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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장이 터질 것 같아.
화가 나서 그러는 건지 아니면 다른 이유인지 확실하게 구분이 가지도 않아.
은성이는 새빨갛게 달아오른 얼굴을 두 손안에 묻고는
빙글빙글- 방 안을 걸어 다니다가 이내 풀썩- 침대에 쓰러지듯 누워.
"짜증 나"
가는 신음 같은 목소리가 그녀의 입술 사이로 새어 나와.
은성이는 숨을 몰아쉬면서 쿵- 쿵- 부서져라 가슴을 두드리는 심장을 진정시키려 애를 써.
화가 나서 그런지 눈물이 자꾸만 배어 나와 억울해서 죽을 것만 같아.
어떻게 이런 짓을 할 수 있는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아.
'뭐? 키스를 했다고? 오늘 키스를 했다고?'
숨겨둔 애인 없냐며 추궁하는 것도 화가 나 죽겠는데
그 와중에 자신이 오늘 다른 여자와 입술을 부딪혔다 아무렇지도 않게 얘기하는 택운에 어떻게 열받지 않을 수 있겠어.
그건 둘째 치고 그 입술로 자신에게 키스하는 건 도대체 무슨 심보인지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은성이는 화가 나서 침대에 얼굴을 묻고 엉엉 울어버리고만 싶어.
'공평 같은 소리 하고 있네'
은성이는 베개를 꼭 끌어안고 속으로 소리를 질러.
공평이라는 단어를 이럴 때 쓰는 게 맞냐고 집현전에 가서 물어보고 싶을 정도야.
한 달이 넘도록 자신이 무얼 위하여 그에게 그렇게 노력해왔는지 갑자기 후회가 되는 것 같기도 하고,
사근사근 나긋나긋할 때에는 거들떠도 안 보더니 갑자기 간섭하려 드는 택운이 은성이는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아.
아니, 간섭하지 말라고 한 사람도, 다른 여자를 만나는 것도 결국에는 다 택운이면서 말이야.
친구 한 번 만나고 왔다고 이렇게 고약한 짓까지 할 것은 없지 않았냐며 은성이는 속으로 그를 욕해.
사랑하지도 않으면서, 사랑하지도 않으면서 이런 식으로 입을 맞추는 게 말이나 돼?
결국 제일 나쁘고 제일 더러운 것은 그였으면서.
그 흔한 말 한 마디, 작은 미소 한 번 지어주지 않은 것도 다 그였으면서.
이제 와서 마치 내가 나쁘다는 듯 말하고,
세상에서 제일 진득한 키스를 퍼붓는 게 말이나 되냐고.
그런데 그러는 와중에 제일 화가 나는 게 뭔 줄 알아?
솔직하다 못해 정직해서 터져버릴 듯 뛰고 있는 심장이 제일 화가 나는 거야,
그가 미우면서도 자꾸만 맴도는 그 입술의 감촉이 너무 화가 나는 거야.
쓸데없이 숨길 수 없는 자신의 감정이.
두근- 두근-
두근두근?
*
택운은 천장을 바라보며 침대에 누워있어.
눈을 끔뻑이며 아무것도 없는 허공을 가만히 바라봐.
어느새 동이 텄는지 블라인드 사이로 햇볕이 스며들고, 잠에 들지도 못한 그를 깨우려 알람이 울어대기 시작해.
무슨 생각을 그렇게 많이 했는지 택운은 뜬 눈으로 밤을 지샜어.
그러니까, 그는 자신이 왜 그녀에게 입을 맞췄는지 알아내기 위해 되지도 않는 밤을 뜬 눈으로 보낸 거야.
하지만 그런 가상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머릿속에 남은 것은
은성이의 입술이라던가, 눈물이라던가, 눈빛이라던가...
그러니까, 해답은 없고 결국 어젯밤의 사실들만 남아 그의 속을 뒤집어놨어.
차은성이라는 그 이름이 말이야.
계속 그를 뒤척이게 만드는 거야.
마치 그날의 그 눈빛처럼.
상처 입은 눈빛처럼.
택운은 제 머리칼을 헝클어뜨리며 이내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피곤함이 온몸에 쌓여서는 얼굴이 저절로 구겨지는 것을 참을 수 없어.
도대체 자신이 왜 고작 차은성 때문에 잠을 이루지 못했는지 그는 알아낼 수도 없었어.
그저 본능적으로 더 키스하고 싶었을 뿐이야.
그저 본능적으로 더 가지고 싶었을 뿐이야.
이상하게도 말이야.
이상하게도 얼굴이 달아올랐단 말이야.
너와 입을 맞출 때면.
