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
"오늘은 집에 늦게 들어가라"
"뭐야 이 의미심장함은"
은성이는 눈을 가늘게 뜨며 홍빈을 흘겨봐.
홍빈은 콧등을 찡그리더니 혀를 차며 고개를 내저어.
"기분도 거지 같은데 내가 친히 놀아주시겠다 이 말이야"
그러더니 예전에 그랬던 것과 같이 손을 뻗어 그녀의 머리를 헝클어뜨려.
은성이 얼굴을 찌푸리며 손을 피하자 홍빈은 키득거리며 꽤나 소년 같은 웃음을 내뱉어.
은성이는 잔뜩 헝클어진 제 머리를 매만지며 홍빈에게 얘기해.
"너 바쁘잖아, 주말인데 그냥 쉬어"
그녀의 한 마디에 홍빈은 어깨를 으쓱이며 말해.
"그럴 거면 처음부터 불러내질 말았어야지"
*
오늘 밤도 함께 욕망 속을 걸을까 묻던 현아의 입술을 뒤로하고 택운은 이른 저녁 집에 들어왔어.
딱히 신경 쓰이는 것은 아닌데 그렇다고 신경이 안 쓰이는 것도 아닌 이 애매모호함을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 걸까?
옷도 갈아입지 않고 소파에 앉은 택운은 무관심하게 티브이 채널을 돌리다가 이내 미간을 찌푸리며 전원을 꺼버려.
이상하게 자꾸 재생되는 이홍빈과 은성이의 모습에 꼭 차게 식어버린 커피처럼 뒤끝이 좋지 않아.
아니, 그래, 만나는 건 그렇다고 쳐도 자기 앞에서는 한 번도 그렇게 웃으면서 다채로운 표정 하나 보여주지 않더니
이홍빈하고 다정한 스킨십은 물론 나긋나긋하고 즐겁게 이야기하는 모습을 보니 괜히 택운은 속이 뒤틀리는 것 같아.
한참 그렇게 속으로 이를 갈다가 택운은 문득 자신이 이런 말할 처지가 안 된다는 것을 깨닫고는
이내 짜증스러운 신음을 뱉으며 일어나서는 부엌으로 발걸음을 옮겨.
물 한 잔을 마시며 아무리 생각하지 않으려 애를 써도 마치 녹화된 것처럼 은성이의 모습이 눈앞에 아른거려.
이홍빈을 보며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도 궁금하고 그녀의 얼굴을 부드럽게 감싸 쥐던 홍빈의 행동이
눈엣가시처럼 거슬려서 저절로 입술을 깨물게 되는 것을 멈출 수가 없어.
괜히 짜증을 내고 있는 자신의 모습에 택운은 고개를 내젓더니
테이블에 걸터앉아서는 골똘히 생각하다가 이내 끙- 소리를 내며 싱크대로 향해.
왜 그렇게 은성에 관하여 생각하고 있는지 그는 잘 모르겠어.
심지어 자신은 외도를 하고 있으면서 말이야.
아니, 외도라고 말할 것 까지는 없지... 그녀와 결혼하기 전부터 현아를 만났으니까.
하지만 은성이에게 괜한 배신감이 드는 건 왜일까?
분명히 오늘 아침까지만 해도 한결같은 그녀가 답답했으면서 왜 그는 이 배신감 비슷한 것을 느끼고 있는 걸까?
'아- 그래 한결같아서 그런 거야'라고 마침내 그는 생각해.
차은성이 한결같이 진심 같아서 그런 거라고.
이렇게 무의식적으로 택운은 결국 인정하고 말아.
그녀가 진심으로 자신을 대하고 있음을.
...어쩌면 말이야, 익숙함이 제일 무서운 걸지도 몰라.
계속 반복되는 그녀와의 고요한 전쟁처럼.
택운은 아침에 싱크대에 넣어둔 접시를 바라보다가 이내 소매를 걷어올려.
은성이 있었으면 벌써 깨끗하게 치워줬을 테지만 어쩐 일인지 그녀는 들어올 생각도 하지 않고 있어.
택운은 무의식적으로 시계를 확인하다가 결국에는 수돗물을 틀고는 설거지를 시작해.
어울리지도 않게 익숙한 손길로 그릇을 닦고, 문득 가려워서 손등으로 코끝을 긁적여.
