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뭐예요?"
말을 다 끝마치기도 전에 은성이 방 문을 열어.
택운은 벙찐 얼굴로 가만히 그녀를 내려다보다 입을 꾹 다물어.
막 샤워를 하고 나왔는지 은성이에게서 따뜻한 온기가 풍겨와.
은은한 샴푸 냄새가 나는 것 같기도 하고, 괜히 코끝이 간질거려.
은성이는 문을 두드리다 말고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택운이 이상해서 눈을 가늘게 뜨며 그를 응시해.
그제야 그녀의 시선이 느껴졌는지 택운은 헛기침을 하며 입술을 움직여.
"너, 계란 프라이-"
그가 말을 하다 말고 그녀를 쓱- 위아래로 훑어봐.
그러고는 벽에 팔을 짚고는 가만히 은성을 응시하다 다시 입을 열어.
외출복 차림의 은성이 그의 앞에 서 있어.
"어디 가?"
"계란 프라이는 왜요?"
"아니, 됐고 너 어디 가냐고"
"어디 가죠"
택운을 슬쩍- 비껴가며 은성이 부엌으로 향해.
택운은 벽에 댔던 팔을 떼고는 몸을 돌려 은성을 바라봐.
계란 프라이고 자시고 이제는 별로 중요하지도 않아.
아니, 뻔하잖아, 일부로 넣은 게. 유치하게.
은성이는 탁상에 올려뒀던 차 키를 쥐고는 그를 슬쩍 바라봐.
택운은 제법 날카로운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다 큰 보폭으로 성큼성큼 은성이에게 다가가.
은성이는 얼른 가방에 차 키를 넣으며 택운을 바라보고, 택운은 그런 그녀가 얄미워서 문득 발걸음을 멈춰.
그런 그의 눈을 바라보던 은성이는 이내 한숨을 삼키며 입술을 움직여.
"나 장 보러 가요"
"......"
"이제 어디 가는지 말했으니까, 됐죠?"
"....."
평소와 같이 대답이 없는 택운에 은성이는 답답함을 숨기고 아무렇지 않은 척 돌아서.
택운도 이내 인기척도 내지 않고 방으로 들어가 버리고, 은성이는 무덤덤해진 마음으로,
아니 적어도 무덤덤한 척하려 애쓰는 마음으로 현관으로 향해 신발을 신어.
불현듯 신발을 신고 있는 그녀의 위로 기다란 그림자가 드리워져.
은성이는 이내 고개를 들자 그 앞에는 택운이 외투를 들고 서 있어.
".....뭐..?"
"같이 가"
은성이 말을 다 끝내기도 전에 택운이 그녀를 쳐다보지도 않으며 중얼거려.
어느새 제 곁에 다가와서 신을 신는 택운을 은성이는 의아한 듯 바라봐.
아니, 그러니까, 이건 진짜 부부들이나 하는 일 아니야?
은성이는 지금 이 상황이 믿기지가 않아서 기가 막힐 지경이야.
자신을 거들떠도 안 보던 이 남자가 지금 장 보는데 같이 가겠다 그러는 게 꿈인지 현실인지 분간도 안 가.
그러다가도 마냥 좋기보단 문득 의심스러운 마음에 괜히 입술을 잘근거리며 택운을 바라보고 있어.
"뭘 그렇게 봐?"
신발을 다 신고 일어난 택운이 자신을 바라보는 은성이의 시선을 느꼈는지 꽤나 퉁명스레 물어.
"같이 안 가도 돼요, 혼자 사 올 수 있어요"
"너 혼자 못 들고 올까 봐 같이 가자는 거 아니야"
"...."
"껍질 들어간 달걀 사오나 안 사오나 감시하러 가는 거지"
현관문을 열면서 툭- 던지는 택운의 한 마디에 은성이는 눈을 끔뻑이며 그를 바라봐.
