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팔랑- 팔랑- 부드럽게 종이를 넘기는 그녀의 손가락.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하얀 머그잔에 붉은 입술을 대는 그의 옆모습.
익숙함에 길들여지다 보면 그들은 서로에게 누구보다 소중한 사람이 되어줄 수 있을까?
한참 동안 정적만 가득한 거실에는 조그마한 부스럭거림만이 존재했어.
딱 한 사람만큼의 자리를 두고 나란히 앉은 택운과 은성이는 같은 공간에서 어쩌면 조금 다른 생각들을 하고 있었어.
은성이는 그의 목소리를 곱씹으며 약간의 설렘을 애써 내리누르고 있었고,
택운은 자신이 왜 무의식적으로 그녀에게 공간을 허용해버렸는지에 관하여 골똘히 생각하고 있었어.
택운은 고개를 슬쩍 돌려 책을 읽고 있는 그녀의 옆모습을 몰래 훔쳐봐.
집중한 듯 꼭- 다물어진 입술과 흘러내린 머리카락이 꽤나 부드러워 보인다고 생각하다가,
이내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모르겠다며 인상을 쓰며 애먼 고개를 저어버려.
그의 잦은 부스럭거림에 있는 힘껏 집중해서 책을 읽던 은성이 이내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봐.
택운은 뭐가 그리 불편한지 소파에서 등을 떼고는 머그잔을 커다란 두 손으로 아주 꽉- 쥐고 있었어.
"....불편해요?"
꽤나 조심스럽게 그녀가 그에게 물어.
택운은 고개를 돌려 그런 그녀를 바라보다 이내 소파에 등을 기대.
"아니"
그가 짧게 대답하며 이내 무표정한 얼굴로 돌아가.
은성이는 그런 그를 보며 알았다는 듯 얕은 끄덕임을 남기며 다시 시선을 책으로 돌려.
그녀는 입술을 가만히 두지 못해.
그에게 말을 걸까 말까 고민하는 게 표정에 부끄러울 정도로 다 드러나.
"어디까지 알고 있어"
반응을 안 할 수 없는 그의 목소리가, 택운의 미성이 그녀의 귀에 걸려.
계속 그의 목소리를 되뇌다 같은 문장을 반복해서 읽고 있었다는 것을 그녀는 뒤늦게 깨달아.
은성이는 슬며시 책갈피를 꽂으며 얼마 읽지도 못한 시집을 덮어.
문득 덤덤한 목소리가 그녀의 입술 사이로 새어 나와.
"뭘요"
"....."
그녀의 되물음에 택운은 고개를 돌려 은성을 바라봐.
은성도 어느새 그런 그의 눈을 마주 보며 다음 말을 기다리고 있어.
택운은 자신의 입술을 살짝- 핥더니 이내 미간을 조금 찌푸려.
그가 그녀의 쪽으로 조금 몸을 기울여.
"다 알면서 그러는 건지..."
"......"
"정말 모르는 건지"
천천히 몸을 일으키며 택운은 끝까지 그녀의 눈을 바라봐.
은성이는 그런 그의 움직임을 지켜봐.
사냥감에게 다가서는 맹수처럼 리드미컬하게 움직이는 그의 어깨에 그녀의 입술을 꾹- 깨물었지만
그렇다고 그의 눈빛을 피하거나 겁먹은 티를 내지는 않아.
"그게 중요한가요?"
그녀가 그에게 물어.
"내가 당신의 사생활에 대하여 얼마만큼 알고 있는지가?"
"그럼 중요하지"
어느새 은성이의 곁에 가까이 다가간 택운이 눈을 내리깔며 속삭이듯 얘기해.
그녀는 제 손에 쥐여진 시집을 꼭 잡고 있고, 문득 풍겨오는 그의 향수 냄새에 코끝이 아려오는 것을 느껴.
은성이는 그가 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가 궁금해.
