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아이의 출산이 임박하려면 아직 두 달이나 남았는데 우리 반의 담임선생님은 잠시 일을 쉬겠다고 학교 측과 모든 얘기를 마치고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었다. 정작 선생님의 학생인 우리는 선생님이 계시는 마지막 주, 그것도 마지막 날에 소식을 알게 됐다. 적잖은 충격을 받았지만, 어차피 떠나야 할 것을 알고 있었기에 우리는 담담하게 인사를 나누고 아이가 건강하게 태어나길 기도해줬다.
그리고 바로 그다음 주 월요일 종례 시간이 되자 우리는 혼란스러웠다. 우리 담임은 갔고, 그럼 이제 우리는 어떻게 되는 거야? 이대로 학급이 운영될 리는 없다고 생각한 반장은 교무실에 갔다. 10분가량이 지났나. 반장은 돌아오지 않았고 교실은 다시 시끌벅적해졌다. 담임이 없어도 나름 재밌을 것 같아, 맞아, 어차피 우리는 열여덟 살이나 먹었고 학급 운영쯤이야...! 아이들의 목소리가 신이 날수록 나는 초조해졌다. 담임선생님이 없으면 반장이랑 부반장인 내가 얼마나 힘들지 감도 안 잡혔기 때문이다.
담당자가 없는 학급을 꿈꾸는 학생이 하나둘 늘어가고 있을 때였다. 우리 교실의 위치의 반대편에 있는 복도에서부터 다급한 뜀박질 소리가 들려왔다. 교무실의 방향과 일치하는 곳이라서 나는 반장이 달려오는 것으로 생각했다.
'드르륵- 쾅!'
웬 젊은 남자 한 명이 앞문을 시끄럽게 열고 문 앞에서 숨을 잠시 고르더니 웃으며 우리 반으로 들어왔다. 그가 교단 위로 올라가고 교탁 앞에 서 있기까지 그 일련의 과정을 우리는 멍하니 쳐다만 봤다.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이지. 저 남자는 뭐고.
"오늘부터 너희의 임시 담임 선생님을 맡기로 한 박지민이라고 해."
"칠판에 연락처 적을 테니까 다들 휴대폰 걷기 전에 저장해놓고,"
"학급 임원 선거는 벌써 했겠지? 반장은 누구야?"
여학생이 압도적으로 많은 문과반이라서 그런지 젊은 임시 담임선생님에 대한 반응은 뜨거웠다. 아이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임시 담임선생님의 질문에 답해줬다.
"여기 없어요!"
"반장 교무실 갔어요!"
"선생님 찾으러 갔어요!"
얘들아. 좋아하는 거 너무 티 내는 거 아니니. 붉게 상기된 볼로 우렁차게 대답하는 친구들의 모습을 봐도 그때 나는 새로 온 담임에 대해 아무런 감정을 느끼지 못했다. 그냥 웃는 모습이 귀엽다는 정도?
"그래? 그럼 부반장은?"
"부반장 여기 있어요!"
"저기 창가 자리!"
"김여주요!!"
아이들이 손가락으로 가리킨 방향의 끝에는 내가 있었다. 이렇게 단합이 잘 되는 모습은 태어나서 처음 봐서 나는 당황한 표정을 짓고 임시 담임선생님을 쳐다봤다. 아마 내 표정은 매우 이상했을 거다. 임시 담임선생님은 웃는 얼굴을 유지하며 나를 향해 고개를 틀었다. 그리고 눈이 마주쳤다.
"김여주?"
이 감정을 뭐라고 표현해야 하나. 호감? 아니다. 더 강렬하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잔잔하던 나의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한다.
"김여주."
끌림? 맞는데 단순한 끌림은 아닌 것 같다. 이게 뭘까. 이게 뭐냐고. 뇌에서 내려진 명령을 따라 마구마구 분비되어 나의 손끝까지 퍼져 나를 간지럽게 하는 이 호르몬. 망할 호르몬이 불러일으키고 있는 감정 따위도 파악하지 못하는 내가 한심해서 눈을 꽉 감았다. 답답하다.
"얘들아. 쟤 김여주 아니야?"
"맞아요."
좋음? 그래. 좋다. 맞아, 좋은 건 맞는데. 이건 그런 좋음이 아니라고. 공부에 지친 육신을 이끌고 들어간 아이스크림 가게의 잘생긴 아르바이트생을 봤을 때와는 다른 느낌이라고.