택운은 욕실로 향하려다 문득 부엌에서 들려오는 달그락 거리는 소리에 문쪽으로 걸어가.
어느새 일어났는지 은성이 아침을 준비하고 있는 소리가 들려.
택운은 고개를 돌려 시계를 확인하다 문고리를 슬며시 잡어.
나갈까 말까 고민하는 표정이 그의 얼굴에 그림자처럼 드리워져.
한참을 그러고 있다가, 한참을 그렇게 입술을 잘근거리다가 택운은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저었어.
차마 문을 열고 나갈 용기가 나지 않아. 아니, 왜 용기가 필요한 건지도 모르겠어.
이내 택운이 돌아서서는 다시 욕실로 향해.
달그락- 달그락- 그릇이 부딪히는 소리.
제 소매를 꼭- 꼭- 접어주던 은성이의 손가락.
그가 출근 준비를 끝마치고 밖으로 나왔을 땐, 언제나 그랬듯 은성이의 자취는 이미 사라진 뒤였어.
택운은 식탁에 앉아서 잘 차려진 아침 상을 쳐다보다가 그녀의 방으로 눈길을 돌려.
그러고는 콧등을 찡그리더니 이내 숟가락을 들어.
참 이상한 여자야.
너무 이상해서 계속 생각이 나는 걸지도 모른다고 그는 생각해.
한결같이 차려져 있는 이 밥상도, 상처받은 그 눈빛도 다 너무 진심인 것 같잖아.
아니, 누가 봐도 진심이잖아 그녀의 모든 움직임은.
도대체 언제부터 시작됐는지도 모르겠고,
왜 자신에게 이렇게 애를 쓰는 지도 모르겠어.
택운은 그게 싫어서, 그러면서도 어제저녁 자신의 행동이 신경 쓰여서 괜히 마음이 불편해.
한참을 그렇게 깨작거리다가 식탁 가운데 떡하니 올려져 있는 계란 프라이를 한 입 집어삼켜.
문득 입안에서 와드득- 하는 소리에 택운은 인상을 쓰며 입에 넣었던 것을 뱉어내.
"아-!"
택운이 제법 짜증스러운 신음을 흘리며 텁텁한 입을 헹구러 싱크대로 향해.
계란 프라이에 껍질이 들어갔는지 입안에서 부서져 까끌까끌하게 입속을 헤집어 놨어.
택운은 물 한 모금을 들이켜고는 다시 자리에 앉아.
고민하는 듯 젓가락을 잡고 계란 프라이를 노려보다가 이내 그것만 빼고는 다른 반찬에 손을 대.
'실수겠지' 하고 택운은 생각해. '실수할 수도 있지' 하고.
..........과연?
*
"오늘 따라 피곤해 보이네-"
간드러지는 목소리가 오피스 안을 매워.
의자에 앉아 잠깐 눈을 붙이던 택운은 이내 슬며시 눈을 뜨며 문을 잠그며 들어오는 현아를 바라봐.
아- 언제 봐도 참 매혹적인 눈웃음이야.
섹시한 하이힐에 쭉- 뻗은 다리, 도톰한 입술에 화려한 곡선.
어떻게 안지 않고 배길 수 있겠어.
"신혼이라 그런가?"
그런 그녀의 의미심장한 질문에 택운은 미간을 찌푸리며 마른 세수를 해.
현아는 낮은 웃음을 흘리며 택운의 얼굴을 쓰다듬어.
그런 그녀를 올려다보며 택운은 천천히 눈을 깜빡여.
"나는 자기의 그런 눈빛이 좋아, 차가우면서 섹시하거든"
"....."
"그 꼬맹이는 어떤 눈으로 쳐다보나 심히 궁금하네-"
"하고 싶은 말이 뭐야"
"우리가 뭐 말로 대화를 나누던 사이는 아니었잖아"
그 한 마디에 택운은 픽- 하고 웃음을 터뜨리며 이내 그녀의 손을 치워.
자리에서 일어나는 택운을 바라보며 현아는 그의 책상에 걸터앉아.
택운은 양 팔을 책상에 올려 그녀를 가두고는 천천히 고개를 기울여.
그의 코끝이 그녀의 목덜미에 닿을 것 같아.
"오늘은 좀.. 피곤한데?"
문득 택운이 입꼬리를 올리며 질문 같은 말을 뱉어내.
현아는 눈을 치켜뜨고는 그런 그를 바라보며 미간을 찌푸리고,
택운은 그녀에게 떨어져서 이내 다시 제 의자에 털썩- 주저앉아.
"할 거면 끝까지 하던가. 간 보는 것도 아니고 뭐야-"
"나가봐"
"아니면 뭐, 진짜 어제 힘쓸 일이라도 있었어?"