그러다가 문득 이런 식으로 자신에게 겁을 주는 그의 행동이
꽤나 악취미 같다는 생각에 고개를 홱- 돌리며 차갑게 이야기해.
"사생활 간섭할 마음 없어요. 이런 식으로 겁주지 않아도 돼요"
"겁먹었다는 듯이 이야기하네?"
택운은 낮게 이야기하더니 이내 그녀의 손목을 잡아.
끌어당기는 힘에 은성이는 원치 않게 그의 코앞까지 다가가게 되고,
다시 한 번 그의 숨결이 그녀의 속눈썹 위로 내려앉아.
은성이는 고개를 들고 그를 바라봐.
자신의 눈을 빤히 응시하는 그의 그 검은 눈동자를.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걸까' 하고 그는 속으로 고민해.
'도대체 지금 나는 무슨 생각을 하고 이러는 걸까' 하고.
사실 그도 별다른 해답을 가지고 있지는 않아.
다만 짜증이 났을 뿐이야. 자꾸만 반복 재생되는 홍빈과 은성이의 모습에 속이 뒤틀렸을 뿐이야.
그녀를 바라보는 홍빈의 눈빛이 이미 많은 것을 말해주고 있었는걸.
부드러운 그의 눈빛과 천천히 움직이는 그녀의 입술.
마지막에 언뜻 본 그녀의 얼굴을 감싸는 홍빈의 행동과 아무렇지도 않게 고개를 끄덕이며 일어나는 은성이의 뒷모습.
'아니, 그렇잖아- 내가 그렇게 차갑게 밀어낼 때에는 꼭 이 세상에 나 밖에 없는 것처럼 굴더니-'
문득 그런 말들을 속으로 삼키며 택운은 콧등을 찡그려.
자신은 그 흔한 관심 한 번, 미소 한 번 지어준 적도 없으면서 질투라 하기에도 뭐 한 감정이 자꾸만 샘솟는 거야.
이게 얼마나 바보 같고 이기적인 일인지 택운은 전혀 모르고 있어.
아니, 애써 생각하지 않으며 모르는 척하고 있어.
바보, 질투하고 있잖아.
짓궂은 악마처럼.
젤로스?
"하나도 안 무서워. 그러니까 그만해요"
은성이 그의 눈을 똑바로 올려다보며 이야기해.
택운은 아주 천천히 그리고 은근하게 그녀의 얼굴에 가까이 다가가며 입술을 움직여.
"그러면 얘기해 보라니까, 어디까지 아는지"
은성이는 대답 대신 화가 난 얼굴로 그를 바라봐.
잘근잘근- 제 아랫입술을 꾹- 깨무는 그녀의 행동에 택운은 원치 않았음에도 홀린 듯 그녀의 입술을 바라봐.
자꾸만 움직이고 있잖아, 발갛게 달아오른 그 입술이 자꾸만 제 앞에서 움직이고 있잖아.
택운은 괜히 짓궂은 마음이 들어서는 은성이 모르게 꾹- 속으로 웃음을 내리눌러.
"말 했잖아요 당신 사생활 간섭 안 하겠다고"
"알고는 있다는 소리잖아, 언제부터 알았어?"
"알아도 안 할 거라고!"
빙글빙글 일부러 괴롭히듯 이야기하는 택운에 그녀가 화가 났는지 처음으로 목소리를 높여.
은성이의 목소리에 씩- 씩- 거리는 그 숨소리에 그가 눈썹을 쓱- 올리며 그녀를 바라봐.
그녀의 얼굴이 발갛게 달아오르기 시작해.
은성이는 문득 밀려오는 답답함과 부끄러움에 그에게 붙잡힌 손목을 비틀어.
그가 일부러 자신을 괴롭히고 있다는 생각이 들자 이제는 별의 별일을 가지고 자신을 힘들게 한다는 생각이 들어.
