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얄 블라썸 (Royal Blossom) 01
그뤼프스(Gryps) 왕국을 세우는 데 공을 들인 5개의 가문은 각 펜리르, 드워프, 딜란, 세이렌, 고르곤 5개의 공국을 세웠다. 대부분의 알파는 펜리르, 고르곤. 오메가는 세이렌, 딜란으로 모여들었다. 베타는 자신들만의 평범한 삶을 살기 위해 드워프로 향했다. 몇백 년이 지나 혼란스러웠던 초기와는 다르게 자리를 잡아가고 있었을 때였다. 왕이 죽었다. 땅에 만개하던 꽃들이 시들고 짐승들은 달이 떨어지도록 울었다. 젊은 왕이 남긴 것은 그의 아들밖에 없었다. 별다른 핏줄도 없었다. 어린 시절 저와 함께 놀던 왕족의 어린아이와 어른들은 왕을 지키지 못했단 이유로 목이 잘렸다. 그 죽음을 지켜보던 왕태자는 말없이 눈물만 흘렸다. 힘이 없는 어린 왕태자는 자신의 목을 노리는 자들 속에서 떨어야 했다. 펜리르는 언제나 왕의 자리를 노리고 있었다. 그들에겐 충성심이 강했던 고르곤은 1차 제거 대상이었다. 세이렌과 펜리르 땅 사이에 있던 고르곤은 쉽게 침략당했고 영토의 반 이상을 빼앗기며 몰살당했다. 고르곤을 제외한 각 공국의 대공들은 왕국의 중심지인 그리폰(Griffon)으로 모여들었다. 오메가인 왕비를 내어주며 그리폰과 친밀한 관계를 맺어오던 딜란의 대공은 착잡한 표정이었다. "어찌 그리 표정이 어두운가. 아, 안길 왕족 알파가 없어서? 기다리시게 곧 펜리르가 왕족이 되어 딜란을 안을 테니 말일세." 궁전이 웃음소리로 찼다. 딜란의 대공은 흐트러짐이 없었다. 많은 모욕적인 말들은 들으려 하지 않았다. 그저 죽은 왕을 추모하며 고개를 떨궜다. 펜리르의 대공 차적이 궁전 안의 소리를 죽였다. "해운, 내 아들이 성인이 되는 날. 그 아이는 왕관을 쓰게 될걸세. 자넨 늘 하던 대로 고운 오메가를 내어주지 않겠나." 차적의 힘이 들어간 손이 해운의 어깨를 두드렸다. 해운의 눈앞이 아득해졌다. '난 곧 죽어. 왕태자를 지키게. 그가 성년이 되어 그뤼프스를 이끌 수 있게 보살펴야 해.' 유언처럼 남겨진 왕의 마지막말을 떠올렸다. 은밀하게 스치는 손길에서 정신을 바로 잡았다. '딜란의 이름을 걸고 왕태자를 옥좌에 앉혀드리겠습니다.' "새 가문에 왕의 탄생이오! 펜리르가 새로운 왕족이 되었소!" 두건을 둘러싼 소년이 종이를 뿌렸다. 드워프의 중앙 시장의 걸음이 멈췄다. 죽은 왕을 애도하며 또다시 눈물을 흘리는 이가 있는가 하면 왕의 탄생을 축복하는 이들이 존재했다. 낡아 해진 천을 둘러싼 민혁이 떨어진 종이를 주워들었다. "왕관을 기다리는 나의 왕자여. 왕자의 선한 마음을 따라 그리폰의 이름을 전승하고 왕태자를 보살피니. 다른 4개의 공국들은 왕자를 따를 준비를 하고 충성은 무슨…. 차적, 이 반역자를 어찌!" 거친 목소리가 울렸다. 주목을 받게 된 민혁이 얼굴을 깊게 숨겼다. 검은 말을 탄 현식이 나타났다. 탄탄한 근육을 가진 현식는 덩치에 비해 선한 인상이 눈에 띄었다. 화려하지 않게 입은 검은 비단옷에서 묘한 강압을 뿜었다. 그 분위기에 주목을 받게 된 현식이 눈꼬리를 내려 자신을 바라보는 상인과 시민을 훑었다. 민혁은 잔뜩 펴진 어깨를 들고 다니는 그가 못마땅한지 발길을 돌렸다. 