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 맥스
미래그룹 돌아가는 꼴 보다 보면 석진은 이러다 제 명 못 채우고 이대로 먼저 이승과 작별하겠지 싶었다. 가는데 순서 없다고 지옥행 예비 1순위 선발로 끌려나갈 처지였다. 약속 없던 석진의 급습에 한창 농땡이를 부리던 사옥 8층 상주 인원 오십 명이 허겁지겁 몸을 일으켰다. 제발 정신 좀 차리세요 다들. 석진의 펜촉 끝으로 서류를 기분 나쁘게 찍어 누르다가 마지막 힘을 크게 주자 일동 주춤하며 뒤로 밀려났다. 마치 가슴팍에 비수 하나 씩들 꽂힌 것처럼 이상행동을 보이며 말이었다.
그대로 팔을 떨군 전자가전팀 이사가 검은 정장을 넘어 손목에 채워진 고급 시계까지 눈으로 흝었을 때 다시 석진의 성난 목소리가 들려 왔다. 목소리가 어찌나 큰지 저만치 떨어진 비서실까지 덮친 한기에 모두 부르르 떨었고, 재빨리 눈을 깔고 발소리를 죽였다.
절로 무거운 한숨이 바닥 저 너머로 깔렸다. 집무실로 돌아오자마자 실장은 별 말 없이 연락이 왔었다는 이야기를 전했다. 더불어 친히 메모까지 전해 주고 대답을 듣기도 전에 호출로 인해 홀연히 사라져버렸다. 의아함이 일었다. 대다수는 굳이 석진에게까지 이어지지 않고 비서실을 통해 딱 간단명료 하게 용건만 전달했다. 주머니에 한 손을 쑤셔 놓고 갸웃거리던 석진이 순간 우뚝 멈춰 섰다.
[ 3시 가족 모임. 장소 서초동 본가. ]
맞다. 까먹고 있었네. 큰일 날 뻔 했다. 빠르게 옷걸이에 걸린 자켓을 낚아챈 석진이 급하게 껴 입었다. 약속 늦는 걸 회삿 돈 삥땅 치는 것보다 싫어하는 석필이었다. 매우 급한 상황이었으나 최대한 침착하고 냉정해지기 위해 석진은 차분하게 심호흡을 몇 번 했다. 몇 년 간 진절머리 나게 호흡을 맞춘 콤비 답게 실장은 세차가 되어 후광이 나기 직전의 차를 꺼내 놓고 대기 중이었다.
실장은 엑셀을 더 힘주어 밟았다. 내비게이션에서 익숙한 여자의 목소리가 흘러 나왔다. 거침없이 핸들을 꺾은 차는 고속도로를 빠져 나왔다. 세상 무서운 줄 모르는 석진도 딱 하나 겁 먹는 존재가 회장님이었다. 김 회장 눈엔 아들이기 전에 그저 일개 부하직원일 뿐이기에 무시 하나로 일관해 오던 석진도 감히 무사할 수 없었다. 무시는 곧 자살행위였다. 목숨 내 놓고 제 발로 사약길 걷는 건 사양이었다.
그건 그거고, 무려 반 년만이건만 본가로 소환되는 발걸음은 축 처졌다. 강남으로 들어오자마자 바로 위치해 있는 본가는 멀리서 봐도 한 눈에 식별 가능했다. 알고 찾아온 사람이 아니어도 헤맬 수 없을 만큼 대저택이었다. 영화 속에서 나올 법한 으리으리 궁궐 같건만 어쩐지 석진의 표정은 잔뜩 이골이 나 있었다.
화려한 저택의 외관과 달리 삭막하기 짝이 없는 식사가 시작되었다. 이딴 게 무슨 가족일까 싶으면서도 석필에게 존재감을 부각할 기회인 만큼, 다들 사람 좋은 척 웃고 있어도 뒤로는 기싸움이 치열했다. 보금자리가 되어야 할 집에서 마저 비지니스의 연장선상일 뿐이었다. 이렇다 할 가족애 같은 건 없었다.
갈수록 석진은 시궁창에 버려진 표정으로 변모했다. 머릿 속이 폭탄을 맞은 것처럼 작살나 나뒹굴었다. 집이라면 몸서리부터 치는 이유는 뚜렷했다. 이렇게 된통 눈 뜨고 코 베이는데 누가 좋아하겠어. 결혼이라는 안건으로 각 주장을 대변하며 의견이 분분한데 막상 그 안건의 당사자만 쏙 빼 놓고 토론질이었다. 당사자가 빠진 공론화는 공갈이라 배웠는데. 배운 만큼 배운 인간들이 이렇게 답답해서 쓰나. 유학이다, 박사 학위다 뭐다 하면 싸지른 돈들은 결국 다 헛짓거리였다.
”아니, 그니까 ….다들 진정하시고. 왜 제 인생 중대사를 본인들끼리 논의하시냐고요.”
타이밍 좋게 낮게 깔린 석진의 음성이 퍼졌다. 일제히 쏠리는 시선을 느끼며 석진이 살풋 미소 지었다. 가식으로 점철된 입꼬리 미동이었다. 눈치를 보며 제 입이 열리기만을 기다리는 모양새가 제법 볼 만했다.
”사람 불러 넣고 말이에요. 하기 싫다는 사람 불러 놓을 거면 회유하는 정성까진 아니어도 적어도 밥 다 먹을 때까지 기다려 주는 인내심 정돈 보여야 하는 거 아닌가 싶은데. 체하겠어요 진짜.”
석진이 차분한 어조를 유지한 채 일정한 음높이로 말을 이어갔다. 석필은 영자 신문에 눈을 박고 눈길조차 안 주었다. 그 콧대 높은 자제들이 모여 과연 한다는 말싸움 수준 자체가 땅 바닥을 기고 있었다.
”그러니까 그때 결혼을 했어야지. 오죽 너가 처신을 제대로 못 했으면 그렇게 매몰차게 뒤도 안 돌아보고 갔겠냐. 그렇지 않아요, 아버지?”
빨리 먹고 집에서 나가려는 일념 하나로 먹음직스럽게 앞에 놓인 음식들을 해치워 가던 석진이 고개를 들었다. 이젠 인신 공격까지 하시겠다 이건가. 굳어진 석진의 얼굴은 보이지도 않는지 석중은 비웃음을 흘리며 입을 놀렸다. 냉소적인 미소를 짓던 석중이 이후 내뱉은 말은 더욱 충격이었다.
”그때 세기의 로맨스니 뭐니 난리 났었지 아마? 경쟁관계 가문끼리 정치적 라이벌에서 사돈 돼서 거대 투자 기대된다고 떠들썩 했잖아. 결국엔 콩고물 떨어지긴 커녕 배드 뉴스로 끝났지만.”
”뭐라고?”
더 이상 참지 못한 석진이 꾹 참고 있던 성질을 폭발하고 일어서 큰 소리가 나자, 우르르 모두가 꿀 먹은 벙어리처럼 입을 다물었다. 신랄하게 이죽거리는 태도에 말을 잃었다. 석연이 제 딴에는 그만 하라며 옷자락을 붙잡고 곤란하다는 의사를 표시해 왔지만 터진 주둥아리는 멈출 줄을 몰랐다. 이미 감정을 드러낸 석진에겐 형이고 뭐고 눈에 뵈는 게 없었다.
”그러는 형님께서는.”
”…. …..”
”그렇게 잘나셔서 아우한테 물고 늘어질 게 결혼밖에 없나?”
그 서늘한 대꾸 탓에 주변의 공기는 찬물을 끼얹은 것처럼 냉랭하기 그지없었다. 그래도 밖으로는 허울 좋은 ‘형아우’라는 이름을 달기 위해 조심하던 게 웃길 정도로, 지금 눈 앞에 있는 석중의 태도는 한 판 하자는 거였다. 석진이 신경질적으로 깔끔히 올린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뭐 이새끼야?”
”그러게, 형이 잘 했으면 애초에 내가 한국에 돌아올 일도, 이렇게 말라 죽을 일도 없었을 거 아냐. 쥐죽은 듯이 외국에서 살려고 했는데 그 계획 다 무산시킨 게 누구야 어? 사주 팔자에도 없는 이 짓꺼리 보고 있는데.”
두 사람은 물 밑으로 몇 년간 치열하게 싸우고 있었다. 안타깝게도 한 명만이 주인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다.