침묵으로 일관하며 자신에게 차갑게 대할 때보다는 낫지만 그렇다고 스트레스를 안 받는 건 아니니까.
"화를 내네?"
"화나게 하니까 화를 내죠"
그녀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해.
"손목이나 놔줘요"
"싫은데"
"이제는 무시하다 못해 괴롭히려 그래요? 그러지 않아도 간섭 안 해요, 안 한다고"
은성이 참다못해 이제는 택운을 흘기며 말해.
그는 여전히 그녀를 놓아주기는커녕 즐거운 듯 움찔거리는 입꼬리를 숨기며 은성을 더 끌어당겨.
"누가 지금 사생활 얘기하는 줄 알아?"
"그럼 무슨 얘기하는 건데요"
"공평하게 알아야지"
"....."
"내가 누굴 만나는지 너는 알고 있으니까, 네가 누굴 만나는지 나도 알고 있어야지"
"....난 당신처럼 애인 같은 거 없어요"
예상치 못한 택운의 한 마디에 은성이는 미간을 찌푸리며 말해.
그녀는 기분이 나빠져서는 이제는 거의 그를 노려보고 있어.
택운은 아직도 머릿속에서 반복 재생되는 홍빈과 은성이의 모습을 말처럼 쉽게 떨쳐내지 못하고 있어.
전쟁이네, 전쟁이야. 결국에는 또다시 전쟁이야, 전과는 조금 다른.
"애인 같은 건 없어도, 애인 비슷한 건 있잖아"
"그런 거 없다니까요"
"너무 거짓말하는 거 아니야?"
택운이 문득 표정을 굳히며 말해.
"애인도 아닌데 그 새끼가 그런 눈으로 널 바라봐?"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예요?"
그렇게 되묻는 은성이의 허리를 그가 커다란 손으로 감싸 안아.
은성이는 놀라서 몸을 뒤로 빼지만 등 뒤에 닿는 것은 소파 팔걸이뿐이야.
어느새 그녀가 쥐고 있던 시집도 하릴없이 바닥에 툭- 하고 떨어져 버려.
"이제 대답할래?"
"무슨...! 놔줘요"
그녀의 말을 간단히 무시하며 택운은 슬쩍 몸에 체중을 실어.
밀려나듯 은성이의 등이 팔걸이에 닿아.
택운은 어느새 소파 위에 무릎을 세우고는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어.
예상치 못한 상황에 은성이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입술을 꼭 깨물어.
아- 그녀가 고통받던 제 아랫입술을 놓아준다.
발갛게 달아오른 핏기가 하얗게 질렸던 그녀의 입술로 다시 돌아와.
택운은 이상하게도 계속 그녀의 입술을 바라보고 있어.
진짜 이상하다 생각하면서도 머릿속이 뿌옇게 바래가는 것만 같다고 그는 생각해.
'커피를 너무 많이 마셨나?'
"아직도 말할 마음이 안 드나? 오늘 누구 만났는지, 뭘 했는지"
택운은 은성이의 손목을 놓으며 그 손으로 슬쩍- 그녀의 얼굴을 만져봐.
은성이의 눈동자가 이리저리 흔들려.
그녀가 눈을 꾹- 감았다 뜨더니 이내 제정신이 들었는지 양손을 뻗어 그의 어깨를 밀어내.
안타깝게도 그는 꿈쩍도 하지 않지만...
"이렇게 쓰다듬었던 것 같은데..?"
택운이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려.
은성이는 그런 그를 바라보다가 이내 입술을 움직여.
"그래 그래!, 오늘 홍빈이 만났어요. 이 변호사. 내 친구!"
"...어"
"말했으니까 됐죠? 이제 공평하잖아, 그만 비켜요 택운씨"
"...아"
".....?"
"난 오늘 키스도 했어"
"네?"
문득 뜬금없는 그의 한 마디에 그녀가 미간을 찌푸려.
