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범하고 또 평범한 나와는 달리 전정국은 학교에서 꽤나 유명인사였다. 일단 그 잘생긴 얼굴이 가장 큰 몫을 했고 뛰어난 운동신경이나 노래 실력도 한 몫을 했다. 처음엔 내가 전정국과 연인 관계가 되리라곤 상상조차 못 했다. 그 아인 너무나도 빛나고 멋졌으니까. 그저 같은 반 친구였다. 학기 초에 전정국과 나는 짝이 되었고 낯을 가리는 성격이라 먼저 입을 여는 일이 없었다. 그런데 특히나 여자애들에게 무뚝뚝하다는 친구들의 증언과는 다르게 나에겐 시덥잖은 농담을 던질 뿐더러 꽤나 다정한 말도 건넬 줄 아는 아이였다. 덕분에 나도 조금씩 전정국에게 적응했고 티가 안 나게 뒤에서 나를 챙겨주고 항상 내가 먼저인 전정국에게 시간이 흐를수록 나도 점점 익숙해져 갔다. 처음에는 나의 감정에 솔직하지 못했지만 너희는 사귀는 사이냐. 친구 사이냐고 묻는 친구들에게 답을 하지 못하다가 내가 좋아한다고 답 한 동시에 정말 무드 없게 "전정국, 나랑 사귀자." 라고 고백했고 그에 전정국은 "그래, 우리 사귀자."라고 답했다. 부제: 눈 오는 날, 그대와 걷는 이 길은 살랑살랑 봄바람이 부는 듯 해.
어느덧 봄, 여름, 가을을 지나 정국이와 함께 하는 두 번째 겨울이 찾아왔다. 2학년 교실에 처음 발을 디뎠던 게 엊그제 같은데 벌써 찬바람이 쌩쌩 부는 겨울이다. 더위를 많이 타는 정국이와는 반대로 나는 유난히 추위에 약한 체질이다. 다른 친구들은 멀쩡한 반면 오들오들 떨기에 바빴고 그 덕에 겨울이 올 때에는 감기라는 절친이 생긴다. 나도 고생이지만 더 고생인 건 정국이다. 춥다는 걸 알면서도 껴입는 걸 귀찮아하는 나는 한겨울이 아닌 이상 마이만 입고 집에서 나오는 게 다반사였고, 겉옷을 탁자 위에 올려놓고도 까먹은 바람에 그냥 나오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감기 걸려서 좋을 거 없으니 점퍼라도 제대로 입고 다니라는 정국이의 잔소리에 점퍼는 꼭꼭 입고 다닌다. 오늘은 아침 일찍 일어난 탓인지 시간적으로 여유가 충분했고 기분도 좋은 게 콧노래가 절로 나왔다. 준비를 끝마치고 한파주의보가 발령되었다는 기상예보를 보고 잠시 고민을 했다. 한파주의보면 많이 춥겠지...? 뭐라도 더 걸쳐야 하나? 입고 가면 교실에서 벗을 게 뻔한데... 아. 결국 고민 끝에 목도리를 목에 칭칭 두르고 집을 나섰다. 엘리베이터 거울로 몇 번이나 내 모습을 체크하고 1층에서 내렸다. 한파주의보라더니 춥긴 엄청 춥네. 이 날씨에 밖에서 날 기다리고 있을 정국이가 걱정되어 아파트 입구 쪽으로 빠르게 뛰어가니 벽에 기대어 핸드폰을 바라보고 있는 한 사람이 보였다. 깜짝 놀래주려고 살금 살금 다가가는데 정국이가 뒤를 휙 돌아보며 말했다. "다 안다. 놀래킬 준비 하는거." "거짓말... 어떻게 다 알 수가 있어?" "네가 하는 건 뻔하지, 뭐." 귀신같이 뒤에서 깜짝 놀래킬 준비를 하고 있던 나를 어떻게 알고 마치 나 밥먹었다. 하는 말처럼 네가 하는 건 뻔해서 다 알 수 있다고 무덤덤하게 말을 뱉는다. 깜짝 놀라 뭐가 뻔하냐고 따지듯이 물으니 내가 평소에 시도하다가 실패한 장난들을 줄줄 읊으며 다 아는 수가 있으니 그만 하라며 장난스레 말한다. 입을 삐죽이며 일부로 나 삐졌어요. 하는 식으로 말했다. "뻔해도 좀 속아주면 안 되나?" "뭘 그렇게 속이고 싶은 거야." 내 말에 뭐가 그렇게 속이고 싶은 거냐며 슬며시 손을 잡아온다. 어? 지금 손잡습니까? 제 손 비싸지 말입니다. 요즘 가장 유명하다는 드라마 대사를 능청스럽게 따라하며 웃자 못 말리겠다는 표정으로 손을 놓고 어깨를 감싸더니 손 말고 어깨는 됩니까? 라고 대꾸한다. 매번 걷는 길이지만 오늘은 뭔가 조금 더 특별하게 느껴지는 건 기분 탓일까. 사실 난 학교를 다니면서 지각을 정말 많이 해봤는데 그중 반 정도는 전정국과 학교를 가다가 한 눈을 파느라 지각을 한 것 같다. 