첫째인 석중은 그렇게 실무와 동떨어진 경영수업에만 치중하더니 부회장 타이틀을 얻은 동안 미래그룹 안팎은 물론 재계에서도 긍정적인 평가 하나 얻지 못 하고 의문 부호만 가득했었다. 평가할 만한 뭔가라도 있어야지, 사실 상 전무했다. 현장능력이라곤 쥐뿔도 없었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능력이 발휘될 것이라는 기대와 달리 갈수록 실패가 입증되자 체면 잔뜩 구기고 거지 빈털털이 꼴이 됐다. 석필에게 바짝 엎드려 구걸했지만 씨알도 안 먹혔다. 꼭대기에 설 자격이 없었다. 그에 반해 석진은 미래를 내다볼 수 있었다. 어릴 때부터 남달랐다.
자리를 빼앗았다고 씩씩거릴 게 아니라 비껴 났어야만 했던 곤두박질 친 본인의 가치를 탓해야 했다. 오히려 여자라고 별 다른 기대도 없던 둘째 석연이 현장을 누비며 쌓은 능력이 석중의 다섯 배쯤 됐다. 안 그래도 좋지 않은 심성이 더 고약해질 판이었다. 더 자근자근 밟아 주었다. 있는 힘껏. 석중 같은 보통 인물이 할 수 있는 것과 조금 거리가 멀게, 논리 정연한 소견으로 말이었다.
석중은 석중대로 이를 갈고, 석진은 악에 받쳐 교묘하게 공격을 해댔다. 두 사람 다 종잇장 구겨지듯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그만 못해! 애비 앞에서 다들 못 하는 소리가 없어. 그 가라앉은 분위기 속에서 포커페이스를 유지하는 건 오직 석필뿐이었다.
”이렇게 될까 봐서 안 오려고 했던 거예요. 삼십 오년을 겪었는데 안 봐도 비디오죠. 너무 뻔해서 이 분위기, 이 대사들 싹 다 외우겠어요.”
석진이 경직되어 굳은 얼굴로 손목에 차고 있던 시계를 풀었다. 셔츠 단추 또한 두어 개 끌고 나서야 그나마 죄어 오던 숨이 이따금씩 터져 나왔다. 순간 머리보다 몸이 먼저 움직였다. 무언가 자각도 없었다. 더 이상 할 말이 없다는 듯 몸짓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망연자실해서 자리에 앉아 있는 것조차 힘이 들었다. 온통 뒤죽박죽이었다.
”알겠습니다. 그렇게 학수고대 하시는 선, 볼게요. 그러니까 다신 이런 일로 사람 오라가라 하지 마세요.”
석진은 재빨리 그들의 사이를 비집고 성큼성큼 걸어 현관문을 쾅 닫고 집을 나섰다. 멍하게 있던 사람들이 뒤늦게 정신을 차렸지만 발걸음도 입도 떨어지지 않아 머뭇거리는 사이, 차를 작동시키는 소리가 들렸고, 이내 무언가를 쿠당탕 집어던지는 소음과 함께 차에 시동이 걸리고 멀어졌다.
만류하는 실장까지 보내고 목적 없이 차를 몰던 석진이 갓길에 대고 잠시 숨을 골랐다. 투명한 유리 너머로 텅 빈 눈이 비쳤다. 끝도 없이 방금 상황을 되감아 가며 떠올렸다. 몇 번이고 재생이 되자 석진은 홀린 듯이 핸들에 머리를 몇 번이고 박으며 한숨을 내뱉었다. 더이상 당해낼 방도가 없다. 이 문장만이 머릿 속에 맴돌았다.
석진이 머리 맡에서 시끄럽게 울리는 알람 소리에 인상을 찌푸리며 손을 움직거렸다. 아, 머리 아프네.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끝을 흐렸다. 가정부가 새벽 여섯 시로 맞춰 놓고 간 알람이 시끄럽게 울어대고 있었다. 석진이 눈을 뜨자마자 보이는 천장에 한숨을 푹 내쉬었다. 잔 것 같지도 않은데 벌써 아침이었다. 뻗은 기억도 없이 얼마나 피곤했는지 필름이 모조리 툭 끊겨버렸다.
삶은 쳇바퀴의 연속이다. 인생은 이지선다였다. 일을 하냐, 아님 다 포기하고 그대로 물러 나느냐. 그 마저도 답이 정해진, 꽉꽉 닫힌 질문지였다. 주말이라고 별 다를 것 없이 석진은 퀭한 얼굴로 산처럼 쌓인 서류들과 씨름을 했다.
몇 시간이 흐르는 동안에 흘긋거리는 시선만 여전할 뿐, 별 말은 오고 가지 않았다. 실장은 평소처럼 조용히 입을 다물고 있다가도 걸려온 부름을 받고 넌지시 석진을 불렀다. 대충 행동을 눈치 챈 석진은 할 말 하라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회장님께서 메일 확인하라십니다.”
집안을 개판쳐 놓고서 떠났을 땐 조금이나마 잠잠하겠지 싶었던 게 석진의 마음이었다. 열기도 전에 무슨 글자가 쓰여 있을지 뻔히 보였다. 핑계를 댈 것 같으니 아예 실장을 시켜 수고롭게 두 번 말을 전하는 고집스러움이 눈에 그려졌다.
사내 메일을 열어 놓고서 열까 말까 수없이 반복했다. 정신 사납게 움직이는 엄지가 갈팡질팡했다. 석진이 고민을 거듭하다 있는 힘껏 엄지 손가락 끝으로 화면을 눌렀다.
당장 일주일 뒤 선을 보라는 연락이었다. 프로필까진 아니더라도 적어도 맞선 상대자 이름은 가르쳐 주는 게 예의지, 너무 짧은데다가 성의 마저도 없어 보이는 지시 사항이었다. 똑같이 되갚음 하듯 흰 창에 딸랑 예. 한 글자 찍어 놓고 전송 버튼을 눌렀다. 곧, 밝기가 환해지더니 전송 완료했다는 문구가 화면에 떠올랐다.
석진이 허탈함에 웃음을 흩뜨렸다. 상황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웃음이었다. 다시 시작될 결혼 전쟁에, 벌써부터 진절머리가 났다. 부추기는 성미로 몇 년 전 퇴짜 맞아 놓고도 학습도 안 됐는지 연달아 되풀이질이었다.
”펑크 내실 건 아니죠?”
실장이 눈꺼풀을 들어 올려 한 마디 덧붙였다. 갑작스런 가시 돋힌 물음에 눈살을 찌푸리는 석진이었다.
”펑크 내면요?”
”지금 이 자리가 며칠 안에 공석으로 비워지겠죠.”
석진이 실장에게 물었다. 그것도 잠시 허를 찌르는 정답에 말문이 턱 막히고 말았다. 틀린 말도 아니었다. 아무리 자신을 믿고 맡긴다 한들, 명령 불이행 시 받을 대가는 쓸 것이다. 형 석중이 겪은 지난 날의 눈물 겨운 사투만 봐도 알았다.
”실장님, 같은 날 있을 조찬 미뤄 주세요.”
마지 못해 꺼낸 석진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실장이 어두컴컴했던 핸드폰 화면을 키고 전화를 걸어댔다. 일사분란 하게 일정을 미루는 솜씨가 예사롭지 않았다. 석진이 헛웃음을 흘리며 쏟아지는 서류를 보는 대신 뒷 서랍장으로 던져버렸다.
뭐, 거지 같은 기분을 끌어올릴 방도는 없지만 한 가지 수는 있었다. 개차반으로 선을 보고 나 몰라라 하면 끝이었다. 잘만 둘러댄다면야 들킬 일이 없고 무엇보다, 집안 강요로 나오는 건 피차일반일 텐데 끼리끼리 도와준다는 전우애로 입만 잘 맞추면 그만이었다. 그냥 대충 대충. 잘 끼워서 갈무리 될 그 날만 기다리며 아득아득 이를 갈았다.
남들이 입을 모아 말하는, 그 불우한 환경 속에선 어서 돈을 벌어야 했다. 하지만, 정국은 공부를 포기하고 입에 풀칠하는 것으론 단순히 가계가 나아질 것이라고 생각치 않았다. 학비 없이 고등학교에 다니려면 어떤 요건이 필요한지를 부족한 정보력을 동원해 알아냈고, 그 조건을 채우기 위해 죽을 듯이 공부했다. 3년 내내 꼼짝 없이 검은색 필기가 가득한 책에 코를 박고 공부만 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한국에서 좋은 평을 받는 대학에 입학할 수 있었다. 다들 독한 놈이라며 혀를 차다가도, 결국엔 지금까지 정국이 살아온 환경들을 보며 전부 이해하는 눈치였다.
