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0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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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 이런 상황이라면 드라마에선 달달한 배경음악이 깔렸겠지. 보기만 해도 간질간질 거리는 눈빛을 주고 받으며 둘은 사랑에 빠
" 썅. 면상 치워. "
" 아 미친년이 진짜. "
지기는 개뿔이. 발끝부터 올라오는 불쾌감에 손바닥으로 전정국의 얼굴을 짓눌러 밀어냈다.
전정국은 짜증이 가득 담긴 손길로 내 손을 쳐냈고 손가락이 혀에 닿았다고 더럽다며 꿍시렁댄다.
그러다 본인도 너무 가까이 붙어있었다는 걸 자각한건지 잠시 멋쩍어하다 꼬물락대며 뒤로 물러난다. 이제 나와 전정국 사이엔 작은 아이 하나 들어갈 수 있는 틈이 생겼다.
맘같아서는 발로 저 끝까지 밀어내고 싶으나 저 근육돼지도 추운 건 느낄테니 인심쓰기로 했다. 그런데 이 새끼는 고마운것도 모르고 자꾸 투덜댄다.
" 아 춥다. 추워. "
" ... "
" 명색이 체육하는 사람인데 설마 얼어뒤지겠어? 그치? "
" ... "
" 이제 이렇게 감기에 걸리면 난 꿈이 무너지고 결국 내 미래가 무너지고 가정이 무너지고 사회가 무너지고. "
" 내 억장 무너지는 소리는 안들리니? "
" 아 들었어? 너 들으라고 한 소리는 아니었는데. 얼른자 얼른... 난 내일 살아있을수는 있으려나. 또 들었어? 신경쓰지말고 자. "
뭐씹은 표정으로 전정국을 위아래로 훑어주니 전정국은 뻔뻔한 표정을 지으며 본인은 절대 나한테 말할 의도가 아니었다는 듯 어깨를 으쓱한다.
아 진짜 전정국 왜 살지. 그렇게 어필했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눈 하나 깜빡 안 하자 전정국은 시무룩해하며 이불을 돌돌 말아 누에고치 마냥 몸을 웅크렸다.
그 모습이 너무 짠해보여 어쩔 수 없이.
" 이 씨발. 야 일로와. "
내 옆자리를 내주는 수 밖에 없었다. 그래. 20년 우정의 힘으로 극복해내보자. 소름끼쳐도 좀 참아보자. 탄소야.
이리 오라는 말에 전정국은 다시 떼굴떼굴 굴러 내 옆에 바짝 붙었고 기분좋은 개새끼마냥 싱글벙글대는게. 꼬리흔드는게 보일 정도였다.
너무 따듯하다며 꼬물꼬물 더 파고드는 전정국. 내 발길질에 몸짓을 멈췄고 둘 사이 간격은 종이 하나가 들어갈까 말까 할 정도가 되었다.
이렇게 바짝 붙어있어서 어색하다거나 부담스러운 건 아니었지만 그냥 징그러웠다. 이 새끼를 이렇게 가까이서 보는것도 오랜만이기도 하고.
한창 사이가 심각했을 땐 십미터 이내 접근금지령까지 내려질 정도였는데.
전정국 7살 생일 때 내가 뽀뽀해준답시고 꽉 껴안았을 때 이후로 이렇게 가까이 붙어있는건 처음인가.. 잠시 눈을 감고있는 전정국을 천천히 살펴봤다.
새삼스럽지만...잘 컸네?.. 어렸을 때까지만 해도 비리비리 말라가지고 코나 흘리던게 이젠 지도 남자라고 얼굴골격들이 본인 주장을 하고 나선다.
볼살 통통하던게 엊그제였는데 젖살은 어느새 다 빠져버리고 선이 제법 남자다워 졌다. 자존심상해서 인정하긴 싫지만 잘 생겼다. 확실히.
그러니 고등학교 때 전정국이랑 어떻게든 잘 되보려던 년들이 나를 그렇게 괴롭혔었지. 다시 생각하니깐 빡친다.
" 혹시 나 감상하고 있는거 아니지? "
아예 몸을 돌려 전정국을 관찰하던 도중, 눈도 안 떴으면서 내가 보고 있는 건 어떻게 안 건지. 새끼, 눈치는 더럽게 빠르다.