택운은 문을 열고는 가만히 서서 미동도 없이 자신을 쳐다보는 은성이의 눈을 마주해.
이상한 여자야. 눈을 보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빤히 다 보이는 저 여자는.
"차 키"
택운이 은성이에게 손을 내밀며 말을 해.
은성이는 가만히 서 있다 그의 한 마디에 화들짝 반응하며 가방을 뒤적거려.
가방에서 차 키를 꺼낸 은성이 그걸 그에게 건네.
그러고는 돌아서는 그의 뒤를 졸졸 따라 아파트 복도를 걸어.
'장 보러 같이 간다니 진짜 부부 같잖아' 하며 괜히 단 맛을 마음으로 삼켜.
그러다가도 알 수 없는 그의 속마음에 의뭉스러움이 넘치고,
괘씸했던 입맞춤에 아직도 화난 마음이 솟구쳐서 그저 입을 꾹- 다물고 엘리베이터에 올라타.
참, 이렇게 소소한 게 좋을 뿐인데.
그냥 이렇게 소소하면 좋을 텐데.
함께 소소하게 행복하면 참 좋을 텐데 말이야.
*
복잡하고 화나고, 답답하고 걱정되고.
온통 정신이 차은성이한테 쏠려있는 홍빈은 자신의 일주일이 어떻게 흘러갔는지 잘 기억도 나지 않아.
한참을 서재에 박혀서 책을 읽던 홍빈이 이내 출출했는지 자리에서 일어나.
뭐 먹을 게 있나 싶어 냉장고를 여는데, 웬걸 텅- 텅- 비어서 냉기만 맴도는 거야.
'장 보러 가야겠네-'
홍빈은 머리를 긁적이며 그런 생각을 해.
'집에 먹을 게 이렇게 없었나?'
*
"과일- 과일-"
중얼중얼 거리며 움직이는 은성이의 뒤를 따라 꽤나 못마땅해 보이는 택운이 카트를 끌고 있어.
은성이는 손에 작은 종이를 들고는 무엇을 살지 꼼꼼히 체크하고, 택운은 카트 손잡이에 턱을 괴고는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봐.
진짜 이상하지 않아? 그의 등을 쳐다보던 건 언제나 그녀였는데 말이야.
"멀었어? 뭐 이렇게 오래 걸려"
택운이 피곤하다는 목소리로 은성이에게 말을 해.
"거의 다 샀어요, 뭐 먹고 싶은 거 없어요?"
"없어"
"그럼..."
곰곰이 생각하며 은성이 발걸음을 옮겨.
택운은 자신이 여기서 뭘 하고 있는지 도통 모르겠다는 얼굴로 서 있다 이내 카트를 밀어.
문득 고개를 들고 주변을 두리번 거리니 아니나 다를까 주말이라 그런지 함께 장 보러 나온 가족들이 많아.
괜히 지루한 마음에 택운은 여기저기 둘러보다가 문득 눈에 익은 실루엣을 맞닥뜨려.
그가 눈을 가늘게 뜨고는 자신이 보고 있는 인물을 가만히 관찰해.
어느새 오렌지를 들고 카드로 다가온 은성이 그런 그를 가만히 바라보다 입술을 움직여.
"택운씨 뭐 봐요?"
그렇게 질문을 하며 그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리는 은성에 택운은 손을 뻗어 그녀의 눈을 가려.
은성이는 갑자기 찾아온 어둠에 놀라서는 제 눈을 꼭- 가린 택운의 큰 손을 두 손으로 잡고는 미간을 찌푸려.
"뭐 하는 거예요, 안 보여요-"
"됐고. 이리 와"
택운은 그녀의 말을 간단히 무시하며 눈을 가린 채로 은성을 끌어당겨.
한 손으로 카트를 밀고 또 다른 한 손으론 그녀에게 어깨동무를 하며 눈을 가리고는 택운은 짜증 난다는 얼굴로 서둘러 발걸음을 옮겨.