붉은 머리카락이 천 사이로 삐져나왔다. 흔하지 않은 붉은 머리를 보지 못했을 리가 없는 현식이 뒷모습을 쫓았다. "눈이 빠지도록 도망가는 꼴이 꽤 웃기군." 말을 돌려 길을 향했다. 길이 점점 좁아지기에 시장의 구석에서는 말을 포기했다. 좁고 복잡한 길을 단 한 명의 기사를 데리고 헤맸다. 여기가 맞는 건가. 인내심이라곤 없는 현식이었다. 잠깐 성질을 내는가 싶더니 무언가를 생각하고 다시 잠잠해졌다. 겨우 찾은 건물은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았다. 나무로 된 벽을 짚었다. 삐걱거리는 소리와 몸이 안으로 이끌렸다. 먼지 날리는 곳에서 한참 거래가 이뤄지고 있었다. 한 달에 한 번. 이곳에선 오메가의 경매가 이루어졌다. 그뤼프스에서 오메가에 대한 차별은 없었다. 다만 그 범위가 귀족에 그쳤다. 귀족이 아닌 시민이나 더 낮은 계급의 노예들은 납치되어 팔렸고 주인의 넘치는 성욕을 감당하지 못한 몇은 자살을 하거나 밑에서 죽었다. 1000 마운트! 1500 마운트! 욕정에 찌든 남자들의 목소리가 섞여 들렸다. 유일하게 빛이 들어오는 무대 위로 노인과 하얀 남자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뒤편에 자리를 잡고 앉은 현식이 눈을 돌렸다. 눈에 차는 남자는 없었다. 다들 건장한 몸에 여린 얼굴이었다. "난 작은놈이 좋은데 말이야. 게다가 저것들은 마운트로 계산할 가치도 없다고." "…오늘로 이곳은 마지막입니다. 겨우 왕자가 되셨는데 행동을 더욱 조심해야지 않겠습니까." "그래. 조심해야지 안 그러면 여기저기서 날 물어뜯고 집어삼키겠지!" 큰 소리와 의자가 뒤로 넘어갔다. 일어난 현식이 어깨를 들썩이며 화가 담긴 숨을 몰아쉬었다. "현재까지 3000 마운트. 얼마를 제시하겠습니까." 노인의 긴 손이 현식을 가리켰다. 마지막으로 남은 남자가 불안에 떨고 있었다. 현식의 시선이 가운데로 향했다. "10000 마운트." "아…10000 마운트 나왔습니다. 더는 없습니까." 높은 가격에 아무도 엄두를 내지 못했다. 왕자! 차마 크게 뱉지 못한 기사의 울림이 현식의 귓가로 들어왔다. 마지막이라며, 그럼 사야지. 천하나만 걸친 남자를 데리고 내려왔다. 마른 손목을 잡아 제 비단옷을 벗어 주었다. 남자의 얼굴은 곱기보단 예뻤다. 누군가에게 이런 말을 하면 같은 말이 아니냐 묻겠지만 달랐다. 그동안의 고생이 상처에 드러나 있었고 순수함이 눈에 묻어 있었다. 두꺼운 돈뭉치를 남자의 손에 쥐었다. "지금 너를 데려갈 사정이 되지 않아. 그리폰으로 가 네 사나운 몰골을 씻고 기다리고 있어. 일주일 뒤 이 시간에 널 데리러 가지." 얼이 빠진 남자의 머리를 쓸었다. 살기가 담긴 웃음을 지은 현식이 어깨를 세게 쥐었다. "너한테는 과분한 숫자야 10000 마운트. 도망가면 알지? 네 사지를 찢어 갈아버릴 테니까 얌전히 기다려." 힘이 풀린 남자가 자리에 주저앉았다. 미련없이 떠난 현식의 여운이 길게 남았다. 거래를 끝났고 아쉬움에 떠나지 못하는 귀족들이 남자에게 시선을 주었다. 쥐어진 큰 액수의 돈을 보고 떨렸다. 볼 수 있을까 했던 돈이었고 저에게 생겼다. 