하릴없이 무거운 박스를 나르다 보면 어느새 퇴근 시간이었다. 한참 출근하는 직장인들 태운 만원 버스를 타고 끝에서 끝으로, 한참을 가다 보면 집은 달동네 제일 꼭대기에 위치하고 있었다. 구불구불한 길을 사이에 두고 누가 선 그은 것처럼 달동네와 고급주택이 나눠졌다. 정국은 한참을 머리를 조아리듯이 졸다 흐르는 종점 방송을 듣고 허겁지겁 일어나 달아나듯 하차했다.
그나마 버스라도 다녀서 다행이지, 눈이 잔뜩 얼기라도 하는 날엔 배차가 아예 없다고 해도 무방했다. 21세기 선진국 대한민국에서 가능한 일인가 싶지만, 정말 가능했다. 그럴 땐 등산로 정상을 오르듯 겨우 벽을 짚어 가며 땀을 뻘뻘 흘려야 했다. 잡 생각을 하며 걷던 정국이 푸, 한숨을 내쉬었다. 전봇대를 기점으로 코너를 돌면 바로 보이는 싸구려 단칸방이 정국의 보금자리였다.
콘크리트도 대충 바르다 말았는지, 너덜너덜 누더기 같았다. 그래도 서울역에서 노숙 생활 안 하는 게 그나마 다행인 건가. 졸음에 묻힌 눈으로 터덜터덜 걷던 정국이 대뜸 들리는 목소리에 놀라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었다.
“정국 학생, 얘기 좀 하자.”
금세 정국이 자리에서 그대로 굳었다. 침이 꼴깍, 목울대가 움직이며 삼키는 소리 마저 들릴 판이었다. 상황을 인지하기도 전에 상대방의 눈썹이 불썽 사납게 치켜 떠졌다. 곧이어 뜯어보듯 흝던 시선이 손가락짓을 하며 비교적 멀쩡한 집 한 채를 가리켰다. 그렇게 피해 다니던 집주인이었다.
앉은뱅이 상을 사이에 두고 독대한 방 안에선 조금의 소음도 없었다. 내밀어진 음료수는 껍질을 벗기지도 못 했다. 참을 수 없는 정적에 무슨 말이라도 끄집어 내야지 싶어 정국이 입술을 간질였다.
“저기,… 아주머니. 그… 집값은.”
“방 빼줘야 할 거 같아. 미안해요.”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먼저 불쑥 튀어 나온 짧은 한 마디는 그 무엇보다 강렬했다. 절망에 가깝다고 해야 하나, 무튼 정국에겐 시한부 선고보다 무서운 것이었다. 정국은 멍하니 집주인을 바라보았다. 예상하지 못한 것은 아니지만, 염치 없게도 얼어 붙긴 했다. 갈 데가 쥐뿔도 없으니 말이었다.
“학생도 알잖아. 집값도 안 올리고 많이 봐준 거. 힘들게 사는 거 뻔히 아니까 차마 말 못 했는데, 이번에 딸 결혼시키면서 나도 수중에 땡전 한 푼 남은 게 없어. 당장 몇 만원도 아까운 상황이라니까.”
평소엔 인심이 푸근한 주인 아주머니인지라 최대한 빨리 방세를 달란 얘기뿐이었고, 정국은 곧 드리겠다며 말을 끼워 맞추곤 했다. 그래도 …. 딱 세 음절 내뱉고 정국이 우물쭈물거렸다. 무슨 말을 해야 그나마 안 쫓겨날 수 있을까. 그제서야 고민하듯 머리를 굴리다가, 이내 더듬더듬 열었다.
“한 달치라도 이번주 내로 내면 안 될까요? 남은 두달 치는 알바를 하나 더 늘려서라도 꼭 바로 드릴게요.”
별다른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정국은 눈치를 살피듯 눈을 들었다, 떨구기를 반복했다.
“휴… 진짜 마지막이라고 생각해도 되지? 우리도 정말 힘들어. 고작 20만원 받아 먹자고 계속 학생 닦달 하는 것도 마음 안 좋고 말야. 진짜 부탁 좀 할게요 정국 학생.”
집주인은 그 다음 말을 기다리지 않고 몸을 일으켜 건너 방으로 넘어갔다. 대출금 갚기도 바쁜 정국이 지키기에는 너무나도 어려운 일이란 걸 알면서도, 다시 한 번 져줄 뿐이었다.
몇 걸음 떨어지지 않은 단칸방으로 가는 발걸음이 직직 끌렸다. 작은 방은 어설프게 등을 굽어야만 180 가까이 되는 키를 소화시킬 수 있었다. 밥 세 끼 제대로 먹고 크지도 못 했는데, 유전인지 DNA를 고대로 물려 받은 탓인지 키만 큰 게 한편으론 짜증났다. 별 걸 다 싫어하는 삶이었다.
한참 미달한 월급으로 모든 걸 책임지기엔 무리를 느꼈다. 갚아야 할 빚을 커버하려고 아무리 가계부를 수십 번 적었다 쓰고, 허리띠를 더욱 졸라매 봐도 쥐똥 같은 신세에서 벗어날 순 없었다. 능력이 없어서 방 한 칸 구하지도 못 하던 신세에 겨우 도움 얻고 누일 자리 얻었는데 이런 민폐가 따로 없었다. 적어도 남한테 피해는 끼치고 싶지 않았는데. 나름대로 정한 개똥 철학 마저 산산히 부서질 터였다. 이불을 피고 구석에 자리 잡고 누웠다. 축축한 이불처럼, 꼭 그렇게 슬퍼졌다.
오늘은 PPT 발표라 빨리 끝난 편이었다. 몇 천원 돈 안 하는 침도 못 맞고 소 마냥 죽어라 일했더니 체력을 끌어올리는 것이 쉽지 않았다. 학교 수업을 마치고 가방을 챙겨 학교를 나섰다. 그나마 가정형편을 알고 있는 재헌이 어물쩡 둘러대 준 덕에 행사나 술자리에선 쏙 빠질 수 있었다. 뭐, 물론 변명거리라곤 집안행사 정도의 하등 유치한 수준이지만. 전정국 가난한 거 누가 몰라. 뒤에서 욕짓거리 비스무리 한 멘트를 던지는 걸 모를 리 없지만 그리 신경 쓰지 않은 타입이었다. 한두 번도 아니고 호박씨 까는 거 모른 척, 평탄하게 넘어가는 방법이었다. 작게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인사를 대신학교 학교를 나섰다.
벌써 4월이었다. 품이 큰 후드티 하나 뒤집어 쓰니까 한껏 숨통이 트였다. 상쾌하기까지 했다. 고작 버스비 하나 아껴 보겠다고 두꺼운 점퍼를 입고 걷다 보면 땀이 뻘뻘 나서 어깨가 묵직했다. 봄이라서 다행이지, 겨울 때를 상기시키는 것만으로도 한숨이 나왔다.
자고로 사람이 먹고 살기가 힘들면 감성이 좀 메말라지기 마련이다. 그런데 그 지긋지긋한 가난 때문에 당장 눈 앞의 미래도 캄캄해서 계산기나 두들기고 있으니 원. 어느 쪽으로나 한 푼이라도 모을 수 있는 방법을 따져 보는 것에 급급했다. 약간의 회의감이 들어 정국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교대 근무자가 쩌억, 입 찢어져라 하품을 하며 편의점을 나서는 모습을 눈으로 쫓았다. 무미건조한 동태 눈깔로 보아 오후가 평탄치 않았다는 것을 증명했다. 잔뜩 근심 어린 표정으로 고개를 젓다가도 금세 입가에 미소를 띄었다. 이유는, 손님이 왔으니까.
“다 해서 7800원입니다. 카드 받았습니다.”
짧게 몇 마디 내뱉은 정국이 물을 한 모금 머금었다. 시원한 액체에 식도를 타고 넘어갔다. 쉬지도 않고 일을 하다 보니 작은 생수병에 담기는 물의 양도 항상 모자랐다.
6시는 편의점의 피크시간이었다. 주변에 회사가 많아 자연스럽게 야근을 하는 직장인들의 발걸음이 들끓었다. 샌드위치, 햄버거, 삼각김밥. 간편하면서도 맛있는 간식거리들이 널린 천국이었다. 계속해서 문이 열렸다 닫히고, 인기척이 멀어질 법 하면 들이닥치는 무리떼를 상대하느라 정국은 눈을 내리깔 틈도 없었다.