그러다 갑자기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는 문현아와 그의 얼굴에 이번에는 정말 화가 나서는 눈물이 고이는 것만 같아.
은성이는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어서, 계속 이런 식으로 괴롭히는 그가 정말 미워서 크게 숨을 들이쉬려 입을 벌려.
"정택운 당신 진짜, 그만...!!"
은성이 말을 끝마치기도 전에 택운의 입술이 그녀에게 닿아.
은성이는 놀라서 눈을 끔뻑거리다가 이내 꾹- 감아버려.
그녀는 그를 밀어내려 그의 어깨를 밀어보지만 꿈쩍도 하지 않고,
도무지 속을 알 수 없는 택운이 어느새 그녀의 얼굴을 꼭- 잡고는 그녀의 입술을 깨물어.
은성이의 입술 사이로 그의 숨결이 뜨겁게도 파고들어.
참으려야 참을 수 없는 신음이 가늘게 새어 나와. 은밀하게 달아오른 혀끝이 맞닿아.
한참을 말이야, 한참을 그 뜨거운 입술로 말이야 탐하고 탐하고 탐하는 거야.
마침내 온몸이 달아올라 정신이 혼미해질 때까지.
자꾸만 파고드는 그의 입술에, 은근한 손길에 은성이는 눈물이 날 것만 같아서 이내 있는 힘껏 그를 밀어내.
그제야 그가 떠밀리듯 멀어지고 은성이는 벌게진 얼굴로 씩씩대며 그를 노려봐.
택운은 무엇에 놀랐는지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연신 눈꺼풀을 깜빡이며 그녀를 바라보고 있어.
은성이는 그가 왜 그렇게 놀란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는지 생각할 겨를도 없고, 그럴 마음도 들지 않아서
살짝 부어오른 아랫입술을 꼭 깨물더니 가쁘게 숨을 몰아쉬어. 그녀의 가슴팍이 바쁘게 오르내려.
그러다가 예상치 못한 눈물이 툭- 하고 떨어지자 얼른 그걸 훔쳐내더니 다시 한 번 택운의 어깨를 밀어버려.
택운은 여전히도 놀란 눈으로 그녀가 미는 대로 밀려나서는 털썩 뒤로 주저앉아.
은성이는 이내 벌떡 일어나더니 홱- 돌아서서 빠른 걸음으로 방으로 향하곤 등 뒤로 문을 쾅- 소리 나게 닫아버려.
'어?'
'어?'
거실에 덩그러니 남겨진 택운은 여전히도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은성이의 방문을 바라봐.
그러다가 갑자기 손을 들어 제 입을 막으며 얼굴을 찡그려.
방금 자신이 무슨 짓을 한 건지 잘 모르겠다는 얼굴로 그는 이리저리 눈동자를 굴리고 있어.
'왜 그녀에게 키스를 한 거지?'
'아니, 그냥 공평하게.. 아니, 아니 그냥 짜증이 났을 뿐인데'
'왜 내가 너한테 키스를 한 거지?'
'왜 그렇게 오래? 왜 그렇게 진하게?'
혼란스러운 파도에 휩싸인 채로 택운은 제 입술을 만지작거려.
그의 하얗다 못해 창백한 얼굴이 이내 갑자기 불지른 듯 빨갛게 달아올라.
볼과 목은 물론이고 귀까지 달아올라서 꼭 새빨갛게 익은 사과 같아.
"미친..."
문득 택운이 중얼거려.
"미쳤나 봐"
쿵- 쿵- 쿵-
떨어지는 소리가 들리니?
말했잖아 익숙해지는 게 가장 무서운 거라고.
언제까지 아닌 척할 수 있을 것 같아?
*
"당신을 사랑하지 않아요"
"예"
"나는 당신을 사랑하지 않아요"
"예"
"나는 절대로 당신을 사랑하지 않아요"
"예"
"조만간 가을이겠지요. 추우니까, 안아줘요"
[이영도 / 폴라리스 랩소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