이 돈이면 평생을 놀고먹을 수 있는 액수였다. 갈등이 생겼다. 도망갈까 생각하곤 자리에서 일어났다. 잡힌 어깨에 통증이 있어 두드렸다. 순간 뼈를 찌르는 고통에 신음을 뱉었다. 슬쩍 들춰보니 퍼렇게 멍이 들어있었다. 현식의 경고였다. 현식의 옆에 있던 기사의 얼굴을 떠올렸다. 자칫하면 정말 죽을 수 있단 생각에 소름이 돋았다. 밖으로 나와 건물에서 멀리 걸었다. 드워프에서 그리폰까진 멀지 않았다. 열린 성문을 보다가 돈이 쥐어진 손에 힘을 주었다. 어쩌면 지금보다 나은 삶을 그리며 남자는 걸음을 옮겼다. "왕태자…." "창섭이야? 창섭아!" 문이 열렸다. 누가 볼세라 휑한 긴 복도를 살핀 창섭이 안으로 들어갔다. 며칠 보지 못한 얼굴이 심하게 어두웠다. 여태 창섭을 기다렸는지 마지막으로 본 옷 그대로였다. "이름을 불러. 난 더는 왕태자가 아니야." "아니요. 그댄 아직 그뤼프스의 왕태자입니다." "듣고 싶어. 네가 불러주는 내 이름…. 이제 내 이름을 불러 줄 사람은 너밖에 없어." "…성재." 허리를 감아 품에 안았다. 머리에 달린 금속의 장식이 성재의 가슴께에 닿았다. 흐르는 성재의 눈물이 창섭에게 그대로 닿았다. 외로웠던 성재가 더욱 강하게 안았다. 어깨에 얼굴을 묻어 창섭의 향을 맡았다. "이제 안 가는 거지? 나랑 있는 거야?" 고개를 끄덕였다. 품에 쥐고 있던 칼자루를 깊숙이 숨겼다. 혹여 성재가 눈치챌까 몸을 떨어트렸다. 창섭도 울었다. 눈물이 없는 그가 울자 성재가 당황했다. 왕태자여 엄한 생각을 한 저를 벌하시오. 평생을 해도 못 갚을 빚을 이리 갚으려 했습니다. 왕이 죽고서 힘들어하는 제 아비 해운과 성재가 안쓰러웠다. 주어진 호칭은 태자비이긴 하나 창섭에겐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그저 오메가로서 대하여 졌고 제 가문에서도 눈초리를 받아 왔다. 가문에 태어난 외동아들이 오메가란 사실과 자라면서 보이는 고운 자태에 해운은 몇 번을 절망했다. 그것이 분노로 와전 돼 창섭에게 해가 되기도 했다. 창섭은 자신을 싫어하는 해운을 미워하지 않았다. 그를 이해하려 했고 모진 행동에도 참았다. 왕이 죽은 뒤 찾아간 딜란의 궁전에선 오직 성재의 걱정밖에 들리지 않았다. 딜란에선 창섭은 없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지금은 견딜만했다. 다만 어린 시절 모진 생각을 한 적이 있었다. 가족은 물론 딜란의 시민들까지 창섭을 미워했다. 오메가의 공국이여서 모진 대접을 받는 생활에서 탈피하고 싶었던 그들은 자신을 이끌 다음 후계자가 알파였으면 했다. 창섭이 태자비가 된 날에도 그들은 기뻐하지 않았다. 그는 그뤼프스의 왕자를 낳기 위해 태자비가 됐을 뿐이었다. "오랜만에 간 딜란은 좋았어? 좋아서 다시 가고 싶어서 우는 거지?" "그럼요. 다들 반겨주더군요." "그래…. 늦었다. 피곤할 테니 얼른 자자." 창섭과 성재의 미래는 어두웠다. 누군가 희망을 준다 한들 쓸데없는 것이었다. 펜리르가 완전히 그뤼프스를 장악한 날 자신들은 죽을 것을 알았다. 그래서 서로에 대한 행동이 더욱 조심스러웠다. 지금 하는 입맞춤이 소중했고 깊게 느꼈다.