조금 한산해질 때마다 지저분한 박스 더미를 치우고 재고를 살폈다. 여전히 익숙해지기 어려운 먼지를 마시면서 켁켁 대다가도 바삐 눈을 굴렸다. 간지러운 피부를 두어 번 문지른 정국이 그제야 걸음을 옮겼다. 안쪽 주머니에 넣어둔 펜이 달그락, 소리를 흘렸다.
잠시 쉬는 시간이 생겼다. 운이 좋았다. 다시 회사로 기어 들어갔는지 한참 손님이 오지 않아 한 켠에 쭈구리고 앉아 숨을 돌렸다. 털썩 주저 앉자 모든 근육이 아우성을 치는 게 느껴졌다. 금세 허기가 들어 정국은 미리 계산해 둔 김밥을 야금야금 베어 물었다.
사뭇 게걸스럽게 먹다가 거울 너머로 수척한 눈과 눈을 마주쳤다. 한나절 동안 먹은 게 고작 200 칼로리도 안 되는 삼각김밥이라는 사실에 어쩐지 처지가 처량해졌다. 그렇지만 불행회로 돌려 봤자 좋을 게 없었다. 무려 직접 사 먹은 게 어디냐 싶었다. 비친 얼굴이 못내 보기 싫어 눈을 흘기다 어지럽혀진 카운터를 정리하려던 쯤이었다.
띠링. 타이밍 좋게 잡생각 그만 하라는 계시였다. 생각이 끝나기도 전에 잠금화면 위로 알림이 하나 왔다. 머쓱하게 웃으며 핸드폰을 쥐었다.
[야 대박. 미래그룹 홈페이지 들어가 봐라]
정국은 초록 창을 띄운 핸드폰을 카운터 위에 올려 놓고서 가만 생각했다. 5일에 심사 결과 발표 한다더니 앞당겨졌나. 대학생이면 누구나 참가 자격이 주어진다길래 도전해 본 디자인 아이디어 공모전이었다. 서류 접수까지 시간이 부족해 기획안을 개발새발 날려 썼던 것 같은데. 애초에 큰 기대도 없었다지만 당장의 불안감에 휩싸이면서 괜시리 긴장되었다.
창 하나를 앞에 두고 씨름했다. 고새를 못 참고 전화한 재헌이 기다리기는 커녕 달달 볶으며 빨리 누르라는 볼멘 소리만 가득 해댔다. 결국 한참을 고민하던 정국이 마우스 왼쪽 버튼을 꾹 누르고서, 눈을 감고 몇 초 세었다.
그리고 눈을 떴다.
이번 공모전 수상작은 미래그룹 임직원들로 구성된 평가위원단이 창의성, 현실성, 주제 적합성을 기준으로 2단계의 심사 과정을 거쳐 선정했습니다.
〈31회 대상>
미래를 더, 프리미어 하게.
전 정국 / 한국대학교
감사합니다.
별안간 대문짝만하게 뜬 ‘전 정국’ 이름 세 글자에 벌떡 일어났다. 이거 진짜야? 놀라서 크게 터진 목소리에 금세 정국이 자신도 놀라 입을 막고 몸을 움츠렸다. 다행히 아무도 없는 걸 넘어 텅텅 빈 가판대 사이로 CCTV만 조용히 돌아갈 뿐이었다.
미쳤다. 진짜 내가 1등 먹었다고? 절로 입이 떡 벌어졌다. 일어난 일이 굉장히 비현실적으로 다가왔다. 물론 아예 희망을 안 건 것은 아니었지만 현실에서 너무 쉽게 이뤄지니까 약간 긴장했다. 이렇게 원하는 대로, 뜻하는 바대로 인생이 흘러간 적이 없어서 나중에라도 수상자 명단 번복되는 거 아닌가 쫄렸다.
ㅡ 짜식. 역시 우리 미대의 인재라니까?
전 정국 인생 25년. 단 한 번도 운이 좋다고 생각한 적이 없는데. 오늘, 역사적인 일이 오늘 벌어지고야 말았다. 솔직히 몰래 카메라 같아서 실감이 안 났다. 야. 이거 진짜지? 덜덜 떨리는 손으로 폰을 손에 쥐고서 분주히 입을 뗐다. 허공에 대고 발차기를 몇 번 하고, 열심히 손을 휘젓는 새에 금방 또 재헌에게서 답문이 들려 왔다.
ㅡ 상금 백 만원인 거에 더 끌릴 것 같은데, 내가 아는 전 정국이라면.
역시, 재헌은 쪽집게였다. 내가 또 기막힌 정보통이지 않냐, 우리 정국이 그나마 한시름 놓겠네. 주절주절 입은 쉬지 않고 떠들어 댔다. 질린다는 듯이 대충 장단을 맞춰주던 정국이 끄덕거렸다.
수상한 것보다도 100만원이라는 큰 액수를 쥘 수 있다는 것에 급격히 머리가 돌아갔다. 당장 사치 부릴 돈은 아니어도, 밀린 집세를 갚을 금액이었다.
그래. 돈부터 갚자. 경쾌한 혼잣말과 함께 한결 가벼워진 마음으로 입안에 김밥을 우겨 넣었다. 일단 기쁨을 맘껏 누리고 미납고지서를 들여다 보자. 그래야 컨디션도 올라갈 테지. 오랜만에 정국이 산뜻한 미소를 지었다.
선 전 날이 되어서야 신상정보 간단히 적힌 약력을 받아볼 수 있었다. 뭔 대단한 선자리 납셨다고 반듯한 서류철씩이나 꽂아서 주는지 석진이 연신 피식거리며 두 손가락으로 몇 장을 빠르게 남겼다.
한참 주가 상승에 열 올리는 정그룹 소속이자, 철수도 모자라 도산으로 끝을 맺은 D 전자의 국내 시장 점유율까지 전부 흡수하고 슈퍼 엘리트로 자리매김한 상무 율진이었다. 정그룹에서 유일무이한 ‘최연소 20대 상무’ 타이틀을 차지했다.
조지타운대 경제학 수석, 존스홉킨스대 경제 석박사 출신에 게다가 학력만으론 모자라 경영능력도 모조리 만점을 찍어버렸고, 경영뿐만 아니라 다른 분야에서도 일단 입을 열면 놀랄 정도의 이론으로 무장돼 있다고 유명했다. 점수화 한다고 가정하면 A+는 먹고 들어가는 스펙이었다. 가방끈과 능력의 함수 관계는 반대일 가능성이 크다는 둥 다들 열등감 뻗친 소리를 해대던데 기여한 공로만 보면 그렇진 않은 모양이었다.
그렇지만 모두 다 예상된 범위였다. 진짜 뻔하다 뻔해. 모조리 빠르게 읽은 석진은 조금 전 심드렁한 표정에서 더 혀를 쯧 차며 중얼거렸다. 진부하기 짝이 없는 스토리에 그나마 있던 흥미도 모조리 증발하는 기분이었다. 이미 한국을 넘어 세계까지 압도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데 여기서 더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자고 상대를 줄지어 대령하는지. 장성한 다른 자식들 다 혼인시키고도 사라지지 않은 끈덕진 결혼 욕심에 석진만 애꿎은 희생양이 되어 있었다.
물론 선을 보는 게 처음은 아니다. 더군다나 요즘들어 ‘김 석진 부회장이 결혼감을 찾는다’란 괴랄한 소문이 좋게 포장되고, 그 덕에 석필은 부쩍 느는 권유 덕에 웃음 지을 날 많아졌다. 부담스러워서 몇 번이고 거절했지만 일단 부딪혀 보라는 식이었다. 아들 내미 입장 같은 거 생각해 줄 만큼 만만한 집구석이 아니었다. 이젠 익숙해질 만도 하지만 여전히, 아니 더욱 피곤해져만 갔다.
피곤한 눈가를 꾹 누르며 본사를 나선 석진이 밖으로 향했다. 비서실에서 꽂아준 헤어샵에 들러 머리를 만지고, 간단하게 메이크업을 받았다. 질색이면서도 꺼릴 정도의 진한 화장은 아니라서 한숨을 삭혔다.
딱 체력이나 성의 이런 것들이 간당간당 남은 상태에서 석진은 차에 몸을 맡겼다. 한껏 꾸민 모습과 정반대로 축 시트에 묻혀 늘어진 몸이 만들어 내는 기시감을 느끼며 실장은 간간히 백미러로 심기를 살폈다.