봄에는 흩날리는 벚꽃을 보다가 딴 길로 새서 사진만 잔뜩 찍어 지각했고, 여름이 막 시작될 때에는 길 건너 슈퍼를 들어가 여유롭게 아이스크림을 먹다가 지각했고, 가을에는 왜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냥 여유를 부리다가 지각을 해버렸다. 오늘은 춥기도 하고 학교를 가기 싫은 마음이 아주 컸다. 정국아 학교 가기 싫지 않아? 그건 맨날 싫은 거고. 이런 영양가 없는 대화들만 주고받다 횡단보도 앞에 서 신호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갑작스레 추워진 날씨에 몸을 부르르 떨며 정국이 뒤에 서서 바람을 막아보는데 정국이 어깨 위로 하얀 무언가가 내려앉았다. "어? 정국아. 너 어깨에 뭐 떨어졌어." "뭔데? 떼어줘." "잠깐만." 그걸 떼어달라는 말에 정국이의 어깨로 손을 뻗자 사르르 녹아내린다. 엥? 먼지가 아니었나? 눈을 비비고 다시 어깨로 손을 가져가자 이젠 흔적도 없어졌다. 어, 설마... 이거 눈 내린 건가? 긴가민가하고 있을 때 즈음, 이번엔 내 손 위에 바스스 떨어진다. 그에 눈을 크게 뜨고 하늘을 올려다보자 눈이 아주 천천히, 조금씩 내리는 중이었다. "정국아! 이거 눈인 것 같아! 와..." "눈? 갑자기 웬 눈이야." 아예 눈이라고 확신한 내가 정국이를 흔들며 눈이라고 소리치자 믿기지 않는 듯 무슨 눈이냐며 눈가를 약간 찌푸린다. 눈 맞다니까 그러네. 첫눈은 아니었다. 하지만 정국이와 함께 맞는 눈은 오늘이 처음이었기 때문에 나에겐 이 눈이 첫눈과 다름 없었다. "진짜네... 눈이네." "와. 나만큼 예쁜데?" 정국의 옷에도, 손에도 눈이 내리니 그제야 조금씩 신기해하는 기색을 내비친다. 눈이 나만큼이나 예쁘다고 뻔뻔하게 웃으며 말하자 어이가 없는지 나를 흘기며 사람이 겸손할 줄 알아야지. 라며 타박한다. 그러면서도 기분이 좋긴 좋은지 학교로 향하는 발걸음이 점점 느려졌다. 나도 기분이 정말 좋았다. 영화 속 주인공처럼 우연히 눈을 함께 맞는 우연이 찾아올 줄은 몰랐다. 처음 보는 눈도, 처음 맞는 눈도 아니었지만 정국이와 함께였기에 선물을 처음 받아본 어린아이처럼 설레는 기분을 감출 수가 없었다. 오랜만에 의도적인 지각을 해야 할 것 같은 타이밍이 찾아왔다.
기다리고 기다리던 크리스마스가 다가왔고 난 데이트 준비로 분주했다. 창문을 두드리는 거센 바람 소리에 잠시 움찔했지만 추위보단 남자친구에게 예뻐 보이고 싶은 마음이 강했기 때문에 오늘 같은 중요한 날의 옷 선택은 매우 중요한 절차다. 스키니진을 대봤다가, 명색이 데이튼데 치마를 입어야 하지 않겠어. 하는 마음으로 치마도 대봤지만 추위에 괴로워할 내 다리를 위해 잠시 접어두었다. 하지만 이내 추워도 예쁘면 그만이지! 란 생각이 들어 냉큼 치마를 주워들고 그에 어울릴 법한 니트와 코트를 준비했다. 정국이가 생일 선물로 사준 향수도 칙칙 뿌리고 예쁘다고 엄지를 척 들어주었던 구두도 신고 현관문 앞에 서서 몇번이고 내 모습을 점검했다. 화장도 잘 먹었고, 고데기도 안 풀리게 단단히 고정했고, 옷도 예쁘다. 이제 날 기다리고 있을 정국이에게 얼른 가자. "정국아! 미안. 많이 춥지... 대신 나 뛰어왔어" "이렇게 추운데 그렇게 입고 온거야?" 항상 약속 시간보다 일찍 나와서 날 기다리고 있는 정국이를 알기에 오늘은 평소보다 일찍 나왔다. 일찍 나왔음에도 크리스마스라 그런지 사람들도 붐비고 버스도 아주 느릿느릿하게 기어가는 수준으로 달렸다. 결국 답답한 나머지 근처에서 내려 빠르게 뛰었고 그 덕에 온몸으로 칼바람과 맞서며 힘들게 도착했다. 날 보자마자 웃음을 띠려다가 내 옷을 살피고 맘에 들지 않는지 그렇게 입고 왔냐며 잔소리했다. 아, 정국아 네 마음은 충분히 잘 알겠다만 나도 예뻐 보이고 싶은 여자라고. 게다가 오늘은 크리스마슨데 그냥 넘어가 주면 안 될까. 그럼 영화를 보고 카페에 들어가서 앉아있자는 나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곤 오늘만 봐주겠다는 엄한 눈빛을 나에게 마구 쐈다. 그 신호를 알아듣고 고맙다고 팔짱을 끼며 영화관으로 향했다. 개봉하지 얼마 안 된 영화를 보고 나오는 정국이의 얼굴엔 나 지루해요. 가 쓰여있는 듯했다. 