그뤼프스(Gryps) 왕국을 세우는 데 공을 들인 5개의 가문은 각 펜리르, 드워프, 딜란, 세이렌, 고르곤 5개의 공국을 세웠다. 대부분의 알파는 펜리르, 고르곤. 오메가는 세이렌, 딜란으로 모여들었다. 베타는 자신들만의 평범한 삶을 살기 위해 드워프로 향했다. 몇백 년이 지나 혼란스러웠던 초기와는 다르게 자리를 잡아가고 있었을 때였다. 왕이 죽었다. 땅에 만개하던 꽃들이 시들고 짐승들은 달이 떨어지도록 울었다. 젊은 왕이 남긴 것은 그의 아들밖에 없었다. 별다른 핏줄도 없었다. 어린 시절 저와 함께 놀던 왕족의 어린아이와 어른들은 왕을 지키지 못했단 이유로 목이 잘렸다. 그 죽음을 지켜보던 왕태자는 말없이 눈물만 흘렸다. 힘이 없는 어린 왕태자는 자신의 목을 노리는 자들 속에서 떨어야 했다. 펜리르는 언제나 왕의 자리를 노리고 있었다. 그들에겐 충성심이 강했던 고르곤은 1차 제거 대상이었다. 세이렌과 펜리르 땅 사이에 있던 고르곤은 쉽게 침략당했고 영토의 반 이상을 빼앗기며 몰살당했다. 고르곤을 제외한 각 공국의 대공들은 왕국의 중심지인 그리폰(Griffon)으로 모여들었다. 오메가인 왕비를 내어주며 그리폰과 친밀한 관계를 맺어오던 딜란의 대공은 착잡한 표정이었다.
"어찌 그리 표정이 어두운가. 아, 안길 왕족 알파가 없어서? 기다리시게 곧 펜리르가 왕족이 되어 딜란을 안을 테니 말일세."
궁전이 웃음소리로 찼다. 딜란의 대공은 흐트러짐이 없었다. 많은 모욕적인 말들은 들으려 하지 않았다. 그저 죽은 왕을 추모하며 고개를 떨궜다. 펜리르의 대공 차적이 궁전 안의 소리를 죽였다.
"해운, 내 아들이 성인이 되는 날. 그 아이는 왕관을 쓰게 될걸세. 자넨 늘 하던 대로 고운 오메가를 내어주지 않겠나."
차적의 힘이 들어간 손이 해운의 어깨를 두드렸다. 해운의 눈앞이 아득해졌다.
'난 곧 죽어. 왕태자를 지키게. 그가 성년이 되어 그뤼프스를 이끌 수 있게 보살펴야 해.'
유언처럼 남겨진 왕의 마지막말을 떠올렸다. 은밀하게 스치는 손길에서 정신을 바로 잡았다.
'딜란의 이름을 걸고 왕태자를 옥좌에 앉혀드리겠습니다.'
"새 가문에 왕의 탄생이오! 펜리르가 새로운 왕족이 되었소!"
두건을 둘러싼 소년이 종이를 뿌렸다. 드워프의 중앙 시장의 걸음이 멈췄다. 죽은 왕을 애도하며 또다시 눈물을 흘리는 이가 있는가 하면 왕의 탄생을 축복하는 이들이 존재했다. 낡아 해진 천을 둘러싼 민혁이 떨어진 종이를 주워들었다.
"왕관을 기다리는 나의 왕자여. 왕자의 선한 마음을 따라 그리폰의 이름을 전승하고 왕태자를 보살피니. 다른 4개의 공국들은 왕자를 따를 준비를 하고 충성은 무슨…. 차적, 이 반역자를 어찌!"
거친 목소리가 울렸다. 주목을 받게 된 민혁이 얼굴을 깊게 숨겼다. 검은 말을 탄 현식이 나타났다. 탄탄한 근육을 가진 현식는 덩치에 비해 선한 인상이 눈에 띄었다. 화려하지 않게 입은 검은 비단옷에서 묘한 강압을 뿜었다. 그 분위기에 주목을 받게 된 현식이 눈꼬리를 내려 자신을 바라보는 상인과 시민을 훑었다. 민혁은 잔뜩 펴진 어깨를 들고 다니는 그가 못마땅한지 발길을 돌렸다. 붉은 머리카락이 천 사이로 삐져나왔다. 흔하지 않은 붉은 머리를 보지 못했을 리가 없는 현식이 뒷모습을 쫓았다.