삼십 분은 상당히 짧았다. 꼭 가기 싫은 자리에 억지로 끌려 갈 땐 시간이 무척이나 빨랐다. 깨우는 실장의 목소리에 가까스로 눈을 뜬 석진은 호텔로 들어갔다. 구겨진 옷 매무새를 다듬고, 느슨해진 타이까지 꽉 조이며 직원의 안내에 따라 이동했다.
몇 걸음 채 떼지 않아 새하얀 테이블보 너머로 율진이 보였다. 천천히 걸어간 석진은 흐리멍텅한 눈빛은 잠시 접어 두고 한껏 예의로 치장한 미소를 띄우며 목례했다. 박 율진 씨 되시죠? 서로에 대해 많은 정보를 알고 있고, 말 그대로 어거지로 끌려온 자리지만 모른 척 할 뿐이었다. 아마추어들도 아니고 말이었다. 멍하니 기대 앉아 물을 들이키던 율진도 그제서야 살짝 고개를 숙였다.
율진은 인상이 좋았다. 청와대 업무 기념 만찬회 때 봤을 때는 서늘해 뵈더니 기싸움 없는 사적 만남이라고 비교적 의외였다. 라이벌 그룹이라고 날 세우고 대들 줄 알았는데 딴 판이었다. 석진은 꽤 기쁨이 동한 얼굴을 하고 씩 웃었다. 본론으로 바로 넘어가도 될 것처럼 느낌이 좋았다.
”여기 나온 이유. 진짜 제가 마음에 들어서는 아닐 거고, 저랑 똑같은 생각이시죠?”
석진은 의문 가득한 물음을 한 번 던졌다. 에라 모르겠다 하는 심정으로, 마음 가는대로 그냥 막 솔직하게 내뱉었다. 정그룹 회장이 별세하면서 율진이 상무로 승진하고, 과감한 세대교체를 한 것도 얼마 지나지 않은 일이었다. 세력을 늘려 제 사람들을 주변에 대거 포진하는 데 바쁠 텐데 무슨 얼어 죽을 놈의 결혼이겠나. 게다가 고작 스물 여섯이었다. 무슨 연유로 여기까지 끌려 왔는지 그저 안타까운 심정이었다. 석진의 솔직한 속내에, 한 번도 표정 변화 없던 율진이 서둘러 말을 꺼냈다.
”좋아하는 사람이 있는데, 한 번 선자리라도 다녀오면 당분간은 잠잠하지 않을까 싶어서요.”
그제야 참담함이 이루 말할 수 없는 정황을 파악한 석진이 대답 없이 고갤 끄덕였다. 율진 역시 복잡한 사연 속 주인공이었다. 아침 드라마에서 볼 법한 스토리가 일상 같이 터지는 이 집단, 바로 재벌가였다. 그나마 생각치도 못 하게 서로 얼굴 안 붉히고 말이 통한 것이 그나마 다행이었다.
지옥에서도 한 차례 빛이 샘솟는 걸 느꼈다. 꿈에도 생각치 못한 전개를 맛보고 나니 이렇게 한 번쯤 솔직해서 피해 볼 것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 서로 성향이 안 맞아 박차고 나온 걸로 말 맞출까요?”
“저야 좋죠. 윈윈 한 걸로 쳐요.”
머쓱하게 어깨를 으쓱해 보이는 율진에게, 석진이 정말 사람 좋은 웃음을 내걸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자리에서 가벼운 인사를 나누곤 뒤도 돌아 보지 않고 미련 없이 정반대 방향의 출구를 향해 내딛었다. 사람 잘못 봐도 한참 잘못 봤다. 율진은 앞으로가 더욱 기대되는 젊은 인재였다. 나중에 기회 되면 호형호제 맺고 싶은 걸? 답지 않게 엉뚱한 발상이 곁들여졌다.
석진이 손목에 채워진 시계를 들여다봤다. 약속 장소에 온 시간이 여섯 시였는데, 고작 30분 지난 시점이었다. 시간도 안 뺏기고, 말도 잘 통하고, 트러블도 없었다. 걱정거리가 모두 머릿 속에서 튕겨져 나갔다. 계획한 대로 착착 흘러가 군더더기 없이 아주 완벽했다. 콧노래를 부르며 엘레베이터를 타고 내려가는 석진의 얼굴이 유난히 가벼웠다.
한바탕 골프 회동을 마친 뒤 석진은 넓다란 필드를 빠져 나왔다. 분기별로 내노라 하는 재벌가 자제들이 모이는 자리인데, 쓸 데 없어 보여도 서로가 정보원이 되어 꽤나 쓸 만치 유용한 정보를 캐내고 건네는 자리라 참석은 필수였다. 새벽부터 시작해서 세 시간씩이나 고난을 겪다 보니 골프채를 쥔 손이 후들거릴 판이었다. 살짝 웃는 입매를 그제서야 내리니 경련이 일었다.
줄이어 뒤따라오는 경호원들보다 한 발 앞선 석진이 스케줄표 한 번, 손목에 찬 시계를 한 번 바라보았다. 석필이 건강 문제로 일선에서 한 발 물러서는 바람에 안 그래도 많던 일정이 요즘들어 더 폭증했다. 소망이라면 얼른 집에 돌아가 쪽잠이라도 붙이고 싶었다. 사실 오늘은 오전 모임 이후로 프리였어서 운이 좋으려나 싶었지만 어느새 귀신 같이 알아채고 밀린 현장 출장을 가라며 닦달해 오기 시작한 석필에 기가 찰 노릇이었다. 물론, 그 표시에 응답을 해 줄 위인이 아니란 것은 이미 잘 알고 있었지만.
아침에 장을 봐온 모양인지 냉장고엔 간단히 먹을 것들이 있었다. 샐러드나 치즈가 듬뿍 든 샌드위치 같은 것들이었다. 입이 심심했는데 잘 됐다고 생각하며 석진은 얼른 샌드위치를 들어 한 입 베어 물었다. 그리고는 자리에 앉아 서류를 펼쳤다. 저번 달 매출 그래프가 한 눈에 보였다. 침대에 배를 대고 누워 편히 잡지를 넘기고 있자니 왠지 모르게 웃음이 실실 나왔다.
오랜만에 생긴 식욕에 캡슐 커피를 진하게 우린 후에야 다시 침실로 향하려던 바로 그 순간, 석진은 잡지 옆에 있던 핸드폰을 보았다. 말문이 막힌 얼굴과 반대로 눈은 여전히 화면에 머물러 있었다.
[기사는 아주 잘 봤다. 뭐든 다 할 것처럼 소리 치고 나가더니 기껏 한다는 게 애비 눈속이는 거냐?]
이제 와서 아니고, 잘못 본 거라 해 봤자 늦은 일이지만 확실히 석필이었다. 분명 며칠 전에 아주 평화롭고 완벽하게 선 마무리 한 걸로 아는데. 율진이 거나하게 뒷통수를 후려쳤을 리도 없다. 율진이 일반인과 열애 중이라는 뒷 소문이야 이미 이쪽 세계에선 파다했다.
석진은 콧방귀를 꼈다. 또 무슨 놈의 기사. 사실 큰 기대도 없었다. 어디서나 거머리처럼 달라 붙는 파파라치들이 많아 성가시긴 했다. 석진은 심드렁 하니 핸드폰을 쥐고 곧장 인터넷으로 들어갔다. 그런 와중에 접한 기사는 충분히 석진의 시선을 끌 만한 것이었다.
그 글은, 신문사에서 나온 정식 기록이 아닌 소위 증권가 찌라시였다. 재벌가의 민낯을 속속들이 파헤친다는 명분 아래 무차별적으로 배포되는 소식지였다. 혹시나가 역시나였다.
「 김 석진 미래그룹 부회장, 박 율진 상무와 맞선 충격!! 」
기사는 생각보다 길었고, 수트를 입은 두 사람이 그대로 박제되었다. 석진은 저도 모르게 작은 실소를 터뜨렸다. 낙인 찍듯 이름까지 정확하게 거론돼 있었다. 결국 회장 귀까지 들어가게 만든 출중하고 기깔 난 글빨에 박수라도 쳐 줘야 하나. 참으로 직설적이고 솔직한 문구들의 향연이었다.