기다란 손가락 위에 거품이 내려앉아.
달그락- 거리는 소리가 고요한 집안을 채우고 있어.
순간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려.
택운은 놀라서 움찔! 하더니 이내 잠깐 굳었다가 고개를 돌려 현관을 확인해.
은성이는 끊임없이 들려오는 물소리에 신발을 벗고는 싱크대 쪽을 바라보다가 택운과 눈이 마주쳐.
택운은 나쁜 짓을 하다 들킨 아이처럼 눈을 굴리며 자리에서 벗어나려 하고,
은성이는 집에 있는 것을 둘째 치고 반쯤 흘러내린 소매로 설거지를 하고 있는 그의 모습에 속으로 놀라서 입만 뻥긋거렸어.
"물 떨어져요"
축축하게 젖은 손으로 한 발자국 물러난 택운을 보며 마침내 은성이 말해.
택운은 제 손끝에서부터 발치로 떨어지는 비눗물을 바라보다 얼른 다시 싱크대로 손을 뻗어.
은성이는 겉옷을 벗어 식탁 의자에 걸쳐놓고는 그에게로 다가가.
그녀가 그의 반쯤 내려가 위태로운 소매를 바라보다가 이내 손을 뻗어 천천히 그걸 접어줘.
"옷 다 젖겠네"
"....."
"고마워요, 설거지 해줘서"
택운은 말없이 제 팔뚝에 닿는 그녀의 손을 바라보다가 이내 비눗물을 씻어내고 수건에 손을 닿아.
은성이는 어느새 다시 제 외투를 들고 방으로 향하려는 듯 몸을 돌려.
진짜 기분이 이상해.
한 번도 본 적 없는 그녀의 뒷모습에 택운은 기분이 이상해서 미간을 찡그려.
수도꼭지가 헐겁게 잠겼는지 똑- 똑- 물 떨어지는 소리가 부엌을 매워.
순간 은성이 뒤를 돌아봐.
"물 떨어진다"
그녀의 특유의 목소리가 그의 귓가에 파고들어.
윙- 윙- 울린다고 했었나? 아니, 아니, 또박또박 박힌다고 했었나?
수도꼭지를 잠글 생각도 안 하고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택운에 은성이는 의아해서 고개를 기울여.
그러다가 결국 그가 움직이지 않을 것만 같았는지 다시 그가 있는 싱크대로 발걸음을 옮겨.
"누구 만났어"
발끝만 보며 걷던 그녀의 귓가에 전혀 예상치 못한 질문이 들려와.
은성이는 문득 발걸음을 멈췄다가 이내 다시 아무렇지 않게 싱크대로 걸어가서 물을 잠가.
택운은 제 옆에 서서 수도꼭지를 꾹- 내리를 은성을 바라보다 다시 한 번 물어.
사실 대답을 다 알고 있으면서도 제멋대로 입술이 움직인다고 그는 생각해.
"말도 없이 늦게 들어오고"
"그냥... 친구 만났어요"
"친구 누구?"
은성이는 그의 질문에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고개를 들어.
자신보다 한 뼘은 족히 넘게 더 큰 그를 올려다보며 그녀가 입술을 움직여.
택운은 그녀의 눈을 바라보다 천천히 붉은 입술로 시선을 옮겨.
"택운씨 지금 되게 이상한 거 알아요?"
"......"
"사생활 간섭하지 말자 한 건 택운씨 잖아요"
"의미 부여하지 마, 집에 맨날 있던 애가 없으니까 물어본 거뿐이야"
꽤나 퉁명스럽게 말하는 택운에 은성이는 슬며시 입꼬리를 올리더니 이내 시선을 떨궈.
그러고는 부드럽게 제 머리카락을 쓸어넘기며 고개를 끄덕여.
"맞네- 궁금할 만도 하네"
택운은 대답 없이 입술 안쪽을 잘근거려.
"택운씨"
은성이 다시 고개를 들더니 그를 바라봐.
택운은 살짝 휘어진 그녀의 눈꼬리에 놀라서는 눈썹을 쓱- 올리며 그녀의 눈동자를 응시해.
그녀의 입술이 천천히, 그리고 아주 부드럽게 움직여.