"눈이 빠지도록 도망가는 꼴이 꽤 웃기군."
말을 돌려 길을 향했다. 길이 점점 좁아지기에 시장의 구석에서는 말을 포기했다. 좁고 복잡한 길을 단 한 명의 기사를 데리고 헤맸다. 여기가 맞는 건가. 인내심이라곤 없는 현식이었다. 잠깐 성질을 내는가 싶더니 무언가를 생각하고 다시 잠잠해졌다. 겨우 찾은 건물은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았다. 나무로 된 벽을 짚었다. 삐걱거리는 소리와 몸이 안으로 이끌렸다. 먼지 날리는 곳에서 한참 거래가 이뤄지고 있었다. 한 달에 한 번. 이곳에선 오메가의 경매가 이루어졌다. 그뤼프스에서 오메가에 대한 차별은 없었다. 다만 그 범위가 귀족에 그쳤다. 귀족이 아닌 시민이나 더 낮은 계급의 노예들은 납치되어 팔렸고 주인의 넘치는 성욕을 감당하지 못한 몇은 자살을 하거나 밑에서 죽었다. 1000 마운트! 1500 마운트! 욕정에 찌든 남자들의 목소리가 섞여 들렸다. 유일하게 빛이 들어오는 무대 위로 노인과 하얀 남자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뒤편에 자리를 잡고 앉은 현식이 눈을 돌렸다. 눈에 차는 남자는 없었다. 다들 건장한 몸에 여린 얼굴이었다.
"난 작은놈이 좋은데 말이야. 게다가 저것들은 마운트로 계산할 가치도 없다고."
"…오늘로 이곳은 마지막입니다. 겨우 왕자가 되셨는데 행동을 더욱 조심해야지 않겠습니까."
"그래. 조심해야지 안 그러면 여기저기서 날 물어뜯고 집어삼키겠지!"
큰 소리와 의자가 뒤로 넘어갔다. 일어난 현식이 어깨를 들썩이며 화가 담긴 숨을 몰아쉬었다.
"현재까지 3000 마운트. 얼마를 제시하겠습니까."
노인의 긴 손이 현식을 가리켰다. 마지막으로 남은 남자가 불안에 떨고 있었다. 현식의 시선이 가운데로 향했다.
"10000 마운트."
"아…10000 마운트 나왔습니다. 더는 없습니까."
높은 가격에 아무도 엄두를 내지 못했다. 왕자! 차마 크게 뱉지 못한 기사의 울림이 현식의 귓가로 들어왔다. 마지막이라며, 그럼 사야지. 천하나만 걸친 남자를 데리고 내려왔다. 마른 손목을 잡아 제 비단옷을 벗어 주었다. 남자의 얼굴은 곱기보단 예뻤다. 누군가에게 이런 말을 하면 같은 말이 아니냐 묻겠지만 달랐다. 그동안의 고생이 상처에 드러나 있었고 순수함이 눈에 묻어 있었다. 두꺼운 돈뭉치를 남자의 손에 쥐었다.
"지금 너를 데려갈 사정이 되지 않아. 그리폰으로 가 네 사나운 몰골을 씻고 기다리고 있어. 일주일 뒤 이 시간에 널 데리러 가지."
얼이 빠진 남자의 머리를 쓸었다. 살기가 담긴 웃음을 지은 현식이 어깨를 세게 쥐었다.
"너한테는 과분한 숫자야 10000 마운트. 도망가면 알지? 네 사지를 찢어 갈아버릴 테니까 얌전히 기다려."
