내였으니까. “흐.......” 눈물이 나왔다. 그게 아니었다. 그녀는 자격에 대해 말하고 있었다. 넌 그에게 짐일 뿐이라고. 가진 것을 모두 놓쳐버린 빈 껍데기. 그가 과연 당신의 어떤 면을 사랑했던 걸까. 아주 곰곰히 생각해 봐요. “외면하고 있지만, 사실 잘 알고 있지 않나요? 내가 이런것 까지 말해줘야 하나. 당신 뒷배, K그룹. 당신이 가졌던 재산. 그리고 그걸로 이룰 수 있다고 생각했던 그의 성공들. 그는 당신의 그런 점들을 사랑한 거에요. 근데, 그게 다 사라졌는데. 과연, 그가 당신을 아직 사랑하고 있다고. 확신해요? 정말로? ” “아직 어리네. 김탄소씨. 멍청한게. 그러니까 남자도 뺐기는 거죠. 응?” 그녀는 제 말을 마치고 그 자리를 빠져나갔다. 참을 수 없이 눈물이 흘렀다. 그는 당신을 사랑한게 아니에요. 당신이 가졌던 것들을 사랑한거지. 그러니까, 이제 그는 당신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더이상 널 사랑하지 않는다고. 아니, 처음부터 당신을 사랑하긴 한 걸까? 전정국은? 머리속에서 울리는 그 여자의 말들로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그가 없는 집에서는 함께 먹던 식사들을 챙길 이유가 없었고, 함께 산책을 나갈 기회가 없었으며, 둘이 같이 보던 티비 프로그램을 챙겨 볼 여유도 없었다. 그저 그가 내 옆에 없는 밤들을 악몽으로 채우고, 의미없는 무채색뿐인 하루들을 멍하니 흘려 보낼 뿐. 네가 없는 텅 빈 집안은 고요하고, 또 외로워서 자꾸 눈물이 나왔다. * “널 사랑하냐고 물었지?” “그만하자. 우리” 아니. 내가, 내가 원하는 말은...... “이게 내 대답이야. 김탄소. ” 그런게 아니었어. “거짓말 하지마. 너. 너 지금 거짓말 하는거 다 알아. ” 울면서 그애에게 매달렸다. 거짓말 하지 말라고, 하나도 재미없으니까 그만 하라고. 그러자 그애는. “김탄소. 잘들어. 난 너 사랑한적 없어. 내가 사랑했던건 K그룹 상속자 김탄소였어. 근데 지금 넌.” 거짓말이야. “아무 쓸모도 없는 고장난 인형이야. 망가져서 가지고 놀 수도 없는 인형이라고.” 제 말만 끝마치고 집을 나가는 그애의 등 뒤에서 쓰러지듯 주저앉았다. 날 사랑하지 않는다고? 아니 사랑한적이 없다고? 내 세상은 너였는데. 내 전부가 이젠 너인데. 그럼 난 이제 어떡하니. 정국아. 그냥 다 그만 두고싶어. 널 기다리는 것도 사랑하는 것도. 이젠 다 지쳐서 다 놓고싶은데. .....그런데 그게 안되는걸 어떡해. 내 세상이 이미 너인데. 한숨 푹자면 좀 괜찮아 질 것 같아서. 심장이 막 아픈게 눈물이 나고 머리도 아프고... 그래서 너 모르게 잠자기 전에 한알씩 먹던 약을 찾았어. 그 약을 보니까 이런 생각이 들더라. 사실 다신 깨어나고 싶지 않잖아? 네가 없는 세상은 너무 무서워서, 살아갈 수 없어서... 나도 잘 모르겠어, 충동적이였나? 한 손 가득 약을 꺼내 놨더라고. 내가. 그냥 그걸 삼키면서 눈이 감기고 그렇게 내가, 내 마음이 죽어버렸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