「 4월 9일 오후 여섯 시 팰리스 호텔 프라이빗 룸에서 미래그룹 김 석진 부회장과 정그룹 박 율진 상무가 맞선을 진행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허나, 맞선은 좋은 결과를 맺진 못 했는데요. 바로 김 석진 부회장이 먼저 거절 의사를 표하자, 박 율진 상무 또한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며 대응한 것입니다. 이로써 박 상무의 열애설이 유력해지는 가운데... 」
아주 얼마나 자세히 취재하셨는지 일자부터, 장소, 시간, 나눈 대화들이 적절히 섞인 유머와 함께 풀어져 있었다. 청산유수같이 척척 진행된 얘기는 꼭 영화 같기도 했다. 하지만 본인 스토리를 남의 입을 타고 전해 듣는 석진은 미치고 팔짝 뛰기 직전이었다. 다 된 밥에 재를 뿌린 것도 모자라 밥상을 그냥 뒤엎은 꼴이었다.
바로잡을 생각도 하지 않고 해탈했다. 예전에야 법적 대응을 했지 이젠 포기 수준이었다. 다음주 내로 이 찌라시가 모든 기업에 뿌려지고 ‘김 석진이가 마흔 전에 기필코 결혼하려고 안달이다’라는 비아냥을 사겠지. 석진은 이미 엎질러진 물에 대해 막연히 예상했다.
율진이 불쌍했다. 찌라시가 얼마나 나왔나 궁금해서 보니 무려 3p나 실려 있었다. 유명한 이슈인 만큼 정그룹에서도 지금쯤이면 기함했을 것이었다. 제 코가 석자이긴 하지만 줄이어 맞선 상대를 고르며 율진을 몰아낼 광경만 생각해도 참 모질다고 생각했다. 샌드위치를 먹는 속도가 점점 느려질수록 석진은 머리를 더 감싸쥐었다. 피곤하기만 하던 하루 속에, 체한 것 마냥 뭔가 속에 있던 답답함이 더 쌓여 갔다.
금방 지나갈 바람인 줄 알았는데 태풍처럼 불어났다. 정녕 김씨 가문의 사슬에서 벗어나려면 억지 결혼만이 답인 것이었다. 이런 식이라면 차라리 내가 상대를 좀 골라 볼까?
그런 생각을 마칠 땐, 따뜻한 커피 마저도 말라가고 있는 중이었다.
미래그룹 아이디어 시상식에서는 총 5명이 수상했고, 정국은 역대 최초로 만점에 가까운 심사 평가를 기록하며 대상을 거머쥐었다. 동시에 한 명이서 뽑아낼 수 없는 수준의 퀄리티라는 호평을 들으며 단연 상위권에 랭크된 한국대 미대의 위상을 한껏 더 높이는 자랑스러운 기회가 됐다.
정국은 주변 사람들과 인사하며 순탄하게 지나가는 공모전 시상식에 안도했다. 수많은 기자들과 둥그런 렌즈를 거쳐, 임원진들이 축하 개회사를 이어 가는 모습 하나하나를 눈에 담아두었다. 그러다가 다가오는 시간을 확인하고서는 앞에 섰다. 이 다음 순서에서 움직이면 돼요. 한 시간 전, 진행요원들이 차분하게 오늘 시상식 순서와 관련 사항에 대해 말해 준 것을 상기시키며 말이었다.
왜인지 긴장이 되어 펼친 손 아래로 축축한 땀이 베어 나왔다. 애써 괜찮은 척이라고 표현하기엔 조금 애매한 감정에 벅차오를 뻔한 순간, 시상하는 사장 뒤로 때깔 좋은 정장을 차려입은 두 눈이 마주쳤다. 단 한 번도 실물 영접한 적 없지만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수십 번 매스컴에서 봤을 법한 인물이기 때문이었다. 홀린 듯 쳐다보다 아차 싶어 눈을 피했을 때, 그제서야 식은땀이 목덜미를 타고 삐죽 흘러 내렸다. 미래그룹 부회장은 티비에서와 다를 것 없이 냉랭한 눈빛이었다. 그 눈길이 여느 대기업 일가들과 비슷한 듯 아닌 듯 겹쳐 보였다. 잘 사는 사람들은 똑같구나. 재차 납득하고 말았다.
시상식에서 내려오자마자 대기실로 돌아왔더니 핸드폰이 시끄럽게 울려댔다.
[시상식 어때? 전정구기 다 컸네 컸어. 뉴스 기사 벌써부터 올라오고 장난 아니다. 내 친구 셀럽 된 듯?]
유명인사는 개뿔. 포스에 눌려서 맥도 못 추리겠드만. 기뻤다가 순식간에 차분해졌다. 시상식이라고 나름 거금을 들여서 와이셔츠 사 입었는데, 유명 디자이너가 제작한 후광 번쩍하는 정장을 보자 그나마 있던 어깨도 움츠러들 판이었다. 드는 생각을 애써 덮고 정국이 핸드폰을 껐다. 곧이어 초청만찬 자리로 옮긴다는 관계자의 안내를 들으며 구겨진 셔츠 매무새를 다듬었다.
미리 준비해 준 차에 올라타 미래그룹 계열사 중 하나인 호텔로 넘어갔고, 직원이 내민 고급스러운 코스 요리를 어찌저찌 해치웠다. 이런 호화는 처음이라 복에 겨우다가도 후식으로 나온 디저트까지 섭취하며 간만에 여유로운 시간을 만끽하다 보니 생각보다 훨씬 순조롭게 시간이 흘러갔다.
평소와 너무 다르면서도, 동시에 특별한 저녁이었다. 엷은 오렌지빛 조명은 화려한 서울의 야경을 더 돋우었다. 수상자들과 어느 학교 출신이며, 지금 전공은 어떤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소소한 잡담을 나누었다. 행복하다. 정국은 벅찬 가슴을 억누르며 웃었다. 그렇게밖에 표현할 수 없었다.
너무나 완벽한 하루였다. 어떠한 문제도 없었고, 오히려 거짓말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완벽했다. 그렇게 쭉 고소한 버터 향이 진동하는 빵을 뜯어 먹던 정국은 무심코 시선을 옆으로 돌렸다.
그리고 그 순간 정국은 보고 말았다. 한 눈에 봐도 억 소리 나는 명품을 온 몸에 휘감고 여자친구 어깨에 손을 걸친, 잊을 수 없는 얼굴을.
마치 못 볼 꼴을 눈 앞에 두고 있는 것처럼. 시간이 멈춘 것처럼 느껴졌다. 오로지 둘의 시선만이 조용하게 오가는 가운데, 정국은 질끈 눈을 감았다 떴다. 꼬박 육 년만이었다. 하지만 눈 앞에 있는 저 남자가 어머니가 죽기 전 남겨준 그나마의 사망 보험금까지 모두 들고 잠적한, 그것도 모자라 19살 앞으로 몇천 만원의 대출 부채까지 떠넘긴 형이란 것을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머리가 둔하진 않았다.
위장이 뒤틀리고, 안색이 눈에 띄게 나빠졌다. 정국은 느리게 심호흡을 이어가다가, 형 정준을 향해 눈짓을 했다. 같은 피 섞인 형제 사이라고 이딴 사인도 단박에 알아차리는 저 모양새에 헛웃음이 튀어 나왔다.
호텔 앞으로 나와 혈색이 맑은 얼굴과 딱 죽기 직전의 얼굴이 서로를 마주보았다. 할 말은 사무치게도 많았지만, 그 어떤 말도 입 밖으로 꺼낼 수 없었다. 침묵이 이어지던 가운데 적막을 깬 건 정국의 목소리였다.
“얼굴 보니 어디서 잘 굴러 먹고, 잘 지내나 봐? 내 등 쳐 먹더니, 이젠 여자 하나 물어서 연명하고 있나 보네.”
미간이 잔뜩 구겨졌다. 그래도 꼴에 형이라고 좋게 넘어가고 싶었지만 머리통에선 차마 좋은 단어라곤 눈꼽만치도 생각이 안 났다.
“엄마 산소는 좀 갔다 오냐? 그래도 엄마 돈으로 먹고 살았으면 자식으로서 그 정도 도리는 해야 되잖아.”
이딴 식으로 온 가족이 풍비박산 났다는 것을 체감하는 순간마다 정국의 기분은 바닥을 치며 떨어졌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날, 믿을 건 형밖에 없다고 생각했는데 썩은 동앗줄을 쥐고 버텼다는 걸 알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자고 일어나 둘러본 집엔 돈 될 만한 것들은 싸그리 사라져 있었다. 집 나간 형이 돌아오지 않을 걸 알면서도 작은 쪽방에서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가, 혹시나 싶어 일하는 곳까지 찾아 봤지만 달라지는 건 없었다. 한 순간에 제 집이 홀연히 남 집이 되어 쫓겨 나고, 그것도 모자라 한 번도 써본 적이 없는 거대한 액수의 체납 독촉장이 날라온 그 날까지도 되묻고 되물어도 납득하기 힘들었다. 나한테 왜 그랬어 형?