그 모습에 웃음이 나왔고 왜 웃냐며 얼굴을 찡그린다. 지루했냐는 내 물음에 기다렸다는 듯이 저렇게 돈 아까운 영화는 처음이다, 다신 저 배우 나온 영화는 보지 않겠다. 라고 다짐한다. 금세 배가 고파져 저녁을 먹기로 했다. 근처 식당에 들어가려고 하는 나를 붙잡더니 갈 때가 있다며 내 손목을 잡고 이끌었다. 그리고 목적지에 다다랐을 때엔 놀라며 정국이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어디로 가는 건지 짐작조차 하지 못하고 끌려가는데 언제인지 기억도 잘 나지 않는 옛날에 저런 레스토랑 나중에 가보고 싶다. 라고 흘리듯이 한 말을 잊지 않고 레스토랑 예약을 했단다. 왜 이렇게 예쁜 짓만 골라 하는지, 아주 나를 좋아하는 티를 팍팍 내서 문제다. 나야 좋아서 문제지만 말이다. 식사를 마치고 밖으로 나와 보니 밤 11시를 훌쩍 넘어 시곗바늘이 10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어머니께서 걱정하신다며 집까지 데려다주겠다는 정국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곤 천천히 내 집으로 향하는 길이었다. 뭔가 빠진 허전한 느낌이다 했는데 아니나 다를까 화이트 크리스마스가 아닌 그냥 크리스마스로 지나가고 있었다. 내 수많은 로망 중 하나가 남자친구와 화이트 크리스마스를 보내기인데 이 옵션들 중 화이트라는 옵션만 제외하고 무사히 수행 중이었다. 아쉬운 마음에 올해는 왜 화이트 크리스마스가 아니네~ 하며 작게 미소 짓자 화이트 크리스마스가 왜 좋냐고 물어온다. 딱히 뭐가 좋아서 그런 건 아니지만 특별한 날, 특별한 사람과 함께 맞는 눈이면 말로 못 다할 만큼 행복하지 않을까. 상상만으로도 행복해 눈을 감고 말하자 무언가를 결심한 듯이 어디론가 뛰어간다. 잠깐. 이 밤에 갑자기 어딜 가는거지? 이해할 수 없는 정국이의 행동에 당황스러워 눈만 깜빡이고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잠시 후, 빠른 속도로 나에게 달려왔고 나는 그런 정국이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숨이 차는지 무릎을 부여잡고 호흡을 고르다가 손에 들려있는 봉지 속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뭔가 싶어서 보니 눈 스프레이였다. "화이트 크리스마스야. 어때. 예뻐?" 네가 그토록 바라던 화이트 크리스마스라며 내 주위를 빙글빙글 돌더니 스프레이를 촥- 뿌린다. 그런 정국이가 웃기기도 하고 귀엽기도 해서 큰 소리를 내어 웃으니 스프레이를 내 손에 쥐여준다 ㅁㅁ이 화이트 크리스마스 보내네, 드디어. 생각보다 훨씬 더 행복한 크리스마스다. 시간을 보려고 핸드폰을 켜니 12시가 되기 10초 전이었고 전자제품 가게 안에 진열되어 있는 tv 속에선 연예인들이 새해 카운트다운을 하는 중이었다. 그와 동시에 나도 정국이를 보며 5! 4! 3! 2! 1! 외치려고 손을 들어 손가락을 접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곧이어 병신년이 밝았습니다! 하는 소리와 함께 내 입술 위로 따뜻한 촉감이 내려앉았다. 놀라 눈을 크게 떠보니 내 눈앞엔 오직 정국이만 있는 듯, 세상에 우리 둘만 남은 듯이 아무런 소리도, 추위도 느껴지지 않았다. 오늘만큼은 내가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들 중 하나가 아닐까. 이 특별한 날을 함께 보낼 수 있는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는 건 엄청난 축복이다. 고로 난 축복 받은 사람이다. 어제도, 오늘도 내 옆에 정국이가 함께여서 행복했고, 행복하고, 행복할 것이다. ------ ++ 모바일로 쓰면 왜 자꾸 뒷말이 잘리는 걸까요....정말 슬퍼요ㅠㅠㅠ흐허어엉 주말 재밌게 보내세요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