" 보고 있으니까 눈 뜨지 마라. 서로한테 안 좋다. "
" 왜. 새삼 잘생겼냐. "
" 음. 나름대로 잘 컸네. "
" 닌 그냥 커졌네. "
" 가는 말이 고운데 오는 말이 더럽네요. "
내 입장에선 나름 용기를 내서 해준 칭찬인데 꿀꺽 삼켜놓곤 나한테 돌아오는 게 없다. 민망해지기만 했을 뿐이다.
다시 주워담고 싶었지만 때는 늦었느니 괜한 소리를 했다 싶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전정국을 꾸-욱 밟고지나가 불을 끈 뒤 다시 꾸욱 밟고 돌아와 제자리에 누웠다.
밟힐때마다 외마디비명을 지르는게 너무 통쾌해서 오늘 밤 잠은 잘 올 것 같다.
'잘 자' 라는 간단한 인삿말도 당연히 생략해버리는 우리 사이. 불을 끄고 나자 방 안엔 틱탁틱탁 시계 초침 넘어가는 소리만 울려댄다.
그 일정한 소리에 취해 서서히 잠이 들어가려는 와중 잠결에 전정국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너도 나름 잘 컸어. "
머뭇머뭇 말하면서 이불을 목끝까지 덮어주는 게 느껴졌지만 이미 잠의 경계를 넘어버린 탓에 아무 대꾸도 할 수 없었다.
**
비행기에 타기 전까지 일은 하도 순식간에 일어나서 기억이 잘 안난다.
늦잠을 자고 비행기를 놓칠까 허둥지둥 챙겨나와서 입에 대충 빵쪼가리를 문 채 절차를 마치고, 정신없이 이것저것 하다보니 어느새 비행기에 올라있었다.
결혼식부터의 피로가 싹 밀려와 우리는 의자에 젤라틴처럼 축 널부러졌다. 결혼이고 나발이고 이렇게 힘든게 신혼여행이라면 두번 다시 올 생각이 없다.
둘 다 힘들었는지 집으로 올라가는 비행기 내에선 거의 말이 없었다.
난 입 다물고 삼일 지난 이제서야 '진짜 결혼했구나' 하고 실감나 하며, 미래에 대해 제 나름대로의 생각에 빠져있는 도중 전정국이 말을 걸어온다.
" 아 맞다. 야. "
" 어. "
" 박지민이랑 김태형이 기념품 사오랬는데. "
" 제주도에서 방금 막 건너온 주먹은 어떻냐고 물어봐. "
니 친구가 내 친구. 내 친구가 니 친구가 된지는 오래. 원래는 전정국이 먼저 사귄 친구들이었지만 어느새 보니 또 니 친구가 내 친구가 되어있었다.
사실 선호하는 친구상이 서로 다른 탓( 또는 너무 우리 둘만 붙어다닌 탓)에 우리 둘과 함께 오래가는 친구는 드물었는데 박지민과 김태형이 그 예외들이었다.
우리 둘의 우정에 버금가는 10년 짜리 친구들이다. 그렇기에 유일하게 우리가 결혼했다는 사실을 알고있는 친구들이기도 하다.
상황이 상황인지라 우리는 철저히 주위에 결혼했다는 사실을 숨기고 지내고 있다. 어짜피 23이 되면 뒤도 안 돌아보고 이혼할 예정이기도 하고
20살 밖에 안된 이른 나이에 결혼이란 타이틀은 그닥 좋은 시선들을 이끌어내지 못한다는 건 잘 알고 있었다.
소문이 나버리면 난 그 뒷감당을 책임질 자신이 없다. 질문세례들과 낯선이들의 수근거림. 그러니 입조심 또 조심해야 한다.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드니 또 머리가 지끈거린다. 숨기기엔 너무 거대한 스케일이 아닌가. 스물 셋까지 하루하루를 간 쫄리며 살아야 한다는 생각에 한숨만 푹푹 나온다.
" 전정국. 만약 우리 결혼했다는 거 학교에 소문나면 어떡할거야. "
" 일단 최초유포자부터 조지고. 음.. "
" .. "
" 생각해보니까 뭐 어쩔거야. 자기들이. "
" 와 씨 박력. "
" 물론. 니 인생과 내 인생에서 당분간 연애라는 건 사라지겠지. 좋겠네. 당분간 학업에만 몰두할 수 있고. "
" ...그런데."