이렇게 하나하나 떠올리다 보면 도무지 견딜 수가 없었다. 모든 걸 잃은 그 몇 년 남짓 동안 인생은 도무지 제대로 흘러가지 않은 탓이었다. 애써 참아온 원망이 왈칵 목 끝까지 차오르자 슬픔이 쏟아졌다. 마주치면 반쯤 죽여버리려고 했는데 정국은 이젠 그럴 만한 힘도 남지 않았다.
“그래, 형도 힘들었겠지. 아빠 집 나가고, 엄마 병으로 죽을 동 살동 숨만 겨우 붙이고 있었을 때 가장 노릇 했어야 하니까. 그럴 때마다 형한테 미안했어. 또, 형도 행복해질 자격 있다고, 그렇게 생각했었어.”
“야, 전 정국.”
“근데 정말 혼자 행복해지려고 매몰차게 떠날 줄은 몰랐어. 나 진짜 하나 딱 물어 보고 싶은 거 있는데. 정말 목구멍으로 밥이 넘어 갔어? 내가 형한테 짐 되기 싫어서, 버려질까 봐, 학교 끝나자마자 밤새 한숨도 안 자고 알바 했던 거 알고 있지. 너 다 알고 있었잖아. 아니야?”
불편한 심기를 알리듯 정준이 입을 다물었다. 핏발이 선 채로 노려보며 육 년 동안의 아픔을 모조리 퍼붓는 정국에게 욕할 핑계를 찾았다는 듯, 욕 한 번, 침 한 번 찍 뱉었다. 어릴 때 으레 형제들이 종종 하는 싸움처럼 주먹질을 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 어떤 몸싸움보다도 고요하게 소름 끼쳤다.
“같이 산 정이란 게 있잖아. 미워도 피 섞인 형제인데, 그래도 동생인데 그 동생 새끼가 살아는 있는지, 어디서 얼어 뒤지진 않았는지 궁금하지도 않았어?”
“아, 씨발. 그래서 뭘 어쩌잔 건데. 뭐 가진 재산이라도 좀 떼어줘? 그렇게 억울하면 사람 붙여서 찾지, 왜 이제 와서 지랄인데!”
왜 그렇게까지 해야만 했는지, 남은 거라곤 형뿐이었는데 모질 게 굴었어야만 했냐고. 그렇게 더 따져 붙고 싶었지만 정국은 결국 꾹 입을 다물고 말았다. 정준은 스스로 분에 못 이겨 성질을 내며 한숨만 팍 쉴 뿐이었다. 갱생 불가였다. 이미 까마득한 육 년 전의 일이었다. 물이 엎질러진 걸 넘어, 이미 매말라 비틀어지고도 남은 시간이었다. 더 이상 따질 가치도 없었다.
“… 됐다. 내가 꺼져 줄게. 서로의 인생에서 없었던 셈 치자.”
마치 참기 힘든 기침을 참듯, 간질거리는 입을 틀어 막으며 정국이 픽 웃었다. 그저, 조금이나마 남아 있던 끈이 모조리 끊어지는 현실을 느낄 뿐이었다.
정준이 무어라 더 말을 꺼내려던 찰나, 마침내 정국은 어깨를 밀치며 성큼성큼 걸어갔다. 호텔과 이어지는 문을 열고 발을 디딜 쯤 저 멀리서 욕설을 읊조리는 소리가 들렸지만 다시는 뒤돌아 보지 않았다.
차마 말로 표현하기조차 어려운 감정이었다. 여자를 태우고 거칠게 차를 몰아 멀어지는 소리를 너머로 들으면서 정국은 서글픔만 상처가 잔뜩 뭉쳐 일그러진 얼굴을 했다. 아까는 쾌재를 불렀는데 지금은 널을 뛰며 혼잡해졌다. 힘듦을 티내지 않으려고 참아 왔다. 게다가 오늘은 대상까지 받은 날이었다. 안 그래도 복잡한 머릿 속에 당장은 슬플 생각을 억지로 끼워 맞추고 싶은 마음이 추호도 없었다. 그런데 다 망쳐버렸다.
그래도 오늘 꽤 행복했는데. 그 마저의 짧은 행복도 허락되지 않았다. 차가 점이 되어 사라지자, 정국은 그대로 무너지듯 주저앉아 몸을 웅크리고 엉엉 울었다. 눈물이 쉴 새 없이 떨어졌다.
뭔가 잔뜩 마음에 안 든다는 표정으로 투덜대는 누나 석연을 보며 석진은 고개를 설레설레 내저었다. 경영도 경영인데 요즘 석연의 성질을 돋구는 것은 바로 같은 부류들이었다. 오늘만 해도 교류하잔 취지로 정계 인사들을 초청한 포럼에서 의견을 주고 받을 때 여자란 이유로 무시를 해댔다. 경제 현안에 대한 의견이 부딪히고, 석연이 가뿐하게 밟아주자 자연스레 기싸움으로까지 번져 다들 트집 잡는 태도로 일관했다. 그리 우애 좋은 남매는 아니지만, 석진은 석연을 능력 자체로는 인정하는 편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석연은 포브스 선정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여성’ 10위권에 진입했기 때문이었다.
개인사부터 해서 하루도 조용할 날 없는 콩가루 같은 집안까지. 짧은 순간 넋이 나가버려 석진은 지끈거리는 머리를 붙잡은 채 집무실로 향했다. 얼떨결에 잠시 놀다 가겠다며 따라온 석연이 나름 감정을 추스리며 주스를 들이켰다.
“석진이 너, 계속 결혼 걱정되지?”
석진은 아는 척을 하지 말까, 하는 생각도 잠시 했다. 그런데 석연이 다 아는 듯 눈까지 찡긋대고 나서니 괜찮은 척도 힘들었다. 포커페이스에 아무리 능한 석진일지라도 결혼 얘기만 나오면 힘을 못 썼다. 큰 눈동자가 이리저리 흔들리고, 손은 옅은 떨림이나마 미세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글… 쎄.”
석진이 애써 덤덤한 기색을 비추려 안간힘을 쓰자 석연이 야유를 보냈다.
“그냥 결혼해.”
“그냥? 결혼이 쉬워? 결혼이 무슨 옆집 개이름도 아닌데 남 일이라고 너무 쉽게 말하는 거 같다.”
재차 이어지는 폭탄 발언에 기겁하는 표정을 지으며 석연을 바라보았다. 석연에겐 동생을 위한 동정이란 게 있긴 하냐는 눈빛이었다. 아침부터 꼬이네. 석진이 속으로 곱씹으며 입술을 달싹였다.
강한 부정은 강한 긍정이랬다. 오히려 너 같은 타입이 결혼하면 막상 잘 살지도. 석연이 살짝 웃으며 코를 찡긋했지만 씨알도 안 먹힐 소리였다. 본디 결혼 파토 난 후로 그냥 독신으로 혼자 명예고 재산이고 독식하다 늙어 죽을 생각이었는데 말이었다.
“네 마음 이해 못 하는 건 아닌데, 그래야 지금 당장 그 자리도, 네 미래도 평탄해질 거야.”
석연과 석진 사이에 어색한 적막감이 돌았다. 금방이라도 치고 받을 듯이 큰 소리로 외치던 석진이 이번엔 반대로 입을 꾹 다물었다. 그래, 맞는 말이긴 했다. 사실 미련이 없다면 결혼 따위 개나 줘버리고 물러 나도 될 일이었다.
하지만, 그러기엔 안타깝게도 석진은 손에 쥔 것은 절대 빼앗기지 않는 불도저였다.
“네 하나뿐인 누나로서 매우 유감이야.”
석진의 낯이 금세 울상으로 바뀌었다. 울상의 정도가 아니라 똥이라도 한 수저 퍼 먹은 것처럼. 입맛이 뚝 떨어져 식욕이 생기지 않았다. 석진이 머리를 부여 잡고 소파에 발라당 누웠다. 잘 생각해 봐 동생. 누나는 너 응원한다.