불현듯 아프게 느껴지는 건 왜일까.
"당신 옷 갈아입어야겠어요"
"...왜"
"향수 냄새나"
"뭐?"
"여자 향수 냄새나요"
문득 부드러운 그녀의 목소리에 택운의 눈동자가 흔들려.
은성이는 어느새 다시 돌아서서 제 방으로 향하고
택운은 여전히 싱크대에 기대선 채로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봐.
아- 진짜 이해가 안 되는 밤이야.
이상하게도 편안하고 이상하게도 덤덤해 보이는 은성도.
자꾸만 북받쳐 오는 짜증에 평소 답지 않은 질문들만 던지는 택운도.
오묘하고 애매모호한 이상한 밤이야.
방으로 들어온 은성이는 심호흡하듯 숨을 몰아쉬고 있어.
아무렇지 않은 척 연기했지만 사실 마음이 아픈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어.
그것도 그런 게 벌써 익숙해져 버렸는걸.
그의 향기가 익숙해져서 이제는 코끝에 잔향으로 남아버렸는걸.
은성이는 가만히 그렇게 문을 등지고 서 있다가 눈을 꾹- 감았다 뜨더니 욕실로 향해.
샤워를 마치고 머리를 말리며 오늘 하루를 되돌아보다가 카페에서 본 택운과 현아의 모습이 생각나서
짜증스럽게 드라이기를 꺼버리더니 편한 옷으로 갈아입어.
아무리 생각을 해 봐도 기분만 나빠질 것이라는 걸 그녀는 알고 있어.
하지만 어쩌겠어, 계속 생각나는걸.
그녀에게 보여주던 그의 미소가 자꾸만 생각나는걸.
옷을 갈아입고 나온 은성이는 읽던 책을 마저 읽을까- 하는 마음으로 책상으로 다가가.
그러다 문득 발밑에 떨어져 있는 책갈피를 발견하고는 고개를 갸우뚱 기울여.
분명 시집 사이에 꽂혀있어야 할 책갈피가 왜 바닥에 떨어져 있는 걸까 잠시 생각하다가
이내 뭐, 실수로 떨어뜨렸나 보지 하며 대수롭지 않게 넘어가.
다시 책을 펼치고 몇 장 읽어나가던 은성이는 목이 타는지 자리에서 일어나서는 방 문고리를 잡아.
지금쯤이면 분명 택운도 제 방으로 들어갔을 거라고 은성이는 생각해.
그녀는 천천히 문을 열고 부엌으로 발걸음을 옮기고,
커피향이 진하게 맴돌아 코끝을 자극하는 것을 느끼곤 고개를 들어.
어느새 옷을 갈아입은 택운이 거실 소파에 앉아있어.
그도 그녀의 소리를 들었는지 고개를 돌려 은성을 바라봐.
"늦었는데 커피 마셔도 괜찮아요?"
"너는 안 자고 뭐 해"
"책 조금 읽다 자려고요"
"...."
"너무 늦게 자지 마요, 내일 피곤하겠다"
진심으로 걱정이 된 은성이 그에게 다정하게 말을 해.
택운은 그런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다 이내 입술을 움직여.
"안 잘 거면 나와서 읽던가"
"네?"
놀라 되묻는 그녀의 반응에 택운이 고개를 돌리며 헛기침을 해.
은성이는 잘못 들은 듯 눈을 깜빡이다 물 마시러 나왔다는 것도 잊어버려.
"조용히 책만 읽을 거면 거실에서 읽어도 된다고"
다시 한 번 그가 말해.
멋쩍은 정적.
그래, 오늘은 이상한 밤이야.
서로에게 돌을 던지다가 문득 자신이 던진 것이 진정 돌이었는지 의심하게 되는 그런 밤이야.
싫어도 미워도 그의 목소리에
그 아무거도 아닌 물음에
가슴이 쿵- 쿵- 뛰는 것을 막을 수가 없는
그런 밤이야.
돌이었을까 맘이었을까.
우리가 서로에게 던지던 것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우리는 무엇에 맞아 그리도 상처를 입었던 것일까.
*
엄마 내 우주는 끙끙 앓아요
매일 발소리 하나 내지 않고
그녀의 창문을 서성거리는 걸요
[김경주 / 늑대는 눈알부터 자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