"여주야."
...지금 성 떼고 내 이름 부른 거 맞지? 나에 대한 고찰을 하느라 닫았던 눈과 귀를 열어본다. 아무래도 이건,
"왜 넋을 놓고 있어. 여주가 1반 부반장 맞지?"
"..네."
사랑이다. 세상을 망할 분홍빛으로 물들이던 봄도 다 지났는데, 이제 여름인데. 공기에 머물고 있던 마지막 한 가닥의 봄바람이 나의 마음을 여리여리한 벚꽃색도 아닌 아주 강렬하다 못해 지독하기까지 한 빨간 빛으로 물들여 놓았다.
"내가 이 동네에 이사 온 지도 얼마 안 됐고 어쩌다 보니 교직의 시작을 임시 담임으로 하게 돼서 좀 서투를 거야. 선생님이 잘 모르는 것 있으면 여주가 너 하고 반장이 도와줘야 한다? 알겠지?"
무지하고 서툴러서 저지를 수도 있는 실수들에 대한 사과를 미리 하더니 나에게 도움을 청한다. 약간 울상이 되어 자신의 처지를 설명하다가 문장의 끝에서 확인을 받을 때 싱긋 웃었다. 아니 이건 뭐...거절할 수가 없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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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좋냐?"
"어."
"어휴."
"하아..."
"왜 또 한숨이야."
"너무 좋아서..."
"미쳤구먼."
의자에 돌려 앉아서 나와 마주 보고 대화 중이던 민윤기가 내 말을 듣더니 정말로 한심하다는 표정을 짓고 몸을 돌려 다시 앞을 보고 앉는다. 나는 지금 정확히 마약을 한 것 같은 상태다. 마약을 해본 적은 없지만 아마 이런 느낌일 게 분명하다. 온몸에서 힘이 쭉 빠져나가고 정신은 해롱해롱하지만 기분은 그야말로 극락세계에 도달했다.
"이게 인생이지..."
"지랄."
"뽕이야 이건."
"적당히,"
"박지민뽕...누나 지금 취했으니까 말리지 마라."
"단단히 미쳤어 아주."
살면서 이렇게 상큼하고 달달한 이름은 들어본 적이 없다. 박지민이라니. 임시 담임 선생님의 귀여운 얼굴에 응당한 이름이다! 대단하다! 속으로 만세를 외치며 종례 시간에 보았던 얼굴을 떠올려본다. 하, 존나 좋다.
오전에 박지민 선생님의 상큼함에 젖어 정신을 추스르지 못하고 있던 나와는 달리 점심시간의 시작을 알리는 종이 울리자 나는 자리를 힘차게 박차고 일어났다. 민윤기, 가자. 아무런 생각이 없어 보이는 민윤기에게 비장한 눈빛을 날리고서는 민윤기의 손목을 잡고 미친 듯이 뛰었다.
"헥헥..."
"대체 나는 왜 매번 끌고 오는 거야."
"아, 숨 찬다."
"나는 급식실까지 뛰어올 생각이 눈곱만큼도 없다고."
"알 바야?"
"말하는 꼬라지 좀 보소?"
민윤기가 한쪽 눈썹을 끌어 올리며 나의 말투에 대해 지적을 하자 나는 어쩔 거냐는 식으로 얄밉게 웃어 보였다. 어차피 때리지도 못할 거면서 맨날 화난 척이야. 사실 민윤기가 남들에 비해서 심하게 식욕이 결핍되어 있다는 점은 잘 알고 있다. 내가 점심시간만 되면 얘를 잡고 뛰는 이유는 단 하나다. 가벼워서, 빨라서. 여자애들은 밥 먹으면 지워질 틴트를 다시 칠하고, 앞머리를 빗고, 수다를 떨며 천천히 걷는다고. 나는 걔네 기다려줄 바에는 얘랑 먹는 게 훨씬 편하다. 그리고 이런 나의 선택을 누구도 뭐라 하지 않기 때문에 나는 앞으로도 민윤기를 끌고 와 급식을 1등으로 먹을 생각이다.
"야."
"저기 우리 임시 담임 밥 먹고 있는데."