남몰래 응원하지 말고 김 회장님 앞에서 편 좀 들어주시지? 걱정하는 듯 하면서도 은근히 속이 뒤집히게 비위를 살살 건드렸다. 아까부터 속 긁는 소리만 해대니 석진은 살짝 인상을 썼다. 그렇게 잠깐 떠들기도 잠시, 석연은 비지니스 미팅이 있다며 소파에 아무렇게나 걸어둔 자켓을 주워 입었다. 뒤에서 아버지 뵙고 가려는데 동행하지 않겠냐며 묻는 소리가 들렸지만 싫다는 대답을 최대한 무성의 하게 던졌다. 허공에 붕 뜬 손이 대충 휘저어졌다.
석진 또한 사장단 회의 관련해서 석필에게 보고할 것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지만 굳이 이 시기에 어색한 부자 상봉을 맞닥뜨리고 싶은 생각이 조금도 없었다. 그냥, 가능하다면 힘껏 도망칠 준비가 된 것처럼 기분이 그랬다.
멀어져 가는 뒷모습을 바라보며 들으라는 듯 격하게 궁시렁거리다가 석진은 결국 의자에 주저 앉았다. 저렇게 씹어 봤자 어차피 석연은 잘 나가는 외국계 CEO와 연애 결혼에 성공해 5년 째 트러블 없이 잘 먹고 잘 살고 있다는 데 변함 없었고, 공감을 사기도 어려웠다.
혼이 빠져나간 것처럼 멍한 표정으로 앉아 있던 석진은 천천히 일어나 테이블에 놓인 커피잔을 들었다. 혼란에 휩싸인 이 순간에도 커피는 꿀떡꿀떡 잘도 넘어가는 게 한심했지만, 몸은 이미 머리가 시키는 대로 움직이고 있었다. 컵의 어귀에 굳어 있는 자국을 보니 뒤죽박죽되어 버린 머릿속이 더욱 어지러워졌다. 향긋한 커피 향이 콧속에 스며들자 그 어질함은 더해졌다.
이젠 정말 벼랑 끝이었다. 생각하나 마나 탈출구는 눈 씻고 봐도 없었다. 이유는 즉슨, 이랬다.
첫째. 결혼을 무슨 게임 퀘스트 마냥 도장깨기 해대는 식구들에게 제대로 된 사고 방식을 요구하는 것조차가 무리일 뿐이었다. 정계 원로들의 시선도 따가워졌다. 분위기 파악 못 하고 버르장 머리 없이 부모한테 반기나 들고 있다며 못 미더워 했다. 천하의 유치한 반격이라면서 말이었다.
둘째. 거기다 지금까지 유학, 석박사, 해외 여행까지. 갖가지 이유로 사회 곳곳을 적시며 퍼진 수십 억이 훌쩍 넘는 천문학적인 액수가 누구 주머니에서 나왔는지 너무나 잘 알았다. 교양 발린 화사한 얼굴도, 부모 잘 둔 덕에 누린 호사였다. 수틀려도 뭐라 비난할 사람 없고, 위선이 솟는 재벌가에 적응된 탓이었다. 더 뻐팅기는 건 지금 석진이 할 수 있는 선택이 아니었다.
그래서 결론은, 만약 이대로 완강하게 고집을 꺾지 않는다면 미래엔 남은 영혼까지 탈탈 털릴 암울함뿐이라는 것이었다.
그나마 최후의 통첩이 가능하다면, 재벌가는 피하고자 했다. 정말 딱 질색이었다. 혼인 동맹은 결국 살면 같이 살고 죽으면 같이 몰락하는, 말 그대로 운명 공동체가 되어야 했다. 리스크도 크지만 한 편으론 사업을 확장하는 데 이만큼 좋은 촉매가 없어 다들 그리 목숨 거는 것이었다. 다만 모든 게 물질적 보상으로 이어지는 게 너무 위험했다. 잘못 하다가는 두뇌회전 잘 되는 상대방에게 페이스가 말려 혼자 허우적거릴 수도 있었다. 차라리 그럴 바에야 모든 빌미를 제거하는 게 훨씬 낫다는 게 석진의 생각이었다.
그러다가 문득 석진은 엉뚱한 상상의 나래를 펼쳤다. 그럼 아예 정반대로 지극히 평범한 집안이면 어떨까? 잘 보이려고 힘쓸 필요도 없고, 조금이라도 기업 간 사이가 악화돼서 새우 등 터질 일도 없잖아. 그렇게 생각하자 당황스럽게 했던 온갖 경우의 수들이 단순하게도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아, 잠깐.
… 그리고 우연찮게 정국이 떠올랐다.
정국이라면 아이디어 공모전 시상식 대상 수상자였다. 아이디어가 신선하고 기발한데다가, 심사위원으로 선 최고 권위자도 대학생의 경지로는 불가능에 가까운 거라며 인정한 가히 다재다능한 인재였다. 천재적인 능력이라며 작품을 봤던 디자인팀의 입에 오르락 내리락거리길래 몇 번 흘리듯 들었던 게 다였다.
그 때 생김새, 학력, 다 구구절절 읊어줬던 것 같은데. 거기다 눈도 마주쳤었는데 별 관심이 없다보니 이제 와 기억해 보려 해도 딱히 기억나는 게 없었다. 지금 석진은 순전히 제 멋대로 경쟁사회 속 대학생의 자화상 정도로 정국의 이미지를 그려 내었다.
미친 놈 소리를 들을지도 모르지만 미래그룹이라는 진흙탕에서 뒹군 짬밥이 몇 십년인데 그렇게 어려운 도전도 아니었다. 자존심까지 굽혀 가며 이번에는 먼저 시도해 보기로 했다. 어떻게 고안해 낸 아이디어인데. 석진의 머릿 속엔 그저 결혼이라는 귀찮은 체크 리스트를 하나 지워버리고 싶은 욕구밖에 없었다.
눈두덩이를 손가락으로 슥슥 문지르면서도 입꼬리에 웃음을 걸었다. 가만히 있다가 웃음을 흘리고 또 가만히 있다가 웃음을 흘렸다. 그러다 망설임 없이 수화기에 박힌 첫 번째 버튼을 눌렀다. 몇 번 수화음이 가지 않아 한 음성이 들려 왔다.
ㅡ 네, 부회장님. 말씀하십시오.
단축키 버튼엔 5분 대기조 비서실이 올라 있었다. 정갈하면서도 딱딱하게 자리 잡은 목소리가 채근하지 않고 석진의 다음 명령이 떨어지길 기다렸다.
“대상 수상자 전 정국 씨 관해서 알아 오세요. 가족 관계, 학력, 사는 곳, 성장 배경, 인간 관계, 특이사항 다 포함해서.”
도대체 무슨 의중인지 이해가 되지 않은 탓에 직원이 다시금 반문하려다 [아, 예.] 하고 짧게 말을 줄였다. 저 너머로 시간을 벌며 지시 사항을 그대로 타이핑 해 나가는 타자 소리가 그대로 들렸다.
“최대한 자세히.”
바로 알겠다는 대답이 들려오고, 석진은 미련 없이 전화를 끊었다.
아무리 뻔뻔한 성격의 소유자라지만 아무 것도 모를 대학생을 두고 뒷조사나 부탁하는 건 일말의 양심의 가책을 불러오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이 순간만 벗어나면 다시는 본가에 얼씬도 안 하는 것은 물론, 그 방향으로 잠도 안 잘 거라는 생각만 했다.
인정하기 싫은 현실에 뒤섞여 결말 꽉 닫힌 배드 엔딩에서 헤매고 있는 석진이었다. 혼란스러움에 제대로 차분하게 생각할 마음조차 들지 않았다. 절호의 기회였다. 집 안에서 뻗치는 영향력에서 벗어나려면 이제 이것밖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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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녕하세요 독자님들 맥스입니다.
말씀드린 것과 같이 주2회 정도 업로드 될 예정입니다!
저, 맥스는 단편을 쓰지 못 하는 병에 걸려서 어쩌다 결혼 역시 장편이 될 거예요.(삐질)
이미 마지막 화까지 대략 마무리 됐고, 틈틈이 수정과 추가를 반복하고 있습니다.
언급했다시피 계약결혼 스토리가 될 거고, 성격도 집안 차이도 모두 다른 두 사람의 우여곡절 결혼 라이프를 담은,
그리 밝지 않은 로맨스물이 되지 않을까 싶네요.
앞으로 마지막 화까지 잘 부탁드립니다 :)
**문의 관련해서 메일 및 댓글로 다 받습니다.
어쩌다 결혼.
written by. 맥스
2022.03.03~
지독한 클리셰를 담은 계약결혼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