은성이는 자신의 어깨에 둘러져있는 그의 팔이 신경 쓰여서 견딜 수가 없어.
오늘따라 향수 냄새도 더 짙은 것 같고,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러는지 알 수 없어서 은성이는 조금 긴장돼.
그녀가 입술을 삐죽거리며 그가 이끄는 대로 걸어가.
"얼마나 이러고 있어야 해요?"
여전히 제 눈을 가린 택운의 손을 양손으로 꼭 쥐며 은성이 말해.
택운은 제 손을 잡고 있는 그녀를 가만히 내려다보다가 이내 입술을 움직여.
생각보다 작은 손, 그때 봤던 그 손가락.
"조금마...ㄴ"
"은성아"
택운이 채 말을 끝마치기도 전에 친근하고 익숙한 목소리가 은성이의 귓가에 내려앉아.
은성이는 놀라서 택운의 손도 아랑곳 않고 뒤를 돌아보고 택운은 저절로 떨어진 제 손을 못마땅하다는 듯 바라보다 이내 목소리의 주인공을 쳐다봐.
은성이의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가 피어올라. 눈꼬리가 예쁘게 휘어지고 꼭 싱그러운 웃음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아.
택운은 그녀의 얼굴을, 변화는 표정을 유심히 응시해.
이상해. 이상하다.
또 이상하게 짜증이 나.
그렇게 웃는 네 얼굴을 보면 나는 이상하게 짜증이 난다고.
예상치 못한 곳에서 마주친 홍빈이 반가워 은성이는 미소를 지으며 그에게 다가가.
택운은 자신도 모르게 그런 그녀를 향해 손을 뻗었다가 스스로 놀라서 얼른 아무 짓도 안 한 척 손을 거둬버려.
그러고는 홍빈을 향해 걸어가는 은성을 바라보다 얼굴을 구기며 고개를 돌려.
'아- 씨 집에 가고 싶다 진짜'
*
집에 가고 싶다는 그의 바람을 무참히도 부숴버릴 심산인지 홍빈은 시간 있으면 차나 한 잔 하자며 이야기하고,
택운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눈빛으로 멀리서 은성을 쳐다보지만 은성이는 홍빈과 이야기하느라 그런 그를 눈치채지 못해.
멀리서 보내는 그런 신호까지 알아차리기에는 그리 가까운 사이는 아니었으니까.
"홍빈이가 차 한 잔 하자는데 시간 있어요?"
은성이 홍빈과 함께 걸어오더니 택운에게 물어.
"나 바빠"
"바쁘면 먼저 들어가시죠, 은성이는 제가 데려다줄 테니까"
홍빈의 그 한 마디가 문득 도발로 들려.
택운은 무표정한 얼굴로 눈썹을 쓱- 올리더니 얼마 안 가 입꼬리를 씩- 올리며 은성이의 손목을 잡아당겨.
은성이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의 곁으로 끌려지고, 홍빈은 그런 그를 못마땅한 얼굴로 바라봐.
택운은 아무렇지도 않게 은성이의 어깨에 팔을 두르며 입술을 움직여.
"아무리 바빠도 어떻게 외간 남자랑 두고 갑니까, 와이프를"
무슨 삼자대면도 아니고 이상한 정적이 맴돌아.
은성이는 괜히 눈을 굴리고 있고 택운은 여전히 그녀의 어깨를 감싸 안고는 홍빈을 바라보고 있어.
홍빈은 꽤나 편안하게 앉아서는 택운을 싫어하는 자기 표정을 숨길 생각도 안 하고 있었어.
은성이는 숨이 막혀 죽을 것 같은 얼굴로 있다가 택운을 바라보는 홍빈의 표정을 보고는 으름장 놓듯 아랫입술을 꾹- 깨물어 보여.
홍빈도 그녀의 표정을 봤는지 피식-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나.