"그만-"
현아의 한 마디에 택운이 미간을 찌푸리며 눈을 꾹- 감아.
현아는 눈을 흘기며 그를 바라보고 택운은 갑자기 치밀어 오르는 어젯밤의 기억에 짜증스럽게 입술을 깨물어.
또다, 밤새도록도 모자라서 이제는 하루 종일 생각나려고 하는 은성이의 감촉이 또 그를 괴롭혀.
원하지도 않는데 말이야, 진짜 짜증 나게.
"서운하네, 엄밀히 말하면 걔가 세컨든데, 일 년만 기다리라던 때는 언제고"
"쓸데없는 생각하지 마, 그런 거 아니니까"
"그럼 증명해 봐"
"뭐?"
"키스를 하던, 뭘 하던 증명해 보라고"
현아의 도발적인 말에 택운은 그녀를 바라보며 제 입술을 핥아.
아- 피곤해서 죽을 것 같은데 차은성이는 자꾸 아른거리고,
아침에 먹은 것은 얹혔는지 여간 속이 더부룩한 게 아니야.
짜증 나.
"피곤하다고 했잖아"
그의 차가운 목소리에 현아는 정말 화가 난 듯 제 아래 입술을 깨물어.
그녀가 팔짱을 끼더니 이내 그에게 말해.
"나 이런 걸로 민감한 여자 만들지 마, 일 년 기다리는 것도 솔직히 마음에 안 드니까"
".....그래서?"
"너 할 말이 그게 다야-?"
"원래 말로 대화를 많이 하던 사이는 아니라며?"
"정택운!"
"....시끄러워, 그만 나가"
택운이 미간을 찌푸리며 말하자 현아는 입술을 비틀어.
현아는 이내 팔짱을 푸르더니 또각또각- 구두 소리를 내며 사무실 밖으로 나가버려.
"진짜 나 잡고 싶은 거 맞으면 일 년 안에 끝내"
문득 그녀의 목소리가 그의 오피스에 울려 퍼져.
택운은 눈을 꾹 감고는 미간을 찌푸리고 있어.
"아니면 내가 그 안에 끝나게 해줄 테니까"
쾅- 하고 문 닫히는 소리가 웅- 웅- 귓가에 울려 퍼져.
택운은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젖혀.
아- 짜증 나.
*
'실수?' 택운이 젓가락을 식탁에 탁- 소리 나게 내려놓으며 속으로 뇌까려. '실수 같은 소리 하고 있네-!'
일주일 내내 같은 집에 살면서 얼굴 한 번 보기 힘들어진 차은성이는
이제 목소리까지 듣기 힘들게 제 방에 콕- 박혀서 나올 생각도 하지 않고,
일주일 내내 식탁 위에 떡하니 올려진 계란 프라이에서는 약속이나 한 듯 빠짐없이 계란 껍질들이 나오고 있어.
처음에는 실수겠지 생각했던 택운도 이제는 참다 참다 못 참겠어서 밥 먹는 것도 잊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진짜 어울리지도 않는 짓이라는 걸 택운도 잘 알고 있어.
하지만 뭘 어쩌겠어, 적어도 퇴근하는 시간에는 식탁에 앉아 자신을 기다리던 은성이
일주일이 지나도록 얼굴 한 번 비칠 생각을 안 하잖아.
그녀의 시집은 여전히 그의 책상 위에 올려져 있고, 아직고 그 입술의 감촉은 아른거리고.
도대체 정리가 되는 게 아무것도 없어 속이 터질 것 같아.
느지막한 아침 식사를 빨리 끝내버린 택운은 그녀의 방 문 앞에 다가서서는 불만 가득한 얼굴로 문고리를 잡아.
'어쭈?' 돌아가기는커녕 꽉- 잠겨있는 방 문에 택운은 미간을 찌푸리며 입술을 깨물어.
그러더니 심호흡을 삼키며 그녀의 방문을 두드려.
쿵- 쿵- 쿵-
기척 하나 없는 고요만이 맴돌아.
택운은 이내 제 입술을 한 번 핥더니 다시 한 번 방문을 두드려.
쿵- 쿵- 쿵-
또 대답이 없어.
대답이 없다고.
"야, 문 열어"
참다못해 택운이 입을 열고는 말해.
"....일어난 거 아니까 문 열..ㄹ"
으응?
과연 문이 열렸을까?
아니면 다른 거?
*
"여보세요"
그녀의 목소리, 매혹적인 그 목소리.
"나 좀 도와줘"
*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내색하지 말아줘.
이제 너는 빌려 간 내 책 위에 젖은 유리 잔을 올려놓아도
상관없는 사람이 된 거야.
[에드윈 알링턴 로빈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