뭐시라? 0.1초 만에 민윤기가 보고 있는 쪽으로 시선을 옮기니 정말이었다. 교직원 급식실은 학생 급식실의 바로 옆에 있는데 유리문이 아주 거대해서 안이 훤히 보인다. 박지민 선생님은 영어과 선생님들과 함께 햇볕이 잘 드는 창가 자리에서 밥을 먹고 있었다.
"세상에..."
정확히 45도로 들어와 선생님의 얼굴의 절반을 따뜻하게 감싸고 있는 햇빛과 립밤을 발랐는지 촉촉한 입술의 조화란. 웃을 때마다 양 볼에서 자몽 향의 비눗방울들이 터지는 환상이 보이기 시작했다. 해롭다. 내 심장에 해롭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내 오른손은 나의 왼 가슴 위에 얹혀 져 있었다.
"쯧."
끙끙대는 나를 두고 민윤기는 그대로 급식실에 먼저 들어갔다. 야! 같이 가! 가까스로 정신을 붙잡은 나는 발소리를 시끄럽게 울려대며 민윤기의 뒤를 따라갔다.
"선생님 저희도 단합해요!"
"맞아요, 아직 저희 반만 안 했어요!"
"단합이 뭔데?"
"저희 반끼리 학교 끝나고 남아서 단체 게임하고 저녁 먹고 하는 거요!"
"저희는 아직 친해질 필요가 있슴다!"
지금 이 정도의 단합이라면 2학기 말까지도 괜찮을 것 같은데 아이들은 어리둥절해 있는 박지민 선생님에게 단합 대회를 요구했다. 뭐? 더 친해져? 지금 이게 친한 게 아니면 뭔데? 이제 고등학교 2학년인데 진심으로 단합 대회를 원하는 거니. 단합 대회를 하게 되면 나와 반장이 고생스럽게 준비해야 할 것을 아니까 나는 단합 대회를 강력히 거부한다. 물론 마음속으로만.
"다른 반들은 이미 다 한 거 확실한 거지?"
"네!!!!"
"그럼..우리도 해야겠지?"
"당연하죠!!!!!!!"
"쌤 사랑해요!"
아따, 우렁차다 우렁차. 박지민 선생님의 망설이는 듯하면서도 흔쾌한 결정에 아이들은 신이 나서 의자에 앉아 있는 몸을 들썩거리며 방방 뛰어댔다. 머리 위로 하트를 그리는 애도 있었고 손가락으로 하트를 마구마구 날리는 애도 있었다. 이에 박지민 선생님은 귀엽게 눈이 사라지는 바보 웃음을 허허 지어주며 뿌듯해했다. 하 씨, 눈물 나게 카와이하네.
"그럼 다음 주 중으로 하자. 다들 시간 괜찮지?"
"어유 시간이야 넘쳐나죠 하하!"
애들은 없던 학원 수업도 뺄 기세였다. 역시 추진력 하나는 최고다. 박지민 선생님이 조금 전에 들고 와 교탁 아래에 뒀던 휴대폰 보관 가방을 낑낑대며 들자 앞자리에 앉아 있던 학생이 쏜살같이 튀어나가서 가방을 대신 교탁에 올려주었다. 박지민 선생님은 그 애에게 미소를 지어주며 고맙다고 했다.
잠시만, 쟤는 지금 1미터도 안되는 거리에서 선생님의 얼굴과 목소리와 냄새를...고작 저 가방 하나 들어준 건데 어떻게 저런 것들을 누리는 거지? 아아, 부럽다. 존나게 부럽다. 교복 입기 시작한 후 최초로 앞줄에 앉고 싶어졌다.
"반장. 인사해야지?"
"네! 차렷,"
"하 잠시만."
"...?"
"으, 나 인사 처음 받아봐서 너무 떨려.... 이제 해도 돼."
"경례. 안녕히 계세요!"
허리 굽혀 인사하는 학생들을 살짝 놀란 듯이 바라보다가 교실을 나가는 아이들에게 한 명씩 손을 흔들어주며 잘 가라고 말해준다. 아마 교사의 꿈을 실현하기 위해 준비하면서 아이들의 인사를 받는 상상을 수도 없이 했겠지. 조금 전 약간 울컥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박지민 선생님이 더욱더 귀엽게 느껴 졌다. 정말 귀여움으로 똘똘 뭉친 사람이다. 나보다 최소 다섯 살은 많을 성인 남자가 이렇게 귀여워도 되나요...? 앞으로 박지민 선생님과 함께할 나날들이 벌써 기대된다.