힘이 풀린 남자가 자리에 주저앉았다. 미련없이 떠난 현식의 여운이 길게 남았다. 거래를 끝났고 아쉬움에 떠나지 못하는 귀족들이 남자에게 시선을 주었다. 쥐어진 큰 액수의 돈을 보고 떨렸다. 볼 수 있을까 했던 돈이었고 저에게 생겼다. 이 돈이면 평생을 놀고먹을 수 있는 액수였다. 갈등이 생겼다. 도망갈까 생각하곤 자리에서 일어났다. 잡힌 어깨에 통증이 있어 두드렸다. 순간 뼈를 찌르는 고통에 신음을 뱉었다. 슬쩍 들춰보니 퍼렇게 멍이 들어있었다. 현식의 경고였다. 현식의 옆에 있던 기사의 얼굴을 떠올렸다. 자칫하면 정말 죽을 수 있단 생각에 소름이 돋았다. 밖으로 나와 건물에서 멀리 걸었다. 드워프에서 그리폰까진 멀지 않았다. 열린 성문을 보다가 돈이 쥐어진 손에 힘을 주었다. 어쩌면 지금보다 나은 삶을 그리며 남자는 걸음을 옮겼다.
"왕태자…."
"창섭이야? 창섭아!"
문이 열렸다. 누가 볼세라 휑한 긴 복도를 살핀 창섭이 안으로 들어갔다. 며칠 보지 못한 얼굴이 심하게 어두웠다. 여태 창섭을 기다렸는지 마지막으로 본 옷 그대로였다.
"이름을 불러. 난 더는 왕태자가 아니야."
"아니요. 그댄 아직 그뤼프스의 왕태자입니다."
"듣고 싶어. 네가 불러주는 내 이름…. 이제 내 이름을 불러 줄 사람은 너밖에 없어."
"…성재."
허리를 감아 품에 안았다. 머리에 달린 금속의 장식이 성재의 가슴께에 닿았다. 흐르는 성재의 눈물이 창섭에게 그대로 닿았다. 외로웠던 성재가 더욱 강하게 안았다. 어깨에 얼굴을 묻어 창섭의 향을 맡았다.
"이제 안 가는 거지? 나랑 있는 거야?"
고개를 끄덕였다. 품에 쥐고 있던 칼자루를 깊숙이 숨겼다. 혹여 성재가 눈치챌까 몸을 떨어트렸다. 창섭도 울었다. 눈물이 없는 그가 울자 성재가 당황했다. 왕태자여 엄한 생각을 한 저를 벌하시오. 평생을 해도 못 갚을 빚을 이리 갚으려 했습니다. 왕이 죽고서 힘들어하는 제 아비 해운과 성재가 안쓰러웠다. 주어진 호칭은 태자비이긴 하나 창섭에겐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그저 오메가로서 대하여 졌고 제 가문에서도 눈초리를 받아 왔다. 가문에 태어난 외동아들이 오메가란 사실과 자라면서 보이는 고운 자태에 해운은 몇 번을 절망했다. 그것이 분노로 와전 돼 창섭에게 해가 되기도 했다. 창섭은 자신을 싫어하는 해운을 미워하지 않았다. 그를 이해하려 했고 모진 행동에도 참았다. 왕이 죽은 뒤 찾아간 딜란의 궁전에선 오직 성재의 걱정밖에 들리지 않았다. 딜란에선 창섭은 없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지금은 견딜만했다. 다만 어린 시절 모진 생각을 한 적이 있었다. 가족은 물론 딜란의 시민들까지 창섭을 미워했다. 오메가의 공국이여서 모진 대접을 받는 생활에서 탈피하고 싶었던 그들은 자신을 이끌 다음 후계자가 알파였으면 했다. 창섭이 태자비가 된 날에도 그들은 기뻐하지 않았다. 그는 그뤼프스의 왕자를 낳기 위해 태자비가 됐을 뿐이었다.
"오랜만에 간 딜란은 좋았어? 좋아서 다시 가고 싶어서 우는 거지?"
"그럼요. 다들 반겨주더군요."
"그래…. 늦었다. 피곤할 테니 얼른 자자."
창섭과 성재의 미래는 어두웠다. 누군가 희망을 준다 한들 쓸데없는 것이었다. 펜리르가 완전히 그뤼프스를 장악한 날 자신들은 죽을 것을 알았다. 그래서 서로에 대한 행동이 더욱 조심스러웠다. 지금 하는 입맞춤이 소중했고 깊게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