" 근데 뭐. "
" 나 그 사람이 알면 어떡해? "
장난스럽게 받아치던 전정국은 내 입에서 그 말이 나오자 입을 다물어버렸다. 그 부분에 대해서는 본인도 뾰족한 수가 없다는 뜻이었다.
그 사람에 대한 내 마음을 누구보다 잘 알고있는 전정국이었고 2년간 나혼자 삽질하는걸 수도 없이 봐왔던 전정국이기에 섣불리 농담식으로 이야기를 내뱉진 못하는거였다.
금새 굳어버린 분위기에 괜한 소리를 했나 싶어 다급히 화제를 돌려버렸다.
" 한라봉초콜렛 사올걸. "
참 거지같은 언변이다.
" 살찐다고 말이나 말던가. "
" 내가 먹으려는게 아니라.. "
그 사람. 주려고 그런거지. 라는 문장이 목끝까지 차올랐다가 다시 꿀꺽 삼켜버렸다. 이러면 어색하게 말을 돌린 의미가 없지 않는가.
" 탄소가 먹으려고 그러지욤^^^^ "
" 내가 어제 너 비행기에서 밀어버린다고 하지 않았냐? "
뭐 그 사람이 알리는 없겠지.
없어야 겠지.
**
삼일만에 도착한 동네. 버스정류장에서 내려 걸어오면 우리 집이 먼저 있고 한 집 건너 전정국 집이 있다.
먼저 집 앞에 도착한 나는 전정국을 보내고 대문을 열고 마당으로 들어갔다.
빨리 집에 들어가서 쓰러지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해 다급한 손놀림으로 도어락에 비밀번호를 두드렸다.
' 삐빅! '
틀렸다는 오류음이 울렸고 잘못 눌렀나 싶어 다시 입력해봤다. 하지만 또 다시 오류음이 울리고 그제서야 뭔가 잘못 된것 같다는 기분이 스물스물 올라오기 시작한다.
하나씩 하나씩 천천히 눌러봐도 도어락은 잘 못 됐다고만 이야기한다. 분명 난 제대로 눌렀는데.
결국 핸드폰을 꺼내 엄마한테 전화를 건다. 집에 있으면 문을 열어줬을텐데 안에서 아무 반응이 없는걸 보아 밖인 모양이다.
잠깐 신호음이 울리더니 달칵. 엄마가 전화를 받았다.
- 응 딸.
" 엄마 비밀번호 바꿨어? "
- 응. 벌써 집 도착했어? 밤 쯤에나 도착할 줄 알았는데.
" 웬일이야? 이십년 동안 한번도 바꾼적 없으면서. 하여간 비밀번호 뭐야. "
- 응? 니가 알아서 뭐하게?
" 팔든? "
아니 무슨 이런 황당한 소리가. 고등학교에 막 입학한 신입생에게 '니가 몇반인지 알아서 뭐하게' 랑 뭐가 다른가. 내가 우리집 비밀번호를 알겠다는데.. 알아서 뭐하냐니.
장난인가 싶었지만 엄마의 말투에선 장난이라곤 하나도 묻어나오지 않았다. 불안한 기운이 서서히 올라오고 어서 알려달라며 찡찡대봤지만 가차없이 끊긴 전화.
그리고 현관을 걷어차기 전 도착한 한통의 문자.
" ....하! "
문자를 읽자 마자 터져나온 헛웃음. 어이가 없어서. 하. 진짜. 와.기가 차니까 진짜 말도 안 나온다. 해도해도 너무하다. 이 인간들.
우리가 제주도에 가있는 동안 고 사이에 네 분이서 작당한게 분명하다. 추진력이 미친 수준이다.
할말이 너무 많아 뭐부터 따지고 들어야할지 어디서부터 어떻게 손봐야할지 감도 잡히질 않는다. 창문이라도 깨고 들어가야 하나 싶어 주위에 있는 짱돌을 하나 집어들었다가
이성적으로 생각하자며 내 자신을 다독였다.
이 말도 안되는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나 싶어 일단 전정국 집에 들어가서 찬찬히 생각해보려 집을 나섰다.
하지만
" ... "
나와 다를 것 없는 전정국. 전정국 또한 본인 집앞에 체념한 듯 서있었다.
" .... "
" .... "
그러다 서로 눈이 마주치고 우리는 서로를 안쓰럽다는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우리 둘다 똑같은 문자를 받은게 분명했다.
낯선 주소와 함께
' 신혼집 '
이라는 세글자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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