"잠시 실례 좀-"
핸드폰을 흔들어 보이며 나가는 홍빈을 택운은 눈으로 쫓다 커피를 한 모금 마셔.
그러다가 문득 느껴지는 은성이의 머리카락에 택운은 그녀를 감싸 안았던 팔을 푸르고는 고개를 돌려 은성을 바라봐.
은성이는 조금 아쉬운 마음에 택운을 올려다보며 말해.
"그... 조금 더 그러고 있어도 되는데..."
"...."
택운은 대답 없이 그렇게 말하는 은성을 무표정하게 바라봐.
은성이는 이내 작은 숨을 내쉬며 그에게서 한 뼘 떨어져 앉아.
그 작은 틈의 몇 배가 되는 거리감이 그녀에게 엄습해.
무서운 일이야. 괘씸한 키스가 밉다가도, 작은 스킨십에 가슴이 뛰게 된다는 건.
조금씩 조금씩 더 당신을 원하게 된다는 건.
택운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미안 전화가 와서-"
홍빈이 해사한 미소를 지으며 자리에 앉아.
은성이는 "괜찮아-" 하며 평소처럼 웃어 보이고,
그게 평소인 적 없던 택운은 다리를 꼬고 등을 등받이에 기대.
"많이 바쁘신가 봅니다. 이 변호사님"
"요새 비슷한 케이스들이 하도 많아서요. 좀 바쁘긴 하네요."
"바쁘시면 먼저 들어가시죠"
"오랜만에 친구 만났는데 이 정도 시간이야 낼 수 있죠"
"...오랜만?"
"정 사장님이야말로 바쁘시다면서 먼저 들어가 보세요. 은성이야 제가 알아서 잘 데려다줄 테니까. 뭐 아닐 수도 있고-"
꽤나 차갑게 오고 가는 대화에 은성이는 기분이 이상해서 얼른 찻잔에서 입술을 떼고는 홍빈을 바라봐.
홍빈은 '내가 말했잖아-' 하는 얼굴로 그녀를 흘끗 바라보다 이내 택운을 향해 미소를 지어.
택운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홍빈을 바라봐.
은성이 마침내 답답했는지 화제를 돌리려 홍빈에게 말을 걸어.
"이번엔 어떤 사건 변호하게 됐어?"
"뭐... 별거 아니야. 이혼 소송"
"아..."
말을 잘못 꺼냈다 싶었는지 은성이의 입술 사이로 가는 신음이 새어 나와.
홍빈은 아랑곳 않고 말을 이어가고 택운은 그런 홍빈을 바라보며 미간을 찌푸려.
"요새 간통법 폐지됐다고 뭣도 모르고 활개치는 불한당들이 한 둘이어야 말이지"
"...그...그래?"
"이러다가 이혼 전문 변호사 되겠어"
"홍빈아"
"은성이 너도 이혼할 것 같으면 나한테 연락해라"
"너 무슨 말을 그렇게.."
"위자료 두둑하게 받아줄게-"
문득 탁- 하는 소리가 카페 안에 울려 퍼져.
은성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택운을 바라보자 택운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나.
그러고는 은성이의 손목을 잡고는 그녀를 일으켜세워.
"우린 먼저 가봐야겠는데- 할 일이 생각나서"
그렇게 말하는 택운을 바라보며 홍빈도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우리라고 하기엔 은성이는 전혀 모르는 것 같은 얼굴인데요?"
"모를 수밖에 없지"
택운이 홍빈을 보며 이야기해.
"이런 얘기 밖에서 하다 잡혀가면, 이 변호사님이 변호해 줄 겁니까?"
*
특별한 사이라는 건 어떤 걸까.
손이 닿아도 싫지 않고
그의 부드러운 입술이 기분좋고
머리카락 냄새만 맡아도
가슴이 떨리는 걸로는
아직 특별한 사이가 아닌 걸까?
[다나베 세이코 / 고독한 밤의 코코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